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1)화 (1/131)

1화. Nouveau Depart(1)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엔 딱 두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하나는 ‘그럴 줄 알았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이었다. 내 인생이건, 가족으로서의 책임이건. 아니면 그들이 내게 기대하던 최소한의 보상이건.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그런 상투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고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늦기까지 했다. 다만 길었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조차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는 게 허무해졌을 뿐.

“잘된 일이지. 그런 곳에서 너 같은 반편이 오메가를 데려가 준다니까.”

아버지는 말을 잇는 내내 드물게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간혹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눈을 빛내기도 했다. 물론 이따금 떠오르는 경멸 어린 시선에는 반쪽짜리 오메가를 향한 혐오가 가득했지만 말이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고. 원래 사업이 다 그런 거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이 애비 맘 이해할 거라고 믿으마.”

이리도 인자하게 말할 거면 적어도 표정만큼은 숨겼으면 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마치 값어치 나가는 물건을 내다 파는 듯했으니. 신뢰가 있어야 할 장소에 야심만이 남았는데, 어떤 마음을 이해하면 좋을까.

“세진이 너한테 기대가 커. 너만 잘해주면 네가 우리 기업을 살리는 영웅이 되는 게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건 알고 있지?”

“……예, 아버지.”

이번엔 도무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아버지는 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들떠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당장 다음 주 토요일이 약혼식이니까 일정 다 비우고 관리라도 받으러 다니든가 해. 왜, 민재가 다니는 그거 말이다.”

다음 주라. 그 말인즉 이 혼사를 꽤 오래전부터 논의해 왔다는 의미였다. 내가 거부하지 못할 걸 알면서, 구태여 당사자만 쏙 빼놓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아니, 어차피 선택권이 없으니 포함할 생각조차 못 한 게 분명했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 봐.”

사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상대 기업은 나를 왜 받아들였는지. 능력 좋은 여자 오메가가 아닌 남자 오메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버지는, 아니 해신그룹은 나를 넘기는 대가로 무얼 받기로 했는지.

“뭐해? 얼른 가서 준비하지 않고.”

하지만 물어본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조금 더 확실히 알게 되는 정도일까. 이럴 때일수록 현실은 적당히 회피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웠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느리게 등을 돌렸다. 평소라면 예의상 안부라도 여쭐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어깨가 무거웠다.

“아, 그렇지. 참.”

아버지는 내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곤 잠깐 서 보라며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조그만 물건 하나가 휙 날아왔다.

“최 교수한테 말해서 받아 놨어. 괜히 퀭한 얼굴로 나와서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이번 주는 그거라도 먹고 푹 자둬.”

바닥에 떨어진 약통이 데구루루 구두 앞까지 굴러왔다. 일부러 받지 못할 위치에 던졌으면서 아버지는 그거 하나 못 받냐며 혀를 끌끌 차기 바빴다. 허리를 숙여 약통을 줍는 와중에도 머리맡에선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봐줄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놈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내게 그나마 딱 하나 잘난 구석이 있다는 게. 그러니 아버지도 그걸 빌미 삼아 정략결혼을 제안했겠지.

“제가 잠 못 자는 거 알고 계셨네요.”

“그럼, 내 아들인데.”

동그란 약통을 손안에 꼭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 성분을 표기한 글자가 보였다. 진정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는 게 우스웠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살가운 미소를 머금자, 아버지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움이 피어났다. 주름이 자글거리는 눈매엔 자기 자신을 향한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가보거라.”

“네, 아버지도 건강 잘 챙기시고요.”

가볍게 묵례를 건네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회장실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소리 없이 뒤에 따라붙었다. 나는 약통을 손톱으로 갉작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졸피뎀 타르타르산염. 이미 내성이 생길 만큼 복용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 * *

지난해, 해신은행에서 출시한 애플리케이션이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입자 90%의 개인정보가 유출됐고, 저장된 인증서는 백여 건이 넘게 악용됐다. 황급히 보안을 강화했지만, 이미 잃어버린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신금융 본사의 채용 비리가 고발된 것이다. 아버지는 곧장 관련 직원을 잘랐으나, 동시기 지원자의 자살 소동으로 논란은 점점 불거지기만 했다. 당연히 해신은 언론의 뭇매를 맞으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폭락한 주가를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기업 이미지를 바꾼들 해신은 결코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없다. 늦으냐 빠르냐의 차이만 있을 뿐, 가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었다.

그런 시기에 회장님 아들인 내게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망조가 들어선 해신금융그룹과 사돈을 맺을 기업이라니. 그 수준이 어떨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기만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래야 할 터인데.

“다음 주 토요일에 선호그룹과의 약속이 잡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근묵자흑이니, 도긴개긴이니. 한가득 떠올랐던 생각들이 새하얗게 휘발됐다. 그 대신 머릿속을 채운 건 잔뜩 고양됐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김 실장은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를 이어 갔다.

“장소는 명성호텔이고,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반입니다. 정세진 본부장님께서는 그날 오전부터…….”

“아니, 아니, 잠시만요, 김 실장님.”

넥타이를 매주던 직원을 밀어내고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김 실장이 직원을 피팅 룸 밖으로 내보냈다. 달칵, 문이 닫힌 뒤에야 목까지 차오른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결혼 상대가 선호그룹입니까?”

다음 주 토요일이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약혼식 날짜였다. 김 실장은 ‘약속’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런 거물급 상대를 두고 다른 일정을 이중으로 잡을 리가 없다. 거기다 장소가 무려 명성호텔, 선호그룹의 연계 사업체였다.

“예, 그렇습니다.”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뉘앙스였는데 내가 정말 꿈에도 몰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는 엉망이 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 결혼 상대가 선호그룹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만…….”

김 실장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그는 의아한 눈을 한 채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봤다.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

모르다마다.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 살이고 외모는 어떻게 생겼는지. 하물며 뭐 하는 기업인지도 모른 채 대충 알파겠거니 짐작했을 뿐.

“……상대도 모른 채로 약혼식 날 입을 예복을 맞추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니 저토록 기막힌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말한 아버지나, 자세히 묻지 않은 나나. 남들이 보기엔 둘 다 어이가 없겠지.

“뭐, 벌거벗고 만날 건 아니니까…….”

실크로 된 넥타이를 행거 위에 걸쳐 놓고 몸을 돌렸다. 김 실장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는데, 아쉽게도 맞은편에 거울이 자리한 바람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김 실장은 나직이 한숨을 삼키며 거울 속 나와 시선을 맞췄다.

“더 묻지 않으십니까?”

“뭐를요?”

무얼 더 물으면 좋을까. 선호가 왜 해신을 선택했는지는 의아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아버지가 신경 쓸 문제였다. 그냥, 적당히 옷이나 맞추고 방긋방긋 웃으며 결혼하면 그만이었다.

“제가 알기로 선호그룹에는 미혼인 자제분이 두 명이나 되시는데요.”

“예,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순순히 대답했으나 김 실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번엔 소리까지 섞어 한숨을 내뱉는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가 보였다.

“둘 중 누구인지 안 물어보십니까?”

“아.”

순간, 멍청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미처 생각지도 못해서가 아니라, 김 실장이 그리 물을 줄 예상도 못 해서.

“뭐하러 물어봅니까.”

선호그룹 부회장인 권상미에게는 총 세 명의 자식이 있다. 하나는 이미 결혼한 부사장이었고, 다른 둘은 애매하게 결혼 적령기를 지난 알파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내게는 과분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둘 다 선호면 됐죠.”

“그런 말이 아니라…….”

곧장 반박하려던 김 실장은 이내 아차 싶은 얼굴로 뒷말을 삼켰다. 고개를 돌린 내가 거울이 아닌 맨눈으로 시선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슬쩍 눈길을 피했던 그가 한결 정제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세진 본부장님께선 선호그룹과 혼사가 진행 중이십니다.”

겨우 외면하던 현실을 발가벗겨 보여 주는 말이었다. 더 이상 회피하지 말라는 듯, 그는 나를 똑바로 주시하며 덧붙였다.

“상대는 차남인 권이도 전무고요.”

“…….”

권이도.

그의 이름은 질리도록 들어 봤다.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100인이자, 가장 주목해야 할 젊은 기업인 중 하나.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전무를 달고 선호전자 총책임자 자리까지 위임받은 사람.

“그건…… 의외네요.”

사실, 나는 이 결혼이 권이도가 아닌 그의 형과 이뤄질 줄 알았다. 고작 세 살 차이지만, 젊고 총명한 권이도와 달리 권이정은 제대로 된 입지도 없이 기생하고 있을 뿐이니까. 선호와 해신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면 약간의 하자가 있는 쪽을 내놓는 게 수지가 맞았다.

“정말 에스테틱이라도 가야 하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을 휘휘 젓는 나를 보며 김 실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엔 놀라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직원 불러 주세요. 상대가 권이도면 끝나고 민재가 다니는 샵도 들러야 할 텐데.”

“…….”

꽉 다물렸던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하려는 말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게 끝입니까? 라든가, 그 외에 물어보실 건 없습니까? 라든가. 앞선 두 가지 중 김 실장이 택한 건 후자였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올곧게 향해 오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기대가 가득했다. 아니, 정확히는 기대가 아닌 미련이었다. 나를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면서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는 것쯤은 그 또한 모르고 있지 않을 텐데.

“있습니다. 궁금한 거.”

그래서 넌지시 운을 뗐다. 반듯하게 서 있던 김 실장이 일순 두 눈을 반짝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행거에 걸어 두었던 넥타이를 가리켰다.

“역시 보타이보단 넥타이가 낫겠죠?”

옷을 맞추는 내내 김 실장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사가 제대로 꼬였는지, 원래라면 직원을 말렸어야 할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심술의 대가로 긴 시간 직원이 건네는 립서비스를 받아 줘야 했다.

“정말 이런 색이 잘 받는 분도 드물거든요. 체형도 마네킹이랑 거의 흡사하시고……. 제가 본부장님 옷 맞춰 드릴 때마다 이 일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니까요.”

평소에도 살갑던 직원은 말리는 사람이 없자 한층 수다스럽게 진화했다. 재킷은 원 버튼보단 투 버튼이 낫다느니, 베스트는 조금 더 딱 붙어야 한다느니. 다리 길이가 어떻고, 피부톤이 어떻고. 매장에 있던 모든 옷을 입혀 볼 기세로 착의를 돕던 직원은 독특한 매듭으로 넥타이를 매준 뒤에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피부가 흰 편이라 밝은 계열이 잘 어울리시네요.”

“하하…… 그런가요?”

“그럼요. 이 원단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건데 남자분들은 진주색이 잘 안 받거든요. 근데 본부장님께서는…….”

고작 약혼식 예복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고를 필요가 있을까. 듣자 하니,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집안끼리 조용히 치른다던데. 물론 추후 뒷말이 없으려면 가능한 한 꼼꼼히 준비해야겠지만.

그래도 슬슬 마무리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으로 김 실장에게 구조 요청의 눈빛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정세진!”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누군가 피팅 룸 문을 열어젖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곳엔, 익숙한 얼굴이 직원 둘을 매단 채 들어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직원들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애걸했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씨발, 정세진 너……!”

나를 발견한 남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위협적인 태도에 옷을 봐주던 직원이 정중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손님, 안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참으로 프로페셔널한 대처였으나,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남자가 성난 얼굴로 직원을 노려봤다.

“비켜. 안 비켜?”

남자에게선 희미한 아로마 냄새가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둘둘 감고, 밝게 염색한 머리를 완벽히 세팅한 상태였다. 어디서 관리라도 받고 왔나 보네. 그런 감상을 떠올리는데, 남자가 이죽거리듯 입매를 늘어뜨렸다.

“야, 너네 내가 누군지 몰라? 다 잘리고 싶어서 이래? 어?”

“…….”

직원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저런 대사를 하는 손님치고 뒤처리가 조용했던 적이 없다. 정말 거물급 손님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진상이거나. 그럼에도 저자세로 나가지 못하는 건 나 또한 웬만큼 무시 못 할 거물이라서겠지.

“손님, 우선 밖으로…….”

결국, 내 앞을 가로막았던 직원이 결단력 있게 입을 열었다. 퍽 친절한 서두에도 남자의 표정은 점점 사나워지기만 했다. 나는 남자가 입을 여는 걸 확인하고 황급히 직원의 말을 가로챘다.

“제 동생입니다.”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말을 잇던 직원도, 남자를 말리던 이들도, 장식처럼 서 있던 김 실장도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해신금융그룹 차남 정민재. 그들이 떠올렸을 누군가가 보란 듯이 이를 드러냈다.

“씨발, 그렇다니까.”

“……다들 나가 보세요.”

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직원들은 선뜻 나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구 흔들리는 두 눈이 그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런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민재는 불만스럽게 인상을 구겼으나, 직원들을 내보내는 데에는 이의가 없어 보였다. 한참, 멍하니 있던 직원들은 내가 살짝 웃어 보인 뒤에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사실 실례는 민재가 했고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언제나 펼쳐지는 풍경이 이따위다. 더 껄끄러운 건, 빠릿빠릿하게 피팅 룸을 떠나는 그들에게 민재가 덧붙인 한마디였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

아무래도, 입어 봤던 옷을 모두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 이거나 저거나 비슷해 보이던 참이니 김 실장에게 그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되겠지.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민재는 제가 주인이라도 되는 양 가운데 놓인 소파에 주저앉았다. 척, 다리를 꼬는 모습이 아주 당당하기 짝이 없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닫힌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나 잡았던 새끼들 다 자르라고 해요.”

별반 대수롭지 않단 투였다. 불쾌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는 것까지 그러했다.

“얘 옷 봐주던 직원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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