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그 뒤, 라피아는 (1)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오이는 여전히 선생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오늘은 학생과의 면담이 있나 보네요. 발자르의 개인실과는 달리, 아오이의 개인실에는 자신의 책상 말고는 따로 책상을 두지 않고 있어요.
아오이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아있을 뿐이에요.
“앨리스 양의 쌍둥이 동생이었죠?”
“네! 아리스 피어리에요!”
해맑게 웃어 보이며 대답하는, 앨리스와 같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얇지만 도톰한 입술을 한 아리스.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앨리스와 똑같은 얼굴이 눈앞에 앉아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모습.
신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되는 이 상황에 아오이는 미간에 얇은 주름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곧 이곳에 아리스를 불러낸 이유를 다시 떠올렸는지 대화를 진행하기로 했죠.
“오늘 왜 저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아니요?”
앨리스와는 다른, 어딘가 순진해보이면서도 사람을 짜증나게 할 여지가 있는 너무나 당당한 대답.
아오이에게는 순진하다 못해 약간은 생각 없이 대답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과목인 마나의 이해와 운용 중급반에서 성적이 저조해서 그래요. 성적의 탑을 담당하는 앨리스와는 비교되는 성적이라서.”
“그치만 전 앨리스 언니하고 같은 과목만 들어도 즐거운걸요!”
“물론, 당신이 후방지원 모험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다른 과목에서는 제대로 평균 이상의 성적을 내고 있는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수업을 신청했다면 그만한 성의는 보이셔야죠.”
“저도 저 나름대로 진심이라구요? 그냥 어려운 게 많아서 그래요.”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아리스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아오이도 알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하이네를 대하던 것처럼 차갑게 대할 수 없었으니, 잔소리보다는 진심어린 조언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모르는 게 있다면 물어보면 되잖아요? 시험이 실습 위주라서 어려운 거라면 따로 보충 수업을 해주는 방법도 있는데 혼자 떠안을 필요가….”
“방과 후에는 앨리스 언니랑 어울려야 하니까요! 선생님의 수업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결혼하셨다면 알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더 같이,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을요.”
이 말 저 말을 주고받다가, 아오이는 말하는 차례까지 가로채어졌는데, 아리스의 말에 따로 반박할 말을 고르다가도 할 말이 없어서 한번 목 아래로 삼키는 아오이였어요.
곧바로 질과 라피아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텐데, 그 둘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리스의 마음과 같다는 걸 알 테니까요.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요, 뭐 제 수업을 메인으로 듣는 학생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네요. 그래도 잘 안되면 앞으론 질문이라도 하세요. 용건은 이게 전부에요. 차라도 한잔하고 갈래요? 제 개인적으로 아리스에게 궁금한 것도 있고.”
“네, 네?! 아니요! 괜찮아요! 궁금한신게 뭔데요?!”
선생님이 내어주는 차라는 것에서 부담이 되었는지, 아리스는 과장된 몸짓까지 해가며 아오이의 차를 거부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발자르에게도 차를 한 박스로 선물해 주었던 아오이가 한 번의 거절로 ‘네, 그러세요.’라고 할 리가 없었어요.
“그렇게 사양할 건 없잖아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건 아리스 양에게만 말해드리는 건데, 사실 학원에서 준비해주는 지팡이는 일부러 마법 식을 복잡하게 꼬아버리는 장치가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아, 미안하지만 차는 한 종류밖에 없어요.”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저, 바쁜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아!! 궁금한건 다음에 물어봐주세요오!!”
“…왜 학생들이 내가 차만 내주려고 하면 다 도망가려는 걸까.”
허겁지겁 방에서 도망쳐나가는 아리스의 뒷모습에 혼자 중얼거리는 아오이였어요.
그 뒷모습에서 질의 모습을 훔쳐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얼마나 급하게 나갔는지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아 끼익하는 소리를 내고 있길래 아오이가 닫으려고 문고리를 잡았는데, 자신의 앞에서 큰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눈치챘어요.
“아오이!”
“라피아?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 보러 오는데 이유가 어딨어? 보고 싶으면 오는 거지.”
“어, 으, 네, 그건 그렇네요….”
별 이유도 없는데 찾아왔다는 말에 짜증을 내기보다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에요.
라피아는 ‘음, 음!’이라는 소리를 내며 아오이를 껴안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쓰다듬어줬어요.
그러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낸 것처럼 가까워진 거리를 약간 벌려 얼굴을 마주했죠.
“아 맞다. 이번에 아버지가 초대했는데 올 생각 있어?”
“현, 아버님이? 으응…. 사이가 나쁘진 않더라도 좋지도 않으니 거절하기에는 입장이…. 고민 좀 해볼게요. 그보다 라피아, 부탁할 게 있는데 괜찮나요?”
역시 현자인 크롬웰과는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나 보네요.
그래도 이제는 자신의 입장 때문이라도 신경전을 벌일 일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호칭도 아버님으로 바뀐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라피아도 이런 노력하는 아오이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탓하는 말은 할 수 없었나 봐요.
“말만 해, 내가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황녀한테 가서 말 좀 해주세요. 수도의 마스코트로 홍보하는 건 제발 그만둬 달라고요. 제가 말하면 분명 별거 아니라고 넘어갈 게 뻔하거든요.”
“아아~ 최근에 유독 심해졌지? 선물을 받아오는 텀이 짧아진 거랑 양이 2배가 된 거. 내가 알기로는…. 너, 전에 몇 번 찾아가지 않았었어?”
“하아…. 찾아갔었죠. 그때를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불쾌해지는 느낌이에요.”
“알았어! 내가 직접 가서 한마디 하고 올게! 대신, 아버지가 초대한 건 제대로 생각해줘.”
황녀 상대로 라피아가 진심을 내는 모습은 또 색다르겠네요.
이게 아오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만큼 라피아를 움직이게 한 아오이도 대단해요.
그만큼 아오이에게 진심을 내게 했다는 의미이니까요.
하지만 아오이는 어딘가 마음 한 곳이 찜찜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하며 라피아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어요.
“저도 제가 아버님의 초대를 거절할 때마다 라피아를 곤란하게, 마음 상하게 만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응, 그걸로 됐어.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만으로도 난 기뻐.”
“뭐, 뭐라는 거에요! 정말이지…. 그런 말을 하는 라피아도 좋지만….”
“그래, 그래~ 나도 이렇게 솔직한 아오이를 사랑해.”
정말이지, 둘이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루 이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어요.
뺨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옅은 미소를 보이는 이런 행복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분명 어색한 때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정말 자연스러워 보이니까요.
아오이와 처음 만나는 사람이 본다면 원래부터 이런 사람인줄 알 거예요.
“라피아, 이 뒤에 시간 괜찮아요? 최근에는 셋이서만 다녔잖아요. 라피아만 괜찮다면 모처럼 저랑 둘이서….”
“당연히 괜찮지! 수도는 네 인기가 워낙 좋아서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음…. 로카우스의 마법 지부는 어때? 거기라면 네가 학생들에게 새로 가르칠 마법 같은 것도 새롭게 알게 될 것 같은데.”
장소와 아오이의 수업 내용까지 배려한 말에 감동받아야 할 부분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한 표정을 짓는 아오이였어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제였던 걸까요?
“데이트하자는 건 아니었는데…. 라피아도 은근 눈치가 없네요. 그래도 라피아가 저를 위해 생각해낸 곳이니까 가도록 해요. 이 세계를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라피아랑 천천히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아, 그런 이야기였어?! 가, 가는 거 취소하면 안 돼? 난 여기서 너랑 둘이 있는 게 더 좋은데?!”
“안돼요. 이미 기회는 사라졌거든요?”
“아, 아오이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애원하는 라피아를 완전히 무시하는 아오이였어요.
열려있던 문을 다시 닫고 열면서 어디론가 연결하는 걸 보면 이미 라피아와 밀실에 단둘이 있는 건 포기한 것 같아요.
“정말 안 갈 거예요? 먼저 마법 지부에 대한 말을 꺼낸 건 라피아잖아요?”
“하아, 아 진짜! 알았어! 가자!”
아오이의 한번 굳힌 마음을 돌리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라피아는 스스로 손을 잡고 문 너머로 빠르게 걸어갔어요.
그런데 어딘가 이상해요.
평소라면 로카우스의 풍경이 보였어야 할 텐데, 라피아와 아오이가 도착한 곳은 모험가 길드의 워프룸 앞이었어요.
“결혼한 뒤로는 이게 조금 불편하네, 네가 나를 신경 써 준다는 건 정말 고맙지만.”
“이전에는 통행료 같은 건 아예 내지 않았으니까요. 이 세계에 녹아들기로 했다면 이 세계의 법에 따라야 하지 않겠어요?”
“응,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 아무리 마군주라고 해도 법을 쉽게 무시할 위치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라피아, 당신은 어떻게 스스로 돈을 벌고 있는 거죠?”
아오이는 라피아가 워프룸 앞에서 요금을 내는 모습을 보고 라피아에게 물어봤어요.
솔직히 아오이가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에요.
질이야 그동안의 의뢰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아오이를 책임질 수 있다는 액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라피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라피아가 쓰는 자금의 출처 정도는 궁금하겠죠.
라피아도 ‘아, 으응~ 말해야 되는 건가? 궁금해?’라며 뜸을 들이다가 워프룸을 통해 로카우스로 건너오고 나서야 답해줬어요.
“그으러니까…. 질이 그랬던 것처럼 의뢰를 수행해서 받는 돈도 있지만, 내 가문이 5대 가문 중 하나잖아? 그래서 받아놨던 용돈이 아직 많이 남아있달까….”
“라피아가 이전에 말했던 금수저라는 건가요?”
“어, 어응, 그렇, 지?”
“알겠어요. 의뢰나 용돈을 제외하면 라피아가 돈을 버는 다른 방법은 딱히 없다는 거죠?”
“내가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찔려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으, 응! 그것보다 저기 봐! 로카우스 외곽에 저, 커다란 문! 보여? 저기가 마법 지부 입구야!”
라피아는 모험가 길드를 나오자마자 검지로 넓게 트인 인도 너머에 있는, 건물보다도 커다란 문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알죠, 겉보기에는 거대한 동굴 속에 입구만 하나 놓여 있는 것 같지만…. 로카우스 밖에서 보면 높고 거대한 첨탑이 하나 서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세웠는지도 궁금한데, 마법사의 양성은 물론, 유일하게 마법사 랭크를 올려주는 자격시험도 봐주는데, 마법사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제공해주고, 마법사뿐만 아니라 다른 모험가들을 위한 즐길 거리까지, 거기다가 또…!”
“라피아, 조금만 진정해요. 마법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니에요?”
좀처럼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라피아는 평소보다도 크게 들떠서 혼자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어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아오이가 나서서 말려야 했죠.
큰소리로 모험가 길드 앞에서 떠드는 것을 보인다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일 테니까요.
“미, 미안, 전생에 마법 같은 걸 경험해 봤어야지…. 솔직히 내가 쓰는 혈마법은 원래부터 있었던, 내 몸의 일부를 움직인다는 느낌이라서 마법을 쓴다는 느낌이 안 들거든. 손가락을 움직이는 간단한 것처럼 너무 당연하다는 느낌이야. 그래서 다른 마법에 관하면 나도 모르게 그만….”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이래 봬도 마군주라는 위치도, 힘도 힘들게 얻은 것들이라서요.”
“그런 힘든 걸 생각하는 것보다는 가서 즐기는 게 어때? 지금은 나도 있고, 집에 돌아가면 질도 있잖아!”
“…알지만, 저는 과거를 곱씹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걸요. 질 덕분에 이제는 조금, 미래를 보는 게 가능해졌지만요.”
아오이의 혼잣말과 비슷한 소리를 듣는 라피아의 표정은 상당히 못마땅해 보였어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아직도 과거에 잡혀 살고 있어서일까요?
둘 다 아니더라도, 중요한 것은 아오이에게 맞춰 걷던 발걸음까지 멈출 정도로 라피아의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거죠.
”…라피아? 에, 읏?! 라피아! 또 이러는 거예요?! 억지로 이끌어가려는 그 버릇 좀 제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너랑 함께 즐기고 싶어서 그래! 과거 따위 나랑 함께 있으면서 생각할 틈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말을 해버리면….”
“네 과거 이야기도 안 해줘도 돼! 나한테는 지금의 네가 전부니까!”
최근 들어서 자주 끌려다니는지, 아오이는 라피아를 탓하려다가도 부끄러운 마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아오이가 라피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만 봐도 라피아의 말이 얼마나 마음에 와닿았는지 알 수 있었죠.
“이, 이젠 익숙하다고요! 그런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갈 줄…!”
“익숙해? 익숙하면 질릴 때까지 들려줄게! 네가 싫다고 해도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여줄 테니까아!!”
“제, 제정신이에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다 듣잖아요!!”
라피아에게 빠른 속도로 이끌려 수많은 인파를 헤쳐나가면서도 한순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어요.
도로에 울려 퍼질 크기의 목소리였으니 부끄러워 할만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빠른 새가 날아간 것처럼 보여서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둘은 꽤 오랫동안 달려, 숨이 차오를 즘에 마법 지부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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