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결혼식과 그날 밤 (完)
* * *
식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치 형태의 문틀이 세워져,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하는 구조였어요.
문 옆으로 길고 높게 늘어선 화단 덕분에 식장의 내부는 보이지 않았기에, 하객들은 이 세 명이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네요.
안쪽에서는 세 명이 등장하기 전이라서 차분한 음악이 들려오고 있어요.
아오이는 문 앞에 선 라피아와 질을 제지하고, 옆에 선 정장 차림의 사람에게 손짓했어요.
그러더니 정장 차림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죠.
웅장하면서도 누군가를 축복하기 위한, 그런 음악이.
“둘 다 진정해요. 저를 마음대로 할 때는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지금은 완전 겁쟁이들이 다 됐네요.”
“언니는 안 떨려요?”
“안 떨린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기쁜 날이잖아요. 미지에서 찾아오는 두려움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좋은 일에 대해 기대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아아!! 언니 대단해요!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질의 고민은 은 황녀가 내려준 대답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오이가 말해준 답은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아오이는 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 질문을 해봤지만, 질은 대답하지 않고 라피아의 손에서 빠져나와 식장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는데요.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에 지지 않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이 숲 전체에 울려 퍼질 그런 목소리였는데, 아오이와 라피아에게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죠.
“신부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우루시쿠로 아오이, 아스티엘 라피아! 세 명, 입장!”
“이 목소리…. 황녀님?”
“그건 나중에 신경 써도 되잖아요. 손잡고 들어가요.”
라피아가 한 발자국 앞서는 질과 함께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보이는, 수많은 하객과 바닥에 깔린 레드 카펫.
여기에 화려하고 짙은 형형색색의 꽃들이 레드 카펫의 양쪽에 심겨 있었어요.
무엇보다 지붕이 없어 따뜻한 햇볕을 그대로 받아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죠.
주례로 서 있는 것이 황녀라는 것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고요.
설마하니 황녀를 주례사로 세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오이와 라피아는 질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요.
하객들은 아직 황녀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세 명의 등장에는 꽤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어요.
박수를 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죠.
여기에는 아오이의 마법적인 효과로 숨겨져 있던 드레스가 드러나는 일이 있던 덕분이기도 했어요.
보라색에 물들었던 드레스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마치 마기를 정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줬거든요.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땅에 끌리도록 긴 드레스가 아오이의 외모를 더 돋보이게 했어요.
“저, 저도 뭔가 준비할 걸 그랬나 봐요.”
“괜찮아요. 질은 지금만 해도 아름다우니까. 저는, 이런 효과라도 주지 않으면 키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역시 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었네요.
이런 걱정과는 달리, 아오이는 셋의 중앙에 서 있었기에 나름 조화롭게 보였어요.
아오이의 왼쪽에는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어 어깨부터 등, 팔의 맨살을 드러내고, 짧은 치맛자락으로 인해 쭉 뻗은 각선미를 뽐내는 라피아가.
오른쪽에는 비슷한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차별점을 위해 상체는 대부분 가리면서, 허리춤에 커다란 리본을 달아 귀여움을 더한 질이 아오이의 손을 잡고 있었죠.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약간의 웅성거림에 음악까지 시끄러웠던 식장이, 이 세 명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예요.
웨딩드레스만 입었을 뿐인데도 이 세 명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니까.
입에서 감탄사만 내뱉을 정도로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죠.
“떨려요?”
“…응, 떨리네. 어젯밤만 하더라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아오이 언니랑 제가 있잖아요.”
발을 맞춰 걷기 위해 멈춰있던 질은 먼저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며 라피아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아오이는 이미 질의 손을 잡은 것을 보면, 역시 대단하기는 하네요.
하긴, 연옥에서 감정을 죽이고 살아왔다고 했으니까요.
조금 떨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숨길 수 있겠죠.
이에 라피아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표정에 미소를 담다가, 곧바로 웃음기를 지워 진지한 얼굴로 질의 손을 잡았어요.
“그렇지, 응. …이제 괜찮아.”
라피아의 말을 끝으로 셋은 단상에 오르기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그 걸음은 상당히 느렸지만, 하객 중에는 오히려 그 장면을 눈에 더 오래 담아두려는 듯이 뚫어지도록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라피아의 아버지인 크롬웰이라던가, 뉴페리시니의 촌장인 케이넨이라던가.
셋은 황녀의 앞에 서면, 그제야 걷는 동안 낮게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려 황녀를 바라봤어요.
황녀도 결혼식의 주례로 선다고 옷을 꽤 차려입고 왔네요.
흰색 바탕의 정장에 금색의 무늬가 장식으로 들어간, 주인공인 세 명보다 약간 튀는 분위기의 옷이에요.
하지만 이런 황녀도 셋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나 봐요.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역시 그대들은 본인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름답군.”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칭찬이니 불만 품지 말도록, 본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대들밖에 없을 테니까.”
“그것참 고맙네요.”
“황녀님, 슬슬….”
질과 아오이, 라피아와 한마디씩을 나눈 황녀는 목을 가다듬었어요.
“모두, 이 결혼식에 찾아와주어 감사한다. 본인은 레나이 아발테인, 황제 루스 아발테인의 장녀이지.”
황녀 앞에 선 셋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당연히 하객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인물의 충격적인 자기소개에 식장 전체가 웅성거렸어요.
식이 시작하기 전에 황녀의 등장부터 알아보았던 크롬웰 가문의 사람들도 꽤 있긴 했어요.
다만, 미리 눈치를 채고 조용히 있었을 뿐이에요.
미리 알지 못했던 사람 중에는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실수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있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누가 황녀를 사회자 겸 주례로 세울 생각을 하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둘째 치고,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일 텐데요.
이 시끌벅적한 소란은 황녀가 능력을 사용하여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마무리됐어요.
“본인은 확실히 황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이 자리에서만큼은 황녀가 아닐 것이다. 단순한 사회자이고, 주례사일 뿐이지. 친구인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우루시쿠로 아오이, 아스티엘 라피아의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요….”
아오이가 끼어들어 황녀에게 잔소리하자,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에요.
“으흠, 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원을 이루어 자리에 바로 서도록. 세 명이니 서로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도록 서야 하지 않겠나? 어서.”
황녀의 말에 셋은 단상에 둥글게 섰어요.
제일 먼저, 서로 인사하라는 말에 허리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죠.
인사를 끝마친 뒤에는 황녀의 수신호에 검은색 정장의 사람이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상자 세 개를 들고 올라와 황녀에게 건네주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이것이 그동안 질이 준비해두었던 아오이와 라피아에게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거예요.
“본인은 허울 좋은 말들로 식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싫어한다. 이는 본인에게 부탁했던 지르니트도 마찬가지였지. 아마도 결혼식은 짧고 굵게 하여 기억 속에 강렬히 남긴 뒤에 한시라도 빨리 신혼여행을 가고 싶은 모양이더군. 성미도 급하지. 그러니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우루시쿠로 아오이, 아스티엘 라피아. 서로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가? 대답은 크게 하도록.”
황녀의 말에 하객 중 일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질은 웃음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제일 먼저 황녀의 말에 대답했죠.
“저는 언니들과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다음은 아오이였어요.
하지만 목소리는 황녀와 질, 라피아에게만 들릴 소리였는데요.
자신의 사랑 표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아오이답다면 아오이다운 행동이에요.
“지르니트와 라피아를 항상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피아가 대답했어요.
“지르니트와 아오이에 대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음, 좋아. 반지는 지르니트가 받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끼워주도록 하겠다.”
황녀가 건네준 반지를 받은 질은 세 가지 상자 중에서 보랏빛 상자를 라피아에게, 파란빛 상자를 아오이에게 주었어요.
그러곤 질이 자리에 돌아와 빨간색 상자를 손에 쥐었을 때, 셋은 동시에 상자를 열었어요.
상자 안에는 각각의 상자의 색과 어울리는 보석이 중앙에 박힌 반지가 들어있었죠.
질이 직접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수준 높은 퀄리티의 반지를 본 둘은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세 개의 선이 매끄러운 선을 자랑하면서, 일정한 패턴으로 얽혀, 링을 이루는 것을 보면 도저히 반지를 처음 만들었다곤 생각할 수 없었거든요.
“…질?”
“네, 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는 질이에요.
“울어요?”
“아, 안 울어요!”
“뭐야, 진짜 울려는 것 같은데? 눈가가 촉촉하잖아, 그렇게 기뻐?”
“진짜, 진짜 안 울어요….”
아오이가 눈치가 빠른 탓에 라피아까지 질의 울 것 같은 얼굴을 알아버렸네요.
확실히 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어요.
이 결혼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울려고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걸까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나오는 것 같으니, 하객 모두 지르니트에게 울지 말고 웃으라는 의미에서 박수 한 번 쳐주도록.”
황녀의 돌발 행동에 질은 화들짝 놀라 하객들을 돌아봤어요.
동시에 평소랑 다르게 포니테일로 묶어놓은 머리가 흰색의 리본과 함께 흔들렸죠.
“반지는 라피아가 아오이에게, 아오이가 지르니트에게, 지르니트가 라피아에게 끼워주는 순서로 되어있다. 라피아가 먼저 하는 게 낫겠군.”
“저 먼저요? 아, 으음~ 알겠습니다.”
라피아는 케이스 안에서 반지를 빼내어, 빈 케이스를 황녀에게 건네주었어요.
그리고는 한 손으로 살며시 아오이의 손을 잡아 반지를 가까이 가져갔죠.
“반지 말인데, 내가 준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끼고 다녔으면 좋겠네.”
“끼우고 나서 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질이 준비하고, 라피아가 끼워준 반지니까요.”
“나도 이제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결혼식 뒤에 기대해. 너도, 질도 다른 세상으로 보내줄 테니까.”
“다른 세상…?”
“극락.”
“라피아 당신은 이런 중요한 날마저 그런….”
라피아의 말뜻을 이해한 아오이는 곤란한 표정 속에 약간의 웃음기를 띄웠어요.
이제는 익숙하다는 의미일 거예요.
아오이도 무작정 라피아에게 당하기만 하지도 않을 테고요.
뭐가 되었든, 라피아는 조심스레 반지를 아오이의 손에 끼워주었어요.
“음, 다음으로 아오이? 지르니트에게 반지를.”
황녀의 부름에 아오이는 대답은 물론,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며 질의 앞으로 다가갔어요.
한 손에 들고 있는 반지 케이스를 마법으로 공중에 띄우더니 반지만 쏙 빼내어 손에 들었죠.
“이럴 줄 알았다면, 반지를 3개 더 준비할 걸 그랬어요.”
“그건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반지를 준비하는 기간도 더 길어졌을 것 같은데요.”
“언니들과 제 욕심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조금은 갑작스러웠지만, 지금 이렇게 여기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와 라피아는 매우 기쁘니까요. 그렇죠?”
“당연한 걸 물어보고 있네, 얼른 반지 끼워줘. 질 팔 아프겠다.”
“라피아는 항상 한마디가 많은 거 알죠? 그렇지만, 이제는 익숙하니까 용서해 줄게요. 그리고 질. 사랑해요.”
라피아에게 잔소리를 하다가도 질에게 한 손을 손바닥을 보인 채로 내밀어 보이는 아오이였어요.
질은 아오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어요.
그러자 곧바로 따듯하게 감싸 쥐는 아오이의 손에 고개를 푹 숙여버렸죠.
“질?”
“얼른 끼워주세요….”
집중해야 겨우 들리는 작은 목소리, 한껏 모여서 떨려오는 어깨.
아오이는 질이 울음을 참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반지를 끼워주고 바로 안아주어 등을 토닥여주었어요.
그러자 곧바로 흘러내리는 눈물이에요.
“기쁜 날이잖아요. 울지 마세요. 자, 뚝.”
“어떻게 안 울어요? 이제 진짜, 가족인데….”
“질….”
“버티려고 했는데….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점점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질의 모습을 눈치챈 황녀는 재빠르게 하객들에게 다시 한번 박수의 요청을 했어요.
식장을 가득 채우는 박수 소리에 질은 억지로라도 진정을 찾기 위해 아오이의 품속에서 심호흡했어요.
박수 소리가 잦아질 그 잠깐 사이에, 질은 흘린 눈물들을 닦아내고 왼손을 아오이의 손 위에 올려두었어요.
그제야 아오이가 반지를 집어 천천히 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는 것이 가능했죠.
이번에도 질은 한 번 더 울먹이며 눈물을 쏟아내려 했지만, 적당히 입술을 깨물어 참아내는 모습을 보였어요.
장하네요.
“기분은 알지만, 지금만큼은 이쁜 모습만 보여주세요.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잖아요? 그리고, 라피아도 기다리고 있고요.”
“후으, 읏. 네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피아 언니, 손 좀 줄래요?”
라피아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마자 얼굴에 조금만 남아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손을 내밀며 눈을 감았어요.
아오이 때와 같이, 자신이 받았던 것과 같이 천천히 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질이에요.
“음, 이로써 맹세의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 끝났다. 응? 아아….”
이어서 황녀의 사회가 계속해서 이어지나 했는데,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말을 멈추고 누군가에게 올라오라는 말을 했어요.
“지금 올라오는 뉴페리시니의 촌장인 케이넨 듀네스가 꽃다발을 전해주고 싶다고 하는군.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도록.”
질의 시야에 들어오는 케이넨은 베이지색의 정장을 입어서 수수하지만, 평소보다는 한껏 꾸민 모습이었어요.
왼팔에 두 가지의 다른 꽃을, 오른손에는 하나의 꽃만을 들고 있어요.
꽃을 제일 먼저 건네받은 것은 아오이였죠.
“마군주 단탈리안, 아니지. 음…. 아오이 씨라고 불러드릴까요?”
“아오이가 더 듣기 좋겠네요.”
“그럼, 아오이 씨. 앞으로 행복한 날만 있기를 바랍니다. 건물을 새로 지어주신 건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거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직접 보니까 알겠어요. 여러분이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제 죄책감을 못 본 척하지 않고, 이 모습 그대로, 여러분에게 속죄해나갈 거예요.”
케이넨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라피아에게로 돌아섰어요.
“그리고 라피아 씨, 지르니트 언니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언니? 케이넨 씨는 딱 봐도 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요.”
“아하하,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지르니트 언니?”
마지막으로 질의 앞에 선 케이넨은 잠깐이지만 바로 부케를 건네주지 않았어요.
약간의 뜸을 들이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라는 짧은소리를 내며 부케를 건네주었죠.
“미안, 언니가 평소보다 더 이뻐 보여서 그만 넋을 놓고 바라봤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지만…. 저를, 피네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네.”
“보기 좋은 모습들이군. 마지막으로 이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아놓고 하객의 축하를 받으며 퇴장하기만 하면…. 음?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지?”
“황녀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부탁?”
황녀의 되물음에 질은 가까이 가서 귀에 뭔가 속삭였어요.
질의 이야기를 듣는 황녀의 눈은 점점 동그랗고, 커다랗게 변했어요.
무슨 이야기이길래 그러는 걸까요?
아오이도 라피아도 궁금해서 귀 기울여 속삭이는 내용을 들어보려 했던 것 같지만, 제대로 들린 것 같지 않아 궁금해하고 있어요.
“지르니트, 그대도 보통이 아니군. 하지만 허락한다.”
“고마워요.”
“하객 모두 집중해서 듣도록! 원래라면 차례에 없는 파트이지만, 지르니트가 그대들의 앞에서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지루해도 조금만 버티기를 바라지!”
황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질은 제일 먼저 아오이의 앞으로 가서 허리를 약간 숙였어요.
그리곤 부케를 자신과 아오이의 얼굴 높이까지 들어 하객들에게 보이지 않게 했죠.
“질? 무슨 일을 하, 웁?! 응읏…!”
순간 벌어진 일에 아오이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당황한 나머지 부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줘버렸어요.
뒷걸음질 치려는 아오이를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를 잡은 것은 덤이었죠.
부케에 가려지지 않은 방향에서 바라보던 라피아는, 질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황녀의 반응처럼 눈동자를 크게 만들며 놀라고 있었어요.
이는 하객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렇지만 모두가 놀란 것은 얼마 가지 않았고, 곧 식장이 환호와 박수 소리로 가득 찼어요.
그런데 박수 소리가 잦아지는 와중에도 질은 좀처럼 부케의 그늘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려는 듯이 자신의 몸쪽으로 아오이를 끌어당겼거든요.
아오이는 질이 만족한 다음에야 그 품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했어요.
“하아, 하앗…, 읏! 질 이게 무슨…!”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화를 내는 아오이에게 한껏 웃어 보이는 질이었어요.
그리곤 대답조차 하지 않으며 라피아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빤히 쳐다봤어요.
뻔뻔한 질의 모습에 아오이는 할 말을 잃고 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겉으로는 화나 보이더라도, 속으로는 내심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뭐야, 뭐야~ 나보고 지금 해달라는 거지? 똑같이 가려줘?”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아요. 저한테 해준 다음에는, 아오이 언니한테도 해 주세요.”
“푸훗! 아~ 못 살겠다, 정말~”
“얼른 해주세요.”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 건지, 질은 양손을 뒤로하곤 눈을 감았어요.
이어지는 라피아의 부케로 얼굴을 가리는 행동.
부케로 가려진 그 뒤의 모습이 어떨지 하객 모두 상상 속에 맡겨야만 했죠.
하객들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질이 아오이에게 다소 폭력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라피아는 상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어요.
라피아의 손이 살며시 질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만은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알 거예요.
부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만족해?”
“최고였어요.”
이번에는 먼저 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는지, 천천히 멀어지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오는 라피아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는 질이었어요.
그 뒤에서는 아오이가 뺨을 붉힌 채로 라피아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라피아는 한참이나 아오이를 바라보다 겨우 입을 뗐어요.
“아오이, 그, 뭐야, 그러니까….”
“왜 그래요?”
“아니, 다시 한번 보니까, 그으…. 역시 넌 아름답구나…. 라고 생각이 드네….”
“…아, 어, 네에….”
“아, 진짜! 이럴 때에 당당해야 하는데…!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아오이!”
“네, 네?”
“사랑해.”
말을 전하자마자 손에 쥐고 있는 부케를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려는 라피아였는데, 순간 아오이가 그 손을 막아냈어요.
그리곤 천천히 라피아의 손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죠.
“라피아, 이번에는 제가 할래요. …받기만 하는 건, 저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알았어. 한쪽 무릎만 꿇고 앉을 테니까. 좋을 때 와.”
아오이 역시 부케로 얼굴을 가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했지만, 사실 이제는 ‘가린다.’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예 의미가 없는 행동이에요.
아오이의 차례까지 끝이 났을 때, 하객들은 다시 한번 박수를 쳐 줬어요.
이 자리에 뉴페리시니의 하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롬웰 가문의 사람도 수없이 와 있으므로 라피아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여자끼리의 결혼, 그것을 축하해주는 귀족들이라니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사회를 이어가는 황녀였어요.
“아버지가 나름 신경 써준 게 보이네.”
“그런 건 상관없지 않아요? 마저 결혼식을 마쳐야죠.”
“아…. 응, 사진 찍는 거랑 퇴장이었나? 어디로 갈 건데? 아직 말 안 해줬잖아, 질.”
“황녀님은 신혼여행이라고 했지만, 저희가 갈 곳은 저희 집밖에 없잖아요? 가족이니까. 그리고 몰래 언니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아직 끝이 아니에요.”
“뭐? 또 뭐가 있어?”
“기대해도 좋아요. 아오이 언니는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라피아 언니한테는 마음에 들지도 몰라요.”
“혹시 부끄러운 건가요…?”
이번에도 웃어주기만 하는 질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황녀의 사회에 따라, 단상의 계단에 최대한 키를 맞춰 서는 셋이었어요.
자신을 제일 잘 나타내는 자신만의 자세를 취하라는 말에 이런저런 자세를 해보는 와중에 오간 대화였죠.
“황녀, 여기 의자 좀 준비해주시겠어요?”
“앉을 텐가? 거기 그대, 그래 거기 멍하니 서 있는 그대 말이야. 의자 하나 좀 가져다주게.”
황녀의 명령에 단상 아래의 구석에서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여자는 곧바로 커다랗고, 새하얀 의자를 단상 위로 가져왔어요.
하지만 아오이는 의자가 놓인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기저기 옮기다가 단상의 정 중앙에 약간 비스듬한 방향을 바라보도록 바꿔놓았죠.
그리고는 치마를 잡고 정리하면서 조심히 자리에 앉았어요.
“질, 라피아, 제 양쪽에 서면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음~ 뒤에 서는 건 별로야? 키가 커서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등도 드러내고 있으니까 약간 뒤로 서서 고개를 돌려서 널 내려다보는 게 사진에 찍힐 때는 더 이뻐 보일 거 같거든.”
“라피아도 주인공이잖아요? 그래도…. 라피아가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여러 번 찍을 테니까. 질은 어떻게 할래요?”
“저는 의자 팔걸이에 걸쳐 앉을래요. 의자가 커서 그 정도는 괜찮아 보이니까.”
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어느샌가 셋의 앞에 선 사진사는 몇 번이고 빛을 터뜨리며 지금의 모습을 담아냈어요.
여러 차례, 다른 방향에서, 자세를 바꿔보라며 제안까지 해가면서요.
그중에는 손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오이를 무릎에 앉히거나, 입 맞추는 장면 같은 것들을요.
십몇 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하객들은 큰 불만 없이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중간부터는 셋과 친해 보이는 하객들도 불려서 같이 사진을 찍었거든요.
그 외에 기다리는 사람들도 지루하지 않게 이 동안에는 서로 대화를 하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허락해 주었으니까요.
“사진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아직 부족한가?”
“아뇨, 충분해요. 그만 퇴장하고 싶은데요.”
“보채지 않아도 돼. 하객 모두 듣도록! 이제부터 주인공 세 명이 결혼식장에서 퇴장할 테니, 그동안 박수를 부탁하겠다!”
퇴장 직전에 라피아는 현자에게 목례를 했어요.
인사를 마치고 바로 단상에서 내려가자마자 하객 모두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죠.
모두의 축복 속에 식장의 문을 열어젖히고 도착한 곳은 역시나 질이 말했던 대로 평소의 집이었어요.
그리고….
“으아! 피곤해! 부담감이 장난 아니었어!!”
“그러게요. 마군주랑 싸울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하아, 그, 그래도 아직 저녁에 선물이 남아있으니까 자면 안 돼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웨딩드레스가 구겨지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바닥에 쓰러지는 라피아와 아오이였어요.
“그런데 질, 결혼식만 하고 끝은 아닐 거 아냐, 서류는? 우리가 결혼했다는 걸 증명해주는 서류 같은 건 어떻게 처리한 거야?”
“그건 황녀님이 해결해주기로 했어요. 언니들이 결혼식에 와 준다면, 이라는 조건으로.”
“진짜 치밀하네, 너….”
질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며 2층으로 향했어요.
분명 결혼식을 끝낸 뒤라 긴장도 풀리고, 쌓인 피로도 많을 텐데, 뭘 하려는 걸까요?
이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진 채로 고개만 돌려 질을 불러세운 라피아였어요.
“뭐하러 가는 거야?”
“언니들 방에 선물 상자를 둘 테니까, 저녁에 선물을 열고 제 방으로 와 주세요.”
“무슨 선물인지 감이 안 잡히네, 뭐길래 그래?”
“알려주면 재미없잖아요? 아, 설마 제 선물인데 받지 않겠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질이 주는 선물이라면 거부할 리가 없죠. 어떤 선물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고, 쓰지 않을까요.”
“아오이 언니, 그 말…. 반드시 지켜주세요. 알았죠?”
질은 말을 마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버렸어요.
올라가기 직전에 보인 의미심장한 웃음에 갑자기 오한까지 들어 몸을 떠는 아오이였죠.
불안한 마음에 라피아와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쏟아지는 피곤함에, 갑자기 찾아온 불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피곤함에 찌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 저녁을 먹은 뒤, 어둠이 짙게 내리 앉은 뒤에, 각자의 방에 놓인 선물 상자를 보고 나서야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어요.
아오이의 불안감은 제대로 들어맞았지만, 질에게 ‘어떤 선물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고, 쓰겠다.’라고 말해버린 이상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아오이는 준비된 선물을 받고 질의 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어요.
라피아는 이미 질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요.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간 아오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과 비슷한 차림을 한 질과 라피아였죠.
“와, 언니! 진짜, 진짜 이뻐요!”
“이런 선물…! 다음부턴 절대 안 입을 거예요! 알겠어요, 질?!”
“왜 화내고 그래? 이쁜데. 새벽 내내 재밌을 텐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별 이유가 없었어요.
질과 아오이, 라피아가 입고 있는 것은 웨딩드레스였어요.
물론 이름만 웨딩드레스인 란제리였죠.
질의 모습부터 살펴보면, 그렇네요.
있어도 원래의 역할을 잊은 듯한 치골을 겨우 가리는 짧은 치마에, 앞쪽은 아예 가려주는 천의 면적이 작다 못해 없는 수준이에요.
치마만 그럴까요?
옆구리는 망사로 되어있어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며, 등부터 어깨, 쇄골까지 드러내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게다가 허벅지에 밴드를 착용하고 있어, 살 눌림이 생겨서 안 그래도 노출이 많은 웨딩드레스에 더한 느낌을 주었죠.
질만 해도 이렇다면 아오이와 라피아가 어떤 모습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어요.
라피아의 웨딩드레스는 완전한 시스루로, 중요한 부위만 불투명한 소재로 가려놓은 의상이었어요.
심지어 라피아의 옷이 질의 옷보다 더 대담했던 점은, 치마의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머리에 베일과 팔의 슬리브가 있어서 모순적인 청초함과 섹시함을 살리고 있었죠.
아오이는, 거짓 하나 없이 웨딩드레스라고 부를 수 없는 란제리에 가까운 옷이었어요.
물론 질과 라피아도 제대로 걸고넘어지자면 웨딩드레스라고 불리기 힘든, 속옷에 가까운 옷이기는 해요.
그렇지만 형태로만 봤을 때는 질과 라피아는 ‘그나마’ 웨딩드레스라고 불러줄 수는 있었지만, 아오이는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죠.
웨딩드레스의 흔적이라고는 순백색의 색깔만이 남아, 불투명한 꽃무늬가 들어간 것이 전부인 선정적인 속옷일 뿐이었으니까요.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 잘 어울리는데요!”
“부끄럽잖아요!”
“자자! 그렇게 화내지 말고, 이리 와!”
“잠, 잠깐, 라피아!”
손으로 치마 아래를 가리다가, 강제로 침대로 이끌려 눕혀진 아오이.
이 뒤에 일어날 일이라고는 아오이에게 다가오는 질과 라피아를 보면….
진심이 된 둘에게 얼마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을지.
셋이 지쳐 쓰러져 잠들기 직전이 되었을 때는 아오이와 라피아가 질을 가운데에 두고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아오이는 거의 눈이 감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라피아가 이불을 들치고 앉아선 질을 바라보며 말했어요.
“질, 행복해?”
하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의 질이었어요.
라피아를 빤히 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옮기기도 했죠.
고민할 거리가 있는 모양이에요.
이 사이에 방금까지 졸려 하던 아오이가 질의 손을 잡으며 대화에 끼어들었어요.
“앞으로 영원히 곁을 지켜줄 새로운 가족이 생겼잖아요, 행복한가요?”
“…네, 저 행복해요.”
조금의 망설임이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자신이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이전이었다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질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게 된 라피아는 이번엔 아오이에게 물어봤어요.
“그거 다행이네. 아오이, 너는?”
“저는…. 행복하냐는 것만 물어본다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있겠네요. 그러는 라피아는 어떤데요?”
아오이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역시 자신이 짊어진 죄에 관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거겠죠.
그래도 질처럼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오이도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찼던 예전과는 다르게, 성장했네요.
“난 너희 둘만 있다면 앞으로 심심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대답이 애매하지만, 질과 아오이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나 봐요.
그럼 된 거죠.
앞으로도 셋만 행복하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셋만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고, 반드시 행복할 거예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