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뉴페리시니 (13)
* * *
이날 저녁, 질은 현자에게 같이 오라는 말을 듣고 크롬웰 가문의 저택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어요.
네, 라피아의 아버지예요.
질까지 불려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라피아의 설득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니 당연히 현자와 만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지만, 질에게는 당연하지 않았어요.
질에게 당연한 것이 있다면 테이블을 하나 두고 앉아있는 이 상황이 가시방석이었다는 것이었죠.
이런 상황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불편함을 가져왔어요.
도중에 현자가 한숨을 쉬는 소리에 질이 어깨를 떨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에서 빼먹을 뻔했네요.
그렇기에 현자인 크롬웰 레이지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질은 식은땀을 흘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죠.
“어색하게 다들 말 한마디 없으면 좀 그렇지 않아요?”
이를 보다 못한 라피아가 질은 구해주기 위해서 끼어들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현자의 다그침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라피아, 이 아비는 지금 상당히 언짢다. 제자로 거둬들인 아가씨가, 설마하니 딸을 빼앗아갈 것이라고는….”
그랬었죠.
질은 마기와 마나를 함께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현자의 아래에 제자로 들어가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양녀라고는 해도 딸을 빼앗아간다는 사실만큼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겠죠.
“스, 스승님, 저는 언니가….”
“조용히 하게, 생각이 정리되질 않고 있으니. 몇십, 몇백 년을 현자로 살아왔건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답이 나오질 않는구만.”
현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일 거예요.
양녀를 들였는데 설마 양녀의 친구인 동시에 동생인 사람이 양녀와 결혼하겠다잖아요?
그 결혼도 무려, 둘이 아니라 셋이서.
본인들은 좋다고 기뻐하고 있겠지만, 아버지 된 처지로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이에 라피아가 계속해서 긴장된 분위기를 풀려고 했지만 전부 무의미했어요.
“저, 그, 아버지? 결혼이라는 게 뭐 있겠어요? 어차피 우리 모두 살 날도 많이….”
“경력이 생기는 게 중요한 것이지 않으냐! 게다가 앞으로 살날이 많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결혼하는 상대인 이 아가씨에게 진심이 아니라는 게냐?! 장난이라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현자가 큰소리까지 쳤으니 말 다 했죠.
그런데 그 와중에도 현자가 질을 신경 써주는 것을 보면 완전히 관계가 망가진 것은 또 아닌가 보네요.
그저 딸을 빼앗기게 될 상황에 놓여서 답답하고 화가 난다는 것이 문제인 걸까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얼마나 질에게 진심인데요!? 아버지 앞에서 딥키스라도 보여드릴까요?!”
“장난은 그만두거라! 뒤통수가 당겨오는 느낌이구나…!”
“스승님, 저 언니랑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 자리에 아오이까지 있었다면 현자는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거예요.
아오이는 일부러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있으면 분명히 현자와 기 싸움을 벌여 자리를 망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 아오이가 없는 지금 상황이 잘 풀리고 있느냐 하면, 보다시피.
거의 30분가량을 말없이 눈치만 보며 보내다가 현자의 혈압을 높이는 말만 하는 거예요.
“라피아…. 이 늙은이가 너를 양녀로 들인 것은 알고 있겠지만, 마지막 뱀파이어의 후손이란 것과 불타는 폐허의 위에서 멍하니 있던 네가 너무나도 가엾게 보였던 탓이지.”
“네? 예, 알고는 있죠…. 직접 말해주셨었으니까.”
“그런데 1년이 조금 넘게 너와 함께 지내다 보니 양녀가 아니라 친딸처럼 대하게 되었던 게야. 아직 더 오랜 시간을 들이고 싶었는데…. 후우, 정말 그래야만 할 테냐.”
현자는 라피아와 친해질 기회가 더 많았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질이 대재앙으로 인해서 일어난 지진을 느낀 뒤 마기노가 찾아온 그 공백의 시간.
어림잡아 두 달이 약간 안 되는 시간이라고 하죠.
이 시간이 라피아와 현자에게 질과 아오이보다 조금이나마 더 길게 주어진 친해질 시간이었어요.
아쉬울 수밖에 없겠죠.
그럼에도 라피아와 현자가 이렇게 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서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저, 아버지…. 저를 구해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렇게 제일 먼저 말을 전하러 온 거예요. 저도, 지르니트도….”
“네가 집을 나가서 이 아가씨와 같이 산다고 했을 때도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알고 있는 게야?”
이건 아오이의 집에서 셋이서 살게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 같네요.
그 전까지는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집에 돌아오는 식이었겠죠.
하녀인 플랑을 피하려고 일부러 가지 않았던 때를 생각하면 집을 비우는 시간은 더 많았을 테고요.
여러 가지로 서운했겠네요.
“그건 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정도로 지르니트를 좋, 사랑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아니었어요. 옆에 있으면 행복하고, 손닿고 싶고, 항상 옆에 있고 싶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아버지에겐 죄송한데요! 아버지와 있을 때보다 더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이건 지르니트만이 아니라, 아, 탈리안이랑 있을 때도 같아요!”
현자의 눈썹이 꿈틀거릴 정도로 격렬한 애정의 표현에 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어요.
셋이서 결혼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오이도 언급하는 걸 보면 라피아도 꽤 치밀한 것 같네요.
확실하게 답변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이겠죠.
그렇기에 라피아는 자신의 생각을 더 현자에게 맞부딪히려고 했는데요.
“후우, 알겠다.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말릴 수도 없겠지.”
의외로 시원하게 허락을 내어주는 현자예요.
이런 현자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라피아와 질뿐만 아니라, 방의 밖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플랑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연하잖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전하러 온 거예요.
현자의 결혼 허락에 놀라 홧김에 방안으로 들어올 뻔한 플랑이었지만, 힘겹게 침착을 되찾아 심호흡한 뒤에는 문고리로 향한 손을 거두며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에요.
상당히 힘들어 보이네요.
그와 반대로 라피아는 들떠서 테이블에 손을 짚으며 반쯤 일어나 현자에게 되물었어요.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허락 못 할 것은 뭐냐? 말릴 이유는 어디에 있고? 단지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거창한 시험 따위는 없지만, 얼마나 서로 좋아하는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보면 아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현자의 양녀이기 전에 라피아, 네 인생도 있지 않으냐.”
하긴, 질과 라피아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현자의 무거운 공기에 버티지 못하고 서로 손을 꽉 쥐고 있던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둘에게는 이미 익숙해져서 일상보다도 더 평범해진 아무것도 아닌 버릇이 된 행동이었겠지만요.
“감사해요! 역시 아버지가 현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질, 너도 이제 긴장 안 해도 돼!”
“그렇지만, 당분간 지켜보긴 할 것이야. 이 아비 없이 얼마나 잘 사는지. 노력은 최대한 해보겠지만, 이전처럼 보호해주지도 못할 테고….”
“잘 할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랑은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아버지랑은 조금 더 친가족처럼 지내고 싶기도 하고요! 가문에 방해가 되는 일을 하게 되어서 정말 죄송하지만….”
“허어…. 되었다. 그동안 네가 가문에 가져온 득이 얼마나 큰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솔직히 말해 보아라. 가문의 일에 지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게지?”
“아, 아닌데요?!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좋아하고, 크롬웰 가문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라피아가 가문을 위해서 한 일 중에서도 당장에 질의 눈에 띄는 일이라면, 놀이공원의 제작이라는 게 있겠네요.
아직 마군주의 위협이 가시지 않은 탓에 제대로 굴러갈지는 미지수이지만, 안전만 확보된다면 라피아의 전생과 비슷한 유희 거리가 하나도 없는 이 세계에서는 100%에 수렴하는 확률로 성공하겠죠.
현자가 말하는 것을 보면, 이외에도 전생의 지식을 사용해서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을 여럿 해 왔겠죠.
“허허…. 결혼식 전야인데 그만 가보거라, 내일…. 식장에서 보자꾸나.”
“스승님, 저어….”
모든 것이 잘 풀리나 싶었는데, 잊은 것이 있었네요.
질과 현자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잖아요.
현자는 지금껏 라피아와 대화하느라 질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늙은이의 하나뿐인 딸을 빼앗아가는 못난 제자라지만, 내 제자는 아가씨 한 명밖에 없지. 앞으로도 마기와 마나를 동시에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같이 연구해줄 테니, 자주 찾아와도 상관없다네.”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아무래도 현자는 라피아만 괜찮다면 허락해줄 생각이었나 보네요.
그런데 급히 돌아가려는 둘을 불러세우는 현자였어요.
“아, 잊은 게 있었구만. 라피아랑 아가씨, 기다리게.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단탈리안도 아가씨도 부모가 없지 않으냐. 부모석에는 이 늙은이가 앉아도 되겠느냐?”
“물론이죠. 진짜 가볼게요, 탈리안이 기다리고 있어서!”
“저도 괜찮아요!”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질과 라피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멈춰섰어요.
둘의 앞에는 플랑이 서 있었거든요.
“…플랑.”
그토록 좋아하는 라피아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름을 불려도 대답하지 않는 플랑이에요.
“아가씨, 저는 주인님을 섬기는 몸으로, 주인님께서 결정하신 일에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결혼…. 축하드립니다.”
“뭐? 너,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결혼까지 하실 생각이시라면 저에게는 기회가 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아가씨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러니 지르니트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 아무런 적의조차 느끼지 못하는 질이었어요.
“굳이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을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나에 대한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예상외의 반응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질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이끄는 라피아였어요.
너무도 침착한 플랑.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표정 하나 없는 무감정한 얼굴이었어요.
억지로 이끌리는 와중에 뒤돌아보며 확인한 플랑의 모습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죠.
“신경 쓰지 마, 어떻게든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너도 각오하고 온 거잖아? 베리아한테 받은 영향은 어디 간 거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한 거랑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다르잖아요.”
“너도 참 착해빠졌어. 나머지 일은 아버지한테 맡기고, 아오이한테 돌아가자.”
라피아는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싫었는지 아오이에게 돌아가자고 말했어요.
이에 질이 열쇠를 꽂아 문을 건너간 곳은 다시 뉴페리시니의 회관 겸 요양원의 뒤편이었죠.
옆을 바라보면 마나의 구체를 띄워놓고, 그 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는 아오이가 있었어요.
아오이는 둘이 나타나자마자 책을 접었어요.
“왜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다른 곳으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 쉬는데 소란스러울까 봐요. 그럼 언니는 왜 불편하게 여기서 책을 읽어요? 의자도 없어서 벽에 기대야 하는데.”
바로 대답한 질과는 다르게 아오이는 뜸을 들이는 모습을 보였어요.
한번 건물 안쪽을 훔쳐보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며 대답해주었죠.
“저는 마군주잖아요. 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자격이 없어요.”
“언니 또 그렇게 답답하게…. 예전에도 제가 말했잖아요! 책임을 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라피아 언니!”
“어, 어?! 어어! 그, 그렇지….”
괜히 불똥이 자신에게로 튀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라피아였어요.
“옆에 있어 달라고 했었죠….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만약 제가 저들이었다면 저는 마군주가 눈앞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용서하지 못할 거에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을 거라고요.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할 텐데,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자기객관화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고 있네요.
대재앙을 일으키지 않고 연옥에서만 살아왔다면 베리아가 넘어올 일도 없었고, 슬리브스터가 생길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완전히 아오이에게 잘못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는 상황인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뉴페리시니의 마을 사람들이 아오이와 같은 생각이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직접 듣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예요.
덕분에 질의 표정은 뚱하다 못해 마음에 안 드는 답변을 들어 부풀어 오른 볼이 터질 것만 같아요.
“저랑 라피아 언니한테만 솔직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네요. 따라오세요!”
“질?! 잠깐, 라피아! 도와주세요! 언제 이렇게 힘이 세진 거예요?! 질!”
“미안, 이번엔 도와주기 싫어. 질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거든.”
질에게 이끌려가는 아오이의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모습이었어요.
억지로 끌려가는 탓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서 라피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 누가 보면 정말 죽으러 가는 줄 알 테니까요.
아오이의 외침에도 질은 손을 놔주지 않고 문틈 사이로 불이 새어 나오는 방으로 향했어요.
그리곤 문을 확 열어젖혀 방주인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거예요.
“엘데린트 씨! 궁금한 게 있어서 왔…!”
“뭐야, 왜 멈춰섰어? 무슨 일이야?”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것은 좋지만, 질은 안쪽에서 흐트러진 속옷 차림의 모습을 한 채로 침대 아래에서 앉아있는 엘데린트를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질의 어깨너머로 라피아가 같이 방주인의 모습을 봤을 땐, 이 방에 있는 모두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죠.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적막을 깬 것은 당연하게도 방의 주인인 엘데린트였어요.
“나, 나가아아!! 얼른 나가!!”
“죄송해요!”
세 명은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와 방문을 닫아줬어요.
“여, 여기 애들은 방문도 제대로 안 닫고 저렇게, 도구를 써서 즐기고 그러는 거야?”
“실수인 게 당연하잖아요. 문이 열려있길래 그냥 들어간 거였는데….”
목소리에서 미안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대답을 듣던 라피아는 질의 손에 잡혀있는 아오이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어요.
“얘는 또 굳었네. 도대체 질이랑 나랑 할 때는 어떻게 버텼던 거야? 아오이! 정신 차려!”
“네, 에? 아…. 미안해요. 도구를 쓰는 건 처음 봐서…. 그, 이 마을에는 즐길 게 없기는 하니까, 이해해줘야겠죠….”
마법은 황녀가 보여주기도 했었고, 저번에 라피아가 한번 보여줬으니 놀랄 일은 없겠죠.
하지만 도구는 그렇지 못할 거예요.
아오이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 자신의 팔뚝을 들어 방금 본 물건을 재보고 있었거든요.
“언니, 그건 아니에요. 예전에 책에서 읽어봤는데 엘프라는 종 자체가 조금 성 쪽으로 개방적이래요. 엄~청! 엘데린트 씨는 부끄러움이 많은 거뿐이에요.”
“그럼 스릴을 즐기는 쪽인가? 일부러 문을 열어두고 언제 들킬지 두근거리며 위로하는 취미라니….”
“이보세요! 다 들리거든요?! 엘프가 성에 개방적인 건 맞지만 전 아니에요! 지금 누구를 욕구불만으로 만드는 거예요!?”
좋을 대로 떠들고 있는 셋이 시끄러웠는지 어느새 말끔한 파자마로 갈아입은 엘데린트가 문을 벌컥 열면서 소리쳤어요.
“깜짝이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주면 되지 화를 낼 필요는 없잖아.”
“지, 지르니트랑 당신들이 문 너머로 다 들리게 말하는데 화를 안 낼 수가…!”
“엘데린트 씨,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였거든요.”
복도에서 소란을 피우기는 미안했는지 급하게 나서서 상황을 중재하는 질이었어요.
이런 질의 모습에 엘데린트는 계속해서 화를 내려다 멈칫하며 숨을 들이마시고는, 곧바로 어깨에 힘을 빼며 팔짱을 꼈죠.
“…하아, 지르니트 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 못 한 제 잘못도 있으니 용서해 줄게요. 뭐가 궁금한데요?”
“엘데린트 씨는 마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엘데린트는 마군주라는 말에 곧바로 눈동자를 굴려 질의 손에 잡혀있는 아오이를 바라봤어요.
지금껏 이런 눈치를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요?
“…무슨 대답을 바라고 왔는지 알만하네. 탈리안 씨는 마을을 세우는 데에 도움을 준 사람이잖아요. 전에 건물을 완전히 새것으로 바꿔줄 때 잠깐이었지만 대화해보고 알았어요. 마군주도 마군주 나름이라는 걸요.”
“마군주 나름…?”
엘데린트는 마군주가 전부 잔인하고 폭력만을 일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요.
아오이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 신세 지고 있는 녀석들 전부 알고 있다고요. 지르니트 씨가 마을에 들를 때마다 아오이 언니가 어쨌네~ 아오이 언니가 저쨌네~ 노래를 부르는 게,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지르니트를 믿자고. 아오이 씨라는 마군주를 한번 믿어보자고요.”
“그렇지만 대재앙을 일으킨 건…!”
“아~ 그런 건 됐고! 사실만 놓고 따져보자고요. 우리 눈앞에서, 우리가 쉬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건물을 세워줬잖아요. 그건 뭔데요?”
추궁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기에 아오이는 엘데린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대답하려고 해도 ‘그건, 그러니까, 미안해서, 당신들에게는’이라며 말을 더듬기에 제대로 된 말처럼 들리지 않았죠.
이에 답답해진 엘데린트가 먼저 나서서 대화를 이어갔어요.
“저희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랬던 거잖아요. 그걸로 된 거 아니에요? 저는 이 이상 잘 모르겠지만, 이 마을의 다른 녀석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걸요?”
“질에게도 비슷하게 들었던 말이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피해자 중에는 마기노와 관련된 것 전부를 보기 싫어하는 녀석들도 있긴 할 거예요. 근데 그게 뭐 어쨌는데요? 어차피 몇 번 보지도 못한 사이에. 직접 아오이 씨한테 피해를 받았던 것도 아니고…. 반대로 매일매일 찾아와서 도움을 주면, 이곳 녀석들은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여길 텐데. 당신이야 모르겠지만, 여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 녀석들은 전부 순해 빠졌거든요.”
‘잘못한 게 어때서, 속죄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부분에서는 질과 같은 생각이네요.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니 아오이가 망설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에요.
잘못한 대상이 한 명여지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아오이는 공공의 적과도 같은 처지잖아요.
그러니 엘데린트의 말을 쉽게 믿고 마을 모두가 인정하고, 자신도 만족할 만큼 일을 돕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거예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죠.
“아! 진짜!! 그렇게 못 믿겠으면 여기서 기다려요!!”
물론, 그렇다고 엘데린트가 아오이의 답답함을 더 참아낼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것 역시 아니었어요.
오히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뛰쳐나가, 기다란 복도의 문을 한 번씩 두드려 주인들을 복도에 나오게 해놓고는 아오이의 앞에 데려왔거든요.
엘데린트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 아오이는 당연하고, 질까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마을 사람들까지 억지로 깨워져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으니까요.
“얘들아! 언니가 질문이 있어서 불렀으니까, 대답만 바로바로 하고 들어가자!”
엘데린트의 말에 모두가 불만을 품고 그녀에게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였어요.
하지만 그 모두를 잠재울만한 단 한마디.
‘지르니트 씨가 궁금해하는 걸 대신 물어봐 주겠다는 거라고!!’라는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어요.
정말 질은 이 마을에서 용사 그 이상, 그란스리보다도 더 높은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게 아닐까요.
“너희들은 하나밖에 없는 회관을 완전히 새 건물로 만들어준 마군주 단탈리안이 밉거나, 내일 있을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을 정도로 원망스럽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방으로 들어가면 돼! 그게 아니라면 그냥 말없이 서 있기만 하라고!”
질이나 아오이가 말릴 새도 없이, 엘데린트의 질문은 바로 시작되어 긴장된 고요함만을 남겼어요.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복도 저 끝에 이어진 요양원에서 환자들이 신음하는 소리만 작게 들려올 뿐이었죠.
10명 조금 넘는 인원이 모였음에도 발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웅성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만 보였죠.
그 역시도 기분 나쁜 웅성거림은 아니었어요.
‘단탈리안이면 아오이 씨를 말하는 거지?’, ‘지르니트 씨가 그렇게 좋아하는….’, ‘앞에 있는 거 아니야?’, ‘우리가 미워할 구석이 어디 있다고 그래?’, ‘넌 어때?’, ‘지낼 곳을 만들어 줬는데 미워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아오이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건물을 지어주었다는 것만으로 어떻게 미워할 수 있냐는 말이 오가고 있었죠.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무서운지, 아오이는 질의 뒤에 숨어, 그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뿐이었어요.
“언니, 그렇게 숨어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내 말이! 아무도 안 떠났잖아요! 아오이 씨는 걱정 말고 내일 있을 결혼식에서 축하받으면서 기뻐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니까요!?”
“…제가 그래도 되는 거예요?”
“하아아, 얘들아 텄다! 텄어! 다 들어가! 정답을 알려줘도 모르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 아오이 씨! 그렇게 못 믿겠으면 내일 결혼식에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당신을 축하해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두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걸 본 뒤, 얼마나 답답했는지 엘데린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서 ‘안녕히 주무세요!’라며 소리를 질렀어요.
뒤에서 라피아가 킥킥대며 웃고 있는데 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오이였죠.
그저 질의 손을 꽉 잡고 있을 뿐이었어요.
“아오이 언니, 저희도 자러 갈까요? 특별히 방을 하나 비워주셨대요. 슬슬 잘 시간이니까….”
“미안해. 내가 아버지를 조금만 더 잘 설득했더라면, 네가 불려올 일도 없고, 돌아오는 것도 더 일찍 왔을 텐데.”
“그건 라피아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제가 늦게 알려준 탓인걸요.”
“음~ 아예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걸.”
“우으…. 어쨌든! 내일 중요한 날이니까 충분히 자둬야 해요! 얼른 자러 가요!”
“아, 혹시 이 뒤에 셋이서 어때?”
아오이처럼 약간 기가 죽으려는 질의 모습에 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라피아에요.
장소로서는 나쁘지 않네요.
환자들이 신음하는 곳이다 보니 어쩌다 이상한 소리를 내서 다른 사람이 듣더라도 다른 곳에서 들려온 것이라 착각하겠죠.
질은 그게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요.
“네에?! 안돼요! 여기 방음은 확실하겠지만…. 내일 결혼식에 피곤해서 안 될 거라구요!”
“뭐야, 뭐야! 결혼식 아니면 괜찮았다는 거잖아! 지르니트 이 녀석~”
맞아요.
결혼식 중요하죠.
하지만 라피아의 말처럼 결혼식만 아니었다면 질이 허락했을 거라는 사실에는 의외네요.
“저는 결혼식이 없었어도 반대예요. 제정신인가요? 집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지내는 곳에서….”
“방금까지 기죽어 있던 주제에 이런 거에만 예민하지? 그럼 집이면 되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저는 질하고 그런 일을…!”
“언니 저랑 하기 싫은 거였어요…? 그래서 항상 제가 억지로 해야만 받아들였던 거구요?”
“그랬어? 나한테는 반대로 적극적이던데, 역시 나이가 문젠가?”
“저 언니랑 했던 약속도 지켰잖아요! 3년 안에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겠다는 거! 그럼 어른이라 봐줘도 되는 거 아녜요?!”
계속되는 나이 언급에 짜증 내는 질이에요.
나이 문제로 잔소리만 몇 달을 들었으니 질릴 만도 하겠죠.
게다가 약속도 지키기는 한 걸요.
한 사람분의, 어엿한 마법사는 이미 충분히 넘어섰어요.
마법사뿐일까요?
그 활용법은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마군주의 힘까지 베리아에게서 물려받았잖아요.
“질! 조금만 조용히…! 그리고 나이가 문제가 아니면 뭐가 문젠데요?! 라피아는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어요?!”
“나, 나? 나는, 없지는 않지만….”
“그것 보세요! 왜 저한테만 그러는지…!”
“잠깐만요! 솔직히 언니들은 지겹지도 않아요? 제 나이로 그러는 거! 저도 이제 그만 어른으로 좀 봐 줬으면 좋겠다구요!”
“그건 성인식이나 하고 난 뒤에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질.”
“음, 음! 듣고 보니 아오이의 말도 맞는 것 같아.”
“아, 진짜아!”
아무래도 이 세 명의 대화는 방에 도착하고 나서도, 잠들기 전까지 계속되겠네요.
많은 일이 있었지만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