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뉴페리시니 (6)
* * *
목욕이 끝난 뒤, 질은 케이넨과 한층 더 깊어진 듯한 모양이에요.
산책 도중에도 옆에 서 있는 비델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는 것처럼 케이넨의 팔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려 하지를 않았죠.
간식을 준비할 때도, 청소할 때도, 창고의 정리를 할 때도, 거의 모든 일을 할 때도 말이에요.
질이 아오이나 라피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붙어있는 건 처음이 아닐까요.
그만큼 케이넨이 고민에 대해 말해준 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있잖아, 지르니트. 상황을 보면 널 좋아하는 마음은 슬슬 접어야 할 것 같거든? 근데 일단 그건 둘째치고, 서로 좀 떨어지지그래? 케이넨 씨도 곤란해하잖아.”
“네에? 그래도 저는 케이넨 씨가 좋은걸요? 케이넨 언니는 제가 이러는 게 불편해요?”
질은 케이넨을 올려다보며 일부러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봤어요.
이런 표정의 질에게는 이길 사람이 좀처럼 없을 거예요.
더군다나 케이넨은, 이 마을의 모두는 질을 대할 때는 약할 테니까요.
그나마 쓴소리나, 강한 태도로 나올 때가 있더라도 질을 위해서 하는 말이겠죠.
그리고 당연히도 케이넨의 반응은….
“아~ 괜찮아, 괜찮아! 지르니트 언니가 이렇게 좋아해 주면 나야 좋지. 그동안은 친해질 기회가 좀처럼 없었으니까.”
“이것 봐요! 괜찮다는데요?”
“하아…. 내 진정한 사랑은 어디 가서 구해야 하나….”
“여기서 구해보는 건 어때? 뉴페리시니에는 노예상에게 잡혔던 애들이 많았던 만큼 괜찮은 애들이 많거든.”
케이넨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비델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아요.
지나가는 사람 전부 외모가 출중하고, 한번 밑바닥을 경험해본 덕분에 성격마저 좋은 사람밖에 없어요.
함부로 사람을 경시하거나 닫힌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 중의 하나였죠.
이런 것만 본다면 비델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예요.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여기 온 이유가, 비델 씨의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장난이 아니라 마음먹고 제대로 상대방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뭐라고? 너까지 왜 그래? 내가 여기에 새로운 사랑의 상대를 찾으러 온 건 아니잖아!”
“뭘 모르네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이별의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주지만, 새로운 사랑이 해결해주기도 한다구요!”
“그건,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닌데….”
“아, 지르니트 언니! 좋은 게 생각났어! 그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비델의 짝을 찾아주는 거야!”
계획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질은 놀란 눈으로 케이넨을 바라봤어요.
반응을 보면 꽤 중요한 일 같은데, 그 전에 비델에게 짝을 찾아준다니 그럴 여유가 있을까요?
“네? 하지만…. 그러기엔 일정이 너무 바빠질 것 같은데….”
“그 계획이라니, 설마 케이넨 씨가 아까 말했던 그걸 말하는 거예요?”
“어, 어? 비델 씨도 알아요…? 아직 반지도 못 건네줬는데 이렇게 비밀을 아무한테나 말하면 안 되죠! 케이넨 언니!”
“미, 미안! 그런데 비델이 널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 선 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어!”
케이넨이 한 일은 질에게 쓸데없는 참견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다며 넘어가는 걸 보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요.
오히려 비델을 떼어내 주어서 고마워하는 눈치였어요.
비델에게는 미안하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들러붙는 것만큼 싫은 일도 없을 테니까요.
“비델 씨의 생각이 중요해요. 아직 반지는 안 건네줬으니까 시간이야 만들면 되거든요.”
“뭐? 아직도 안 건네줬어? 원래라면 어제나 오늘 건네줬어야 했잖아?”
“그렇긴 한데요. 조금…. 건네주려니까 망설여져서…. 헤헤….”
“어쩔 수 없지, 큰일이니까. 그럼…. 반지는 이 일이 끝나면 도와줄 테니까. 제일 먼저 중요한 짝 찾기의 대상부터 찾아볼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마을 분들을 도와드리려고 온 거잖아요.”
“아픈 사람의 옆에서 의지할 사람이 되어주는 것도 어떻게 보면 구호 활동이야! 비델도 자리가 나면 언젠가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게 될 거잖아?”
“그, 그런가아?”
얼마나 확신이 없으면 고개까지 기울이며 고민에 빠지는 걸까요.
케이넨이 말한 건 구호 활동과는 약간 거리가 멀지만요.
미래에 이 마을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 머물게 될 비델을 돕는다는 것 자체는 일종의 구호 활동에 맞는 일이긴 하니까요.
단지, 그 돕는 일이라는 것이 비델의 옆구리를 따뜻하게 해줄 사랑의 상대를 찾아주는 일이라서 그럴 뿐이에요.
“그러니까 시작하기 전에 물어보겠는데, 비델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야?”
“흐름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찾아준다니까 말하자면…. 자기 한 몸 돌볼 정도로 1인분은 했으면 좋겠네요.”
“환자는 안된다는 거지?”
“환자, 환자라도 상관없어요. 저도 아직은 아픈 몸인걸요. 그냥, 제가 옆을 지켜주지 못해도 당분간은 저까지 챙겨줄 수 있는 듬직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지르니트처럼.”
예시가 좋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구체적이에요.
제일 먼저 언급한 조건을 따진다면 이 마을에서 일꾼으로 지내는 사람이 좋겠네요.
환자여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비델이 말한 조건을 살펴보려면 건강한 사람이 좋을 테니까요.
이에 케이넨의 시선은 당장 눈앞에 지나가는 우락부락한 근육의 남자에게 제일 시선이 갔어요.
“어이! 데르미안! 잠깐만 와볼래?”
“응? 볼 일이라도 있습니까? 케이넨 누님.”
“데르미안, 네가 지금 몇 살이더라?”
“저, 올해로 19살입니다. 근데 나이는 왜 물어보십니까?”
꽤나 차분한 말투의 남자는 케이넨의 뒤로 있는 비델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어요.
“그럼 슬슬 결혼해도 될 나이 아니야? 성인식을 하고 3년이나 지난 데다가, 인간은 특히 살아가는 햇수가 짧으니까 말이야.”
“누님, 저 항상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비혼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운동할 시간도 줄어서 이 근육을 유지할 여유도 없을 거 아닙니까.”
“어, 어어…. 그래, 미안해. 일 봐.”
사랑보다도 근육을 선택하는 데르미안의 모습에 케이넨은 할 말을 잃고 보내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뒤에 있던 질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다가오기 시작했죠.
“지르니트잖아? 있다고 말을 하지, 이거 받아. 이번에는 마을에 좀 더 오래 머물다 가고.”
질은 데르미안이 건네주는 과일 하나를 건네받았어요.
확실히 지르니트의 인기는 좋은데, 첫 번째 상대는 확실하게 꽝이었네요.
생긴 것도 준수하고 체형도 듬직하며, 일꾼으로서는 백 점 만점의 백 점이었을 텐데요.
뭐, 데르미안이라는 남자가 비델의 취향이었는가를 따지자면, 처음부터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것 같았으니까요.
한 번에 와닿는 이렇다 할 느낌이 오지 않은 거겠죠.
비델은 스스로 말하기를, 쉽게 사랑에 빠진다고 했잖아요?
운명이 아니었을 뿐이에요.
“근데, 비델.”
“네?”
“이미 한 명 실패해버린 마당에 물어보긴 미안한데, 남자도 괜찮은 거야? 네가 지르니트를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여자만 수비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네요.
바로 옆의 질만 하더라도 아오이와 라피아랑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비델도 이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아요.
고민에 빠져 집중하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고 있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양성애자가 아닐까요? 남자도 여자도 둘 다 좋아하는…. 아, 근데 여자는 짝사랑을 해봤으니 괜찮다고 해도…. 아직 남자를 사랑해본 적은 없네요.”
“그럼 여자를 대상으로 찾아야겠는데, 여자 중에 비델을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모르겠네. 아, 아! 비델, 네가 부족하거나 못생겼다는 건 아닌 거 알지?”
“무슨 말인지 아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으, 음, 그럼…. 일단 임시 식당부터 가볼까? 거기 주방장은 남자인데, 그 아래 애들은 전부 여자거든.”
비델은 ‘임시’라는 말에 의아해했어요.
또 그런 궁금증은 쉽게 이겨내지 못하는 비델이었기에 식당에 도착하기 전까지 전부 물어봐야 했어요.
이에 대한 답은, 마을이 세워지고 구해진 사람들을 수용할 곳이 필요했기에 최우선적으로 마을 회관과 공간을 공유하는 병원을 지었다.
그 기간이 한없이 길어져 길드에 의뢰를 넣었음에도 빨리 해결되지 않아 아오이가 돌아왔을 때, 힘을 빌려 건설 도중인 병원과 회관만을 완전한 새 건물로 지어냈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여기가 임시 식당이야! 조금 허름해 보이긴 해도 제 역할은 확실히 해내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케이넨의 말을 따라 도착한 곳은 조금은 단단한 판자로 이루어진 창고 비슷한 무언가였어요.
다른 창고와 차이점이 있다면 지붕 쪽에 굴뚝이 하나 있어, 그곳으로 연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었죠.
도무지 식당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어요.
안쪽에 들어서면 그나마 청결해 보이는 인상이 들어 뭔가 입속으로 넣을 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 될 것 같았죠.
“너무 허름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우선도가 떨어져서 나중에 리모델링을 할 거라지만….”
“먹는 건 대충 하더라도 휴식과 치료는 확실히 해야 하니까. 이제 창고를 건들고, 식당을 건들면 나머지는 기숙사만 찍어내면 완벽한 마을이 되는 거지!”
“잠깐만요. 아오이라는 분이 돌아왔을 때는 도움을 받아서 회관이랑 병원이 금방 지어졌다면서요, 그럼 그분한테 나머지도 해달라고….”
“비델, 우리도 염치가 있지. 다 해달라고 하면 되겠어? 지르니트 언니한테 물자를 받기만 하는 것도 미안한걸. 그렇지, 언니?”
마을에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던 질에게 대답을 바라는 케이넨이에요.
케이넨의 말에는 틀린 말이 없다지만, 질은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며 오히려 케이넨을 다독이는 말을 했어요.
“네? 아뇨, 저는 괜찮아요! 비델 씨한테도 말했었지만, 저는 제 자기만족으로….”
“지르니트,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네 자기만족에 구해진 사람들은 한없이 고마워하고 있어.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다만, 케이넨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나 보네요.
질은 마지못해 알겠다는 말을 하고는 식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케이넨과 비델이 짝을 찾는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고 싶은가 봐요.
질이 앉는 것을 본 케이넨은 한번 시선을 건네주고는 요리실로 눈을 돌렸어요.
“자, 그럼 부엌으로 가볼까! 어이 주방장 씨!!”
안쪽에서는 누가 봐도 바쁘다고 생각될 수준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저녁 식사의 준비로 바쁜 것 같은데, 사람을 이렇게 막 불러내도 괜찮은 걸까요?
“…정말 바쁜가 보네, 어이! 케인! 케인 아크로퍼!”
“바쁜데 누구야?! 어, 으헉?! 케이넨 누나?!”
짜증을 내며 칸막이 천을 들추고 나온 남자는 케이넨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었어요.
케이넨을 누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서열상 아래에 있는 것이겠죠.
더구나 뿔이 달린 걸 보면 같은 드래고니안 같으니 친밀하게 부르는 것도 이해가 가고요.
“하하~ 너 이 자식, 나한테 큰소리쳤겠다~”
“누, 누나, 아니, 누님!! 그런 게 아니라!? 으악! 뿔 잡아당기지 마십쇼! 누님!! 잘못했어요!!”
“그래, 알았으면 됐어. 그것보다는…. 너, 외롭지 않냐?”
케인의 뿔을 잡아당기던 케이넨은 이번엔 귀를 잡아당겨 속삭이듯이 말했어요.
“예? 음…. 아, 저 소녀 말하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거 아닙니까? 가슴은 큰데…. 그렇지만 누님, 이렇게 어린 녀석이랑은….”
“음~ 아쉽네. 안쪽에 있는 여자애들은 어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것 좀 놔주세요! 언제까지 잡고 있을 겁니까?! 아픕니다!”
“아, 미안. 네가 워낙에 건방져야지~”
“오? 근데 저 구석에…. 지르니트 아니야? 왔으면 말이라도 하지! 얘들아! 지르니트 왔다! 맛있는 것 좀 해와!”
케인의 외침에 분주해 보였던 요리실은 지르니트의 이름이 몇 번 불리는가 싶더니 이전보다 더 바빠진 것 같았어요.
질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소리쳤지만, 전혀 통하지 않을 외침이었죠.
구석에 숨어있듯이 앉아있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나 보네요.
어딜 가든 질의 인기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계속해서 케인을 설득해보지만, 요리실 안쪽의 요리사들이 포기를 모르는 탓에 질은 적당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저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아 비델이 짝을 찾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죠.
자신의 앞에 음식이 하나, 둘 놓이는 걸 안 보이는 척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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