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뉴페리시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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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문으로 나온 비델은 이미 거품이 나는 빨래 더미 위에서 체중을 실어 밟고 있는 케이넨을 봤어요.
하지만 그 외의 것을 보자마자 비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와, 뭐, 뭐야…? 이렇게 많아요?”
“어어! 왔어?! 후욱…! 너도 와서 도와줘!”
“마법은 안 쓰는 거예요? 왜 굳이 그런 육체노동을….”
“여기에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 각인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얼마 없는데, 그런 고급 인력은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빠!”
“마도구는요? 마도구를 쓴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 마을은 오로지 지르니트 언니의 자본으로 굴러가고 있어! 흐읍! 그러니까 우리 편하자고 마도구를 사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일 아니겠어! 빨리 도와줘! 힘들어!”
각인을 새기는 일 자체가 괴롭고 힘든 일이라고 했으니까요.
이런 작고 사소한 일에 마법을 쓰는 것은 마나의 낭비겠죠.
마을의 자금이 지르니트의 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면 소비에는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테고요.
하지만, 지르니트의 자본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겠네요.
작은 마을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라니 말이죠.
“그렇네요….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편해지자고 돈까지 쓰게 하면…. 이거 빨면 되는 거예요?”
비델은 곧바로 납득하고,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 더미 앞에 앉았어요.
“물에 충분히 적신 뒤에, 거기 옆에 세제 보이지?! 그거어! 뿌리고! 때가 빠질 때까지 밟아!”
엄청난 육체노동의 시작이네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비델 혼자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겠죠.
옆에서 케이넨이 지치지 말라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줄 테니까요.
“비델! 그, 누구야! 그, 그으~ 제리하고는 잘 놀다 왔어?! 무슨 이야기 하다 온 거야!”
그렇지만 케이넨은 미리 시작하고 있던 만큼, 제리의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힘들었나 보네요.
“그냥,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너무 칙칙해져서, 사랑 이야기를 좀 했어요!”
“사랑 이야기?! 나도 들려줘!”
“그냥, 지르니트한테 제가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에요! 재밌는 거 아니니까! 다른 이야기 해요!”
“조금 더 팍팍 밟아! 그래가지고 때가 빠지겠어?!”
“밟고, 있다고요!”
비델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어요.
빨랫감이 그저 평범한 옷가지들이었다면 이렇게 세게는 하지 않아도 됐겠지만, 하필이면 이불이었거든요.
거품을 내며 밟는데, 꿀렁거리며 다른 부분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면 묘하게 짜증이 났을 거예요.
이러는 와중에도 케이넨은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했던 것 같아요.
“이야기도 멈추지 마! 궁금하니까!”
“아으! 노예상에게 붙잡히면 다들 그렇잖아요!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발악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나! 포기하자아! 그래서 다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르니트가 나타났다고요! 그 상황에서,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고마움 뿐일까, 새로운 빛처럼 느껴졌어요! 내 앞길을 비춰줄 그런 빛으로!”
“첫눈에 반한 것 치고는 정도가 과한데?!”
“당연하죠! 저는 저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면 조금의 도움만으로도 금방 좋아하게 되니까! 그리고…! 그리고…. 같은 여자라지만 그렇게 이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넘어가요…. 메리를 좋아할 때도 혼란스러웠는데….”
요컨대 비델은 질의 외모에 낚였다는 말이네요.
원래부터 여자를 좋아했던 것에 흔들다리 효과가 더해져,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 여기에 질의 외모까지.
반하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어요.
비델은 빨래를 밟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땅만 바라봤어요.
“저도 이렇게 금방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싫은데요.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이런 사람인데.”
“여기의 모두가 지르니트를 좋아해.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래서 선은 넘지 않아. 아무리 고맙고, 좋아해도 사랑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일부러 자제하지. 구해진 남자는 당연하고, 같은 여자끼리라도 말이야.”
“저는 그게 안 돼요. 저는, 갖고 싶은 건 가져야 해요.”
“너 여기 올 때, 마을 바깥쪽에 결계랑 그 결계 속에 파티장처럼 꾸며진 곳을 본 적 있어?”
비델은 고개를 저었어요.
이곳에 올 때는 항상 질의 문을 건너는 능력을 썼으니까요.
하지만 아픈 사람들이 많은 마을 옆에 파티장처럼 꾸며진 곳이라니, 무슨 용도로 만든 곳일까요?
“질이 나를 포함해서 몇 명에게만 살짝 말해준 건데, 너한테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귀 좀 빌려줘.”
“무슨 이야기길래,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불평을 말하면서도 비델은 쉽게 귀를 내줬어요.
그리곤 작은 소리로 속삭여오는 케이넨의 말을 들으면서 점점 눈을 크게 떴어요.
뭔가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게 아닐까요.
다 듣고 난 뒤의 비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케이넨을 바라보는 걸 보면 분명 그럴 거예요.
“진짜, 진심인 거예요?! 그 정도로 지르니트는 그 언니들이랑…!”
“그러니까, 네가 그곳에 낄 자리는 없어. 적당히 포기해.”
“그렇지만, 그런 건 이해할 수 없어요! 인정 못 해요!”
“웃겨~ 네가 지르니트랑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다고? 네가 인정 안 하면 어쩔 건데? 지르니트를 어떻게 막을 건데?”
“저를 막아요?”
“아, 지르니트 언니! 어서 와!”
대화가 격해지려던 와중에 질이 뒷문을 열고 나타났어요.
질의 실력이 좋다고는 해도 사냥은 별개의 기술을 필요로 할 텐데, 벌써 사냥이 끝난 걸까요?
“벌써 끝난 거야? 아까 따로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얼마 안 지난 거 같은데?”
“그러게요, 저도 따라갔었는데 막상 사냥은 이곳에 계신 분들이 다 하시더라구요. 저한테는 몬스터를 만나도 위험하지 않게 호위만 해달랬나? 제가 필요 없는 것 같아서 구경만 하다가 왔어요.”
“하긴 마을이 생기고 몇 달이 지났는데 그 몇 달 동안 계속 사냥한 사람들이 너보다 더 잘하겠지.”
“그, 그건 조금 열 받는 말이네요. 근데 결국, 저를 막는다는 건 무슨 말인지 안 알려줄 거예요?”
역시 쉽게 넘어가려고 하지는 않네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는데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요.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이 빨래를 말리는 게 큰일이라고 말한 거였는데?”
“그렇구나…. 그럼 전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말도 안 되는 핑계 같지만, 옆에 쌓여있는 빨래 더미의 양을 보고 입을 다무는 질이었어요.
“이거 도와주지 않을래? 너, 마법 쓸 줄 알잖아.”
“마법으로 빨래를…? 아, 아니에요. 할 수 있겠다. 아오이 언니가 하는 것처럼, 이렇게였나?”
질은 처음 아오이와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마나를 사용해 공중에서 물을 만들어 냈어요.
그저 아오이를 따라 할 뿐이지만, 원소를 다루는 마법을 잘 다루게 됐네요.
물과 관련된 마법은 써 본 적이 없잖아요.
기껏해야 화염, 번개 두 종류의 마법만 사용해왔을 테니까요.
평소에 책을 많이 읽던 효과가 여기서 나타나네요.
“물을 만들어서 뭐 하려고?”
“그 빨래들을 전부 물속에 던져 넣어주실래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린 따라야지.”
케이넨과 비델은 이불부터 시작해서, 담요, 수건, 손에 잡히는 모든 빨래를 공중의 커다란 물방울에 던져넣었어요.
빨래가 하나둘 물속에 갇히는 걸 본 질은 그대로 검지를 펴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죠.
그러자 물속에 담긴 빨래가 질의 손가락에 맞춰 회전하기 시작한 거예요.
아오이의 주특기인 버블 캐논이었나요?
그걸 재현해낸 거네요.
다만, 숙련도 면에서는 차이가 났는지, 회전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몇몇 빨래가 튕겨 나갈뻔하거나.
빨래에 스며든 세제가 무서운 기세로 땅에 떨어지기도 했어요.
여기에 더해서 물이 사방으로 튀는 탓에 셋 모두 옷이 흠뻑 젖어버렸죠.
“빨래 상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힘 조절이 어렵긴 해도, 찢어질 정도로는 하지 않고 있으니까!”
“우린 언제까지 물을 맞아야 하는 건데?!”
“금방 끝나요!”
비델의 외침에도 굴하지 않고, 적당히 세제를 빼냈다고 생각한 질은 물방울 안에서 빨래 더미를 꺼내, 물 없이 고속으로 회전시켰어요.
편하기는 하더라도 가감을 모르는 탓에 뒷마당이 홍수라도 난 것처럼 변해가고 있었지만, 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죠.
다행히도 풀밭이었기에 망정이지, 돌바닥이었다면 정리하는데 꽤 큰일이었을 거예요.
“저기다 걸면 되는 거죠?”
“어, 어어!”
질 덕분에 빨래가 순식간에 끝나기는 했어요.
높은 곳에 걸린 빨랫줄에 거는 것도 마법으로 해결했으니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걸요.
단지,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신에 흠뻑 젖어버렸다는 것이 대가였을 뿐이에요.
“다음에는 숨어있어야겠다. 언니가 마법을 써주는 건 고마운데…. 바로 앞에서 구경할 일은 아니네….”
“씻으면 되죠! 옷도 말리고! 다음부터는 조금 더 연습하고 와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 아니야. 그래도 비델은 완전히 넋이 나간 것 같은데? 빨리 욕실로 데려가야겠어.”
“그렇네요. 세제 냄새도 나고…. 이번은 제 실수였어요. 좀 더…. 물이 튀지 않게 더 조심해야 했는데.”
“그런 말 하지 마! 이걸로 이번 주 빨래는 다 했는걸! 네 덕분이야!”
침울해지려는 질을 위로하겠다고 다가와서 등을 토닥여주는 케이넨이었어요.
하지만, 저 수많은 빨래 더미가 이번 주 분량이었다는 것이 더 놀랍네요.
빨랫줄의 길이도 길이지만, 뒷마당 전체를 채우는 빨래를 보고 있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마을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지 알 정도예요.
그러니 케이넨이 물에 좀 젖었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고,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당연했어요.
질이 노력해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 세 명은 커다란 욕실을 전세를 내서 쓰는 게 가능했어요.
당연히 질의 집에 있는 욕실보다 화려함은 덜하고, 필요한 것만 갖춰져 있지만,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넓이는 엄청났어요.
크기로만 따진다면 똑같은 수준이었죠.
“그래도 생각보다 마을을 잘 써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 도중에 케이넨을 향해 말하는 질이에요.
그동안 제대로 도와준 적 없이 물자만 가져다주었으니 마을이 잘 돌아가는지 세세하게 확인해 본 적은 없었겠죠.
“잘 쓰기만 할까, 이 마을이 없었으면 우린 다 노숙자에 거지 신세였어. 모험가 길드에서는 인생이 망가진 녀석들을 신경 써 주지 않으니까.”
“길드에서 조금 더 신경 써 주면 좋을 텐데….”
“모두를 신경 써 준다는 건 조금 비현실적인 이야기이긴 해. 길드가 전 세계의 모험가를 다 돌봐줄 수는 없잖아. 돈 있고, 재기 가능성이 있는 녀석들만 돌봐줄 수밖에 없는 거야.”
“이해는 하지만….”
“너무 고민하지 마! 언니가 우릴 구해주고, 돌봐주잖아? 그렇지, 비델?”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을 불려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네? 네, 그렇, 죠.’라며 대답하는 비델이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느라 이렇게 조용한지, 욕탕에 들어가기까지도 비델은 아무 말이 없었죠.
그 깊은 생각에서 비델을 끄집어낸 것은 케이넨이었어요.
바로 옆에 앉아, 물에 잠기는 동시에 비델의 가슴을 쥐었거든요.
“뭐, 뭐 하는 거예요?!”
“응? 아, 미안. 만져보고 싶게 생겨서. 하핫! 엘프가 아닌데도 이렇게 큰 건 처음 보거든.”
“하아…. 놔 주세요.”
케이넨의 말대로, 비델의 가슴은 엄청났어요.
비델의 가슴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는 케이넨의 손을 빤히 쳐다볼 정도로요.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아 흘러내리려는 것도 그렇지만, 가만히 두기만 해도 물 위에 둥둥 떴거든요.
자연스레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는, 그런 가슴이었어요.
옷을 입고 있을 때야 가려져서 몰랐지만 벗으니 굉장해진 거예요.
“…넌 또 뭘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부럽기는, 가슴이 무거우면 어깨가 얼마나 결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건, 그렇지만요.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예요.”
계속해서 쏠리는 관심을 버티지 못한 비델은 케이넨의 손을 쳐내며 가슴을 지켜냈어요.
그리곤 곧바로 손을 한데 모아 물을 담고선, 질에게 향해 물총을 쐈죠.
자신의 가슴에 관심 좀 끄라면서요.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이 마을은 언제 만든 거야?”
“얼마 안 됐을걸요? 분명…. 로니아와 몸을 공유한 뒤였으니까, 아마 다섯 달은 넘었을 거예요.”
다섯달이 넘었다는 말에 비델은 그게 얼마 안 된 거냐며 투덜거렸어요.
“응? 근데 로니아는 또 누구야? 몸을 공유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
“어, 어쨌든 거의 반년이네요! 그리고 벌써 대재앙이 일어나고 나서 1년이 다 돼가요! 시간 정말 빠르다!”
누군가에게 말해준다고 해도 쉽게 믿어줄 내용이 아니기에, 질은 곧바로 대화 주제를 돌리기로 했어요.
누구라도 쉽게 흥미를 느낄 만한 주제, 대재앙에 대해서.
벌써 1년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는데 그 누가 무시할 수 있겠어요?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케이넨이었어요.
비델은 대재앙에서 가족을 잃었기 때문인지 어깨를 흠칫거리며 시선을 떨구는 게 전부였죠.
“1년 가까이 지났다는 건 믿기지 않네, 아직도 마기노가 넘쳐나는 걸 보면 어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는데. 주변에서 안 좋은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오니까.”
“클래드나 리니스, 실라 같은 대도시라면 괜찮겠지만 작은 도시나 마을은 버텨내기 힘드니까요.”
케이넨은 덧붙여 ‘대도시는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다른 곳은 여전히 지옥이야.’라고 말했어요.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에도 질은 턱 바로 위까지 물에 잠기며 생각에 빠졌어요.
이전에 황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죠.
찾아오는 위협만 받아칠 것이며, 더 이상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 소중한 사람을 잃기 싫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질이 누구인가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모른 척할 수 없고, 자신과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사람들을 도와주고 다니겠다고 다짐했었잖아요.
그렇게 강하게 다짐하기는 했지만, 쉽게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는 거예요.
자신이 당했던 그 과거를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기 케이넨 씨, 비델 씨.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물어봐.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했어도, 몇백 살은 넘었으니까 모르는 건 없다고?”
몇백 살 넘게 살아온 드래고니안이 지금껏 질을 향해서 언니라고 하고 있었던 건가요?
외모에 대해서는 거짓말이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질이 거부할 만했네요.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친구가 하나 있어요. 정의감과 복수심에 불타는 친구가.”
“그 친구가 널 말하는 건 아니지?”
“비델 씨, 조용히 들어주세요.”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침착하게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는 질이에요.
그 친구가 어떤 일을 겪었고, 누구의 아래에서 자랐고,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가족과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미래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같은 중요해 보이는 이야기까지 전부 들려주었죠.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만 추려내 보면, 언니의 그 ‘친구’라는 사람이 가진 고민…. 그러니까 누군가를 잃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과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을 망설이는 것에 관한 게 문제네. 그렇지?”
“마, 맞아요. 그 친구가 정말 마음속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거든요.”
“언니는 가족을 믿지 못하는 거야? 소중한 사람을 믿기 힘들어? 조금만 더 그 사람들에게 신뢰를 가져보는 건 어때? 이야기만 들어본다면 나는 언니 생각만큼 그 사람들이 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마군주와 그에 버금가는 실력의 하프 뱀파이어라니.”
케이넨은 질이 이야기 도중 친구라 말한 사람이 아닌, 질에게 직접 말했어요.
이에 신뢰가 부족한 것은 전혀 아니라고, 적이 강할 뿐이라고 대답한 질이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질은 이미 충분히 강하기에 혼자서도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부수고 다니지만, 이들과 질의 앞에 나타나는 적들….
마군주가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일 뿐이죠.
“그럼 더 많은 사람의 힘을 빌리면 되는 일이잖아. 언니는 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면서? 마기노에게 안 좋은 기억을 새겨지는 일이 없게 하고 싶다면서? 그럼, 겁먹지 마. 자신의 신념을 믿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뎌. 이미 지르니트 언니는 답을 얻었잖아.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과를 얻었잖아.”
“…이미 얻었다구요?”
“이 마을에 있는 모두가 지르니트 언니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지르니트 언니는 이 마을에서 영웅 취급받고 있잖아? 항상 물자를 가져다 주면서 못 느꼈어? 이번에 사냥을 도와줄 땐 어땠는데?”
“제가 일을 도우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하고…. 저랑 말하고, 어울리고 싶은 눈치였어요. 만날 때마다 뭔가 주고 먹여주려고 하고.”
“그래. 모두가 지르니트 언니처럼 되거나, 언니를 돕고 싶다고 생각해. 언니는 이미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야.”
질은 케이넨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기만 했어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뻥긋거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죠.
뜬금없지만 물로 세수를 몇 번 하다가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어요.
“언니가 누구와 어떻게 지내든 그건 상관없어. 이 마을에 물자만 가져다주고 직접 마을의 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리를 구해줬잖아. 나뿐만이 아니야. 옆에 있는 비델도 같아. 그렇지?”
“…한마디 해야 된다면 해야지. 내가 사랑에 잘 빠지는 타입이기는 해도, 이 사랑이 식는다고 해도, 나를 구해준 건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네가 다른 사람이랑 사랑한다고 해도 그럴 거고.”
케이넨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한 말솜씨에요.
조금이라도 웃기기 위한 말이라면 모를까 위로에는 어울리지 않네요.
살아온 햇수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일까요?
“그러니까 누구를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빠지지 마. 겁먹을 필요 없어. 잃게 하지 않아, 이 마을에서 다시 싸울 수 있게 회복한 사람이 있으면, 네가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전력으로 널 도울 거야. 만약 이런 노력에도 누군가를 잃는다면, 그때는 우리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네가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때까지 네 옆에서 자리를 지켜줄게.”
상당히 포근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로 전해져오는 말 때문인지, 질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어요.
평소에 하이텐션으로 언니라고 불러오며 친근하게 굴던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요.
지금은 그저 케이넨의 위로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느낌에 온몸을 맡기는 질이에요.
“…엄마 같아.”
“아무리 언니라도 내가 엄마 같다니?! 부끄럽지만 몇백 살이 넘었으니까, 그런 소릴 들어도 할 말은 없는데…! 어쨌든! 이 마을의 모두가 언니의 편이야.”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또, 또 엄마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 난 지르니트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데?!”
분위기를 잘 잡아가던 케이넨은 질의 엄마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지금껏 위로해온 게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그런 느낌의 공격이었죠.
질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엄마, 안아주세요.”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서 아, 안아달라니…. 오늘만이니까?! 엄마는 언, 지르니트 같은 이쁜 딸을 둔 적이 없으니까!?”
당황한 탓인지 쉽게 안아주겠다고 하는 케이넨이에요.
마치 데자뷰네요.
아오이와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요?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아오이 때는 몸을 가리는 것 하나 없이 완전히 알몸이었다는 것이지만요.
지금은 그나마 수건이라도 몸에 두르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걸로 조금이나마 질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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