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뉴페리시니 (4)
* * *
다음날, 질은 비델과 함께 자신이 구해준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왔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저녁 내내 이어진 비델과의 대화에서 메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싶다고 한 것 때문에 질이 일부러 데려와 준 것이었죠.
잡생각을 떨쳐버리기에는 움직이는 것이 제일 좋다고 판단한 거예요.
집안일이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고, 의뢰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질과 비델은 문을 건너자마자 어제 만났던 드래고니안, 케이넨 듀네스를 만났어요.
“돕고 싶다고? 안될 건 없지만…. 의뢰는 어떻게 하고?”
“마을에 자리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당분간 의뢰는 쉬면서 비델 씨랑 마을 일을 도울까 해서요. 항상 물자만 가져다주고 바로 돌아간 게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어쩜 지르니트 언니는 이렇게 마음씨가 좋을까! 도와준다는 사람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어서 와, 뉴페리시니에!”
질은 언니라고 부르지 말라면서도 웃어 보였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있는데 기분이 좋겠죠.
아직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르고 있어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치료의 품질은 겉으로 보기에도 좋아 보였어요.
이미 질이 걱정할 상태는 지난 거였죠.
“인사하는 도중에 미안한데, 나는 정확히 어떤 걸 도와주면 되는 거야? 겉보기에는 이 마을…. 몇몇 낡아 보이는 곳 빼고는 상당히 멀쩡해 보이거든.”
“노예상에 잡혀있던 것 치고는 모습이 괜찮아 보여서? 일주일에 두 번, 의사가 왔다 가거든.”
“그럼 우리가 도울 일이 없는 거 아니야?”
“간호할 사람은 있어야지. 붕대도 갈아주고, 땀도 닦아주고, 씻겨주기도 하고, 요리도 하고, 밥도 먹여주고, 재료도 직접 구해야 해서 사냥에 농사까지…. 마을이라곤 하지만 거대한 요양원이라고 보는 게 맞아.”
케이넨은 뒤편의 큰 건물을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어요.
건물의 옆에는 넓게 울타리가 쳐져 있어, 그 안에서 비델은 알 수 없는 채소와 야채가 자라고 있었어요.
커다란 건물 하나를 제외한다면 창고 비슷한 건물과 용도불명의 허름한 건물 하나가 전부였기에 마을이라 부르기에는 부적합하게 보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마을에 적게는 10명부터 많게는 30명까지의 사람들이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일이 부족하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죠.
“뭘 도와야 하는데?”
“으음, 지르니트 언니는 실력이 좋으니까 오늘 분의 사냥을 해줬으면 하고, 비델 씨는…. 뭘 할 줄 아는데?”
케이넨의 말이 끝나자마자 질은 금방 다녀오겠다며, 비델을 남겨두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버렸어요.
그런데 남겨진 비델은 케이넨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요.
무작정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해야 되는 일들부터 알려줘, 그러니까 어…. 케이넨 씨.”
“케이넨 언니라고 해, 듣기 좋잖아? 따라와!”
비델은 케이넨의 손에 잡혀 커다란 건물 안쪽으로 이끌렸어요.
건물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접수대에 앉아있는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땋아 내린 소녀였어요.
아무래도 입장한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이 소녀도 몸이 좋아 보이지는 않아 보이네요.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없어 불편해 보여요.
“케이넨 언니? 그 사람은….”
“비델 앤 엘리츠라고 오늘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야. 노예상에 잡혀있다가 지르니트에게 구해졌다나 봐.”
“…반가워요.”
몸이 불편해 보이는 소녀는 왼팔을 뻗어 악수를 청했어요.
비델은 그 불편해 보이는 신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악수를 받아주었어요.
“저야말로 반가워요. 방금 케이넨 언니가 소개해주셨지만, 저는 비델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저는 제리에요. 제리 펠 아크티스. 저도 지르니트에게 도움을 받았었어요. 고블린들에게 잡혔었는데…. 몸이 이렇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서,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 들어주더라고요.”
제리가 이 자리에 와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아예 재기불능이 되어버린 것보다는 다행인 일이지만요.
어느 새에 이런 마을을 세우고, 제리를 도와준 건지, 정말 대단하네요.
행동력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해요.
그리고 제리도 상당히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의 그 제멋대로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환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누군지 모를 따뜻한 표정의 접수원이 다 됐네요.
“이런 일이라도 돕게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렇, 구나…. 제가 여기서 뭘 도우면 될까요?”
“건물 뒤편에 빨래가 엄청 쌓여있거든요. 그것부터 도와주시면 될 것 같아요.”
“들었지? 가자. 이름만 적고 뒷문으로 와. 뭐어…. 원한다면 제리랑 더 떠들다가 와도 돼.”
케이넨은 비델을 두고 곧바로 뒷문으로 향했어요.
제리랑 더 떠들다 와도 된다는 것은 권유가 아니라, 부탁처럼 들려왔죠.
그 정도 눈치는 가지고 있었기에 비델은 자신을 두고 가는 케이넨을 붙잡지는 않았어요.
“…바쁘다면서 무슨, 후우…. 옆에 앉아도 돼?”
“물론이죠. 사양하지 마세요.”
제리는 한 손으로도 벽에 세워진 간이 의자를 능숙하게 펴주며 비델에게 손짓했어요.
일을 도우러 왔음에도 느긋하게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지만, 비델은 말없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케이넨 언니는 무슨 생각인 거야?”
“저 때문일 거예요. 사람들이 자주 왔다 가기는 하지만 이곳은 지나다니는 길목이잖아요? 이름만 적으면…. 금방 할 일을 해야 해서 바쁘니까.”
“그래서 네가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부끄럽지만, 맞아요. 비델 씨는 어디서 오셨나요?”
“나? 나는 저기 북부 마필레 호수 서부에 있는 마을의 귀족이었어. 대재앙 때 부모님을 잃었지.”
“미안해요. 괜한 걸 물었나 보네요.”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쉽게 사과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떤 일이 있었길래 제리가 이렇게 변한 걸까요.
비델은 이런 안쓰러운 제리를 보고 괜찮다며 등을 한두 번 토닥여주었어요.
“너도 힘든 일을 겪은 게 다 보여, 괜찮아. 부모님을 잃고 난 뒤에는 모험가 일을 하다가 배신을 당해서 이 꼴이 됐지.”
“저는 용사의 피를 이은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그 증거를 나타내는 문장을 나타낼 손이 잘려나가서 증명할 수도 없고, 가문에서 쫓겨났지만요.”
은근히 밝아 보이는 얼굴로 팔꿈치 아래로 없는 오른팔을 들어 보이는 제리예요.
겉모습만큼 속이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속이 썩어들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억지로 밝은 척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용사의 핏줄이래도 이제는 거의 전설 취급당하는 옛날이야기 아니야? 용사는 이미 역할을 다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갔잖아.”
“맞아요. 예전에 저는, 그게 뭐라고…. 오만해져선 제 실력을 과신했어요. 남들과는 다르게 특별하다는 증거였으니까. 조금 더 뛰어나다는 것만으로.”
“나 불만인 게 있는데, 심심해서 대화 상대를 해달라고 했던 거 아니야? 이런 칙칙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런 암울한 대화를 계속하면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침울해질 테니까요.
제리에 비해서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비델은 밝은 이야기만 하고 싶을 거예요.
“아~ 으음~ 미안해요. 질이랑 있던 일이라도 들려드릴까요? 예전의 저는 완전히 남자 같았거든요.”
“네가?”
“말투도 지금보다 훨씬 신경질적이고, 투박했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사람들을 대해야 하다 보니까 변한 거예요.”
“못 믿겠는데? 너 머릿결만 봐도 천생 여자야.”
“비델 씨도 참…. 그럼 뭐해요, 팔다리가 한쪽씩 없는걸요. 아, 말투 한번 되돌려볼까요?”
“궁금한데, 한번 보여줘.”
“하? 용사 후보생인 내가 널 위해 광대 짓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뭔데?! 나는 미래에 용사가 될 귀한 몸이라고!”
제리는 왼손으로 책상을 쿵, 치며 몸을 지지한 채로 일어서며 소리쳤어요.
그래요, 이런 모습이 제리였죠.
남을 쉽게 깔보려 했고, 항상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했으며, 굽히기 싫어하는 분위기의.
비델은 이런 제리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어요.
기껏 입을 열어 한다는 말이….
“우, 우와…. 재수 없어….”
이런 말이었죠.
제리가 너무하다며, 해달라고 해서 해준 거 아니냐며 따지면 그때가 돼서야 미안하다고 말할 뿐이에요.
“미안, 표정도 그렇지만 억양부터가 정말, 재수 없어서…. 지르니트랑 싸운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어? 말투 보면 조금만 말을 나눠도 바로 싸웠을 것 같은데.”
“싸웠었죠. 그렇지만 지르니트가 아니라…. 다른, 라피아 씨였나? 그분하고 싸웠었어요. 그때의 지르니트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순하고, 망설임이 많은 어린아이였으니까요. 몇 달 만에 저렇게 큰 게 신기할 정도로.”
“예전의 지르니트라니, 궁금해지네.”
“지르니트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네요.”
“그야, 나를 구해줬으니까. 너는 그런 생각 안 들어? 지르니트가 아니었으면 언제까지고 제자리에 있기는커녕, 더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거라고.”
제리는 비델의 말에 공감했어요.
고블린에게 잡혀있다가 구출된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제리는 지르니트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요.
자신이 마을에서 무언가의 일이라도 도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집에서마저 쫓겨난 자신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상관없이, 질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겠죠.
이는 비델의 마음과 비슷했어요.
비델 역시 지르니트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노예상에게 붙잡힌 채로 여러 가지 싫은 일을 당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비델에게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뭔가가 더 있어 보이네요.
“나는,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조금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갖고 싶다고요?”
“지르니트라는 아이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소유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첫눈에 반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 여자끼리 사랑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어? 너 몰라? 지르니트 걔 이미 같이 사는 언니들이랑 끈적한 관계인데.”
“네? 저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애초에 개인사를 깊게 파고드는 건 오래전에 버린 버릇이라서….”
하기야 제리는 지르니트의 속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요.
알 기회도 없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죠.
당장에 비델만 하더라도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쉽게 믿지 못했었으니까요.
다만, 비델은 자신보다 더 지르니트와 오래 알고 지낸 것이라고 생각되는 제리가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놀란 것 같아요.
“야, 나는 뭐 일부러 알아내려고 해서 알게 된 줄 알아? 어젯밤에 지르니트가 말해준 거야!”
“의, 의외네요…. 하지만 그러면, 3명이 함께 사랑하는…. 대담해라….”
눈 둘 곳을 모르고,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지르니트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걸 보면 완전히 소녀가 다 됐네요.
“그래서 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더라.”
“설마 벌써 고백한 거예요? 그리고 차인 거고요? 세상에….”
“대차게 까였지. 뭐가 부족했을까, 이런 하찮은 꼴을 하고 있어서였을까?”
“지르니트잖아요. 지르니트가 좋아하는 그 두 사람은 분명 저희보다 빛나는 사람들일 거예요.”
그리고 지르니트에 대한 인식도 꽤 후하게 바뀌었네요.
일을 소개해준 덕도 있겠지만, 제리 본인이 바뀐 탓이겠죠.
“빛나다니, 퍽이나…. 아, 빛을 내긴 했지. 분홍빛을.”
“분홍빛…? 어쨌든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분명, 저희가 봐도 빛나는 사람들일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누구를 좋아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뭔가, 아까랑은 다르게 희망에 찬 것 같은 말만 하네, 너.”
“그으런가요? 아, 잠시만요.”
제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더니 곧바로 자세를 고쳐앉았어요.
뒤에도 몇 명의 사람이 더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제리의 일이 시작된 모양이네요.
남자가 들고 있는 짐의 내용이 무엇인지, 양은 얼마나 되는지부터 세세하게 종이에 적어나가는 걸 보고 비델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어요.
작게 손을 흔들어 잠시 뒤에 다시 보자는 손짓을 하고는 뒷문으로 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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