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뉴페리시니 (3)
* * *
“내가 할 말은 정말 많거든? 그런데, 네가 날 구해줬으니까 참을게.”
“아하하….”
비델의 화난듯한 표정에 질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어요.
지금까지야 서로가 좋아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하게 여겨왔지만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한 관계로 보이기에 충분할 거에요.
사랑을 나누는 대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것에서부터, 그 대상끼리도 사랑을 나누고 있으니까요.
양다리는 물론, 의자매라 할지라도 일단은 근친상간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비델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죠.
“웃음이 나와? 적어도 이건 말해줄 수 있어. 이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야.”
“…그건 아니에요.”
“너 완전 속이 새까맣구나? 어쩌다가 내가 이런….”
“질? 옆에 그 아이는….”
비델은 질을 탓하려는 순간에 아오이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을 보고 말을 멈췄어요.
아오이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좋지 못했지만, 그 시선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는지 곧바로 얼굴을 돌려 허공만을 바라봤어요.
“비델 앤 엘리츠라고 하는, 제가 이번에 슬리브스터 거점에서 구해온 사람이에요. 갈 곳이 없다고 해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질 때까지만 여기서 지내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지만, 그래서 몇 개월 전에 따로 마을을 만들었잖아요?”
“조금 바쁘대요. 최근에 돌봐줄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요.”
“…음, 알았어요. 여자만 있는 집에 남자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가구는 없지만, 방은 준비해줄게요. 그런데 자리가 없다면 당분간은 질도 의뢰를 쉬어야겠네요.”
“네, 조용히 공부만 하려구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던 질은 자신에게 꽂히는 비델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어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비델은 빠르게 질의 귀에 입을 가까이해서 속삭였어요.
“왜냐니, 너, 방금까지는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으면서….”
비델의 참견에 기분이 안 좋게 변한 게 표정으로 뻔히 보이는 질이에요.
다행히도 아오이로부터 등을 돌린 채로 있기에 싸늘하게 식은 그 표정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요.
애초에 아오이나 라피아의 앞에서 지독하게 표정 관리를 해왔던 질이에요.
이런 표정을 쉽게 보여줄 리가 없죠.
“신경 쓰지 마세요. 비델 씨, 저랑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요. 과한 참견이에요.”
놀라울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에 비델은 질의 기에 눌려 몇 걸음 뒤로 물러섰어요.
그럼에도 억울한 표정으로 질을 바라보며 작게 소리쳤어요.
아오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로요.
“윽…. 나, 나는…! 네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전부 말하지 않았는데도 귀신같이 알아듣는 질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따라올 리가 없잖아! 노예상에게 잡힌 뒤로 줄곧 혼자였어! 줄곧 괴로웠다고! 그런 나를 구해낸 게 너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비델 씨를 구해준 이유는 제 자기만족 때문이니까. 저는, 아오이 언니랑 라피아 언니 외에는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아오이 언니랑 라피아 언니가 저 몰래 사랑한다고 해도. 저는 그 둘을 사랑할 자신이 있어요. 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런 악에 받친 외침에도 비델에게 다가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속삭이듯 말하는 질이에요.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반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어요.
질도 비델과 비슷한 경우였잖아요.
그 당시의 질에게 아오이는 자신을 구해준 불의 마녀로, 새로운 가족으로, 또 새로운 연애 상대로 보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오이와 라피아에게 심하게 빠져든 질에게는 하나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어요.
모든 말을 끝마친 뒤에 질은 매몰차게 뒤로 돌아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아오이에게로 갔어요.
아오이는 비델에 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는 모습이에요.
“아, 언니! 반지….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3일 뒤에 어때요?”
“이제 주는 거예요? 오래 걸렸네요.”
“제작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따로 준비해둘 것도 있었구요.”
“따로 준비한 것? 반지 말고도 또 뭔가 있나요?”
“언니 마음에 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제대로 놀라기는 할 테니까요! 기대해주세요!”
“질이 기다려달라고 말한다면 기다려야죠. 따라오세요. 빈방으로 안내해줄 테니까.”
아오이를 따라간 둘은 정말로 먼지만 가득히 쌓인 방에 도착했어요.
단순히 깔고 누울 이불조차 없어, 정말로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방으로서의 기능만 하는 곳이었죠.
이제 막 더위가 풀려 선선해지고 있었으니 다행이죠.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제 방에서 이불 좀 가져올게요!”
“내일 바로 침구를 사 올 테니까 불편하더라도 하루만 참아주세요.”
“아니면 불편하더라도 조금은 푹신한 소파에서 자 볼래요?”
“먼지 쌓인 건 이렇게 하면 금방 사라지니까, 나중에 바닥만 걸레로 한번 닦아내면 쓸 만할 거예요.”
쏟아지는 질과 아오이의 배려에 비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마법으로 방에 돌풍을 일으켜, 먼지를 창문 밖으로 쏟아내 버리는 것까지 합쳐지니 더 그랬죠.
그 사이에 질이 푹신해 보이는 이불을 가져와 방 중앙에 깔아줬어요.
“불편해도 괜찮아요. 이불 위면 충분히 잘 수 있으니까…. 그것보다는 조금 혼자 있을 시간 좀 줄래요?”
“알겠어요. 그리고 맞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저 옷장 속에 편한 옷으로 몇 벌 준비해뒀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질이나 저한테 와서 말씀하시면 돼요. 집 안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지만, 밖에 있는 결계 밖으로는 나가지 마세요. 몬스터랑 만날 테니까.”
“네, 네. 한동안은 집안일을 도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집에 있다 보면 빨간 머리의 뱀파이어도 한 명 만날 거예요. 눈매가 날카로워서 무서워 보여도 착한 사람이니까 무서워하진 마시고요. 대충 전할 건 다 전해드린 거 같으니까, 편히 지내요.”
모든 설명을 듣고 난 뒤의 비델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아오이와 같이 사라지는 질의 뒷모습을 바라봤어요.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다가, 완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 문을 닫아버렸어요.
옷장에 시선이 한 번, 두 번 갔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이불 위로 몸을 던져버렸죠.
구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체력이 바닥났을 거예요.
여기저기 끌려다닌 데다가, 질에게 거부당하기도 했으니까요.
특별히 깊숙한 감옥에 갇혀있던 노예로 잡혀있던 만큼 비델의 외모는 출중했어요.
질과 아오이의 사이에 끼어서 빛을 내진 못하더라도 못생겼다고는 하지 못할 수준이었거든요.
“자기도 구해준 사람한테 반했다면서, 나는 왜….”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방에서 원망 가득한 말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볼 게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질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으니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지 희망을 품었던 것 같지만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질은 조금만큼의 다정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어요.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지만, 다가오려고 하기만 하면 차가운 태도로 거절하기에 바빴으니까요.
어쩌면 비델이 예전의 질처럼 절실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나도 미쳤지, 저런 애한테 첫눈에 반하다니…. 넌, 넌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쟤를 좋아할 생각이 들어? 진짜, 진짜 한심해…. 지르니트를 탓할 처지가 못 되잖아.”
비델이 생각을 정리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여요.
그런데 갑자기 문 건너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방금까지 자책의 시간에 빠져있던 비델은 호기심에 문을 열어봤는데, 질이 놀란 얼굴을 하며 양손을 가슴팍까지 올려 들고 있었어요.
“뭐 하는 거야…?”
“아, 팻말…. 이름 적힌 거 문에 걸어 드리려고 왔어요. 이거.”
질은 비델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팻말을 들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흰색 바탕에 분홍색으로 새겨진 비델의 이름, 그 주변을 장식하는 꽃의 그림.
적당한 눈치를 갖고 있던 비델은 건너편에 보이는 질의 방을 보고 비슷한 팻말이 걸려있는 걸 눈치챘어요.
“그래. 하던 거 마저 해, 방해 안 할게.”
비델은 다시 문을 닫고 이불이 깔린 곳에 다시 누우려고 했어요.
다시 열리는 문만 아니었다면요.
여전히 팻말을 들고 있는 질이 우두커니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는걸 본 비델은 이불 위에 눕기보다는 앉는 걸 택했어요.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된 비델을 본 질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죠.
꽤 조심스러운 대화 주제로.
“저기, 비델 씨. 왜 저를 좋아하는 거예요?”
“보기 좋게 거절했으면서 그런 건 왜 물어봐?”
“밖에서 너무 차갑게 대한 것 같아서 미안해져서…. 궁금하기도 하고…. 이야기만 듣는 거라면 해줄 수 있으니까요. 제가 비델 씨를 사랑해주는 건 무리겠지만….”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야? 가능성도 없는데 왜 좋아하는지 말해달라고?”
“아니에요! 그런 건…. 그냥, 그냥…. 미안해요.”
“…계속 서 있을 거야? 와서 앉아.”
비델은 자신의 옆 바닥을 토닥이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어요.
하기야 질이 이렇게 누군가를 매정하게 내친 적이 드물긴 하죠.
로니아가 아니라면 거의, 아예 없을 거예요.
덕분에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던 질은 순순히 그 손짓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팻말도 내려놓을 생각조차 못 하면서요.
하지만, 옆이 아니라 등을 맞대고 앉아 여전히 비델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였죠.
“길어질 이야기에요?”
“그냥, 내 옛날이야기나 해줄까 해서. 나도 나름 귀족이었으니까. …대재앙이 일어난 뒤로 벌써 몇 달이 지났지?”
“곧 여름이니까, 7개월에서 8개월정도 지났죠. 비델 씨도 대재앙 때 잃은 게 있었나요?”
대재앙이 겨울 끝 무렵, 숲이 깨어나는 시작한 시기에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네요.
“부모님, 같이 살아남은 건 쌍둥이 동생이었던 메리 앤 엘리츠랑 우릴 초보 모험가만큼 키워준 전직 모험가 출신의 집사까지 세 명이 전부였어.”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저보다 많았네요.”
“내가 너보다 불행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날 세우지 마. 네 이야기를 들어봐서 알아, 네가 더 고생했다는 거.”
질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며 당황한 목소리로 부정했지만, 비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어요.
“집사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동생인 메리라면 모를까. 나는 집사에게 잘 대하지 않았었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요?”
“메리를 빼앗아갔으니까. 밤마다 그 품 안에서 울어대던 메리를, 너무 보기 힘들었어.”
“집사가 아니라, 도둑이었네요.”
“큭큭, 맞아. 근데 설마하니 여자끼리 그럴 거라고 생각을 못 했으니까. 우연히 둘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는….”
“집사가 여자라구요?”
“집사가 다 남자란 법이 있어? 시골 마을에 살았다고 했으니까, 그 탓인가? 집사는 여자도 꽤 있어. 하녀로 들어오는 게 보통이지만, 집사라고 해도 보통은….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서 결정되니까.”
집주인의 취향이라는 말에 질은 바로 이해한듯한 얼굴을 했어요.
“바로 이해한 거야? 머리 좋네. 어쨌든…. 그래서 좋은 눈길로 바라볼 수가 없었어. 그런데 집사도 알았던 거야. 내가 집사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걸.”
“무슨 일이 있었나요?”
“큰일은 없었어. 그냥, 가끔…. 가끔이 아니지. 매일. 네가 가질 수 없는 걸 내가 가지고 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봐오길래…. 무시했던 일이 전부야.”
질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이야기를 들었어요.
비델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정도가 심해져 갔다는 이야기가.
메리가 보지 않는 장소에서는 대놓고 자신을 깔보는 말투로 대하며, 메리의 앞에서만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차리는 모습을 보였다.
메리가 없을 때면 훈련이라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험하게 굴리기도 했으며, 성적인 괴롭힘도 서슴지 않았다고 말이에요.
이런 괴롭힘 속에서 메리의 곁에서 떠나기 싫어서 악으로 버텼다는 것이 노예상에게 잡혀가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언제는 메리에게 집사를 두고 떠나자는 식으로 운을 띄웠던 적이 있어. 하지만, 집사랑 그런 관계에 있는데 메리가 순순히 따라줄 리가 없잖아. 그게 집사의 귀에 바로 들어간 거야. 일은 거기서 터졌어.”
“설마 노예상에 잡힌 이유가….”
“집사가 꾸민 일이지, 자신과 메리 사이에 개입해오는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설마 메리까지 휘말릴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야.”
“누군가가 방해되는 그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아무리 질이 로니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천성은 한없이 착한 어린아이예요.
비델을 향한 집사의 괴롭힘부터 시작해서, 누군가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버린 그 악독함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겠죠.
없던 동정심까지 생겨나 비델을 가엽게 여기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집사 녀석이 하던 일에 비하면 노예상에게 잡혔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고 생각해. 차라리, 메리를 볼 수 없게 된 지금이라면 가족이라는 것도 편하게 체념할 수도 있으니까.”
“거짓말, 가족을 빼앗기는 게 싫었던 거죠? 한 명 남은 유일한 핏줄이니까. 굳이 그 집사 씨가 아니더라도 비델 씨는 메리를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아직도 메리 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난, 나는! 메리가 그 집사랑 어울리는 게 싫었을 뿐이야! 집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도 그냥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거라고!”
“비델 씨, 솔직해져요. 누굴 속이려는 거예요? 제가 비델 씨랑 같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는데요. 저만 하더라도 아오이 언니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싫었는걸요. …지금도.”
“…하아, 그래 너 같은 애랑 말씨름해서 뭐해. 인정할게, 난 미련한 년이야.”
갑자기 이어지는 빠른 포기와 자책에 질은 당황해서 비델을 돌아봤어요.
더 우길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이렇게 빨리 포기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였을까요?
노예상에게 잡혀있을 때 죽은 눈빛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이유가.
그렇다면 다시 빠르게 눈빛을 되찾은 것도 설명이 되네요.
빠른 포기와 빠른 회복이 특징이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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