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뉴페리시니 (1)
* * *
며칠 뒤의 아침, 흑기사가 질과 함께 훈련장에서 어울려주고 있었어요.
반지의 준비만으로도 바쁠 텐데, 땀까지 흘려가며 서로의 실력을 시험하고 있었죠.
스태프를 들어 내리치면 갑주로 받아내어 흘리기도 하고, 갑주의 날카로운 부분을 세워 베려고 하는 것을 아슬하게 피해내기도 했어요.
질과 흑기사가 서로 부딪힐 때마다 쿵, 쾅 거리는 큰 소리가 났어요.
마치 공기가 진동하는 것처럼요.
위력도 얼마나 파괴적이었냐면, 하나하나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땅에 금이 갈 정도였어요.
전력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정도라면 전력을 냈을 때가 두려워지네요.
언제 이만큼 강해진 걸까요.
연습은 계속되어 훈련장의 평평했던 흙바닥이 울퉁불퉁해졌을 때였어요.
“세르디어! 잠깐 휴식!”
“음, 생각의 정리는 좀 됐나?”
“…휴우, 완벽하지는 않지만 덕분에 조금은 머릿속이 깔끔해졌어!”
질은 마법으로 훈련장의 바닥을 다시 평탄하게 만들며 밝은 목소리로 답했어요.
물로 적시고 잘게 다져 진흙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요.
흑기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갑주를 마나의 형태로 바꿔 사라지게 한 뒤에 편한 자세로 벤치에 가서 앉았어요.
“적어도 어떻게 건네줄지는 미리 생각해뒀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으응, 미리 생각은 해뒀었지. 생각은….”
땅을 고르게 피던 질은 스태프를 지팡이처럼 써 지면에 고정하고, 두 손을 스태프의 머리 부분에 올려, 그곳에 턱을 올려 고민했어요.
“근데 막상 행동으로 옮기는 게 어렵더라구.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것처럼 무서운 게 없었어.”
“무서워? 거절당할까 봐?”
“그것도 그렇지만, 말을 꺼내는 것부터가 잘 안된달까?”
“도와달라고 어리광부리는 건가?”
흑기사는 어느샌가 자신의 뒤로 와서 자신의 목에 팔을 감는 질을 발견했어요.
천천히 자신을 끌어안아 가만히 있는 질을 보고 가만히 눈을 감으려 했는데, 정면에는 여전히 질이 지팡이에 턱을 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죠.
“…루니?”
“오랜만이야,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내가 불렀다고 하고 세르디어가 나 대신에 언니들을 데리고 온다면….”
“그건 안되지, 지금껏 무서운 적들도 잘 헤쳐나왔으면서 고작 프러포즈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무서워서 못하겠다니?”
그것도 그렇네요.
고블린부터 노예상, 성기사에서 황궁 기사, 마기노와 마군주까지 상대해보지 않은 적이 없는걸요.
이런 무서운 적들을 상대해놓고 고작 고백하는 것이 두렵다는 거잖아요?
루니는 이런 지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을 풀어 흑기사에게서 멀어졌어요.
“피이, 뭐어 그래도 무서운 건 사실인걸. 이젠 마기노보다 언니들한테 고백하러 가는 게 더 무섭거든. 아니라고 할 생각은 없어.”
“이번 건은 질, 루니. 너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결해야하는 문제다.”
“로니아도 그렇게 비슷한 걸 말했었어. 둘의 옆에 있으려면 스스로의 의지로 죽여야 한다고. 왜 나한테 다들 내 힘만으로 헤쳐나가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게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이거든. 루니, 너도 책에서 봐서 알 텐데.”
흑기사의 말에 잔뜩 볼을 부풀리며 ‘뭐어? 나는 아직 어른이 되기 싫은데?’라며 장난스레 말하는 루니예요.
질의 표정도 같이 살핀 흑기사는 질이 루니와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 가졌지, 다른 생각 중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지르니트, 네가 어른이 되기까지 세상은 네 생각대로 천천히 기다려주지 않아. 앞으로 6년이면 넌 어른 취급 받을 테니까.”
“왜 그렇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하는걸까? 책임을 질 수 있냐, 없냐로만 따지자면 난 이미 어른인걸?”
“그건 정령인 나로서는 모르겠군.”
흑기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어요.
이에 이번에는 지르니트가 나서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 가며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이만큼 해낼 수 있다.
이미 어른과 다를 게 없지 않느냐면서요.
“돈도 내가 벌지? 물건도 내 돈으로 사지? 사고를 치는 일은 없지만, 사고를 치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배상도 해주지! 미래 계획도 나름대로 잘 짜고 있는걸!”
“그런 게 아니야, 아니지만…. 나로서는 역시 모르겠다.”
“세르디어, 너도 은근히 비겁한 거 알아? 대답하기 곤란할 때마다 ‘나는 정령이니까.’라고 말하면서 도망치잖아!”
정곡을 찔렸는지 흑기사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일어서서 다시 갑주를 착용해, 연습의 재개를 알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곧바로 루니가 흑기사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죠.
연습은 여기서 끝이라고.
“아, 잠깐만, 오늘 의뢰가 있는 날이거든. 같이 가자. 오늘도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부수러 가야 해요~”
“새삼 열심이군, 왜 아직도 슬리브스터에 집착하는 거지?”
타당한 의문이에요.
아오이는 이미 구출해내었는데, 질은 아직도 슬리브스터의 거점에 산책가듯이 의뢰를 수행하러 가고 있으니까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말이에요.
“으응~ 복수를 이룰 상대가 없어서? 나는, 뭐라 해야 될까? 아오이 언니가 나타나자마자 가족의 원수를 죽여줬거든.”
질은 문고리에 열쇠를 꽂아 넣고는 흑기사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의뢰를 하러 가야 하는데 따라오지도 않고, 뒤에 멀뚱멀뚱 서서 대화만 이어가는 게 답답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갈 곳 없는 복수심을 이런 데서 불태우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반은 맞아, 아오이 언니를 빼앗아간 원수는 로니아였으니까. 점점 로니아를 이해하게 되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 복수심은 갈 곳이 없었어.”
“좋게 말하면 복수의 화신이라는 길로 엇나갈 일은 없었겠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목표가 사라져서 자신이 향해야 할 곳을 잃었다는 느낌이군.”
“지금은 복수보다 언니들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은 있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조금, 눈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황녀가 그랬었죠.
자신은 나아가고 있다고 아오이와 라피아를 속이는 꼴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틀렸어요.
질도 나름대로 고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네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바라는 게 뭐가 나쁜가요?
질은 제대로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데요.
“흐흥~ 그렇게 보이면 다행이지만! 어쨌든! 의뢰는 어제 받아놨거든? 그러니까 가서…. 노예로 잡힌 중요인물 한 명만 데리고 나오면 돼.”
“다른 사람은 구하지 않는 건가?”
“혼자잖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알았다. 준비하지.”
어느샌가 단단해 보이는 돌벽으로 이루어진 건물 내부로 들어온 둘은 숨을 죽였어요.
이제는 라피아도, 아오이도 따라오지 않아도 의뢰를 해낼 수 있는 걸 보니 다 크긴 했네요.
하긴, 마군주까지 잡았는데 노예상이 무슨 위협이 되겠어요.
조심스럽게 건물 내부로 나아가면서도 파수의 눈을 전부 피해내는걸요.
설령 먼저 파수에게 들킨다고 하더라도.
“세르디어!”
“걱정하지 마라!”
그저 서로의 이름을 한 번씩 부르는 것으로 합을 맞춰 파수를 한순간에 제압하는 전문적인 모습까지 보여줬어요.
약간의 소란으로 인해 시끄러워질 것을 예상해서 쓰러트린 파수를 으슥한 곳에 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죠.
그렇게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때였을까요.
질도 흑기사도 문 앞에서 멈춰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어요.
“지르니트.”
“응, 나도 느꼈어. 앞에 누군가가….”
“그럼 내가 먼저 앞으로 나가지.”
“잠깐만!”
“응? …걱정도 많군.”
앞에 먼저 나설 흑기사가 걱정되었는지 질은 그 갑주에 얇은 마나 배리어를 둘러줬어요.
그리고 질의 불안한 감각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문을 열자마자 붉은 화염이 튀어나와 흑기사를 집어 삼켜버렸어요.
이글거리다 못해 부글거리며 끓는 용암 같던 마법이 진정되면 그 안에서 그을린 자국 하나 없는 흑기사가 나타났죠.
역시 대단한 실력이에요.
하지만 누가 흑기사를 공격한 걸까요?
분명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었는데, 함정만 있고 끝이라니 말이 안 되는걸요.
“…괜찮아?”
“아아, 그렇지만 나를 공격한 녀석은 이미 이 자리에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이 안에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바로 구하고 나가자. 여기서 더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혹시 모르니 조심해. 감옥은 보이지만….”
질이 구해야 할 사람이 갇혀있는 감옥은 다른 감옥에 비해 견고해 보였어요.
분명 안쪽에 노예도 확실히 들어있고 함정 같아 보이지는 않았죠.
그래도 질은 더 싸움을 길게 이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바로 감옥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노예 앞에 앉아 이름을 물어봤거든요.
재빨리 일을 끝마치고 싶은 거겠죠.
“저기, 이름 좀 말해주실래요?”
“…비델 앤 엘리츠.”
“이름 맞고, 생김새도 전해 들은 그대로네요. 자, 의뢰주가 기다리고 있어요. 같이 만나러 가요!”
주머니에서 의뢰서를 꺼내 정보와 일치하는지 확인한 뒤, 창살을 구부러뜨렸어요.
비델이 빠져나올 만한 구멍이 생길 때까지 구부린 뒤에는 마나를 거둬 손을 내밀었죠.
그런데 자신을 너무 쉽게 도와주는 질을 경계하는 것인지 쉽게 밖으로 나오려고 하질 않네요.
“지르니트, 이미 우리가 들어온 건 들켰을 거다. 빨리 가야 해.”
“나도 아는데에…. 나오려고 하시지를 않네….”
“마냥 기다려줄 수도 없으니, 억지로라도 데려가야지.”
“너무 강압적인 거 아닐까….”
“괜한 걱정이었나 보군, 생각보다 조용한데.”
비델이라 불린 여자는 조용히 흑기사의 어깨에 들렸어요.
눈에 빛도 없는 게 대부분의 노예들이 그렇듯이 주도적으로 움직이길 포기한 상태인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지금 구해진다 하더라도 얼마 안 가서 곧 다시 잡혀 오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거예요.
“그럼 구할 사람은 구했으니까, 우리가 들어왔던 곳까지 빨리 도망치자.”
질은 먼저 방을 나와 몰려드는 적들을 살펴봤어요.
그리고는 항상 그렇듯이, 푸른 섬광을 남기며 적들을 제압해 길을 열기 시작했어요.
질이 문을 연결해 의뢰소에 흑기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비델의 눈에도 어느 정도 빛이 돌아와 있었죠.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수속 마치고 올 테니까.”
“음.”
“그, 비델 씨는 조금 내려 놔주고….”
“아, 잊고 있었다. 대충 앉혀놓지.”
질의 말에 흑기사는 주변의 의자 한 곳에 비델을 내려놨어요.
그런데 질이 접수대에서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동안, 비델이 흑기사에게 말을 걸어왔어요.
“지금까지 몇 명을 이렇게 구해낸 거야?”
“음? 흐음…. 수백, 아니 수천은 되겠지.”
흑기사는 시선을 맞춰주지도 않고 대답했어요.
그야, 비델도 흑기사를 본 채로 말을 걸어온 건 아니었으니까요.
이에 비델이 중얼거렸어요.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녀석도 수백은 봤을 거다.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네가 뭘 안다고….”
“그 대사도 질리도록 들었지. 물론,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르니트는 잘 알고 있지. 지르니트도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있어서는 전문가급이니까.”
여전히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델의 모습에 흑기사는 한숨을 쉬었어요.
그리곤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것처럼 설명을 이어갔죠.
“그만큼 많이 잃어봤다는 거다. 그만큼 다시 일어서봤고.”
“뭘 잃어버렸는데.”
“가족, 친한 지인, 사랑하는 사람, 이해자. 사람과의 인연만 잃어본 것도 아니지. 자신의 목표, 감정이 향할 곳과 같은 추상적인 것도 잃어보았다.”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지르니트의 소환수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잃어버렸으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섰다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믿고 말고는 자유다. 하지만 10살짜리 꼬마보다 잃어본 것도 없고, 다시 일어서본 적도 없는 네가 뭐가 잘났다고 지르니트를 욕하는 거지?”
이번에는 10살이라는 말을 믿지 못해 되묻는 비델이에요.
저 외견에 10살이라니 쉽게 못 믿을 일이기는 하죠.
“마침 오니까 모험가 카드를 보여달라고 하면 되겠군. 지르니트! 비델이 궁금한 게 있다는군!”
“으응? 비델 씨가? 이제 괜찮은 거예요?”
“네가 10살이라는 걸 도통 믿지를 않아. 신분증을 보여주는 게 어때.”
“아~ 그런 거면 보여줘야지, 자.”
“이젠 믿겠나?”
비델은 신분증을 본 뒤에야 얼마나 노안인 거냐며 중얼거렸어요.
하지만, 질은 그 작은 중얼거림 하나도 놓치지 않았죠.
비델이 말문을 트인 건 상관없고, 노안이라 욕한 것에만 관심이 있나 봐요.
하기야 원해서 이런 성장한 몸이 된 것도 아니니까요.
“노, 노안이라뇨! 실례네요! 저는 이상한 버섯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구요! 비델 씨도 막, 그렇게 동안은 아니에요! 16살이라 이제 막 성인이 됐으면서, 생긴 건 20대 후반이잖아요!”
“뭐, 어? 20, 20대 후반? 내가 이렇게 보이는 건 몇 주간 노예상 녀석들한테 잡혀있어서 그런 거야!!”
“둘 다 싸우지 마. 주변에 민폐다.”
보다 못한 흑기사가 나서서 말리지만, 소환된 정령이 어떻게 주인을 말릴 수 있겠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소환 해제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죠.
“잡혀있다고 해도 사람이 생긴 건 쉽게 변하지 않거든요! 비델 씨가 노안인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비델 씨….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요….”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의뢰주였던 메리 앤 엘리츠 씨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해요….”
“예상했어…. 도망가라고 했었는데, 말도 더럽게 안 듣지….”
아무래도 뭔가 뒷일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네요.
그렇다면 의뢰가 또 하나 늘어날 수도 있겠어요.
이번에는 메리를 구해달라는 내용의 의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