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파과의 뒤에
* * *
질에게 이끌려 찻집으로 들어온 둘은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했어요.
오늘따라 질이 아오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빈도가 잦았기 때문이에요.
그뿐만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각이 라피아에게도 전해졌거든요.
물론, 이것만으로 몸이 달아오른다는 일은 없었지만요.
“그래서 언니, 반지는 며칠 뒤면 완성될 거 같거든요. 시간 괜찮아요? 하루 정도 완전히 비워주셨으면 좋겠는데….”
“괘, 괜찮아요….”
대화 도중에 자꾸만 손으로 신경이 쏠려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네요.
모처럼 질이 사준 디저트도 못 먹고 말이죠.
그때였어요.
“아아, 안 되겠다…. 미안한데, 질.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먼저 먹고 있어 좀 걸릴 것 같아.”
“응? 네에….”
건너편에 앉아있던 라피아가 사라지자마자 더욱 아오이에게 들러붙는 질이에요.
그야 세 명이 함께 모여있을 때는 다른 한 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만요.
이젠 아예 팔에 달라붙어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요.
당연하지만, 곤란한 얼굴로 아오이가 질을 바라볼 뿐이에요.
“…질?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반지에 대한 거예요?”
“아뇨, 아니에요. 그냥….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한테 가까이 붙는 건지 궁금해져서….”
“흐응, 매일매일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 당연하지만 라피아 언니도 있으면 좋구요!”
“그, 그래요…. 그런 거라며…?! 흐윽!?”
그때였어요.
질의 대답에 맞장구를 쳐주기 위해 말하는 순간, 언젠가 질이 아오이의 침대 위에서 들어봤을 듯한 소리를 낸 거예요.
갑자기 일어난 일에 아오이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둘 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죠.
아오이는 무슨 일인지 곧바로 알아챈 것 같았지만요.
“라피아아! 화장실에서 도대체 뭘…! 아읏!? 큭…!”
“언니 괜찮아요? 갑자기 왜….”
“괘, 괜찮, 흐읏…. 화, 화장실…!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럼 저도 언니랑 같이!”
“괜찮아요! 저, 금방 다녀올 테니까요!”
애써 착한 아이라며 질을 달래고 거의 화장실로 달려가는 듯한 아오이였어요.
그렇지만 그 걸음은 어딘가 불편해 보여, 가던 도중에 갑자기 주저앉아 질의 걱정을 사기도 했어요.
“저, 정말 괜찮아요?!”
“하읏, 윽…! 진짜 괜찮아요…. 하아…. 자리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질은 착한 아이잖아요?”
몸을 부르르 떨다가도 잠시간의 진정할 시간을 가진 뒤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는 아오이예요.
질은 아오이를 걱정하면서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잘 지켰어요.
약간 화장실이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착하게 호기심을 죽이는 데 성공했죠.
아오이에게 설교를 들은 것 같은 라피아가 그 손에 끌려 나오는 모습을 보기까지요.
“…다신 그러지 마세요! 알겠어요?”
“어응, 죄송합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 죄송합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적어도 말이라도 해줬으면 집에 가서라도 계속했을…!”
아무래도 화장실에서 라피아가 혼자 즐겼던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아오이에게 혼나는 것도 당연하죠.
아직 효과가 지속되는 도중에 즐기러 간 거잖아요.
질의 옆에서 움찔거리고, 화장실로 향하던 도중에 주저앉아야 했던 아오이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니까요.
“언니! 괜찮아요?”
“아, 질…. 거짓말로라도 괜찮다고는 못하겠네요. 집에 돌아갈까요? 옷도 갈아입고 싶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 그럼 잠시만요!”
질은 둘을 먼저 가게 밖으로 보내놓고 계산대로 갔어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아오이는 라피아에게 왜 그랬었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왜 갑자기 화장실에서 그런, 분별없는 행동을 한 건가요.”
“아니, 넌 안 그랬어?”
“뭐가요.”
“옆에서 막 사랑이 담긴 손길로 만져오는데 발정하지 않고 버틸 수 있냐고!”
“바, 발정…?! 라피아 말 좀 가려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며 소리치는 모습이 꽤 불쌍하네요.
한번 달아오른 몸을 그대로 참으라는 것도 꽤 괴로운 일이기는 하겠지만요.
“나는 못 참아! 기세에 몰려서 해버린 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어쨌든 못 참는다고!”
“아, 알았어요! 조용히 좀 해요! 집에 가면, 어울려줄 테니까아….”
“약속이야. 알았어? 잊으면 나도 화낼 거라고!”
“알았어요. 질도 끝난 것 같으니까 진짜 집에 돌아가도록 해요.”
아오이는 계산대에서 포장된 물건을 받아들고 나오려는 질을 보고 라피아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뭐야 그 손은?”
“라피아는 싫어하나요? 손잡는 거, 질은 좋아하던데요.”
“…잡을 거야.”
“후후, 라피아도 착한 아이네요. 평소에도 말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조용히 손을 잡는 라피아가 귀여워 보였는지, 뺨을 붉힐만한 칭찬까지 건네오는 아오이에요.
질이 나오자마자 둘의 손을 잡은 모습을 보고는 벌써 화해한 거냐며 물어봐 왔는데, 라피아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겠죠.
“맞아요, 화해했어요. 저한테도 약간 잘못이 있었으니까요. 근데 뭘 산 건가요?”
“조금 더 남아서 먹어보고 싶은 디저트가 있었는데, 돌아간다고 하니까 아쉬워서…. 그래서 따로 포장해왔어요!”
“그건 또 기대되네요. 아까 제대로 집중해서 먹어보지 못했던 게 저도 아쉬웠거든요.”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해요! 많이 포장했으니까!”
“질? 미안한데 나는 밥도 먹어야 해. 항상 하던 대로 그…. 알지? 밥하기 귀찮을 테니까 조금만 나눠준다면 괜찮아.”
“아, 아아! 네! 물론이죠! 라피아 언니 것도 따로 준비해 줄게요. 깨끗하게 씻어서….”
아주 작은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이 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세 명이 집에 돌아가자마자 본 것은 레나이였어요.
레나이가 집에 있는 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죠.
일주일간 집에 머무는 것이 계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레나이’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술 냄새에 찌들어있는 셀레스도 함께 있었기에 문제가 된 거였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이 새로운 마군주라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잖아요?
“레나이, 이건 무슨 상황이죠?”
그러니 전후 사정을 언젠가 레나이에게 전해 들었던 아오이라고 해도 날 선 태도를 지우기 어려웠을 거예요.
설령 상황의 이해를 하더라도, 집에서 술 냄새가 가득한 광경을 본다면 집주인으로써도 화가 날 테고요.
“일이 좀 있었어. 아무래도, 본인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분에 넘치는 인물이 아닐까 해서 말이지. 그대들이 맡아주었으면 해서.”
“당신이 목욕할 때 했던 말들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어요. 그녀가 적이 아니라는 것도요. 그렇지만, 여기에 들여도 괜찮다고는 한마디도…!”
“안녀엉~ 단탈리안이었나? 오랜만이야아….”
“친한 척하지 마세요! 집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역시 화를 낼 포인트가 한두 군데가 아닌 모양이네요.
아오이의 양옆에서 눈치만 보는 질과 라피아와는 달리, 셀레스는 소파에 누워 해맑게 아오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고 있으니까요.
빈 술병들로 가득해진 소파 주변의 바닥만 보더라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려는 의도가 너무 뻔하게 보여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술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을 전부 열고 있는 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게 불가능했거든요.
“무슨 생각으로 저 마군주를 이곳에 데려온 건데요?”
“전혀 감시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계약도 어기고 뻔뻔히 낮 시간대에 돌아다니니까…. 낮에만 그대가 좀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해달라는 게 아니야. 본인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제가 끊임없이 받아주기만 하니까 멍청해 보여요?! 질도 마군주에 관련되기 싫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마군주를 데려오다니 제정신이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아오이가 남의 말까지 가로채면서 화내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요.
분명 질과 관련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평온한 일상이 시작되려는 와중에 끼어든 문제는 골치 아프기도 해요.
게다가 집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싶지도 않겠죠.
아오이의 화에는 이유가 충분해요.
어쩌면 마군주이기에 계속해서 이런 일만 생기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뭐, 지금은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해버린 황녀 덕분에 눈치만 봐야 하는 질과 라피아만 불쌍할 뿐이죠.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를 조금만….”
“나가세요! 저 마군주랑 당장!”
“후우…. 알았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지. 그래도 혹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나가라고요!”
황녀는 다시 한번 소리치는 아오이를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셀레스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집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어요.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질이 아오이의 눈치를 살피며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어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아오이가 같이 일을 거들기 시작했는데, 라피아는 그러지 못했어요.
오히려 황녀를 붙잡으러 따라 나갔다고 해야 할까요.
“황녀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피아의 부름에 끌고 가던 셀레스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는 황녀예요.
그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과 함께 곤란함이 잔뜩 묻어나와 있었죠.
“여기서는 황녀라 하지 말라고…. 아니지, 더 이상 계약을 이어갈지 아닐지도 모르는 판국에…. 무슨 일이지?”
“정 그 마군주를 맡기실 곳이 없으면 저희 가문의 파크에 맡겨보시는 건 어때요?”
“파크라하면…. 그곳 말인가? 이번에 그대의 아비가 만들고 있다는….”
황녀는 잠깐의 고민 끝에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대답했어요.
파크가 대체 뭘까요?
“거기라면 셀레스가 즐길만한 것도 있을 테고, 셀레스를 감시할 인원도 충분할 거예요.”
“셀레스가 좋아할지는 차치하고, 아직 완공 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개장 후에는 저희 가문의 사람들이 직원으로 들어갈 거라서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당분간은 질과 아오이, 둘 중 하나가 자주 이용할 것 같기도 하고요.”
“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았다. 본인은 그럼 곧바로 현자에게 가서 부탁해보지. 탈리안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 며칠 안 지나서 곧 다시 보겠지만….”
“그야 아직 일주일이 안 지났으니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네?”
“아니다. 볼일 보도록, 정보는 고맙군.”
황녀는 다시 셀레스를 질질 끌며 집을 떠났어요.
그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라피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어요.
양손 가득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나온 아오이네요.
“갔나요?”
“어어…. 근데 그렇게 화낼 일이었어?”
“황녀 편을 들 건가요?”
아오이는 쓰레기봉투를 문의 옆에 두고 손을 털며 물어봤어요.
굳이 편을 갈라야만 하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익숙한 질문인지 라피아는 일순간 놀란 척을 하다가도 곧바로 아오이의 옆에 가서 붙었어요.
그리고는 온몸을 배배 꼬듯이….
“편이라니, 야아~ 내가 황녀님한텐 어쩔 수 없는 입장인 거 알잖아아~”
“으, 웬 애교에요? 어울리지 않게….”
“쯧, 아 좀 봐줘!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알아요. 알죠. 그래서 아까 거기서 더 나아간 잔소리는 안 하잖아요.”
“끄응…. 기분 전환하지 않을래? 이번엔 질도 같이 노는 거야.”
“뭘 할 건데요?”
아오이의 질문에 라피아는 가슴을 폈어요.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뽐낼 수 있다는 것처럼, 어깨도 높아져선 ‘흠! 흠흠~!’같은 추임새까지 넣었죠.
“저번에도 말하려다가 황녀님 덕분에 끊긴 건데, 전생에 테마파크라는 곳에서 놀아본 적 있어? 그걸, 이 세계에도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거든.”
“유원지를 말하는 거예요?”
“바로 그거야! 유원지에 정말 마법이 깃든다고 생각해봐! 생각만 해도 엄청난 대발견 아니야?!”
“유원지, 기대되기는 하네요. 좋은 생각인 거 같기는 하네요.”
“그렇지?! 진짜 환상적일 거야, 마법으로 회전하는 거대한 찻잔! 마법으로 움직이는 양탄자 위에 올라타서 하는 진짜 모험! 회전목마는 정말 살아있는 것 같은 모형 말까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걸 보니 라피아가 아오이와 질만을 위해 준비해온 것은 아닌 것 같네요.
둘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즐기려고 생각 중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이렇게 들뜬 아이처럼 말할 리가 없는걸요.
덕분에 짜증만 가득하던 아오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찾아왔어요.
“푸훗, 회전목마에는 진짜 말을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말을 쓰면 말이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닐걸? 그래도 반응 보니 다행이다! 기대해도 좋아!”
“그전에 들어가서 질 좀 도와주세요. 혼자 청소하느라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까요.”
“어, 응! 그래야지!”
마지막에 잠깐 험악해진 분위기 때문에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나름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셀레스는 라피아가 알아서 잘 관리해주겠죠.
그런데 집에 들어가다 말고, 라피아가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리기 시작했어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나요?”
“아니, 그, 뭐야…. 황녀님 때문에 분위기는 별로였지만, 저녁에 방에 찾아갈게. 먼저 준비하고 있어.”
“아, 에, 네, 네에! 자, 잘 부탁해요….”
아무래도 질과 있을 때 제대로 끝맺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나 보네요.
집에 돌아오면 이어서 하겠다는 약속도 있었고 말이에요.
아오이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나름, 기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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