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67화 (167/189)

〈 167화 〉 두 명이었습니다

* * *

라피아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아오이의 앞에서 추궁받고 있었어요.

아오이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틀어 눈치만 살피는 게 뭘 잘못했는지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황녀를 가게 내버려 뒀다는 건가요?”

“어, 으응…. 아, 안돼?”

“먼저 이 약속을 잡아놓은 게 황녀였잖아요. 황녀한테서 뭘 할 예정이었는지 듣고 보낸 거예요?”

황녀에게 들었던 3시의 약속을 전해준 라피아였지만, 아오이는 쉽게 화를 풀어주지 않았어요.

문제는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으니까요.

지금은 오전 11시, 약간은 이른 점심시간인 데다가 천천히 밥을 먹는다고 해도 12시를 약간 넘는 게 고작이겠죠.

주최자가 사라져버린 것은 둘째 치더라도, 아오이와 라피아는 막상 단둘이 있을 때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어요.

이럴 기회는 좀처럼 없었으니까요.

평소에는 항상 주변에 질이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잖아요?

항상 둘만 남으면 방금처럼 사이는 좋아 보여도 신경질적인 말을 하다가 결국에는 싸우는 결말만이 남는 게 이 둘의 일상이었으니….

아오이도 좀처럼 라피아에게 잘 대하려고 해도 약간은 신경질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아….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뭘 할지부터 생각해보죠.”

그렇게 시작된 싸늘한 식사시간, 그 주변은….

대낮부터 열기 때문에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술을 팔지는 않지만, 일단은 술집이기에 주변의 사람들은 꽤 떠들썩하게 식사하고 있었어요.

반면에 아오이와 라피아는 대화 주제의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 깨작깨작 포크로 자기 앞에 놓여진 음식들만 찍어 입으로 옮길 뿐이었죠.

이런 시끌벅적한 정적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아오이였어요.

“라피아…? 다, 단둘이 있으면 각오하라면서요?”

과연, 라피아를 도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나 보네요.

하지만 주제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이 술집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더라도 오전 시간에 비하면 꽤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게다가 라피아의 반응도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의심을 갖는 듯했어요.

그래도 먼저 이런 주제를 꺼낸 것은 아오이가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증거이기도 했으니, 라피아가 도발에 발끈하는 일은 없었죠.

“뭐? 주변에 사람들 안 보여…? 여기서 뭘 어쩌라는 거야…?”

“여, 여기서 하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너…. 나랑….”

“뭐라는 거예요?! 다, 단지 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라고요!”

아오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라피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다가도 마저 식사를 이어갔어요.

아무 말도 없이 식사만 하는 라피아의 생각이 궁금한지 아오이는 조심스레 그 이름을 불러봤죠.

“안 불러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건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된 다음, 에…. 아오이?”

“네?”

“서로에 대해서라고 하니까 말이야, 나는 전생에 있던 미련을 다 버리고 왔어. 그러니까 나에 관한 이야기는 됐고…. 넌 어때? 넌 전생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나쁘지 않은 주제 선택이네요.

과연 혼자서 몇백 년 이상을 살아온 친구 하나 없던 마녀와는 다르네요.

전생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진 아오이는 입으로 옮기던 포크를 접시 옆에 내려뒀어요.

“전생에…. 이름은 말했었죠? 우루시쿠로 아오이. 17살의 고등학생이었어요. 가족은 어머니가 이혼하셔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랑 저, 그리고 여동생이 한 명이었죠.”

“아, 어어…. 못 들을만한 걸 듣고 있는 건 아니지? 미안해지려고 하는데….”

라피아의 괜한 걱정에 탈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어요.

“괜찮아요. 이미 몇백 년 전 일인걸요. 어쨌든, 학교는 나름대로 좋은 곳을 다니고 있었어요. 자랑할만한 건 아니지만 부모님이 이혼하기는 했어도 좋은 집안이었거든요.”

“금수저였다는 거구나, 아, 넌 금수저라는 말을 모르려나? 부자라는 거야, 부자.”

“처음 듣는 단어네요. …뭐, 제가 그런 유행에 느려서 모르는 걸지도. 어쨌든 학교도 그렇고 집안도 그렇고 다 좋은 곳이다 보니, 제가 일탈을 할 일은 거의 없었어요. 특히 어머니가 저와 제 동생이 일탈하게 될 가능성조차 만들어두지 않으셨으니까요. 제가 가질 수 있는 취미라고는 책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뿐이었어요.”

상당히 엄한 집안에서 자랐나 보네요.

질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도 이미 몇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몸에 밴 습관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던 거예요.

어쩌다 한 번씩 화를 주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반말이 튀어나오는 게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증거겠죠.

“설마 진짜로 책 속의 세계에 빠져들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야. 물리적, 초월적으로.”

“그렇네요. 다만, 전에도 말했듯이 책 속에 납치된 것은 저 혼자가 아니었어요. 제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과 같이 납치됐었죠.”

“그게 저번에 말했었던 첫 연애 상대야?”

“아~ 음…. 네, 그렇지만 연애라고 해도 별일은 없었어요. 연옥에서의 연애는, 비상식적이었으니까요. 서로 힘든 일을 말하고 위로받는 것이 전부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우정이었을지도 몰라요.”

“왜? 적어도 키스라거나, 몸을 섞는다거나 그런 일은 했을 거 아냐.”

“라피아에게는 미안하지만, 라피아는 연옥의 일을 모르잖아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에요. 일분일초라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면 사방에서 기습을 받고 사냥당하기 좋은 곳이었죠.”

아오이가 말했던 것처럼, 베리아의 기억에서 엿보았던 것처럼, 연옥은 사람이 살 곳이 되지 못해요.

그런 곳에서의 연애가 어떤 긴장감을 가졌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라피아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흐음? 그 친구는 어떻게 알게 됐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전부 같은 곳이었어요. 게다가 퓨이는 저보다도 더한 책벌레였어요. 항상 도서관에 가면 저보다 먼저 책을 읽고 있었죠. 왜 제가 단탈리안이 되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였어요.”

“그래서 이 세계에 넘어와서도 둘이 사귀게 되었었다 이거야? 책이라는 연결점이 있어서?”

“조금은 속사정이 있지만, 맞아요. 지금은 퓨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도 되는지, 고민 중이지만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아오이의 씁쓸히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라피아에게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요.

요즘은 퓨이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 것을 보면 반쯤은 포기한 것 같은데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그 퓨이랑 전생에서는 뭘 했었어? 친구였으니까 책이랑 관련된 게 많기는 하겠지. 뭘 하고 어울렸었냐는 거야.”

“제가 다닌 곳은 여학교라서…. 일탈도 막아놓은 어머니 덕분에 교내의 소문에 홀려 다니기 쉬웠어요. 어느 선생님이 잘생겼고, 어느 학생과의 스캔들이 있을뻔했다…. 그러니까 사춘기의 여학생이 관심을 가질 만한 그런 거요. 외부에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거든요. 하더라도, 퓨이가 집에 놀러 와서 책에 대해 떠들거나 그런 일밖에는…. 아, 가끔 요리도 했었는데 저는 항상 실패만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립네요.”

과거에 빠져든 아오이의 얼굴은 지금껏 질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지금의 라피아는 버린 약간의 미련이 담겨있는 듯했지만, 이 미소가 라피아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요.

미간이 좁아진 것도 그렇지만, 눈썹을 꿈틀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라피아는 이런 면에서 바로바로 말해버리는 타입이었으니까요.

“야, 야! 아무리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지만, 지금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 거지!”

“아, 그, 그랬죠…. 미안해요. 그리고 또 뭘 했냐면 밤에 자고 갈 때도 있었는데 같은 침대에 누워서….”

“그만, 그만! 됐어! 듣고 있으니까 질투 나서 안 되겠다! 어쨌든, 퓨이라는 네 전 여친이랑 해본 것들은 일단 제외해두고, 못해본 것들을 해보자. 그러려고 물어본 거였으니까! 하고 싶었던 거 있어?”

“하고 싶은 거…? 저는 연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느긋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 중이었어요. 전생에서 못해본 일탈은, 조금 과격하고 비상식적인 폭력들로 지긋지긋하게 해결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퓨, …아니에요. 어쨌든 저는 충분히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어요. 질도 있고, 라피아도 있잖아요.”

“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네! 그래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뭔가 하고 싶은 거. …없어?”

자신을 바라보며 차분한 미소로 답해주는 아오이의 모습에 라피아는 뺨을 붉히며 다시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어요.

이미 충분하니까 더 바라는 것은 없다고.

“그럼 뭘 하든 즐거울 거란 말이야? 막, 내 취향의 일만 하더라도?”

“이 기회에 라피아를 조금 더 자세히 알아가는 셈 치면 되지 않을까요? 라피아와 어울리다 보면…. 저도 그 일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윽…. 그럼 싫어하는 건? 적어도 싫어하는 건 있을 거 아냐? 느긋하게 살고 싶다 했으니까 예를 들면…. 엄청난 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그런….”

오늘따라 아오이의 말에 여러 번 기분 좋게 되는 라피아네요.

그럴 때마다 당황하거나, 얼굴을 붉게 물들이거나, 눈동자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거나, 다양한 반응을 보여요.

어쩌면 아오이가 라피아를 이길 가능성은 이런 곳에 있는 게 아닐까요.

힘이나 말로서 이기기보다는, 설레게 하는 것으로 이기는 방법 외에는 없는 거예요.

“저 이래 보여도 운동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키는 작지만,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 으음…. 미안, 전생에서도 노력할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도 뱀파이어라서 그런 건 잘 모르겠어. 노력 안 해도 되는 체질이라….”

“그건 조금 열 받는 말이네요. 어쨌든, 뭐든 괜찮아요. 처음이잖아요? 라피아랑 단둘이 뭔가 하는 거.”

“아, 윽, 아, 아알았어…. 밥 다 먹었지…? 나가자. 더 있다간 위험할 것 같네….”

황급히 일어서서 벗어두었던 겉옷을 걸치는 라피아에요.

이런저런 말실수도 있겠지만, 역시 아오이의 말을 전부 받아내기 어려운 게 아닐까요.

아오이는 그런 라피아를 보고는 자신의 접시에 담긴 고기조각을 찔렀어요.

하지만 곧 포크를 내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죠.

“조금 남았지만, 방금 라피아가 한 말 때문에 적게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만 먹을래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오늘따라 너한테 미안할 일이 많은 것 같다…?”

“기분 탓이에요. 어디로 갈 건데요?”

“아까 황녀님 따라가다가 본 건데, 이 세계에도 만화책이 있기는 하더라고. 보러 가자. 보니까 만화만 있는 게 아니라, 카페처럼 먹을 것도 있던 거 같던데?”

“뭔가, 이 세계랑 어울리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것도 술집 근처에….”

아오이의 말대로 이 세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편한 곳이 존재하네요.

위치 선정도 술집 근처라니 좋지 못하고요.

하지만 라피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뭐 어때? 내가 만났던 신도 너무 이것저것 따지면 골치 아프댔어! 그러니까 자세한 건 따지는 게 아니야! 이제부터 놀 거라는 게 중요한 거지! 얼른 가자!”

“이끌지 마세요! 급할 일도 아닌데…!”

그저 앞으로 아오이와 놀 생각에 싱글벙글하며, 억지로 손을 잡아 이끌 뿐이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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