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세 명이었는데요
* * *
레나이와의 일이 있고 나서 질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이야기 도중에 깊은 생각에 잠기던 이유는 질만이 알겠지만, 그런 어딘가 고민 많은 모습은 잘 숨기고 다녔어요.
누구의 앞이라고 해도, 아오이와 라피아의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열심인 척을 했죠.
물론, 아오이와 라피아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거짓된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오늘도 반지의 재료를 준비해준 점주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어요.
“저번에는 일자로 펴기 위해 두들기는 작업을 했지? 둥글게 말아서 연결도 했었고. 이번에는 아가씨가 조금 힘들어할 작업이야.”
“힘들어할 작업이라니…. 옆에서 소리만 치지 말아주세요. 집에 가서도 귀가 아팠다구요.”
“그럴 거면 가이드 북을 줄 테니까 혼자 알아서 해보시던가.”
“아, 아니에요! 어서 알려주세요!”
“오늘은 샌딩이라는걸 해서 반지의 면을 정리할 거야, 돌아가는 사포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니까 쉬울 거고. 이것도 마찬가지로 손에 힘 조절을 잘 해야 해. 각도도 마찬가지고.”
점주는 발을 앞으로 내밀어 페달을 밟아 봤어요.
그러자 앞에 동그란 사포가 맹렬한 기세로 돌아가기 시작했죠.
페달을 밟을 때만 돌아가는 구조인가 보네요.
질은 곧바로 점주를 따라 해 사포를 돌리고선 반지의 표면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기를 한참일 때, 질은 갑자기 의문이 들었죠.
“…겉은 다 했는데, 안쪽은요?”
“다 방법이 있지. 잘 보라고, 이건 특히 잘 안 보이는 곳이라 각도를 망쳐놓을 수도 있어.”
이번에는 작은 사포가 달린 스틱을 가져와 버튼을 눌러보는 점주였어요.
그러자 끝에 달린 작은 사포가 회전하기 시작했죠.
이전과 다를 건 없어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질이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어요.
건물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질이 반지를 만드는 모습을 보는 아오이와 라피아.
최근 며칠간은 아오이와 라피아가 은밀하게 질의 뒤를 캐고 있었거든요.
그야 이럴 수밖에 없잖아요.
질이 자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선물이 반지라고 하는걸요.
“…기특하지 않냐.”
“그렇네요. 근데 꼭 이렇게 훔쳐봐야 해요? 저는 질이 줄 때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반지보다는 질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궁금한 거야. 너도 그래서 따라온 거잖아? 근데 재료로 꽤 비싼 걸 쓰네.”
“비싼 거예요?”
“아니, 반지의 재료는 저거랑 비슷한 색도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옆에 보석들, 본가에서도 보던 비싼 것들이야. 만약 서민이었으면 구경도 못 할 것들인데 3개나 있잖아. 최소 400만 Eli는 나올걸?”
“400만 Eli? 그렇지만 그런 큰돈을 어디서…. 나쁜 곳에 손을 댄 건 아니겠죠?”
“질이 그럴 애야? 아마 네가 베리아에게 잡혔을 때 모아둔 돈일걸? 너 찾겠다고 녀석들 거점만 몇 개를 박살 냈는데.”
“그사이에 모은 돈이라면 질에게는 할 말이 없네요.”
질이 그런 큰돈을 어디서 얻었겠냐는 말에 걱정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오이였어요.
“계속 보는 것도 미안하니 슬슬 황녀를 보러 갑?! 읍?! 으읍!!”
“뭐, 뭐야?! 어, 황녀님!?”
갑자기 뒤에서 레나이가 아오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타났어요.
배후에서 습격해온 사람이 레나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황급히 그 품에서 벗어나곤 매섭게 노려보는 아오이였죠.
심지어 레나이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망토까지 입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한 변장 중이었으니까요.
아오이는 순간 자신을 해하려는 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왜 그렇게 무섭게 보는 거지?”
아오이는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도 계속해서 기분 나쁜 티를 냈어요.
그제서야 레나이가 무언가를 건네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죠.
“…이건?”
“음? 모르는 건가? 그대가 있던 곳에서 가져온 술이라던데.”
“확실히, 여기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술이네요.”
“사과의 선물이지. 그대의 고향에서 가져온 물건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하아…. 라피아, 줄게요. 선물이에요.”
술병을 몇 번 흔들어본 아오이는 그대로 라피아에게 건네줬어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걸까요?
얼떨결에 술병을 받아든 라피아였지만, 레나이의 눈치를 보는 데에 급급했어요.
라피아가 예상하듯, 당연히 레나이가 발끈하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죠.
“뭐, 뭐 하는 건가! 본인의 선물을 그렇게 막 아무한테나 넘겨주다니!!”
“조용히 해요. 들킬 것 같잖아요.”
“아~ 지르니트인가? 열심이군. 그보다! 본인의 선물을 그렇게 경시해도 되는 건가?!”
곱게 넘어갈 생각은 없는지 계속해서 자신의 선물을 넘긴 아오이를 탓하네요.
이에 보다 못한 라피아가 중재에 나섰어요.
“저, 황녀님? 술은 집에 보관할 테니까 나중에 집에 오시면 같이 마시는 게 어떠세요? 지금은 원래 이야기하기로 했던 셀레스에 대해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슬슬 본인에게도 친근히 대할 때가 되었지 않았는가?! 저번에는 마음을 열어주나 싶었더니 다시 이렇게 차갑게 굴 줄이야…!”
이전에 외롭다며 약한 모습을 내비친 적이 있었으니 레나이가 착각할 만했어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때의 아오이는 레나이에게 친근하게 대했으니까요.
물론 이번에는 레나이가 아오이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탓도 있지만요.
라피아는 일단 진정시키고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어요.
거리가 조금 멀다지만, 질에게 들킬 수도 있잖아요?
“지, 진정하세요, 황녀님…. 아오이도 예민하게 구는 건 그만하고 적당히 넘어가자.”
“…알았어요. 미안해요. 황녀.”
“그 황녀 소리 좀 그만 하래도! 황궁 밖에서는 레나이라 부르라니까!”
정말 끝까지 포기할 줄을 모르네요.
인내심을 조금만 기른다면 언젠가는 불러줄 텐데요.
라피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억지로 레나이를 달래며 장소를 떠났어요.
셋이 도착한 곳은 한 술집이었어요.
누가 고른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집이라니, 셋 모두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네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명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어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지만요.
라피아가 한가지 실수를 해버렸거든요.
“어디서 흘렸는지 기억 안 나요?”
“황, 레나이 님 달래느라 어디서 흘렸는지 모르겠어. 정신 차리고 보니까 손에 없더라….”
모두가 짐작하다시피, 술병을 잃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질이 있는 가게가 수도에 있는 곳이다 보니, 술병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하더라도 깨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거예요.
워낙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돌아가서 술병을 찾는다고 해도 이미 누군가가 가져갔을 수도 있고요.
“뭐, 됐다. 그리 귀한 것도 아니고…. 다시 가져오면 되는 일이니. 본인의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중요하지, 술병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다시 가져온다고요? 새로운 술을?”
“그래, 술이라면 셀레스가 몇 병이고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독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본인은 셀레스와 계약했으니, 위해를 가할 걱정은 없어.”
과연, 셀레스에게서 받아온 술이었네요.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가지고 있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그다지 중요한 선물도 아니었잖아요.”
“본인이 그대들 마시라고 제일 좋은 것으로 달라고 했단 말이야! 셀레스가 귀찮다고 뻐기는데 얼마나 설득하기 어려웠는지….”
“선물 이야기는 그만 해요. 셀레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면서요?”
“아, 음, 으음…. 다음에는 꼭 받아달라고. 그래서 셀레스…. 그, 하아…. 셀레스가 말하기를 자신을 포함해서 4명의 마군주가 넘어왔다고 한다.”
레나이는 그동안 셀레스와 같이 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셀레스, 라파르를 제외하고도 2명의 마군주가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상황에 머리가 아파져 온 걸까요.
아오이는 앞에 놓여있는 얼음물을 한 번에 전부 들이마셨어요.
그야 일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끊이질 않고 있으니까요.
“잠깐만요. 일단 셀레스가 누군지는 말해주세요.”
“음? 마군주인데 모르는 건가?”
“마군주라고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가 이 세계로 넘어온 뒤에 셀레스의 코어를 강탈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베리아가 질에게 코어를 질에게 양도한 것, 로니아가 베리아의 이름을 빼앗은 것을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에요.
연옥은 하루가 멀다고 욕망에 눈이 멀어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니까요.
“그렇군, 미안하다. 그대뿐만 아니라 라피아를 배려하는 것도 잊고 있었어. 셀레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10대 후반의 소녀로 보이는 마군주다. 다만, 하는 행동은 정반대이지만 말이야.”
“당신이 가져왔던 술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음. 미지의 공간에서 끝도 없이 술을 꺼내 마시더군. 취한 상태인 것은 분명한데, 아무리 술을 마셔도 기절하거나 잠들지 않는 것도 신기한 볼거리였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인지, 능력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귀찮다며 모든 관찰과 분석을 거부하고 있으니.”
“연옥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이유는요?”
레나이는 보채지 말라며 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아오이와 라피아에게 건네주었어요.
종이를 천천히 읽기 시작한 둘에게 추가로 설명을 이어가는 레나이였죠.
“그건 만나자마자 물어보았지만, 진실인지 불명확하다. 여러 번 말하지만, 셀레스는 귀찮은 것을 강박적으로 싫어한다. 자신의 입으로는 이름을 얻게 된 뒤로 그리되었다고 하던데…. 그 덕분에 술을 마시며 놀고먹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더군. 그렇기에 연옥에서 싸움에 휘말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설마 하는 말이지만, 싸우는 게 싫어서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건가요? 그것도 다른 마군주를 도와주는 척을 하면서? 여기 적힌 대로라면 셀레스라는 이 구제 불능의 마군주는….”
“탈리안, 그대도 잘 알지 않나? 마기노가 마군주에 도달하는 순간, 그대와 같으면서도 다른 별종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아오이의 말을 끊고서 설명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별종이라는 말에 아오이가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이에 뭐가 잘못됐냐며 하나하나 아오이에 대한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죠.
“자식 키우듯이 고아를 데려와 키우며 사랑을 주고, 싸움에는 관심이 없고, 고아에게 사랑을 받는 것에 큰 의미를 두며, 조용히 살아가기만을 바라는 마군주가 그대 말고 더 있나?”
“마, 말이 조금 심한 거 아닌가요?! 저, 전부 사실이지, 만…. 큿! 친해질 생각이 있는 거예요?!”
아오이의 화만 부추길 뿐이었어요.
사실만을 말하더라도 결론은 아오이가 별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까요.
중간에 끼어서 둘의 아슬아슬한 사이를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라피아만 고생 중인 거죠.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해서 아오이의 신경을 건드는 레나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요.
“그대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본래 마군주란 존재는 전부 별종이다. 마군주끼리 어울릴 수가 없는 것들이지. 어쩌다 의견이 맞아서 잠시간의 동맹이 이루어질 수는 있더라도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도 있고.”
“…하아, 그래서요?”
“셀레스는 다른 두 명의 마군주, 뿌루뿌루와 뷔네티시와 함께 넘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동맹을 맺어도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지. 지금은 전부 따로따로 움직이는 중이라는군.”
“뿌루뿌루…? 이름이….”
마군주의 이름이 너무나도 귀여운 발음을 내는 탓에 제일 먼저 반응을 한 건 라피아였어요.
이에 그 반응은 당연하다며 레나이가 설명을 이어갔죠.
셀레스에게 들었을 때 레나이도 쉽게 믿지 못했으니까요.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되물어봤었잖아요?
“본인도 듣고 의심했었지만, 본명은 거짓 없이 뿌루뿌루였다. 몇 번을 물어봐도 똑같았지. 하여튼…. 뿌루뿌루는 재미를 위해서 넘어왔다고 하며, 위험한 것은 거기 적혀있는 뷔네티시라는 마군주. 그 녀석은 라파르를 이용해 베리아의 코어를 가로채기 위해서 이 세계에 넘어왔다고 하는군. 라파르를 되살린 배후에 있는 마군주 중의 하나도 그 녀석이다.”
“이 정보들을 알려주는 이유는요?”
아오이는 길게 이어지는 설명이 지루해졌는지 레나이의 의도를 물어봤어요.
레나이가 건네준 종이에 적힌 정보는 나중에 더 읽어보면 되는 거고, 중요한 정보는 이미 레나이의 입으로 충분히 들었으니까요.
“아직 모험가로 활동하는 아이펠슈에에게도 전했지만, 도와줄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의미이지. 아비고르만으로는 불안하니.”
“이번에는 강요가 아닌 건가요? 저번에는 라피아에게 가문과의 관계를 인질로 협박했던 것 같은데요.”
“혀, 협박이라니, 아오이…!”
“괜찮아, 사실이니 그렇게 안절부절못할 것도 없어. 탈리안, 그대는 지르니트가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로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겠지. 그렇기에 이번에도 먼저 지르니트와 만나 이야기를 해보았다.”
“또 그랬다고요?! 당신 진짜…!”
아오이는 화를 내려다가 한번 참아냈어요.
술집의 아르바이트생이 한참 전에 주문한 요리를 내왔거든요.
웬만해서는 질을 건드렸다는 말에 하를 참지 못하는 아오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화내고 싶지는 않은 거겠죠.
아르바이트생마저 분위기가 좋지 못한 건 아는지,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빠르게 요리를 내려놓고 떠나버렸어요.
“본인의 나쁜 버릇인 건 인정하지만, 그대가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좋아. 지르니트는 본인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유는…. 말해주기 어렵지만, 본인도 납득했기에 미련 없이 물러났지. 이번에는 라피아 그대에게도 강요할 생각이 없어.”
“…질이 거절했다고요?”
“그럴 애가 아닌데, 무슨 일 있었나?”
“나중에 그대들이 직접 물어보도록, 본인은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쨌든 요리가 나왔으니 먹지?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은 마군주들의 약점이나 능력 같은 것은 거기 적혀있으니 집에 돌아가서 읽어보고.”
레나이는 김이 나는 찐 감자에 포크를 찔러 들어 올리며 흔들어 보였어요.
질이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더라도, 둘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인지 대화 주제를 빨리 돌리고 싶은 눈치였죠.
일부러 자신이 몸에 익힌 식사예절을 무시하면서까지요.
“레나이 님,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일주일간 집에서 같이 지내는데, 굳이 따로 나올 이유가 있었나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는데, 레나이만 따로 합류한 이유가 있었나 보네요.
일주일간 같은 곳에서 지내는데 굳이 이렇게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대는 같은 여자이면서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나? 분위기가 조금 안 좋기는 하지만. 이 뒤에 셋이서 데이트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한껏 꾸미고, 기분도 내고 싶을 텐데, 집에서 같이 나선다면 데이트 같지가 않잖아. 동네를 산책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레나이가 말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 부분이에요.
부부 또는 가족이라면 집에서 같이 나서도 되지만, 레나이와 아오이, 레나이와 라피아는 그럴 수가 없는 사이잖아요?
아직 깊어지기 시작하는 단계, 그렇다면 조금 더 서로에게 새로움과 설렘을 찾고 싶을 거예요.
“아~ 뭐어…. 애인이랑 동거를 해봤어야죠. 질이랑 아오이랑은 같이 살게 되었는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응? 왜 그렇게 봐?”
하지만 레나이에게 억울하다는 듯이 항의하는 라피아에게 아오이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어요.
“라피아, 전생에서는 연애 안 해봤어요? 그런 걸 보고 섬세함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뭐, 뭐? 아니, 너까지 그러기야? 그러는 너는 전생에서 연애해본 적 있어?”
“네? 아니, 어…. 이 세계에 넘어온 뒤라면 있지만…. 전생에서는…. 다가오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거절, 했었어요….”
“거봐! 너도 없으면서! 질하고 사랑하는 것도 집에서 했을 거 아냐 이 집순이가!”
서로 연애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네요.
아오이야 한 번쯤 있었다지만, 라피아의 조건으로만 따지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연옥에서의 연애는 제대로 된 연애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항상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의 연애는 분명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거예요.
결국, 아오이는 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이는 좋지 못한 선택이었죠.
“지, 집순이라니, 저는 그저 책이 좋아서…! 아니, 그러는 라피아는요?! 질하고 밖에 돌아다녀 본 적이라도 있어요?!”
“나는…! 말하기 부끄러운데….”
이런 반응이 나올 게 뻔하잖아요.
당장 최근에만 하더라도 혁명군을 찾을 때 뒷골목에서 흡혈했던 일을 떠올려보면 라피아는 할 말이 많았지만요.
그걸 다른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건 부끄러운 일일 거예요.
“뭐, 뭐라고요?! 어린애랑 뭘 한 거예요?!”
질과 남들 듣기 부끄러울 만한 짓을 했다는 말에 아오이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고 일어나면서 라피아를 혼내려는 듯했어요.
그렇지만 라피아도 이번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죠.
왜냐면, 이제는 질에 대한 것으로 자신이 혼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질의 나이가 어리기는 하더라도 수많은 일을 겪은 데다가, 완전히 사람의 아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종족이잖아요?
게다가 저번 전투에서 아오이가 먼저 사랑하자고 말을 꺼낸 일도 있으니, 라피아에게는 아오이의 지금 행동이 질투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도 말했지만, 질도 알 거 다 알고 있다니까? 언제까지 어린애로 볼 건데?! 그렇게 내가 질이랑 붙어 다니는 게 싫으면 먼저 나보고 데이트하자고 말하던가!”
“하! 그렇게 말해놓고 질이랑은 뒤에서 몰래 어울릴 거죠?! 다 알고 있어요!”
아오이의 대답에 모두의 지레짐작일 수도 있지 않으냐는 의문도 금방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어요.
아오이 스스로도 전혀 부정하지 않고 있는 걸요.
결국, 라피아가 꺼내 든 것은 언젠가 질이 말했던 것처럼, 조금 더 솔직해지라는 말이었어요.
똑같이 테이블을 쿵, 치고 일어서서는 아오이에게 소리쳤죠.
“너, 나랑 단둘이 있을 때 각오해! 가만히 안 둘 거니까! 네가 나를 질이랑 붙어있지 못하게 한다면, 못한 분만큼 너한테 더해진다는 걸 알아야지!”
“뭐, 뭘 하려고…! 그런다고 제가 겁먹을 줄 알아요!? 오히려 좋!? 읏?! 무, 무무! 무슨 말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게요, 아오이의 말대로 단둘이 있을 때 무슨 일을 하려고요.
그래도 어느 정도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아오이도 마냥 싫은 건 아닌가 봐요.
라피아의 어깨를 주먹으로 토닥거리며 때리는 건 부끄러워서라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나 보네요.
“아, 아팟! 아프다고! 네가, 윽!! 야! 그만! 진짜 아프다고!”
“크흠! 그대들은, 본인을 잊은 것인가?”
아, 레나이도 있었죠.
그런데 레나이는 대답 없이 미안해하는 둘의 시선을 피해 창문 밖을 보더니, 식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자신을 빼놓고 사랑싸움을 해서 그런 걸까요?
그러면서도 가게를 나갈 때 계산하는 것은 또 잊지 않았죠.
이런 레나이를 말리기 위해 라피아가 급하게 달려가 말려보았지만….
“황녀님! 잠시만요!”
“황녀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라피아는 숨을 죽였어요.
바깥에서의 레나이가 황궁 안에서 봤을 때와 같은 진지함이 가득해진 얼굴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아니, 그, 레나이 님!”
“정말 괜찮으니, 그대들 둘이서 잘 놀도록. 급한 일이 생겼다.”
“정말 죄송하다니까요!? 지금부터는 황, 레나이 님도 신경 써드릴 테니까!”
라피아의 간절함에 레나이의 마음이 돌아선 걸까요?
레나이는 라피아의 어깨를 잡더니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아니, 정말로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 거니까 본인에게 신경 쓰지 말고 둘이 즐겨. 마군주라지만 이렇게 말을 안 듣는 녀석은 처음이군.”
“마군주? …아, 도와드릴까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흡사 거지와 다름없는 꼴의 소녀가 휘청이며 걷고 있었어요.
라피아는 직감적으로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고 레나이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봤지만….
“이미 말했잖나, 가서 탈리안과 놀도록. 아쉽지만 본인은 저 술주정꾼을 집에 데려다 놓고 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나중에 집에서 봬요.”
“만약 본인과 함께 놀 것이라면, …3시. 3시에 남해안의 등대에서 만나기로 하지.”
“3시, 아오이, 아니, 탈리안에게도 물어보겠습니다.”
결국, 라피아와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 레나이였어요.
모처럼 질을 빼고 셋이서 놀 기회가 찾아왔는데, 아쉽게 됐네요.
그렇지만 아오이와 라피아에게는 충분히 새로운 경험일 거예요.
질 없이 둘만 놀게 된다니, 기대되기도 할 테고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