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금방 들켜버린 밤에
* * *
그날 밤, 질은 좀처럼 보기 힘든 옷을 입고 있었어요.
언젠가 아오이가 질에게 돈을 다 쓰고 오라고 했던 그 날, 직원의 사탕발림에 속아 이것저것 사 온 옷 중에 하나 껴있던 옷이에요.
주요 부위를 제외하고는 반쯤 비치는 검은색의 네글리제.
그 끝자락이 치골의 바로 아래까지밖에 내려오지 않아 상당히 요염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어요.
이런 차림으로 질이 기다리는 사람은 당연, 선약을 잡아놓았던 레나이.
침대에 걸터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10살의 여자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수준이네요.
혼자서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였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질의 집중을 깨트렸거든요.
“지르니트, 레나이다.”
“윽?! 네, 네! 잠시만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질은 어깨를 흠칫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어요.
문고리에 올라간 손은 좀처럼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레나이 쪽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있지 않았어요.
나름의 배려일까요.
아주 천천히,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복도의 빛이 새어 들어왔어요.
레나이의 시선에서 보이는 질의 모습은 앞으로 일어날 은밀한 일을 기대하는 소녀 그 자체였어요.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뺨, 약간 처진 눈썹과 레나이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뭔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자그마한 입술까지.
네글리제를 입은 몸은 그 자체로도 매혹적이었지만, 레나이의 시선은 그 아래, 잘빠진 다리로 향했어요.
“하, 이것 참. 항상 새롭군.”
“드, 들어오세, 아앗?!”
레나이는 질을 번쩍 안아 들어 안쪽으로 향하며, 문을 발로 밀어 닫았어요.
어두운 방 안에는 달빛만이 비추고 있음에도 꽤 환한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레나이는 질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죠.
침대에 던져지듯 한 질은 자신의 위로 올라타 도망갈 곳을 막아버리는 레나이의 팔을 느끼곤 겁먹은 표정으로 올려다봤어요.
“저, 저기, 레나이 언니…. 제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건 조금, 무서워해서….”
“상냥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읏, 네, 네에….”
가면을 썼건, 쓰지 않았건, 질은 이전에 라피아에게 호되게 당했던 경험 때문에 누군가에게 억지로 당하는 것은 싫어하게 되었나 봐요.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인 일이기는 해요.
그 당시, 이어지는 라피아의 장난스런 괴롭힘은 질이 그만해달라며 애원해도 멈추지 않았었으니까요.
어림잡아 절정에 달한 횟수는 최소 8번.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 거예요.
“걱정하지 마, 본인은 황궁 내에서도 상냥하기로 소문났으니까.”
“…언니, 계약에 조건 하나 더 추가해요. 우리 가족 이외에 야한 거 금지.”
“음? 그건 안 되겠는걸. 그렇지, 10분. 그대가 10분만 본인에게서 버텨낸다면 고려해보지.”
“10분?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파격적인 거래네요.
라피아의 괴롭힘에서 그만큼 당했던 질인데, 고작 10분이라니 얕잡아봐도 너무 얕잡아 봤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레나이의 손은 질의 턱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점점 아래로 향했어요.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면서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조용해진 질이에요.
“원래 이런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 매너 위반인 건 알지만, 지르니트. 그대는 다른 누구보다 아름다운 선을 하고 있어.”
“빈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진짜라고, 믿어봐. 수많은 여자를 안아본 본인이 하는 말이니.”
“갑자기 후회되, 읏….”
“쉿.”
레나이는 귓가에 속삭이면서 한 손에 들어오는 질의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어요.
어둠 속이라도, 네글리제를 입고 있어도, 달빛이 환하게 비추어 줬기에 그 형태와 색이 적나라하게 보였지만 레나이의 시선은 질의 입술에 가 있었어요.
가슴을 잡은 한 손은 엄지와 검지만으로 끝을 애태우며 반응을 즐기다가 질의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자신의 입술로 살며시 막은 거예요.
노크하듯 천천히 한두 번 입을 맞추곤, 다른 한 손으로 입술을 열어 혀를 섞었어요.
이전에는 교육이랍시고 여유도 없이 당하기만 했었으니, 이렇게 천천히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은 처음이겠죠.
그렇기에 질의 손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침대의 이불만 꽉 쥐고 있을 뿐이었어요.
레나이의 손이 가슴의 끝을 굴리고, 살짝 꼬집을 때마다, 전에 겪었던 느낌과는 다른 쾌감이 찾아왔으니까요.
한차례 쉬는 시간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질의 눈이 완전히 풀어져 있었어요.
“어때? 아직 4분 남았는데, 버틸 자신이 있나?”
“4분이면, 충분, 해요….”
“하핫, 이렇게 적셔놓고 충분하다니….”
“아응…!”
레나이가 한번 손을 쓱 훑고 지나가자 투명한 물이 손가락에 묻어났어요.
질에게 일부러 과시하듯이 손가락을 비비다가, 약간은 점성이 있는 것을 보여주었죠.
그 뒤, ‘센 척을 하는 부류의 사람에게는 이 방법이 제일이지.’라며 레나이는 질의 양다리를 잡아 크게 벌렸어요.
“뭐, 뭐 하는 거예요?!”
“뭘 하기는, 이런 걸 하려는 거지.”
“히익, 그, 거긴 더러운데…! 앗, 흐윽?!”
벌어진 다리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은 레나이는 질의 물기 어린 곳을 핥기 시작했어요.
처음 당하는 일에 억지로 레나이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하는 질이었지만, 이미 불리한 자세로 눕혀진 상태에서는 여간 쉬운 게 아니었어요.
발버둥 쳐도 억눌려있는 다리 때문에 저항의 의미가 없었죠.
그리고….
“명한다. [쾌감에 몸을 맡기도록. 저항은 하지 말고, 모든 걸 본인에게 넘겨.]”
결정타로 레나이의 명령 때문에 질은 가만히 허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에 손가락이 쉬지 않고 민감한 돌기를 상하로 문질러주며 질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기도 했어요.
“거짓말, 거짓말쟁이! 안, 안 쓴다고…! 상냥하게, 한다고…! 했으면서어…! 아?! 시, 싫엇! 또, 또 그때처럼…! 아읏, 흑!?”
레나이의 말의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질은 다리를 힘껏 오므리며, 아래쪽에서 실금하듯 투명한 물을 기세 좋게 흩뿌렸어요.
한껏 들린 허리가, 이따금 경련하는 몸이, 질이 얼마나 레나이에게 몰렸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원래라면 상냥하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말이지. 그대가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본인이 그대의 진실된 가족이 될 것이라면 응당 그 제안에 타야 하는 것이 맞아. 하지만, 본인은 여색이 너무나도 좋다. 포기하지 못해.”
레나이는 질에게서 떨어져, 휴지로 자신의 얼굴을 흠뻑 적신 물을 닦으며 말했어요.
다 닦아낸 뒤에는 입맛을 대며 다시 질의 옆에 앉아,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하복부를 쓰다듬기 시작했어요.
아직 끝이 아니라는 의미의 손짓이었어요.
“허나, 이것으로 그대의 제안에는 따를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제부터는 충분히 상냥하게 해주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아.”
하지만 아직도 숨을 고르는 데에 열중인 질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어 보였어요.
레나이의 손은 질의 하복부를 쓰다듬다 보니 다시금 젖게 되었어요.
처음 절정에 달한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물을 흘려, 축축했으니까요.
하복부에서, 치골, 허벅지, 그리고 사타구니 안쪽까지.
“미리 물어보겠는데, 그대는 안쪽을 허락한 사람이 있나?”
“하아, 읏…. 안쪽…?”
“여기를 말하는 것이다.”
레나이는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방금까지 자신이 핥고, 빨았던 곳을 가리켰어요.
“없어요…. 없지만, 거긴, 아, 탈리안 언니한테, 주고 싶어서….”
“후, 큿, 흐흐…. 기특하군. 기특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그럼 아직은 이곳을 공략하지는 않도록 하지.”
질은 미적지근하면서도 잘 가시지 않는, 열이 오른 얼굴로 의외라는 듯이 레나이를 바라봤어요.
지켜줄 것은 지켜준다는 걸까요.
레나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이고는 질을 자극하는 걸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도 혼자서는 즐겼을 것 같은데?”
“혼자서는…. 했었죠…. 그렇지만 라피아 언니에게도, 베리아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곳이에요….”
“왜 그렇게 둘이서 기를 쓰고 좋아하는지 알 것 같지 않나. 이렇게 귀여워서야….”
“언제까지 그렇게 만지기만 할 거예요….”
질은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매만지는 손을 멈추지 않는 레나이에게 불만 가득한 투로 말했어요.
그렇게 당하기는 했어도, 부족하기는 하다는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 일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뭐가 됐든, 오늘 밤의 일은 레나이와 오간 모종의 거래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요.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열이 식으면 추워지기도 할 테고…. 아니면, 이러길 바라나?”
“하으, 읏…. 아니, 아니에요….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나이는 질의 요청에 따라 돌기를 살짝 집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강한 쾌감을 느낀 질은 자신의 상태가 바로 이어질 행위에는 벅차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바로 항복하고 레나이의 손길을 느끼기로 했죠.
완전히 레나이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 같네요.
“충분히 쉬어 둬, 아아, 그렇지. 이번에 셀레스라는 마군주가 본인과 계약했다.”
“그건, 하아…. 지금하고 어울리지 않는 주제 같, 으응…. 같은데요….”
“뭐, 일단 들어보도록. 그 셀레스라는 마군주, 이번 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어 있더군. 배후라고 해도 될 정도였어. 지금은 황궁에서 지내고 있지만….”
“언니하고 계약했으면, 문제없잖아요….”
질은 레나이의 말에 힘겹게 대답하면서도 눈을 감고,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오는 손에 매달리듯 붙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레나이의 말이 끊기더니 한숨을 내쉬고선 질을 바라보는 거예요.
“…지르니트, 그대가 나 몰래 자위하고 있는걸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네, 네?! 아, 안 그랬어요!”
거의 발작하듯이 레나이의 말을 부정했지만, 질이 당황하면 나오는 버릇인 강한 부정은 오히려 레나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해주는 것 같았어요.
실제로도, 질은 미묘하게 달아오른 몸에 안타까워했거든요.
“본인의 팔에 착 달라붙어서 교묘하게 숨긴 한쪽 팔로 가슴을 달래고 있던 걸 뻔히 아는데 말이야. 그렇게 안타까우면, 차라리 이곳을 괴롭혀주는 쪽을 더 좋아하겠군.”
“아, 아니에요! 아닛…! 으읏!?”
레나이의 말대로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던 사실이 들켜,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다시 자극을 받기 시작한 질은, 이 뒤로도 실컷 괴롭혀져 여러 번 절정에 달했어요.
땀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몸과 가슴팍에 새겨진 적지 않은 수의 키스 마크, 레나이의 어깨에 새겨진 잇자국까지.
본 실력을 뽐내기 시작한 레나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피아 때처럼 심하게 괴롭혀진 건 아니었어요.
레나이는 정도를 아는 사람이니까요.
적당한 페이스 조절에 배려하는 듯한 상냥한 손길은 레나이뿐만 아니라 질도 만족스럽게 했거든요.
“언니는, 대단하네요….”
질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해도 될 거예요.
기사단도 전부 여자만으로 채워 넣었는데 질을 만족하게 할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기쁜 얼굴을 하면 다시 이어서 하고 싶어지는데 말이야. 본인은 7 정도밖에 만족하지 못했거든.”
“7? 전체가 몇인데요?”
“10이지. 그렇지만 이 정도면 꽤 후한 점수라고? 보통은 4에서 5까지밖에 나오지 않으니.”
“그런 거예요…?”
“그대의 손길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교육해준 것을 그대로 흡수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어.”
도중에 질의 교육도 겸했었나 보네요.
가르쳐주는 것을 모두 흡수해서 그대로 레나이에게 써주었다는 말이니까요.
만족했다고도 말했으니, 알려주는 족족 질은 레나이의 기술을 자신의 기술로 만든 것이겠죠.
나중에 쓸 일이 생긴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말이다. 마군주 셀레스의 정보를 토대로….”
“레나이 언니! 저 있잖아요? 더 이상 마군주와의 일에 엮이는 건 사양할래요.”
그런데 이야기가 잘 흘러가던 와중에 질이 레나이의 말을 끊었어요.
마군주와 엮이는 것은 싫다고.
레나이는 자신의 말을 끊은 것에 불만인 듯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어요.
서로 잘 즐기고 난 뒤의 분위기를 망치기도 싫은 것은 당연하며, 여기에서만큼은 황녀가 아니니까요.
그저 조용히, 질의 생각을 물어볼 뿐이었죠.
질은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입으며 짧은 고민을 마친 뒤에 대답했어요.
“저 많은 사람을 봐왔어요.”
긴 이야기가 시작될 거란 직감에, 레나이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어요.
질은 준비가 된 레나이를 보자마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모아 올려묶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죠.
“저는 가족을 잃고, 제르반 오빠를 잃었어요. 무언가를 잃었던 슬픔에 잠겨, 복수심에 불탄 적이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로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모든 마기노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보니까요. 그러고 보니까….”
질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 한명 한명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레이지 크롬웰, 아스티엘 라피아, 알렉세이 제르반, 리니스 시멜리, 아이펠슈에, 벨루아 알마, 제리 펠 아크티스, 플랑….
적다고는 하지 못할,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을 봤어요. 알마 언니는 제르반 오빠를 잃고 저에게 슬픔을 부딪쳐 왔어요. 또 베리아는 소중한 사람의 명예를 더럽혀졌다는 생각에 마군주 라파르에게 복수했어요. 그걸 보고 나니까 알게 된 거예요.”
레나이는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어 ‘복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이라며 물어봤어요.
하지만 질의 대답은 전혀 아니었죠.
“무의미하지는 않아요. 저는 복수에 성공하면, 그만큼 노력했으니까 노력 자체는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자신의 목표를 이룬 거잖아요.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이전에 보았던 슬픔이랑, 공허한 무언가가 있을 뿐이었어요…. 그렇다면 노력해도 고통뿐인 가시길 보다는 제자리걸음일 뿐이더라도 조금은 색이 바랜 꽃밭을 걸어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는가.”
“적어도 제가 챙길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챙겼다고 말해주세요. 저는 쭉, 탈리안 언니의 옆에, 라피아 언니의 옆에 있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잃을만한 그런 위험은 하나도 겪고 싶지 않아요.”
설령 도망치는 것이라도 머릿속으로, 또 마음속으로 수없이 고민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일 거예요.
잃고, 잃고, 또 잃으면서 내린 결정이 지금 레나이에게 말해준 이 말일 거예요.
이 결정은 레나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평하더라도 절대로 바뀌지 않겠죠.
“그대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둘을 속이는 것이 될 터.”
레나이의 말에 질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레나이를 바라봤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제르반 오빠가 저에게 남긴 희생적인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옛날에 저 스스로 다짐했던, 저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잃을 것 같은 위험에는 일부러 나서지 않겠다는 거예요. 찾아오는 위험에만 맞받아칠 뿐인 거죠.”
“그 제르반이라는 자를 좋아했나? 상당히 애틋하게 말하는군.”
“네? 설마요! 으으! 저는 탈리안 언니랑 라피아 언니가 아니라면 싫어요! 제르반 오빠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싫어요! 생명의 은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거부감이 든단 말이에요!”
“음, 미안하다. 그대가 그렇게 굳은 의지를 가졌다면, 라피아를 인질로 삼아 협박한대도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다만, 상당히 실망했다.”
실망했다는 말에 질은 표정을 지웠어요.
방금 웃었을 때와도 같았지만, 레나이는 평소와는 아예 다른 질의 모습에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죠.
가면을 쓰지 않은, 베리아에게 보여주었던 그때의 그 모습이었어요.
“아…. 용사 후보생인 제리 씨였나? 그분한테서 배운 거예요. 현실이랑 타협한 거라구요. 뭐 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까.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지금조차도 이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탈리안 언니를 제외한다면, 정작 저와 상관있는 사람들은 한 번도 제대로 구한 적이 없어요. 아빠, 엄마, 동생, 제르반 오빠, 베리아까지…. 전부 잃기만 할 뿐인걸요.”
“정말 잃기만 했나? 그대가 파괴한 슬리브스터의 거점에서 구해낸 사람들은?”
맞아요.
그동안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파괴하면서 구해낸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수많은 노예가 질에게 구원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죠.
하지만 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활짝 열어젖힌 창문 앞으로 가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깐의 사색에 잠겨,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레나이를 쳐다봤어요.
“말했잖아요? 저와 먼 사람들은 지켜내면서 저와 가까운 사람은 하나도 구해내지 못했어요! 심지어 베리아는 제 손으로 죽여야 했다니까요!”
아무래도 베리아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일이 질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나 보네요.
진정하기 위해 바람을 쐬었던 것이었을 텐데도, 질은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언성을 높였어요.
“…아직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탈리안 언니의 친구인 아이펠슈에 언니는 이렇게 말했어요. 모든 불행은 노력이 부족했던 저의 탓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난 뒤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요! 이래도 안된다면 포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계속 잃기만 하는데, 여기서 더 노력해야 해요?! 그러다가 또 잃는다면요! 이젠 정말 지쳤어요…. 누군가를 잃는 것도 싫고, 슬퍼하는 것도 싫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도 싫어요. 그냥 언니들이랑 행복하기만 할래요.”
몇 개월 전, 대재앙으로부터 지금까지 지르니트는 너무나 많은 상실을 겪었어요.
레나이도 이를 알고 있기에 깊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있었죠.
질에게는 충분히, 이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어요.
”알았다. 실망했다고 했지만,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 사실만 따지면 그대는 나쁘지 않다. 그대 같은 어린아이를 탓해서 뭘 하겠어. 고작 10살이라는 나이에 뼈아픈 체험을 하게 한 이 세상이 나쁜 것을. 전부 이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탓이다.”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렇지만 약간은 후회도 해요. 조금 더 노력해서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길도 있지 않을까, 그런 후회가. 그래도 이미 선택했으니까, 저는 제 힘이 닿는 곳에서만 사람들을 지킬래요.”
약간의 후회가 남아있다는 말에 레나이는 굳은 표정을 풀었어요.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에서 질을 안아주고는 남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죠.
뜬금없는 포옹에 잠깐 놀란 질이었지만, 금방 그 손길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가능성 자체는 열어두도록 하지. 언제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본인에게 연락하는 게 좋아. 전력으로 도와줄 테니. 본인은, 지금 그대로의 지르니트 페어차일드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지르니트 페어차일드가 분명 더 보기 좋을 테니.”
“그런 날이…. 올까요.”
“언젠가는 올 것이다. 본인이 장담하지. 늦었으니 얼른 씻고 자도록 해. 그대가 부탁한 건은 대가도 받았으니 확실히 처리해주지.”
“고마워요. 먼저 씻으세요. 바람이 기분 좋아서…. 저는 조금 더 있다가 씻으러 갈게요.”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레나이는 질에게서 떨어져 행복을 빌어주겠다는 말을 하며 방에서 나갔어요.
질은 레나이에게 손을 흔들다가 문이 닫히면 그대로 뒤를 돌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생각이 많은 새벽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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