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뒤바뀐 입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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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르가 다르크의 시체에 달려드는 것을 보고, 기습을 고려해 뒤로 물러난 베리아와 질은 그 둘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다르크를 죽인 이상, 베리아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봐야 했으니까요.
“로니아, 저….”
그런데 질이 말을 걸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베리아의 얼굴을 쳐다봤어요.
“크흐흣, 흐하, 하하핫! 꼴 좋구나, 라파르!! 네 녀석이 하등종과의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도! 아하하하!!”
아직 라파르를 죽인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반 정도는 달성했다는 기쁨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적이라고는 하지만 슬픔에 빠져 멍하니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상대를 비웃는 베리아의 모습에 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스스로 악인이라고 했던가요?
누군가의 죽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제 알겠느냐?! 누군가를 잃는다는 슬픔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 아직, 아직이야…. 이 몸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아아, 네 녀석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로니아? 더 뭘 하겠다는 거예요…?”
“…닥쳐라. 중요한 일이니.”
베리아는 이 방에 처음 도달했을 때와 같이 새빨간 마기의 안개를 만들어내 방을 가득 채웠어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마자, 질이 보고 있던 베리아는 눈치챌 겨를도 없이 한순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슬픔에 빠져 넋이 나간 라파르가 입을 열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을 하는 거예요.
이미 죽어버린, 움직일 리가 없는 다르크에게.
“다, 다르크?! 괜찮은 거야?! 다르크!”
다르크는 손을 움직여 라파르의 손을 잡아줬어요.
싸늘해진 시체가 되어있었을 텐데, 가슴에 뚫린 상처가 메워져 있는 채로요.
기적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일에 놀란 라파르를 향해, 무언가의 말을 전하는 다르크였지만 질은 거리가 멀어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죠.
그저 실시간으로 라파르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만 볼 수 있었어요.
안개 때문에 정확한지조차 모르지만요.
“베리아아아!! 네가, 이 죽여버릴 년이!!”
“크하하핫! 공격할 수 있겠느냐?! 네 녀석이 사랑했던 다르크라는 남자의 몸을?!”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라파르에 답하는 다르크의 말투는, 완전히 베리아의 것이었어요.
탈리안이 잡혀있던 지하감옥에서 봤던 타인의 몸을 빼앗아 조종하는 능력을 썼나 보네요.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걸 뜻하는 것이었나 봐요.
베리아는 다르크의 몸을 일으켜 세워, 라파르의 목을 잡아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방의 한구석에 던져버렸어요.
흙먼지가 일어 라파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베리아는 그쪽을 향해 소리쳤죠.
“네 녀석이 가티아를 가지고 놀았을 때, 이 몸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이제야 피부에 와닿느냐!? 전부, 전부 네 녀석이 자초한 일이다!!”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작은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 안쪽에서 라파르가 비틀거리며 나왔어요.
얼굴에 흐르는 한줄기의 피가 얼마나 세게 던져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애초에 다르크의 몸부터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 다르크를 못 움직이게 했던 것만으로도 베리아의 권능은 대단했어요.
“다르크가, 다르크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고!!”
“그렇게 소중했다면 구석에 처박아두고 싸우지 못하게 해야 했던 것이 아니더냐?! 이런 같잖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하등종이 가티아와 같아? 마군주 하나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웃기는군!!”
베리아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어쩌다 사랑에 빠져, 어쩌다 소중하게 여기게 된 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렇게 소중했다면 전쟁 같은 일은 아예 하지도 못하게 숨겨놨어야 했어요.
한번 되살아나, 다음에라도 다시 한번 더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마군주인 자신이라면 몰라도, 다르크는 아니잖아요.
물론, 다르크가 혁명군의 리더이기에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기는 하지만요.
라파르는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도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투로, 적반하장으로 소리쳤어요.
“그 년은 원래 죽어있었어! 아무것도 아닌 시체로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렇다면 이 몸이 다르크라는 쓰레기의 몸을 가지고 놀아도 네 녀석이 참견할 이유는 없겠구나.”
“헛소리 하지 마! 내가 너랑 같다고 생각해?! 네가 어땠는지는 내 알 바 아니라고!”
질이 베리아의 기억을 통해 바라봤을 때랑 다를 게 없네요.
라파르는 시간이 얼마나 지나도 라파르였어요.
베리아도 이에 무언가 생각의 정리를 마친 것처럼 라파르를 비웃었어요.
“…후, 크흣! 그래, 한편으로는 걱정했었다. 네 녀석이 혹시나 개심하고 이 몸에게 사과를 해온다면 어쩌나 싶었지. 하지만 기우였구나. 여전히 옛날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어 감사한다. 고민할 필요 없이 네 녀석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닥쳐, 닥쳐! 다르크의 몸을 돌려줘!!”
대화를 더 길게 이어갈 생각은 없는지 라파르는 베리아에게 달려들었어요.
그래 봐야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뭔가 할 수 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지만요.
이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거겠죠.
“후후후, 이미 죽은 녀석이다. 돌려준다 한들 뭐가 달라지지? 다르크라는 쓰레기의 몸은 이제는 이 몸의 것이란 말이다! 이전에 네 녀석이 그러했듯이!!”
당연하지만, 라파르의 단도를 이용한 공격과 뱀의 형태를 한 마기가 함께 달려드는데도 베리아는 너무 쉽게 피해버렸어요.
마군주를 검압 한 번에 날려버릴 다르크의 신체 능력이 베리아에게 갖춰진다면, 이 정도는 아무런 일도 아니겠죠.
“더 날뛰어라! 슬픔에 더 몸부림쳐라! 네 녀석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를 것이다!”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네년의 사지를 분해해서 벌레들의 먹이로 줘버리겠어!!”
마군주 둘이 싸우고 있는데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
어딘가 익숙한 장면에 질은 기억을 더듬어봤어요.
베리아가 말한 적이 있는, 다른 마군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라파르를 가지고 놀았다던 그 장면과 완전히 똑같았죠.
라파르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면 가볍게 피해내, 모두의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적당히 손대중만 하며 놀기 시작한 거예요.
무기를 쳐내어 바닥에 떨어트리고, 내지른 팔을 잡아 관절을 꺾어 부러뜨렸으며, 그럼에도 다시 덤벼온다면 발로 복부를 강하게 차서 다시 날려 보냈어요.
바닥에 몇 번이고 강하게 굴러, 꺾인 관절이 비틀릴 수준이었지만 베리아는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요.
“그 시절이 그립구나. 가티아를 생각하는 마음도, 연옥을 바꾸겠다는 허무맹랑한 꿈도 잊고 욕망에 충실히 살았었을 때가.”
“웃, 기지…. 마, 내가 왜…. 너한테 다르크를…. 빼앗겨야, 하는데…!”
라파르의 생명력은 바퀴벌레와도 같아, 베리아가 어떤 식으로 상처를 주든 비틀거리며 일어났어요.
하지만 그런 라파르를 보는 베리아의 눈빛이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차가워져 있었어요.
“라파르, 이 몸은 네 녀석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했다면 그걸로 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네 녀석이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이 몸에게 화를 낸다고는….”
“내가 왜 사과를 해!! 가티아를 내가 죽였어?! 오히려 고마워해야 되는거 아니야!? 움직일리 없는 가티아를 내가 움직이게 만들어 줬으니까아!!”
이 말을 기점으로 질은 라파르를 걱정스럽게 보기를 그만뒀어요.
사람이라면 입에 담을수 없는 말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내뱉었으니까요.
게다가 베리아의 감정이 실시간으로 자신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더는 막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거겠죠.
“그래, 그래야지. 즐기는 것도 잠시뿐이다. 결국은 복수라는 것의 끝은 허무밖에 없으니, 길게 끌어서 좋을 것도 없지.”
“당하고 있기만 할 것 같아…! 내가, 내가 다른 마군주들한테 기면서 힘을 받은 이유가 뭔데!! 나 혼자만 죽을 수는 없어!!”
다시 한번 발작하듯이 덤벼들려는가 싶었던 라파르는 제자리에서 마기를 끌어모아 바닥을 향해 부딪혔어요.
예상외의 행동에 베리아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서 라파르와 마기가 모여드는 지점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지르니트! 녀석을 막아라!! 연옥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 작정이다!!”
지금껏 구경만 하던 질에게 큰소리로 명령하며, 함께 라파르를 저지하기 위해서 달려들었어요.
예전에 탈리안과 함께 보았던, 불길한 소용돌이가 치는, 한계를 알 수 없는 구멍.
그것을 떠올린 질 역시 자신이 당한 일을 생각하고는 베리아의 명령에 곧바로 따랐어요.
아직은 마기가 모여들어 기반이 만들어지는 단계이지만, 그대로 놔둔다면 작은 문일지라도 다른 마기노들이 넘어오기에는 충분한 크기였거든요.
“어떻게 막으려는 건데요!? 막을 방법은 있어요?!”
“네 녀석이 라파르가 이 몸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해라! 문은 이 몸이 닫을 테니!”
“윽, 크흑! 아하핫, 아하하하! 왜 그렇게 필사적이야?! 하등종, 하등종 노래를 부르더니! 왜 이 세계를 지키려는 거냐고오!! 베리아아아!!”
잔뜩 악이 오른 라파르는 질의 마나가 담긴 주먹에 맞아 휘청이면서도 여전히 베리아를 향해 소리치기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질의 공격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비틀린 분노에 고통도 잊고, 재앙의 문을 닫으려는 베리아에게 다가가고 있었죠.
모여드는 마기 앞에 앉아 자신의 마기로 흐름을 역전시키는 베리아.
그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라파르의 몸이 베리아에게 제대로 된 공격이라고는 하지 못할, 걸레짝이 되어있었기에 질도 라파르를 저지하는 것을 멈춘 뒤였어요.
“왜, 왜 나한테…. 나한테서어…. 다르크를 빼앗아간 거냐고…. 망할 년아….”
“지르니트, 나머지는 네 녀석이 해라. 마기의 흐름을 거스르다 보면, 이때다 싶은 느낌이 올 거다. 그 뒤로는 추상적이지만, 마기로 이어진 끈 같은 것을 끊어낸다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리면 된다. 조금 더 설명을 해주고 싶지만….”
“네?! 아니, 제, 제가 하라구요?! 앗! 로니아!!”
베리아는 억지로 질을 자신의 자리에 끌어와 놓고, 코앞에서 쓰러져 자신을 노려보는 라파르의 머리채를 잡아 한쪽 구석으로 향했어요.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문을 닫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질은 그저 마기에 집중하면서도 곁눈질로 둘을 바라볼 뿐이었어요.
“이 몸이 네 녀석과 만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만 있다고 했었지. 다만, 말했듯이 허무하구나.”
“킥, 킥킥…. 그래도, 후회 안 해…. 이걸로, 너는 또다시 가티아인지…. 뭔지, 그 잡년을 기억하면서 살아…. 갈 테니까….”
“후후…. 이 몸이 다시 가티아를 기억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확실히 네 녀석 덕분에 마음고생 좀 했지. 그러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생각해보니 죽이는 것은 너무 가벼운 형벌이지 싶었기에 새로운 것을 준비했다.”
마지막까지 베리아의 인내심을 건들려는 라파르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머리채를 잡은 손의 힘을 놨어요.
“…윽! 다르크 곁으로 보내주려는 거야? 흐흣, 흐…. 윽?! 컥, 끄윽…!”
숨통이 트여 말을 제대로 이어가 다시 비웃으려 하자마자 재빠르게 라파르의 목을 조였어요.
그리곤 허공에 마기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더니,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빛나는 돌덩이와 함께 마정석을 하나 꺼냈죠.
“대신전에 갔을 때, 네 녀석에게 딱 맞는 물건을 가져왔지. 이 몸의 자그마한 선물이다.”
“끅, 끄윽…. 기분 나쁜 그거, 뭐야…!”
“마기를 억제하는 신성석이다. 방음 기능을 넣은 마정석도 있지. 네 녀석도 알다시피, 마군주는 코어가 무사한 경우 한도 끝도 없이 살아있지. 이 세계의 하등종처럼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영원히.”
베리아는 말을 마치고선 라파르의 살점을 파내어 신성석을 몸 깊숙이 집어넣었어요.
그리곤 날카로운 다르크의 손톱으로 사지를 깔끔하게 잘라냈어요.
물기 어린,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사지.
완전히 오뚝이 인형이 되어 바둥거리는 꼴이 꽤 흉측하네요.
“어허, 피를 많이 흘려 죽기라도 하면 안 되지. 마기노에 있어선 앞으로 겪을 일도 죽는 것과 다름이 없다만.”
“아, 으으윽…!!”
베리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마기를 달궈, 라파르의 출혈을 막았어요.
이로 인해 신성석도 새로 녹아내린 살에 파묻혀 쉽게 꺼내기 어려워졌네요.
“이곳이, 네 새로운 연옥이다.”
“안돼, 안돼!! 그만, 그, 읍?! 컥! 으, 어억…!”
몸을 비틀며 저항하는 라파르의 입속으로 마정석을 집어넣어 억지로 삼키게 했어요.
그리곤 라파르의 몸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을 파내고는 던져버렸죠.
열심히 도망가려고 몸을 비틀지만, 사지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제자리에서 꿈틀대는 오뚝이 인형과 똑같았어요.
한참을 발버둥 치다 진이 빠진 라파르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짓던 베리아는 천천히 돌무더기를 가져와 숨구멍만을 남겨두고 라파르를 묻어버렸어요.
곧이어 짙은 안개가 걷혀가며 다르크의 몸이 라파르가 묻힌 곳 위로 쓰러지고, 안개가 모여들어 다시 베리아가 나타났어요.
“끝났나?”
“…네.”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지?”
“로니아의 얼굴이랑 그다지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해요.”
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잡았지만, 베리아는 곧바로 뿌리쳐버리며 비웃었어요.
“계약 이행의 시간이다. 지르니트.”
“정말, 이렇게 가야 해요?”
“정든 것이냐?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몸을 한번 섞었다고?”
“농담이 나와요?! 저는…! 저는….”
시기가 좋지 않기는 하네요.
베리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테니,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이전에 베리아가 스스로 말한 적이 있어요.
‘가족을 죽인 원인이 있는 자신에게 농락당하면서 기쁘게 울어댈 줄은 몰랐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베리아도 분명 질에게 영향을 받았어요.
그 결과, 사람을 깔보고, 위에 서는 것만을 좋아하고, 제 손안에 두기 좋아했던 베리아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가티아를 떠올리게 되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툴툴거리기만 할 뿐인 로니아로 말이에요.
이는 지금, 베리아가 하는 말만 들어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가티아의 복수는 이뤄냈다. 마정석은 미리 마기로 오염시켜두어, 라파르의 마기를 연료로 영원히 지속될 방음(?音) 마법을 발동시킬 거다. 재앙의 문도 네 녀석이 확실히 닫아 놓았다. 혁명군의 리더 역시 네 녀석이 마무리 지었다. 모든 일이 잘 되었는데, 무얼 신경 쓰는 것이지? 이 몸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것이다. 이 몸은 악인으로서 사라질 때이지.”
“로니아도 스스로 인정했잖아요! 자신이 로니아라고! 그렇다면 제가 도와줄 테니까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저랑 같이…!”
당연히 질은 베리아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마음인 것 같지만요.
마음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베리아는 질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강수를 놨어요.
“…계약을 이행하지 않겠다면 네 녀석에게 넘겨준 코어의 반분을 다시 회수해 가겠다.”
“왜, 왜 그렇게 쉽게 목숨을 포기할 수 있는 거예요?!”
“자, 이것이 이 몸의 코어다. 이미 신성석에 의해 많이 약해졌지. 이 몸의 코어를 깨부수면 안에서 네 녀석에게 건네주었던 나머지 반분의 베리아의 코어가 나타날 것이다. 그건 네 녀석 마음대로 흡수하거나, 버리거나…. 마음대로 하도록.”
자신을 붙잡는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가슴팍에서 코어를 꺼내 보여주는 베리아에요.
이제는 완전히 질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나 봐요.
“로니아….”
“서두르지 않으면 탈리안과 라피아가 들이닥칠 거다. 계약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그 둘은 자신의 눈 앞에서 이 몸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 …어서.”
“이미 로니아는 혁명군도 막고, 마군주도 막아내서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적까지 올렸는데!!”
베리아를 향해 소리치는 질은, 말은 이렇게 해도 손을 코어로 뻗고 있었어요.
이전보다 마기를 뿜어내는 양이 현격히 줄어든 코어는 색도 연해져 그 투명한 속을 비추게 했죠.
속을 알 수 없이 탁한 색을 띠던 게, 마치 정화된 것처럼 보였어요.
“악인치고는 꽤 행복한 결말이다만,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구나.”
“…시끄러워요. 이런 부탁, 로니아가 아니었다면 들어주지도 않았을 거라구요!”
“알고 있다. 네 녀석은 물러 터졌으니. 이러는 것도 꽤 큰 결심을 해야 했겠지.”
“알면, 조용히 해요….”
질은 서서히 자신의 마기를 베리아의 코어에 모아, 베리아의 코어는 흡수하면서 로니아의 코어에는 금이 가게 했어요.
점점 금이 가며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는 코어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보였죠.
아슬아슬한 이 잠깐의 사이에, 베리아는 마지막인 것처럼 천천히 무언가를 말했어요.
“크윽…. 지르니트, 이 몸을 포함해서 제일 처음 이 세계에 넘어왔던 마군주는 총 다섯이다. 아가레스, 베리아, 아이펠슈에, 아비고르, 단탈리안.”
언젠가 한 번씩 들어봤던 이름들이에요.
아가레스라는 이름만 빼면 질이 실제로 다 만나본 인물들이죠.
아비고르는 스쳐 지나간 인연이지만요.
“아가레스는 다른 마군주들보다도, 현격하게 강력한 녀석이다. 파괴와 살인밖에 모르는, 본능 그 자체. 그놈에게는 설득하려 들지 말거라. 이 몸도 그놈 앞에서는 기어야 했으니.”
“…그렇게 강해요?”
베리아마저 기어야 했다면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되지 않네요.
얼마나 강력하길래 질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걸까요.
“마주치면 도망쳐라, 그것도 가능할 경우의 이야기이지만…. 아가레스를 처단하겠다는 생각은 고이 접는 게 나을 것이다. 태초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알겠어요.”
심지어 도망치는 것도 안 되고, 태초신만이 처리할 수 있다고 해요.
아무래도 상식 밖의 이야기인 것 같네요.
질이 베리아의 말을 귀담아들었을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뭐가 됐든, 베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제대로 된 말을 못 하고, 툭툭 끊어진 단어만을 말했어요.
마지막에는 힘겹게 떨리는 손을 질의 뺨에 가져다 댄 베리아였지만, 그 순간에 코어는 완전히 바스러져,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어요.
동시에 베리아는 마기의 안개 덩어리가 되어 흩날려버렸죠.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네요.
분명 다른 길은 있었을 거예요.
베리아가 개심하고 질과 가족으로서 지낼 수 있는 미래가 있었을 테죠.
안타깝지만, 지금의 질에게는 그 미래를 고를 수 없었던 거예요.
고를 수 있었더라도, 일부러 고르지 않았던 거예요.
베리아가 유일한 질의 이해자라고 했던 것처럼, 질 역시 베리아의 유일한 이해자였으니까요.
만난 시간, 교감을 나눈 시간은 짧지만,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질은 코어를 나눠 받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베리아가 사라진 곳에 남은 코어의 잿더미를 보고 있었어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숨기고는 쭈그리고 앉아 어깨를 떨었죠.
그러던 도중에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놀라 옷소매로 몇 번 얼굴을 비비고, 문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적에 대비해 마나를 한껏 달궈놓았지만….
확실한 윤곽을 알아본 뒤에는 그 적이 탈리안과 라피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질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둘에게 알려줬어요.
황궁과 교회에 댈 핑계가 필요해진 탈리안은 머리가 복잡했지만, 우선은 마군주를 둘이나 처리했다는 점에 안심했어요.
질이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고 끝난 것이 다행인 일인 거죠.
“별일 없어서 다행인데, 근데 탈리안. 황궁의 기사들이랑 우리 가문 사람들은?”
“저의 분신인 실리아와 달리아, 그 외의 분신이 영원의 도서관에서 직접 해주를 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올 거예요.”
“아, 다행이다아…. 진짜로, 진짜 다행이야….”
잊고 있던 아군의 일도 잘 마무리된 것 같네요.
“아오이 언니.”
“네?! 네, 에…?”
“왜 그렇게 놀라요…?”
“아, 그게…. 동생이 생각나서….”
“…동생? 어쨌든, 남은 혁명군들은 어떻게 했어요?”
“그러고 보니 어디에도 혁명군이 보이지 않네요…. 설마, 미리 이동해서…. 황녀에게 알려야겠어요. 둘은 먼저 돌아가 있어요. 알겠죠?”
아직 해결이 안 된 일이 있었나 보네요.
이상하긴 했어요.
혁명군이라고는 다르크와 라파르 이외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모두 고생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던 거예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