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57화 (157/189)

〈 157화 〉 뒤바뀐 입장 (5)

* * *

어떻게든 전장의 정리를 끝마친 라피아와 탈리안은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어요.

전력 차는 약 1만 대 1.

2만 명이 넘어가는 아군을 두 명이 상대해야 했으니까요.

잘 싸우고 있을 질과 베리아가 걱정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약간의 휴식이 필요할 거예요.

서로 이어지는 일이 있기도 했지만, 이런 둘에게 다른 걱정인 점이 있다면….

“있잖아. 탈, 아오이, 혁명군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맞아요.

라피아도 알고 있듯이, 둘이 고생하며 최소한의 사상자를 내며 전투에서 이긴 것은 아군이 상대였기 때문이에요.

원래 상대해야 했을 상대는 혁명군이었으니까요.

“그렇네요, 혁명군은 실력은 없지만, 수가 많다고 해서 이런 많은 수의 아군이 온 거였는데….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설마 하는 생각이지만 탑 안에서 매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질이 위험할 것 같은데.”

“…바로 갈까요.”

질이 위험한 것 아니야는 말에 벌떡 일어서는 탈리안 좀 보세요.

이러면서 평소에 질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화를 내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라피아는 갑자기 마법 지부 안으로 들어가려는 탈리안을 보고 놀라 일어나려다 말고 발을 헛디디면서까지 허리를 잡고 늘어졌어요.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걱정돼? 네가 말했잖아. 실력은 없는 애들이라고. 그럼 질이 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너는 보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 같아.”

“라파르의 능력을 봤잖아요. 연옥에 있을 때, 저런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옆에 베리아도 있었잖아? 베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질을 지켜줄 거라고.”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쉰 거 아니에요? 얼른 출발하도록 해요.”

“나 아직 다리가 안 움직여. 너무 열심히 싸웠나 봐. 업어줘.”

계속되는 재촉에 라피아는 설득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는지, 탈리안이 뻔히 보는 앞에서 다시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버렸어요.

라피아도 참 열심이네요.

“…업어달라고요? 지금까지 바닥에 쓰러져있다가 제가 움직이니까 달려들어서 허리를 끌어안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그건, 그러니까? 어어! 이미 사랑하는 사이에 포옹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쓸만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말을 더듬어가며 손짓에 몸짓까지 해가며 말하네요.

하지만 다리가 끌리는, 반쯤 누운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썩 좋은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는 해도 이제 막 시작한 관계잖아요.

게다가 살아온 시간만으로 따져도 라피아가 한참은 연하이기도 하고요.

상점가에서 군것질거리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와 다를 게 뭘까요.

20살이 넘었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이러니 당연히 탈리안의 눈빛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어요.

“다리, 괜찮잖아요.”

“아, 아악! 다리가, 다리가 아파! 다리가아~! 누가 업어주면 안 아파질 것 같은데에!!”

“라피아는 여기 있어요. 저는 질을 도우러 갈 테니까.”

“아! 야! 아오이이! 진짜라니까?! 나 진짜 너무 힘들어어어…!”

“제가 업어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키 차이를 생각해보라고요!”

탈리안의 말도 맞아요.

안 그래도 탈리안과 질만 하더라도 키 차이가 나는데, 질보다도 큰 라피아가 탈리안에게 업힌다는 것은 무리인 일이 분명해요.

업는다고 해도 균형이 무너져 쓰러져버릴지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이 뒤, 라피아의 반응에 탈리안은 더 화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아~ 아…. 그, 그래도 마법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을까?”

“그 미묘한 시간차는 뭔데요!! 몰라요! 라피아는 여기 평생 누워있으세요!!”

“미, 미안! 미안하다니까?! 아오이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커녕 뒤돌아보지를 않으니 라피아는 그저 먼저 앞서가는 탈리안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억지로라도 따라오게 했으니 일이 잘 풀렸다면 잘 풀린 거지만요.

이걸로 4명이 다시 모이게 되겠네요.

그럼 질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지 보도록 해요.

분명 전위에서 싸우는 베리아의 보조를 맡았었으니, 크게 다칠 일은 없었을 거예요.

베리아가 다치는 일은 있더라도요.

“로니아! 정말 괜찮은 거예요?! 팔이…!”

“네 녀석이 보조를 조금만 열심히 했더라면 이렇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질의 탓을 하는 베리아의 왼쪽 팔은 잘 짜인 젖은 걸레처럼 형체만 남아 비틀려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베리아가 죽을뻔했던 위기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팔에서는 베리아의 것이 아닌 마기의 잔향이 감돌고 있었으니까요.

잠깐의 빈틈을 보였을 때 라파르의 기습을 받았을 거예요.

“푸훗, 큰소리치더니 결국은 그 모양, 그 꼴인 거지! 베리아, 너는 나한테 상대가 되지 않아! 그래, 상대 될 리가 없지…. 지난날의 치욕을 갚아줄 때인 거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조롱해오는 라파르의 모습에 베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네요.

한쪽 팔이 이 상태라면 온전한 상태의 마군주와 싸워 이기기 어려울 테니까요.

“이까짓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돼! 지난날 내가 당했었던 일들을 모두 갚아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해.”

“한눈팔지 마세요! 당신 상대는 저예요! 라파르!”

옛날 일을 되새기는 듯한 라파르에게 스태프를 들어 달려든 질이에요.

스태프는 마나를 증폭시켜주거나, 마법의 효과를 높여주는 도구가 아니었던가요?

접근전에 쓰라고 준 무기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후후후…. 전황이 불리해져서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거니? 이런 얇고 약한 지팡이로 뭘 할 수 있, 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이 부족하지 않아요!! 루니!!”

질의 부름에 갑자기 라파르의 뒤에서 또 하나의 질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라파르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밀착해, 양팔을 잡고 구속했어요.

가뿐히 스태프를 잡아 막아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라파르는 질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스태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폭발에 휩싸였어요.

영거리에서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만큼 강력한 건 없겠지만, 상대가 마군주라서 그런지 질도 다칠 각오를 하고 사용한 것 같아요.

베리아가 이를 보고 몸을 아끼지 않는다며 질을 욕했지만 그렇다고 마군주에게 확실한 유효타를 넣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베리아를 보조하려고 했던 것이 베리아의 팔 한쪽을 잃는다는 결과만 내놓았으니, 질이 다시금 라파르와 일대일의 싸움을 건 것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선택이에요.

“그래서, 네 녀석은 보고만 있는 것이냐? 덤벼들 것처럼 일어서더니 라파르만 싸우게 하고….”

둘이 다시 싸우기 시작한 것을 본 베리아는 다르크의 주의를 끌었어요.

그동안 여러 마법으로 라파르의 방해를 하며 베리아가 다르크에게 닿을 수 있게 도와주던 질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라파르는 끈질기게 다르크에게로 가는 길을 막아서며 베리아와 싸웠으니까요.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며 다르크까지 지켜낸 거예요.

한때, 베리아에게 놀아난 나약한 마군주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요.

“지금의 라파르와 대등하게 싸우지 못할 수준의 녀석이라면 내가 나설 것도 없다.”

“호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이 몸이 네 녀석 하나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틀렸나? 검을 한번 휘두른 것으로 나가떨어진다면, 그뿐이다. 예전이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날아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수준이겠지.”

“쿠후훗, 후후후…. 네 녀석, 진심으로 싸우거라. 안 그러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덤벼오겠다면 막지는 않겠…. 흐읍!“

베리아보다 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다르크는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베리아를 눈치채고는 바로 검을 빼 들어 자신의 등 뒤로 옮겼어요.

그러자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다르크가 앞으로 신발을 끌며 밀려 나오게 되었죠.

“왜 그러느냐, 벌레만도 못한 수준이라면 막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인정하지, 너는 라파르와 싸울 정도의 수준은 되는 것 같다.”

“누구 마음대로 이 몸을 평가하느냐. 이 건방진 것!”

“꽤 하지 않나! 처음부터 힘을 보였다면 즐거웠을 텐데! 힘을 보이면 보일수록 라파르가 왜 패배했었는지 이해가 갈 것 같군!”

베리아와 다르크의 싸움은 길게 이어질 것 같아요.

질은 푸른 화염이 걷히자마자 라파르와 격렬한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었죠.

영거리에서 사용한 마법 때문에 둘 다 모습이 말이 아니었지만요.

“라파르라고 했나요? 로니아보다 약하네요!”

“뭐, 뭐라고?! 이 되다만 꼬맹이가아!! 감히 누구랑 비교하는 거야!!”

상황만 놓고 본다면 질의 도발에 휘둘리는 라파르 때문에, 오히려 라파르의 상대는 질이 계속해야 하는 분위기에요.

아무리 강한 힘을 새로 받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이래서야 그저 평범하게 힘만 센 마기노일 뿐이니까요.

베리아가 라파르와의 상성이 좋지 못한 것은 가티아와의 이야기로 휘둘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공격은 강하지만 되받아칠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라파르에게 있어서 제일 큰 약점이겠네요.

“그런 공격, 아무렇지도 않다구요!!”

“이게, 촐랑촐랑 짜증 나게!!”

질은 계속해서 라파르의 날카로운 공격을 아슬하게 피해가며 침착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말뿐만이었다면 라파르도 간단히 넘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최대한 베리아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얼굴과 표정, 손짓까지 더해 라파르를 화나게 했거든요.

공격을 피할 때마다 혀를 내민다던가,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던 욕까지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한다던가.

유치하지만 그런 것들 말이에요.

이런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베리아는 열심히 다르크와 싸우면서 점점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어요.

“강한 척 해봐야 고작 하등종인 것이다! 이 몸에게 주제도 모르고 덤벼든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하다!”

“크으…! 아직이다! 아직 계획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내가 없어서야, 황궁과 이 세계를 구할 수가…!”

다르크의 거대한 검의 궤적을 따라 몸을 비틀어 피해내고, 큼지막한 공격이 지나간 뒤에 생긴 허점을 찾아내어 공격하기를 반복했죠.

그럼에도 다르크의 위기에 대처하는 실력만큼은 대단해서 치명상까지 입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충분히 압도하고 있었다.’라고 할 수는 있었어요.

특히 베리아는 이전에 보인 적 없는, 검고 붉게 타오르는 화염을 양손으로 날려대며 다르크가 피할 곳을 없애가고 있었거든요.

덕분에 방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라파르가 방해할 기회 자체가 생기지 않기도 했어요.

불로 자신과 질의 구역을 나눠버려 완전히 일대일의 상황을 만들어 낸 거였죠.

“반쪽짜리 마군주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녀석이 구원자 같은 말을 지껄이니 꽤 웃기는구나! 이걸로 마지막이다! 라파르 앞에서 네 녀석의 시체를 가지고 놀아주지!!”

“아직 쓰러질 수 없다고 했을 거다!!”

“윽?!”

그런데 잘 싸우던 베리아가 양팔로 가드를 올린 채,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와 동시에 늑대의 울음소리가 방에 울려 퍼지며 방 안에 거센 돌풍이 몰아쳤어요.

돌풍이 걷히고 난 뒤, 베리아가 확인한 다르크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어요.

변하기 전에도 근육질에 덩치가 있어 평범한 사람치고는 덩치가 컸는데, 거기서 더 거대해져, 회갈색을 띠는 털이 온몸을 덮고 있는 짐승의 형태를 하고 있었죠.

주둥이는 길어져,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도록 거친 숨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손톱과 발톱은 닿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이 날이 서 있어요.

다른 짐승들과 다른 게 있다면, 네발이 아닌 두 발로 서 있다는 거예요.

대검도 쥐고 있고요.

“네 녀석…. 완전한 하등종은 아니구나. 네 녀석이 그러했듯이, 이 몸도 조금은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세계를 바로잡을 것이다!!”

크게 소리치는 다르크는 들고 있던 대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더니 힘을 주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곧, 커다란 대검이 둘로 쪼개져 쌍검이 되어버렸죠.

그 모습에 베리아는 잠깐 놀라며 충분한 거리를 벌리려고 했어요.

빠른 판단이 무의미할 정도로 다르크가 덮쳐오는 속도가 빨라,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허용해버렸지만요.

한순간이지만 방심한 것을 대가로 베리아의 양팔이 둘 다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어요.

마기로 쓰러질 뻔한 몸의 균형도 다잡고 불길의 벽을 세워 다르크로부터 멀어지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이까짓, 잔재주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베리아는 한껏 마기를 폭발시켜 방 전체에 수많은 마법식을 그려 넣었어요.

바닥부터, 벽, 천장, 가구 모든 곳에 빽빽하게 말이에요.

모든 마법식은 마치 살아있어 다르크를 향해 뻗어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곧 다르크의 몸에도 휘감기게 되었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이변을 감지한 질은 끈질기게 붙어오려는 라파르와의 싸움이 질척거려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곧바로 한 손에는 마기를, 다른 손에는 마나를 휘감아 라파르의 가슴에 소프트 터치를 하고는 곧바로 베리아에게 달려갔으니까요.

아예 라파르는 관심 밖의 일이라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라파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지금껏 민첩하게 싸워오던 모습은 어디 가고 팔을 뻗는 자세 그대로 멈춰, 돌처럼 굳어버렸어요.

어떤 마법을 썼길래 그 대단한 마군주가 질의 마법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가만히 당하고 있기만 하는지, 대단하네요.

“로니아!! 무슨 일이에요? 이건 도대체…!”

“네 녀석, 라파르는 어찌하고 이 몸에게…! 라파르 녀석, 어떻게 된 것이지? 아니, 되었다! 이참에 다르크 녀석을 같이 상대하거라!”

“라파르는 앞으로 10분간 저 상태일 거예요! 그 안에 이겨야 해요!”

“이 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마군, 아니 마기노 로니아다! 베리아가 아닌 로니아의 권능을 보여주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짙은 농도의 마기가 휘몰아치는 모습에 질은 잠깐뿐이지만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어요.

마기는 곧이어 베리아의 잘려나간 팔의 위치에 모여들어 형태가 불분명한 팔의 형태를 이뤘는데,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다르크가 아무것도 못 하고 마기에 묶여 소리만 치고 있었거든요.

“큭!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네 녀석의 힘, 불공정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이 몸은 탐욕 많은 어리석은 마기노! 나눠 받겠다!”

“가만히 둘 것 같나!”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즉시 온 힘을 다해 구속을 뿌리치고 달려들려고 한 다르크였어요.

하지만 너무 쉽게 질의 푸른 화염에 앞길이 막혀 멈출 수밖에 없었죠.

마지막이었을 기회마저 날려버린 다르크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요.

“가만히 있어 주세요!”

“이 자식들이…! 비겁하게 두 명이서…!!”

“싸우는 데에 비겁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질의 말이 맞죠.

게다가 다르크와 라파르는 질과 같이 왔던 기사와 마법사들, 2만 명을 빼앗아서 상대하게 한 걸요.

그런데 고작 두 명을 상대하는 것으로 비겁하다고 말하다니, 그럴 자격도 없는데 뻔뻔하네요.

“아니, 잘 말했다! 이 몸은 세계 최강의 악인이니!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뿐이다!”

“크윽, 크아악!! 몸에 힘이…!”

베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르크에요.

이상하게 다르크가 고통스러워하면 할수록 그 몸집이 작아져 가기만 하고 있네요.

정확하게는 살과 근육이 점점 줄어드는 중이네요.

반면에 베리아의 잘려나간 팔에서는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어요.

마치 물리적으로 생명력을 뺏어오는 듯한 느낌이에요.

“지르니트! 시간이 없다고 했을 터! 그렇다면 네 녀석이 저 쓰레기의 목숨을 끊어라!”

“네?! 어, 으, 그렇지만…!”

하지만 베리아는 시간이 부족하다며 질에게 다르크를 죽이라고 명령했어요.

말하는 것만 본다면 시간이 충분하다는 조건 아래에, 베리아는 이대로도 다르크를 죽일 수 있을 거예요.

상대방을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한 뒤, 고통을 주면서 서서히 자신은 회복해가는 능력.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실로 베리아에게 편한 능력이지만요.

중요한 것은 시간이 부족한 것 때문에 질에게 책임이 넘어갔다는 거예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책임이.

“라파르가 풀려나기 직전까지 해야 한다면, 네 녀석의 가면을 쓴 모습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다!”

“아, 알았다구요!”

원래는 황궁에서 처리해야 할 중범죄자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질이 다르크를 죽이더라도 사고인 척 넘어가더라도 별다른 책임을 묻지는 않을 거예요.

질이 사람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여본 적이 없다는 것이 조금 큰 걸림돌이 되겠지만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다르크의 앞에서 망설이는 것이 그 증거였어요.

“얼른 끝내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하, 할거예요! 할거라구요…!”

“심장을 꿰뚫어라! 단숨에 숨을 끊어내야 한다!”

복수에 진심인 베리아는 다르크의 목숨을 끊는 일을 계속해서 재촉했어요.

질은 스태프의 날카로운 끝부분을 다르크의 가슴에 가져다 댔어요.

천천히,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에.

그렇지만 아무리 가면을 벗은 질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인 적이라곤 없는 손으로는 부들부들 떠는 것이 고작이었죠.

베리아가 몇 번을 소리치든, 아래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다르크의 눈빛에.

스스로 누군가의 목숨을 끊어낸다는 행위에 겁먹었기에.

“미, 미안해요…. 저는….”

“네 녀석이 바라던 그 둘의 옆에 서려는 소원에 살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지금 해내지 못한다면 네 녀석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겠지! 네 녀석의 의지로 죽여라!”

고민 끝에 질이 스태프를 잠깐 들어 올려 내리려 할 때, 또다시 베리아가 끼어들었어요.

아무래도 베리아는 질이 다르크를 죽이려는 것을 포기하려는 것처럼 본 거겠죠.

그래도 이런, 탈리안과 라피아의 언급을 한 것이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질은 어느 정도 망설임에서 벗어난 모습이었어요.

“으윽, 둘의, 둘의 옆에 서려면…!”

눈을 질끈 감고 스태프를 내리찍으려던 질은 팔에 힘을 잠깐 빼두고서, 눈을 제대로 떠 다르크를 바라보며 제대로 내려다봤어요.

그리곤 다시 한번 다르크의 가슴에 내질러, 그로테스크한 소리가 들리며 스태프가 가슴을 관통했어요.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고 피를 토해내는 다르크가 발버둥 치며 스태프를 쥐어 잡고 가슴에서 빼내려고 했지만,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베리아가 아니었죠.

권능의 사용을 그만두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 다르크의 턱을 마기를 두른 발로 차버린 거예요.

“곱게 저세상으로 떠나거라, 하등종!”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의 다르크는 저편으로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가슴에 박힌 스태프가 뽑혀 나가며, 구멍 뚫린 가슴에서 피의 분수를 뿜어댔어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기세 좋던 피의 분수는 멈췄지만, 이것으로 다르크가 살아날 방법은 없어진 거예요.

그리고….

“아, 아아아! 다, 다르크으!!”

질의 마법에서 풀린 라파르의 절규가 마법 지부에 울려 퍼졌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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