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뒤바뀐 입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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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과 베리아가 이제 막 라파르와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을 때, 탈리안과 라피아도 의외로 고전하고 있었어요.
피오라 레이지, 그녀와의 싸움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어요.
빈틈없이 공격하는 라피아에게 억지로 파고들어 무기로 공격을 맞받아치면서, 자신은 상처 하나 없이 반격했기 때문이었죠.
상황만 놓고 본다면 피오라가 라피아를 가지고 노는 듯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어요.
“짜증 나게 항상 훈련할 때처럼…!”
“라피아! 꼭 이기거나 지지 않아도 돼요! 무슨 말인지 알고 있죠?!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아요!”
실리아가 하는 말은 적당히 시간만 끌어도 되는 일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라피아와 피오라의 싸움이 계속될 동안은 적들 중 그 누구도 싸움에 간섭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라피아는 싸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오라와의 싸움에만 전념했죠.
오늘따라 정말 말을 안 듣네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그런 애매한 일은!! 내가 용납 못 해!!”
“라피아! 아아, 진짜! 이러면 실리아가 나설 수밖에 없잖?! 뭐, 뭔가요! 왜 덤벼드는 건데요!”
싸움을 방해하려 드는 것을 알아챈 건지, 적들이 일제히 실리아에게 덤벼들었어요.
역시 쉽게 가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실리아를 제외한 분신이 개입하는 것으로 곧바로 풀려났죠.
“잘해줬어요, 달리아! 탈리안에게는 집중하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권능을 조금 써서 라피아의 시선을 저 짜증 나는 여자로부터 돌리는 게 우선이니까!”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라피아를 원망하며 실리아가 마기로 둘이 싸우고 있는 땅에 마법진을 그려냈어요.
마법진이 완성되자마자 땅에 금이 가더니, 어느샌가 문으로 변해 라피아와 피오라를 둘 다 문 안쪽으로 삼켜버렸어요.
“시, 실리아?! 너 뭐 하는 거야아아악!!”
“미, 미안해요. 라피아…. 실리아가 금방 꺼내 줄 테니까 참아주세요!”
둘을 삼켜버린 문은 금방 닫히고서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문이 생겼어요.
실리아의 손짓에 문이 열리자마자 그곳에서 라피아가 떨어졌죠.
“아아아!! 윽?! 실리아아아!! 잠깐뿐이지만 계속 공중에서 떨어지기만 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라피아, 머리 좀 식혀요. 실리아도 더 소리치기 싫어요. 피오라는 영원의 도서관에 가둬놨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라피아가 땅을 치며 화를 내는데, 실리아의 답답해하는 표정에 입을 꾹 닫아버렸어요.
그렇게 다정해 보이던 실리아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만 해주고 있는걸요.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은데….
원래, 조용한 사람이 화나면 제일 무서운 법이잖아요.
“알았어, 미안해…. 그래도 조금, 시간은 벌었, 지?”
“네, 조금은요.”
“그래, 다행이, 어?! 또 뭐,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이번엔 제가 아니에요!”
땅이 울리는 소리와 진동에 놀란 라피아가 실리아를 향해 물었지만, 원인은 실리아에게 있지 않았어요.
저 멀리 마법사들이 마나를 집중해 언제 준비해왔을지 모를 거대한 물건을 일으켜 세운 거예요.
그 정체는 마법 지부의 거대한 성문을 부수기 위해 특수 제작된 건물 8층 이상 높이의 키를 가진 골렘이었어요.
골렘을 보자마자 처리하기 위해 달려든 라피아지만, 골렘이 육중한 팔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나가떨어져 다시 실리아의 곁으로 돌아와 버렸어요.
“쓰읍, 후우. 실리아, 어쩌지?”
“실리아 혼자서는…! 저 뒤에서 마나를 공급하는 마법사만 처리해도 훨씬 수월해질 것 같은데, 접근을 못 하겠어요!”
라피아가 덤비는 동안 실리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마법으로 수도 없이 공격해, 몇 번이고 부서져도 곧바로 파괴된 부위가 수복되는 골렘의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죠.
골렘 뒤에서 마나를 공급하는 마법사만 수백 명.
저만한 골렘을 유지하고 고치려면 이 정도 수가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접근조차 못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단순하지만, 골렘이 이유에요.
움직이기만 해도 땅이 울려 퍼지는 육중한 몸.
팔을 뻗어 주먹으로 대지를 강타하면 지형이 바뀌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
몸집에 비해 민첩한 골렘의 움직임은 마법사들에게 향하는 라피아와 실리아의 움직임을 막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어요.
설령 접근해서 마법사들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서 쉬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이 나서서 다시 마나를 공급할 것이 뻔했죠.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기에는 너무나도 리스크가 큰 행동인 거예요.
“아오이는 아직이야?! 한 시간은 충분히 버틴 것 같은데!!”
“아직, 아직 40분밖에 안 지났어요!”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를 처리하고도 한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말에 라피아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어요.
꽤 많은 적을 해치우면서 많은 시간이 지났을 거라 느꼈는데, 전혀 아니라니 그럴 만도 하죠.
게다가 공략이 어려운 새로운 적까지 나타났으니까요.
“적어도 골렘의 핵이 어디 있는지라도 알려줘 봐!”
“골렘의 몸 정 중앙에 빛나는 게 보여요? 저거에요! 아니, 그런데 알면 어떻게 하려고요!”
“마법사들이 수복하지 못하게 핵을 부숴버려야지! 마정석 가진 거 있으면 다 줘 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탈리안에게 있어요!”
“그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키고 있어!”
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라피아는 골렘의 공격을 피하며 전장에서 멀어졌어요.
탈리안을 지키고 있는 다른 두 명의 분신을 제외하고서 4명만으로 2만 명과 싸우며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대단하죠.
질이었다면 약간은 벅찼을 수도 있을 거예요.
죽이지 않기 위해 힘을 조절하면서 탈리안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니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요.
적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힘 조절을 하지 않아 금방 탈리안의 곁에 도착한 라피아에요.
“잠깐, 잠깐만요, 라피아! 마정석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는 거예요?!”
“핵을 온전히 내 힘으로 깨부수려면 힘이 부족하니까 마정석을 때려 박고 터트릴 거야!”
“네!? 그렇게 된다면 라피아도 위험하잖아요!”
“별다른 수가 없잖아! 저 녀석들 방어도 진형이 견고해서 마법사를 처리할 수도, 처리해도 계속 끊임없이 튀어나와! 그렇다고 기사들이 쉽게 쓰러져주는 것도 아니라면 골렘이라도 먼저 확실하게 처리하는 수밖에! 저만한 골렘이 폭발하면 녀석들도 죽지는 않더라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너는 전이 마법에 집중해!”
라피아는 탈리안이 메고 있는 가방의 끈을 잘라내어 급하게 마정석을 챙겨갔어요.
집중하고 있는 상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겠지만, 멋대로 가방을 망쳐놨으니 탈리안에게는 나중에 사과해야겠네요.
그래도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까요.
가방을 챙긴 라피아는 눈 깜짝할 새에 탈리안의 앞에서 사라져 다시 골렘의 앞에 날아왔어요.
네, 말 그대로 날아왔어요.
좀처럼 꺼내지 않던 날개까지 꺼내서 말이죠.
“마정석 개수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팔을 휘두르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골렘의 저항에도 이리저리 공중기동을 하며 피해내는 라피아예요.
어렵게 몸에 달라붙으려 하면 자신의 몸이 맞는다 해도 상관없는 것처럼 공격하는 탓에 쉽게 접근하지도 못했죠.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골렘의 관절 부분에 박혀있는 보석 같은 것들이 몇 번 점멸하더니, 무차별적으로 공격마법을 날려 주변을 초토화하기 시작했거든요.
“실리아아! 잠깐이라도 좋으니 골렘의 움직임을 멈추게 해봐!!”
“실리아한테 의지해주는 건 기쁘지만요! 몇 초밖에 안 될 거에요! 읏…! 실리아도 싸우기 바쁘니까아!”
옆에서 날카롭게 파고 들어오는 칼날을 피해내면서도 착실하게 대답도 해주고, 부탁받은 것도 해주는 걸 보니 마군주는 마군주네요.
골렘이 균형을 잃어버리도록 다리 아래의 지면을 변형시켜 높게 융기시킨 것만 보더라도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거예요.
분신인 실리아로서도 이렇게 고군분투하게 되는 일이 생길 줄 몰랐겠죠.
“잘했어! 맡겨두라고!!”
“위험한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나중에 혼날 거라고요!”
“질리도록 말하는 것 같은데!! 네 친구를 믿어! 네 애인이 될 여자를 믿으라고!”
“하아!? 으으! 실리아는 나중에 탈리안에게 혼날 것 같아요….”
라피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넘어진 골렘의 위에 착지에 핵을 둘러싸고 있는 바윗덩어리들을 부쉈어요.
그렇게 드러난 골렘의 빛나는 핵에 마정석을 쏟아붓고는 주먹을 크게 높이 치켜들었죠.
그리고는….
“제발 이걸로 쓰러져 달라고!!”
마나를 휘감은 주먹을 힘껏 내리치자마자 마정석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어요.
골렘의 핵에도 금이 갔는데, 여기에 수십 개의 마정석의 마나가 흘러 들어가 과부하가 일어나기 시작한 거였죠.
“어, 이거…. 생각보다 큰일 난 거 같?! 으아…!!”
실리아가 라피아를 걱정하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섬광이 일어 전장 전체를 휩쓸었어요.
누가 전장 한가운데에 포탄을 떨어트려 폭발시켰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파괴력이었죠.
탈리안이 준비하고 있는 전이 마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어요.
섬광이 잦아들고 전장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 그 여파는 상상보다 더한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절반은 나가떨어진 기사와 마법사들, 골렘의 거대한 파편이 이리저리 튀어 폐허를 불방케 하는 전장의 모습.
탄내와 흙먼지가 날리는 속에서도 실리아는 간신히 일어서 라피아를 찾았어요.
“라, 라피아…! 라피아! 콜록, 흐으…. 라피아 괜찮은 거예요?! 대답해요!”
폭발의 여파는 간신히 막아낸 것 같지만, 실리아 역시 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겠죠.
라피아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 적진 가운데서 비틀거리며 헤매는 걸 보면 분명 그럴 거예요.
대단하다면 대단한 것이, 이런 상황에도 집중이 흔들릴법한데 탈리안은 계속 마기를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실리아가 대신 찾고 있으니 괜찮다는 것일지도 몰라요.
“라피, 라피아!!”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실리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어요.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그곳으로 달려 잔해를 파헤쳤죠.
주변에서 하나, 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려 일어나는 도중에도 그 손은 멈추지 않았어요.
다른 두 명의 분신이 기사와 마법사들을 막아줄 동안 계속 파는 거예요.
그 손이 멈출 땐, 골렘의 잔해 속에 파묻힌 라피아를 발견했을 때였어요.
“라피아, 괜찮아요?! 숨, 숨은?! 숨은 쉬는데…! 눈 좀 떠봐요!”
만신창이가 된 라피아를 보자마자 눈동자가 흔들려 주변의 상황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실리아에요.
천천히 회복은 되고 있지만, 옷은 불에 타서 곳곳에 구멍이 나 있고, 몸 이곳저곳의 화상 자국과 핵과 마정석이 터지며 박힌 파편들.
길었던 머리카락도 타들어 가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게 된 모습이에요.
라피아가 크게 다쳤다는 사실에 자신이 먼저 나섰더라면, 이라고 후회를 하는 것인지 실리아는 몸을 떨고 있었어요.
다른 분신에도 이 영향이 미쳤는지,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라피아를 계속 흘겨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죠.
이 와중에 분신 중 하나는 기사의 공격에 치명타를 입어 탈리안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정신, 정신 차려봐요…. 라피아, 라피, 아?! 타, 탈리, 안…!”
그런데 라피아를 흔들어 깨우려던 순간, 실리아는 다른 분신과 함께 그림자 속에 빨려 들어갔어요.
탈리안이 억지로 돌아오게 한 것 같아요.
집중을 그만두고, 라피아의 곁에 순식간에 날아와서는 두꺼운 배리어를 만들었거든요.
그리고는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라피아의 손을 잡았어요.
“…이런 무모한 일을 하라고 마정석을 준 게 아니잖아요. 또다시 친구를 잃는다면 저는….”
“누가 보면, 나…. 죽은, 줄 알겠다….”
라피아는 한쪽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 것인지, 눈을 뜨려다 아예 다시 눈을 감고 탈리안을 안심시키려 했어요.
초월적인 몸의 회복력을 믿고 이런 일을 벌인 거겠지만, 탈리안이 얼마나 걱정했으면 라피아의 모습을 보자마자 날아왔겠어요.
게다가 친구를 또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아마 라피아나 질, 둘 중 하나를 잃어버린다면 탈리안은 무감정했던 처음으로 돌아갈지도 몰라요.
“라피아! 괜찮아요?!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는 일만 하는 거예요!!”
“귀, 울려…. 왜 울상이야, 이쁜 얼굴 다 망가지게….”
“이럴 때마저 농담이에요?! 정말 죽은 줄 알았다고요!”
“흐, 후흐흐…. 농담 아닌데? 너, 얼마나 이쁜지…. 넌 몰라. 어쨌든 나, 노력했으니까…. 소원 좀 들어주라.”
“이 싸움이 끝나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게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쉬어요. 처음부터 한 사람도 죽이지 않는다는 건 무리한 일이었어요. 이제, 봐주지 않을 거니까요.”
라피아가 걱정됐었고,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마음에 안도감이 드는 건 알겠지만….
나중에 무슨 소원을 말할 줄 알고 다 들어준다고 한 걸까요.
나중이 기대되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탈리안이 봐주지 않는다는 마음을 갖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쉽게 갈 전투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조금만 노력해줘…. 나, 황궁도 그렇고 가문 중에는 아는 사람이 많단 말이야….”
“저도 그렇지만, 당신도 질처럼 무른 거 알아요? 그리고 소원이랑은 별개로 나중에 설교 예약이에요.”
라피아는 설교라는 말에 ‘그냥 기절한 척하고 있을걸’이라며 후회했어요.
이전에 한번 몇 시간 동안 베리아가 설교 당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이건 당연한 반응이에요.
그래도 라피아가 희생해준 덕분에 골렘도 처리하고, 동시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적을 처리한걸요.
미래의 라피아에게 설교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중간에 놀라서 이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적이 반이나 줄었으면 충분할 거예요.”
“으응? 뭘 말하는….”
라피아의 의문은 곧바로 풀렸어요.
전투가 시작하기 전부터 준비하던 탈리안의 전이 마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죠.
마기가 땅에서 솟구쳐 올라 모든 적과 동식물, 심지어는 벌레부터 땅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흘러넘치며 감싸버렸어요.
오직 탈리안과 라피아를 제외하고요.
그 기세는 길게 이어지지 못해 점차 땅속으로 마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지만, 마기만이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마기에 뒤덮인 것들 전부, 형태를 잃어가며 땅속으로 흡수되고 있었죠.
“…아오이, 이거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말했잖아요? 전이 마법이라고요. 아까도 들어서 알겠지만, 영원의 도서관으로 보낸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설마 아까 나 떨어지기만 한 것도 이거랑 같은 거야?”
“아, 그, 그건…. 맞는데…. 저기, 실리아에게 했던 말 있잖아요.”
라피아가 실리아에게 했던 말이라고 해봐야 중요했던 말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요.
웬만하면 전부 전투에 관련된 것들이라 기억도 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라피아의 답답함에 먼저 이야기를 꺼낸 탈리안이었어요.
“이번에 라피아가 골렘이랑 싸우기 전에…. 애인이 될 사람이라고, 했었잖아요.”
“아~ 어, 그게 왜?”
“생각해보니까, 친구를 이렇게 소중하게 다룬다면 가족도 가족이지만…. 질이나 라피아가 말하는 애인이랑 다를 게 뭔지 헷갈리게 되더라고요.”
“어, 어어…? 뭐라고…?”
“그러니까! 저, 라피아가 위험할 때 또 친구를 잃는다는 감정을 느끼기 싫었어요…. 그리고 말은 안 했었지만, 그 친구랑도 사랑하는 사이였거든요….”
“어, 응, 응! 어?! 그랬어?! 아니지, 그래서?!”
“이, 이걸 꼭 제가 말해야 해요?!”
“말해줘.”
탈리안은 조금은 더 분위기를 원하고, 라피아가 말해주기를 바라던 것 같아요.
같이 사귀어 달라거나, 사랑해달라는 그런 뻔한 말들 있잖아요?
뻔하고 평범하지만, 직접 입 밖으로 내기에는 부끄러운 말.
상황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탈리안이 말해야 하기도 하지만, 이런 말은 원래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해줘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기에 탈리안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고, 후드를 뒤집어쓰며 힘겹게 입을 심호흡을 했어요.
“…후우, 저, 저랑…. 사랑, 해볼래요…?”
이어지는 몇 초간의 침묵.
그 와중에 탈리안의 후드를 잡은 두 손이 부들거리는 것을 본 라피아는 크게 소리치며 대답해줬어요.
아니, 대답보다는 감탄이라고 해야겠네요.
“아오이이이!! 너 진짜! 진짜 귀여운 거 알아?!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질이랑 너는 진짜, 못 참겠다!”
“네? 못 참겠, 아읏! 뭐, 뭐예요?! 왜 갑자기…!”
“네 탓이야. 네가 너무 귀여워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그때랑 완전히 다른 모습인 거 알아? 엄청 사랑스러워.”
탈리안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은 라피아에요.
사랑스럽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라피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탈리안은 멀어지려고 힘을 쓰다가도 곧바로 얌전해졌어요.
“아, 우으…. 저,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절대로….”
“지금은 그걸로 됐어. 네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준다면, 나도 지금까지보다 더 널 소중하게 여겨줄게.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사랑해줘도 돼.”
“…네.”
대답을 듣자마자 라피아는 탈리안을 놓아주며 풀고, 모래도 사라진 평평한 땅 위에 드러누웠어요.
온몸에 힘을 다 빼고 뻗어버려, 하늘만 바라보았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쉬다가 가자. 나 죽을 것 같아.”
“정말, 고생했으니까요. 질이 걱정되지만…. 이번만 넘어가 드릴게요.”
“너는 자기 사람만 되면 한없이 마음이 넓어지네.”
“싫어요?”
“그럴 리가. 좋아서 그래.”
분위기를 타서 부끄러움을 극복해내고 후드를 벗으려던 탈리안은 그대로 후드를 아래로 당겼어요.
후드가 완전히 자신의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푹 눌러 써버렸죠.
이번에도 조용한 시간이 꽤 길어질까 싶어 조용히 눈을 감아 휴식에 집중하려던 라피아였지만, 이번에는 탈리안이 먼저 말을 걸어왔어요.
“라피아, 한가지 약속을 해줄래요?”
짧게 ‘응.’이라고 대답한 라피아는 순식간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아래를 봤어요.
자신의 가슴과 배에 느껴지는 무거운 감각.
탈리안이 자신의 위에 엎어져 있는걸 보게 되었거든요.
“앞으로 몸 좀 아껴가면서 싸워주세요. 라피아의 출신이나, 하는 일을 생각한다면…. 싸우지 말라는 부탁은 무리한 부탁인 것을 알아요. 싸우지 말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을 조금 더 아껴주세요. 라피아를 잃는다면 저는 다시 일어나지 못 할지도 몰라요.”
“아~ 왜 울먹이고 그래, 조심할 테니까 울지 마. 마음 약해지게….”
“정말, 약속인 거예요.”
라피아는 재차 확답을 요구하는 탈리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어요.
그리고는 탈리안이 진정할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한동안 시간을 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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