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뒤바뀐 입장 (2)
* * *
라피아가 피오라와 싸우고 있을 때, 질과 베리아는….
“지르니트, 정녕 이 길이 맞느냐?”
“…믿어보세요.”
마법 지부라는 탑에 성공적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야 원래는 길잡이가 되어줄 사람들이 전부 라파르의 편에 서게 되었으니까요.
지도를 나눠 받았다곤 하지만, 라파르가 멍청하게 마법 지부의 내부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어요.
복도와 방을 이리저리 꼬고, 섞어놓은 거죠.
신기한 게 있다면 길은 이렇게 꼬아놓고 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이곳은 뭘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복잡한 것이지?”
“저도 직접 와 본 적은 없는데요. 마법사들을 양성하는 곳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마법에 소양이 없거나, 마법 지부를 총괄하는 사람의 허락이 없으면 이렇게 헤매게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인즉, 이 몸을 헤매게 만드는 마법사 놈의 식을 깨부수면 된다는 말이군.”
베리아는 망설임 없이 지금껏 헤맨 것이 짜증 난다는 투로 대답했어요.
“그게 간단하면 이렇게 길을 찾고 있지 않겠죠….”
“간단하지 않다고? 조금만 집중하면 마법식이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있는지 뻔히 알도록, 마나의 흐름을 대놓고 보이게 해놓았는데?”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질의 말에 베리아는 손가락을 튕겼어요.
그러자 방안 가득하게 마나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며 빛을 밝혔어요.
방을 가득 채운 마나 중에는 유독 밝고 이정표처럼 어딘가로 향하는 것처럼 보여 갈 곳을 명확히 제시해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질이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베리아가 한마디를 더 했어요.
“언제 봐도 역겨운 기운인 것은 똑같구나. 자, 이러면 길을 찾는 것도 편하겠지. 앞장서라.”
“…진작에 하지, 근데 이럴 거면 왜 제가 앞에 서야 하는 거예요?”
“계약상 네 녀석이 위험하면 지켜주기야 하겠다만, 이 몸이 일부러 나서는 것은 싫으니 말이다.”
“제 앞에서 자존심 세우지 않아도 돼요. 이미 서로 알 거 다 알고 있는 사이잖아요. 제가 로니아고, 로니아가 저예요.”
날이 갈수록 질에게는 자신과 베리아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봐요.
자신이 로니아, 로니아가 자신이라니 영혼의 동화란 참 무섭네요.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질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베리아도 딱히 부정의 말은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싫다는 것이 아니냐! 이 몸은 네 녀석이 싫다!”
“지금은 넘어가겠지만, 그렇게 거짓말만 하지는 마세요. 속으로는 점점 좋아지고 있잖아요?”
“빌어먹을 꼬맹이…!”
베리아는 질을 뒤따르면서도 작은 소리로 질을 욕하며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마나의 흐름에 길을 맡기고 걸었을 때였을까요.
질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다른 곳과 다르게 살짝 튀어나온 바닥을 가만히 살펴봤어요.
“흐흥~ 이런 걸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가 그렇게 즐겁지?”
“보세요!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발판 함정이에요! 책에서만 보던 거라구요!”
갑자기 들뜬 질의 모습에 베리아는 한숨을 흘리며 질을 지나쳐, 또 다른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어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오히려 짜증을 내는 베리아의 모습에 질은 쫓아가서 왜 무시하냐고 따지는 질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네 녀석은 이곳에 놀러 온 것이냐? 이 몸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만, 밖에서는 탈리안과 라피아가 열심히 시간을 끌어주고 있을 텐데?”
“그, 그, 그게, 으, 네에…. 맞아요…. 놀 때가 아니었죠….”
설마하니 베리아에게 잔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은 질도 몰랐을 거예요.
게다가 반박할 거리가 하나도 없는, 주눅이 들 만한 말을 골라서 듣는다니.
베리아의 잔소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이 몸은 언제 죽든 상관없지만, 네 녀석은 아니겠지. 밖에서 고생 중인 둘이 있으니까.”
“아, 알았다구요! 빨리 해결하면 되잖아요! 보통 이런 건 마법식으로 가는 흐름만 바꿔주기만 해도…!”
듣다 못 한 질은 언성을 높이며 눈에 보이는 흐름에 손을 가져다 대어 억지로 비틀림을 유발했어요.
어떠냐는 식으로 자신만만해진 질은 베리아를 돌아봤지만….
베리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게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한 것 같네요.
“억지로 흐름을 바꾼다면 마법식을 파훼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하지만 이 몸이 왜 진작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지 그 하찮은 머리로 생각해 보거라.”
“왜, 왜 그렇게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이제 길을 헤맬 일도 없을 텐데!”
일을 보채길래 성공적으로 문제 해결까지 완벽하게 해낸 질이지만, 베리아는 질을 더욱 탓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답답한 마음에 물어보는 질이지만….
“답을 말해줘야 하나? 네 녀석은 그런 쪽으로 머리가 나쁘지 않았을 텐데. 네 녀석이 한 일은 뒤죽박죽 얽힌 길을 순차적으로 풀지 않아,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길게 늘여 뜨려 놓은 것이다. 이 몸이 도발 좀 했기로서니 그렇게 이성을 잃어버려서는 한참 멀었군.”
이번에는 질의 실수가 있기는 했었네요.
탈리안의 아래에서, 마법 학원에 입학해서 마법 공부를 했다면, 마나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방금은 베리아의 도발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잠깐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원인이 베리아에게 있다고 생각했는지 질은 정색하며 표정을 지우며 말했어요.
“로니아, 화나게 하지 마세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서 짜증을 내는 거예요?”
“이 몸의 목적은 타도 라파르.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네 녀석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답답한 마음이 늘어만 갈 뿐이지.”
“진짜 가티아에 대한 사랑 하나만큼은 대단하네요. 저랑 다른 게 없어요. 길만 만들어주면 되는 거죠? 알았어요.”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베리아의 질문에 질은 보고 있으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양손을 댔어요.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빛이 약간 번쩍이며 마나가 제대로 흐르던 곳으로 움직이더니, 금세 길을 만들어냈어요.
마나가 벽에 닿으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주며, 돌바닥은 한 칸씩 올라와 계단을 만들어주었죠.
모습만 따지고 본다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형 계단이 넓게 퍼져 있었으니, 탈리안의 집에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닮아 보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길을 완전히 창조해내는 마법은 또 언제 배운 걸까요.
예전에 연금술에 관한 책을 읽었던 적이 있기야 하겠지만, 분야도 다르고, 이런 종류의 마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텐데요.
“실제로 쓰는 건 처음이었을 텐데, 이건 조금 놀라웠다.”
“연금술은 기초만 알고 나면 마법이랑 접목하기 좋아 보이는 과목이더라구요. 그걸 활용해본 거예요.”
“관심 없는 내용이군. 가능했다면 진작에 쓰지 그랬느냐.”
“으으!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밖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놓고, 마법 지부 안에서는 진짜 하나도, 방해하지 않고 있잖아요. 혁명군도 다 어디 갔는지 안보여서….”
“…이제 곧 만날 테니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베리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안 그래도 빠른 걸음에 더 속도를 붙였어요.
따라가는 질이 벅차 보일 정도로 빨랐던 그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버렸어요.
“꼬맹이, 네 녀석…. 길을 만들다 만 것이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꼬맹이도 네 녀석도 아니라, 확실하게 이름으로 불러줘요.”
“그렇다면 이 몸의 앞을 막고 있는 이 거대한 문은 무엇이란 말이냐.”
“저도 모르죠. 라파르가 이 앞에 있을지…. 도!? 로니아 뭐 하는 거예요!?”
질이 놀란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라파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흥분해서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 전부일 뿐이에요.
조금 전만 하더라도 이성을 챙기지 못해 돌발적으로 흐름을 바꿨다며 뭐라 했던 주제에, 베리아도 참….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한 질은 어쩔 수 없이 문 안쪽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올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베리아는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마기를 뿜어내며 안쪽으로 걸어가고만 있었죠.
“기분은 알지만 조금만 조심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뒤를 따르던 질은 다시 한번 베리아의 걸음이 멈추는 것을 보고 어두운 방 안쪽을 눈을 찌푸리며 쳐다봤어요.
그곳에는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베리아의 감옥과 비슷한 풍경을 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다른 것이 있다면 황궁의 왕좌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거대한 물건이 방의 정중앙에 놓여있다는 것과.
그 왕좌에 두 명의 인영이 보인다는 것이었어요.
왕좌에 앉아있는 둘은 질과 베리아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런 어두운 환경에 제일 먼저 적응한 것은 베리아였는데,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꺼낸 말은 비난이었죠.
“…그 하찮은 꼴은 무엇이더냐, 라파르.”
하찮은 꼴.
질의 눈도 어둠에 적응했을 때 보인 두 명은, 남자와 여자였어요.
정확히 남자가 왕좌에 앉아, 여자가 그 품에 안겨있듯이 앉아있는 것이었죠.
베리아의 말대로라면 안겨있는 쪽이 라파르일 거예요.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는 못 하고 시비부터 거는 거야? 베리아, 너도 나 못지않게 하찮은 꼴을 하고 있잖아? 사로잡힌 몸이라니….”
“그 쓰레기는 무엇이냐.”
베리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곳에는 라파르를 안고 있는 남자가 있었어요.
“쓰레기라니, 말 좀 가려서 해줄래? 다르크가 얼마나 멋진 남자인데.”
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며 얼마나 남자를 아끼는지 보여주는 라파르에요.
곁눈질로 욕하지 말라고 노려보는 걸 보니 아마 진심이겠죠.
남자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지만, 라파르에게 조종당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나설 타이밍을 놓쳤을 뿐일지도 모르죠.
사실 이런 건 다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잖아요.
“네 녀석…. 하등종과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이냐? 감히…. 이 몸 앞에서…?”
“문제 있어?”
“그걸, 그걸 지금 말이라고….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가티아의 시신을 가지고 놀았던 천박한 도둑년이!!”
베리아가 라파르의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고 나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는 사실 말이에요.
바로 뒤에서 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릴까말까 고민 중인 것 같지만, 질도 알고 있어요.
말린다고 해서 말려질 베리아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렇다고 또 질이 베리아를 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도 않다는 것을요.
가티아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모두 알게 된 질이 과연 라파르를 보고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까요?
아닐 거예요.
베리아와 같이 이성을 잃고 덤벼들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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