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53화 (153/189)

〈 153화 〉 뒤바뀐 입장 (1)

* * *

질이 탈리안과 성공적인 화해를 하고 난 뒤, 시간이 흘러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 사이에 서 있어요.

배가 정박한 곳은 마법 지부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이 보이는 항구였어요.

저 거대한 탑을 점령한 혁명군은 반란군과 다를 게 없다고 판단되어 황궁과 크롬웰 가문에서 먼저 나선 것이었죠.

배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돛은 찢어지고, 갑판은 불탄 흔적이 보이고, 부러진 기둥이 있는 건 당연한 일, 배의 옆부분엔 구멍이 뚫려 침수될뻔한 흔적도 보였어요.

이런 모습이 되는 와중에도 질과 탈리안이 화해를 하고 있었다니 어느 의미로는 대단하네요.

“이런 형식상의 이벤트는 중요하긴 한데 말이야…. 지루한 건 똑같네. 교장 선생님이 하는 훈화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아, 그 느낌은 저도 알아요. 아침마다 강당이나 운동장에 서서 지루해했던 기억이 있어요.”

라피아와 탈리안의 대화는 제일 앞에서 누군가가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연설 중이었기 때문이에요.

수만은 되어 보이는 기사와 마법사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려니, 목소리를 증폭해주는 마도구도 다섯 개나 써가며 연설 중이었는데요.

혁명군은 이런 상황에 기습 같은 것도 하지 않고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기습하기에는 제일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요?

“그래도 사기를 올리려면 이만한 이벤트는 없으니까, 또 불평은 못 하겠단 말이야.”

“어쩔 수 없죠. 그런 말이 있잖아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라. 저희는 이세계인이니까요.”

“그런데, 화해는 확실히 한 거야?”

라피아의 기습 질문에 탈리안은 연설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어요.

분명 남부 지방이라 날씨가 추운 건 아닌데, 얼굴이 붉게 보이기까지 하면서요.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죠.

화해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자백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에요.

“아, 네, 네! 확실히, 했어요…. 확실히….”

“질, 탈리안이 왜 저러는 거야? 둘이서 야한 짓이라도 했어?”

눈치가 정말 빠르다니까요.

아직은 의심의 단계이지만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탈리안을 보면 거의 100%의 신뢰성을 보여주고 있는걸요.

질은 이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만 대답했어요.

“피를 나눠 마셨어요.”

“어어…. 응? 피를 왜 나눠 마셔?”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실 전부를 말하지는 않았네요.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는 숨기는 게 맞기는 하지만요.

혹시라도 사실을 말했다가 라피아의 질투, 또는 경쟁심에 불을 붙여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도 큰일이니까요.

“탈리안 언니랑 가족이 되고 싶어서요. 자세한 이야기는 싸움이 끝나면 알려드릴게요.”

“으응…. 그래, 탈리안이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설명해준다니까.”

조건 없이 질을 믿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질도 참 사랑받고 있네요.

그런데, 탈리안은 왜 아까부터 말이 없을까요?

“질, 라피아, 베리아. 잠깐 따라 나오세요. 일이 뭔가 이상해요.”

무슨 일이냐며 묻는 라피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탈리안은 질과 라피아의 손을 잡아 수많은 사람의 속에서 밖으로 빠져나왔어요.

한참을 연설하는 곳에서 멀어져 마법 지부와 가까워지고 나서야 탈리안은 둘의 손을 놓아주었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가, 마법 지부가 조용한 거?”

“잘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는 거예요….”

라피아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른 척을 했던 걸까요.

아니면 상황을 기다리고 있던 것일 수도 있겠어요.

그저 탈리안이 말하는 게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녀석의 주특기는 무언가를 빼앗는 것. 그 녀석의 수준으로는 네 녀석들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저기 멍청하게 서 있는 기사나 마법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확히 뭘 빼앗을 수 있는지도 알려주세요. 항상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요.”

“기억을 떠올려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느냐? 네 녀석도 과거에 이 몸과 라파르가 싸우는 것을 보았잖느냐. 마군주가 가진 능력의 범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을 네 녀석도 잘 알 텐데?”

“일대일의 싸움은 도움이 안 돼요. 더군다나 그때 당신이 상대했던 것은 힘이 빠진 라파르였잖아요. 제일 중요한 건, 실제로 겪어보기 전까지는 대비할 수도 없다는 거고요. 대비는 하고 싶다는 거예요. 알고 있는 것들을 전부 알려주세요.”

끈질기게 이어지는 탈리안의 명령에 베리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로 애꿎은 돌을 차버렸어요.

그리고 한숨을 내쉬기를 몇 번 반복한 뒤에야 설명을 시작했어요.

“상대방의 강함에 따라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정해진다고 했었지. 사소한 신체 능력부터, 고유 기술, 마법 능력, 신체의 자유까지. 같은 마군주의 수준이라면 고작해야 잠깐이나마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게 전부일 것이다. 이 몸에게는 듣지도 않을 능력이겠지.”

“코어의 반분을 질의 몸에 남겨두었다면서요. 그럼 능력이 통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정곡을 찔린듯한 베리아는 고개를 돌려 잠시 지르니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어요.

“…짜증이 나는군, 다시 돌려받도록 하지 지르니…! 이 꼬맹이가, 가만히 있지 못하겠느냐!!”

“아, 안 돌려줄 건데요?! 따라오지 마세요!!”

굳이 저렇게 마기를 쓰지 않고 다리로 직접 달려 따라가야만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순식간에 달려드는 베리아를 피해 도망치는 질이에요.

잠깐밖에 이어지지 않은 추격전의 끝은 라피아의 저지로 인해 끝이 났어요.

도망가던 질을 품 안에 안아주어 베리아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으로요.

“어차피 계약 때문에 빼앗지도 못하잖아요?! 왜 그러는 거예요!”

“애도 아니고 그 흉악했던 베리아 맞냐? 내 팔다리를 아작내놓던 녀석은 어디 가고 이런 바보같은 보모가 나타난 거야?”

“보모라니, 언니! 저는 이런 보모 필요 없어요!”

“하, 이 몸도 이런 꼬맹이를 돌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만들 하세요. 베리아도 답지 않으니까 이야기에 집중 좀 하세요.”

이상하게 질과 베리아는 지나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닮아가는 것 같아요.

베리아는 점점 잔학하고 거만하던 태도를 잃어가고, 질은 그저 가능성이었던 차가운 감정을 숨기기에 바쁜 것이 영혼의 동화 때문에 나온 영향인 거겠죠.

“하지만 탈리안, 이런 탁상공론을 벌이기에는 때는 늦은 것 같구나.”

“이건, 라파르의…!”

탈리안이 베리아의 말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있던 장소에서 자줏빛의 섬광이 엄청난 크기의 지역을 에워싸며 일었어요.

엄청난 진동과 함께 불길한 마기가 이 지역 전체에 퍼져나갔죠.

이런 마기를 흩뿌릴 수 있는 것은 마군주밖에 없으니, 분명 라파르의 짓일 거예요.

“이 몸 같은 실력자에게는 라파르의 기술이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기 두고 온 기사들과 마법사는 어떻지? 이미 전부 자유의지를 빼앗기고 라파르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것이다.”

“베리아 네 말은 지금, 저게 다 우릴 향해 오고 있다고? 그 말이야?”

라피아는 질을 놓아주고는 그 앞에 서며 언덕 아래를 가리켰어요.

해안을 가득 채운 백금색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두꺼운 갑주를 입은 황궁과 크롬웰 가문의 기사들, 어느샌가 마법의 영창 준비를 마친 마법사들까지.

대신전에서 상대했던 성기사들의 수보다 몇십 배는 더 많았으니 막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문제일 거예요.

“아무래도 떠들 시간은 없는 것 같으니까, 모두 전투 준비하세요!”

“상대는 조종당하고 있다지만 아군이라고, 어떻게 싸울 건데?”

“힘들겠지만 기절시키는 방법밖에는….”

“말이야 쉽지, 최소한 한 사람당 5천 명은 때려눕혀야 해. 마차를 실었던 배가 자그마치 3대였다고. 전쟁하러 온 인원만 최소 2만 명이야.”

라피아의 말대로 전쟁을 위해 동원된 사람의 수는 육안으로 봐도 많아 보였어요.

이게 고작 4명이라는 인원수로 막아내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이 될 수준이었죠.

이 정도가 되는 인원을 전부 죽이지 않고 기절시키며 싸우겠다는 말 자체가 터무니없는 거예요.

“알아요. 말 그대로 전쟁이에요. 그렇지만 라피아, 당신은 가문의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죽이는 걸 봐도 싫어할 거고요. 아닌가요?”

“답답한 상황이네…. 화가 치밀어올라….”

“언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하아, 기절시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라파르가 저들을 조종한다고는 하지만, 움직임은 꽤 단순해 보여요. 그러니, 함정을 파고 최대한 수를 줄여보도록 하죠. 그 뒤에 남은 소수의 인원이라면 기절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죠.”

라피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손을 잡아주는 질을 본 뒤에야 탈리안은 한가지 방안을 내놓았어요.

이렇게까지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아끼는 라피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물론, 질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제는 탈리안에게 있어서 라피아도 꽤나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요.

함정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에, 탈리안은 설명을 계속 이어갔어요.

“예를 들자면, 그렇네요…. 대규모 전이 마법 정도면 괜찮을까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요.”

“어디로 보낼지는 몰라도 2만이나 되는 인원을 전부 보낼 수 있다고? 아까도 말했지만, 최소 2만이야, 최소!”

“네,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마군주 단탈리안이면서 당신의 친구잖아요. 당신의 친구인 아오이를 믿어보세요. …그리고 이렇게 한다면 질과 베리아를 먼저 라파르의 앞에 보낼 수도 있어요. 저를 보호하는 것은 라피아, 당신만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상식선을 벗어난 이야기에 탈리안은 오히려 불가능할 것이 뭐가 있냐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어요.

친구를 믿어달라는 말에 라피아는 더 이상 걱정의 말을 하지 않고 작은 소리로 알았다고만 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보호해줄 사람으로서 라피아만 있어도 된다니, 라피아가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는 것 같네요.

“저도 언니를 지키고 싶은데요!”

어쩐지, 질이 가만히 있는다 싶었어요.

옆에서 함께 지켜주겠다고 하는데, 탈리안이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지 모르겠네요.

“질, 이건 질을 믿고 있기에 하는 말이에요. 라파르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진짜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마차 안에서.”

“언니, 저! 갔다 오면 언니한테 드릴 게 있으니까 기대하고 있어도 좋아요! 라피아 언니도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질은 베리아의 손을 잡고 높은 탑처럼 생긴 마법 지부로 향했어요.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아무 저항하지 않는 베리아가 대단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어요.

“저렇게 보내도 괜찮은 거야? 사실은 지켜줬으면 하잖아.”

라피아는 질의 모습이 아예 안 보이게 되자마자 다시 탈리안을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말처럼 쉬운 상대는 아니니까요.”

“라파르 쪽이 더 위험할 텐데?”

“난전이 이어지는 여기보단 덜 위험할 거예요. 그리고 질을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라피아도 믿고 있고요.”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너도 질을 닮아가는 거야?”

원래 가족은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지만, 탈리안은 좀처럼 이런 솔직함을 보이질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질이 그렇게 솔직해지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효과가 지금에서야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모르겠네요. 지금부터 집중할 테니 잘 지켜주세요. 오랜만에 도와달라고 부탁도 할 테니까요. 그렇죠, 여러분?”

“여러분? 아니, 뭐야…. 전에 말했던 분신이라는 게 이런 거였으면 빨리 했어야지. 이러면 잊고 있었던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잖아.”

탈리안의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다섯 명의 새로운 탈리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라피아는 괜히 걱정했다며 후회했어요.

이렇게 다섯 명의 분신과 탈리안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만큼 이번 전투에 있어서 진심이라는 것이겠죠.

이어서 탈리안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마도서를 펼치면, 분신들은 각각 탈리안의 주위에 자리를 잡아 다가올 전투에 준비했어요.

“미안해요. 자, 질이 나중에 준다는 걸 받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싸워보도록 해요.”

“미리 물어보겠는데, 필요한 시간은 어느 정도야?”

“그건 실리아가 답해드릴게요!”

탈리안은 이미 마기를 뿜어내며 집중하기에 바쁜 것처럼, 대답은 실리아가 대신해주었어요.

뜬금없는 간섭에 라피아가 고개를 휙 돌렸는데, 이름까지 따로 있을 줄은 몰랐겠죠.

그럼에도 라피아는 실리아라는 이름을 착실하게 불러주었어요.

“실리아? 어, 그래…. 그럼 나 좀 따라올래? 앞에서 진형을 좀 붕괴시키면서 들어야 할 것 같거든.”

“좋아요! 저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드릴게요!”

실리아의 대답을 듣자마자 전력으로 앞으로 뛰어올라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착지한 라피아는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아 터트렸어요.

마나의 폭발과 착지의 영향으로 주변의 기사들 이 몇몇 떨어져 나갔지만, 그것이 전쟁을 시작한다는 신호라도 된 듯이 모두가 라피아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죠.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였다가는 포위당하기 좋은 실수였을 거예요.

다행인 점이라면 라피아에게는 실리아를 포함해서 다른 동료가 4명이나 더 있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뛰어들면 저희가 힘들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잘 도와줬잖아?”

라피아의 말대로, 달려들던 기사는 어느샌가 촉수와도 같은 마기에 붙잡혀 땅에 구속되어있었어요.

“실리아가 한 게 아니라, 달리아가 한 거라구요! 바로 그렇게 뛰어들 줄 알았다면…! 라피아! 또 그렇게…!”

아무래도 자신을 보조해줄 인원이 늘어난 만큼 라피아는 적진을 헤집어놓기로 한 것 같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무기를 만들어내어 기사들을 때려눕히기도 하고, 검을 건틀렛으로 변형시켜 또 다른 상대의 복부를 강타하기도 했어요.

애꿎은 실리아만 고생하며 라피아의 뒤를 덮치려는 기사들을 상대해야만 했죠.

이 기사들의 실력도 만만찮아, 보통의 마나 배리어도 몇 번의 공격을 받으면 금이 가려 했으니 라피아의 선공 필승이 올바른 싸움 방식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적어도 한 시간은 필요해요! 그보다 천천히 좀…!”

“한 시간이면 힘 조절 좀 해야겠는걸!”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작 라피아의 행동은 정반대였어요.

이전과 같은 자해행위는 없었음에도 몸에 붉은 오라가 휘감기면서 온 힘을 끌어내는 듯했거든요.

“라피아! 제 말 좀 들으라니까요!!”

“너는 은근히 밝아서 대하기 어려워! 분명 다른 녀석들도 다 저마다의 성격이 있겠지? 보조만 해줘!”

“그러다가 다치면 저는…! 아, 제발 좀! 라피아!”

하여간에 말 정말 안 듣네요.

그런데 어떻게 둘이 비슷하기는 또 엄청 비슷해요.

걱정해주는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페이스에 맡겨 그대로 나아가는 모습이 말이죠.

지금은….

그저 실리아의 걱정이 배가 되어 늘어가고 있기만 하지만요.

라피아가 이렇게 적진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데, 실리아는 실력 좋게 다가오는 적들을 날려 보내고, 책을 소환해 납치하고, 책 속의 괴물을 소환해 싸우게 하고….

온 힘을 다해서 라피아를 보조했어요.

문제가 하나 생겼다면, 적진 가운데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라피아의 기세가 좀처럼 줄어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상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당해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기사들이 전선에서 라피아와 실리아들을 막아주고 있다면, 마법사들은요?

마법사들이 영창하고 있던 것을 신경 쓰지 못했던 거예요.

탈리안은 집중, 분신들은 라피아의 보조, 라피아는….

그러니 마법사들의 마법들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걸 본 라피아는 제자리에서 흠칫거렸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던 거예요.

신입 모험가도, 보통 모험가도, 그저 그런 용병도 아닌, 전쟁만을 위해서 훈련된 사람들이에요.

그 하나하나가 적들을 죽이기 위해 수많은 경험을 받아왔을 텐데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당연히 안 되겠죠.

“아극! 이, 젠장…!”

방심한 그 잠깐의 사이에 라피아의 배에는 검 세 자루가 꽂혀있었어요.

입가에 흘린 피를 닦은 라피아는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세 자루 모두 힘으로 부러뜨려 뽑아내 버렸죠.

검이 뽑혀져 나오자마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회복되어 깨끗한 피부를 자랑했어요.

“라피아! 그러니까 제가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시끄러워! 아픈데 잔소리하면 화낼 거야!!”

“이미 화내고 있으면서…! 마법 날아오니까 뒤로 빠져요, 제발!!”

라피아의 회복속도를 알면서도 배에 큰 구멍이 3개나 뚫렸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상처가 빨리 회복된다고 해도 코앞에서 다치는 걸 보게 된다면….

또 아프다고 건들지 말라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할 수도 없을 테니 실리아는 답답하기만 할 거예요.

실제로 라피아가 해치운 수만 하더라도 10분이 막 넘어가는 시점에 벌써 500명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딴 같잖은 마법들은 네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숙련된 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인데, 라피아는 큰소리친 만큼 자신의 행동으로 이를 증명해냈어요.

설마하니 정면으로 날아오는 마법을 주먹으로 때려서 상쇄해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라피아의 주먹과 마법이 맞닿아 생긴 충격파가 워낙에 강하다 보니, 주변의 기사 중 약한 몇몇은 저 멀리 날아가기까지 했는걸요.

실리아는 약간 감탄하는가 싶다가도 고개를 몇 번 좌우로 흔들고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마기로 공중에 들었다가 지면에 내리꽂으면서 라피아에게 다가갔어요.

“그, 그렇게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요?!”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봤으니까 충분해! 지금 문제는…. 저 녀석이야.”

라피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흑발을 가진 여기사가 서 있었어요.

다른 기사들에 비해 가벼운 갑주와 검, 최소한의 몸을 지킬 방패조차도 들지 않은 전장에서 보기 어려운 유형의 기사였죠.

“누군지 알고 있나요?”

“우리 가문의 제3 보병대 부기사단장, 피오라 레이지. 근접전의 검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나를 압도할걸.”

“가문과 같은 성씨…. 전력을 내야 한다는 거죠? 그럼 실리아가 나설….”

몇 번이고 같은 반응이 나올 뿐이에요.

걱정 어린 말에도 라피아는 피오라의 앞에 서서 실리아가 나설 공간을 독차지해 버렸어요.

이상하게 피오라가 라피아의 앞에 천천히 걸어 나오는 동안 주변의 기사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요.

자유의지가 사라졌다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또 아닌가 보네요.

“아니, 내가 나설게. 보조 부탁해. 나한테 얇은 배리어를 씌워줘.”

“정말 괜찮겠어요? 적어도 다칠 위험이 없는 저희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네가 그랬잖아, 친구를 믿어보라고. 날 믿어. 네 애인이 될 사람이라고.”

“애, 애인이라니, 아직도 그 소리예요?! 시, 싫지는 않지만! 아아! 이걸 탈리안이 알면…! 알았다구요! 믿어볼게요!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바로 도울 테니까요!”

“걱정 붙들어 매, 개인적인 일도 있으니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짧은 대화의 끝에 라피아가 검을 만들어내자, 피오라 역시 검을 검집에서 빼 들었어요.

그리고는 잠깐의 적막이 찾아왔죠.

정말로 자유의지가 사라진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모두가 둘에게 집중했어요.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전장에 탈리안이 집중하며 마기를 끌어모으는 소리만이 들릴 때, 하늘에서 새가 우는 게 아니겠어요.

울음소리를 신호로 이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짧은 순간.

라피아와 피오라는 서로 상대방에게 달려들어 검을 맞부딪혔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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