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약속은 지켜야해요 (3)
* * *
질은 라피아에게 이끌려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 왔어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라피아는 질을 침대로 이끌어 걸터앉게 했죠.
그리곤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추며 물어봤어요.
“질, 도대체 왜 그런 거야?”
힘없이 앉은 질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질은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는 라피아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어요.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졌죠.
“질.”
“왜 불러요.”
“왜 그랬냐고 묻잖아.”
평소에는 그렇게 시선과 시선을 맞추며 대화하길 좋아했던 질이, 지금은 땅만 바라보며 대답하고 있어요.
라피아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질도 분명 잘못을 했는데, 인정하려 하지 않고 탈리안처럼 대화를 거부하며 피해자인 척만 했으니까요.
내가 이러고 있는 원인은 탈리안에게 있다는 것처럼.
“뭐하자는 거야?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데? 탈리안한테 소리치다니 너,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언니가 약속을 안 지켰으니까요.”
“무슨 약속을?”
“마기를 나눠준다는 약속.”
언젠가 한 번 대화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라피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었어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겠죠.
하지만 라피아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고작 그것 때문에? 아니, 아니야. 탈리안이 괜히 안주겠어? 다 네가 걱정되니까…!”
“언니는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준다고 말했어요. 못 주는 걸 알면서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거라구요!”
거짓말이 나쁜 건 맞아요.
탈리안에게도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죠.
하지만 상황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번에 질이 화낸 행동은 문제가 있어요.
아무런 징조도 없이 단 한 번,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탈리안에게 화내고 소리쳤잖아요?
베리아에게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때처럼, 질이 품고 있는 마음을 생각한다면 마기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맞아요.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를 화를 내버린 건 명백한 질의 잘못이니까요.
“아무리 탈리안이 거짓말을 했어도 그렇지, 그 녀석이 곤란해하는 거 못 봤어? 애초에 왜 그렇게 마기를 받고 싶은 건데?”
“언니는 몰라요! 제가 왜 언니들 옆에 서고 싶은지! 저는, 저는…!”
질은 베리아와 있을 때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며 소리치던 때와는 달리 말을 끝마치지 못했어요.
무엇을 말할지 궁금해서 기다리던 라피아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죠.
어떤 이유로 화를 내는지 말이라도 해줘야 알 텐데, 그조차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으니까요.
“질, 혼자 있는 동안 적어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봐. 시간이 없어서 탈리안을 도우러 가야 하니까.”
역시 질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일 뿐.
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칫한 라피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한번 질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다시 탈리안이 있는 곳으로 향할 뿐이었어요.
방에 혼자 남아버린 질은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듯 누워버렸어요.
밖에서는 여전히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마법이 발동하는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질에게는 들리지 않고 있을 거예요.
질은 그나마 밝은 분위기를 유지해주던 방문 옆의 전등 스위치에 작은 마나의 탄환을 날려 꺼버렸어요.
평소보다 격한 행동에 억울함이 잔뜩 담겨있는 것 같지만 그것뿐인 건 아닌 것 같아요.
“이게 전부, 로니아 때문이야…. 로니아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더 잘 숨기고 있을 수 있었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고 침착과 이성을 제대로 유지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 마군주라는 베리아도 가티아라는 약점을 들키자마자 질에게 엄청 휘둘렸는데 말이에요.
어쩌면 그동안 베리아가 질을 봐주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유야 모르겠지만, 자신은 당하기만 하고 질의 속마음을 건들지도 않았으니까요.
질은 끊임없이 중얼거렸어요.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옆에만 있어 주면, 사랑만 받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같은 위치에 서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은 베리아가 나쁜 거다.
이런 핑계성 짙은, 거짓이 담긴 말들을 늘어놓았죠.
맞아요.
거짓말도 섞여 있었고, 남을 탓하는 말도 섞여 있었고, 부정의 말도 섞여 있어요.
탈리안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지금껏 모두에게 속마음을 잘 숨겨왔는데, 이제 와서 베리아에게 들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시간을 보내다가 겨우 후회라도 됐나 봐요.
탈리안에게 찾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지금이라도 나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언니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그런 열등감을 뿜어내는 추한 얼굴로 탈리안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냐?”
“…로니아.”
아무도 모르게 어느샌가 질의 방안에 들어온 베리아가 말을 걸어왔어요.
어쩌면 질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어 베리아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되는 범인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인지 질은 분노가 담긴 눈동자로 베리아를 쳐다봤어요.
“제 얼굴이 어떻다고 그래요?”
“겁에 질린 아이, 질투하는 아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구나.”
“로니아도 알잖아요. 저는 아직 10살이에요.”
그러니까 질이 말하고 싶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다워서 나쁠 것이 뭐가 있냐는 거겠네요.
나쁠 건 없죠.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니까요.
“그런 것 치고 평소에 가면을 쓴 네 녀석을 보면, 어린아이에 어울리지 않는 문란함에 찌들어있는 것 같다만.”
“시비 걸려고 온 거예요?”
“아니, 그럴 리가. 네 녀석이 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낸 지 두 시간이다. 아직도 탈리안과 라피아는 밖에서 고전 중이지.”
질의 신경질적인 말에 베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어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베리아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엄지로 가리켰어요.
“말로 해요. 움직이기 싫으니까….”
“이 배는 네 녀석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황궁의 자본과 크롬웰이라는 가문의 기술력이 들어가 있다던가. 이 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목적지가 코 앞이다. 일어서라.”
거의 도착했다는 말에 질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어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배가 멀쩡한 걸 보면 두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탈리안과 라피아가 꽤 노력해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물론, 기사들과 마법사들도요.
“…로니아는 언니들을 돕다가 온 거예요?”
“…큭, 크흐흣, 그렇게 혼나고도 탈리안과 라피아를 걱정하는 것이냐? 네 녀석도 참 안쓰럽기 그지없군. 그렇게 걱정된다면 먼저 다가가면 될 것을.”
“로니아 때문이잖아요! 로니아가 제 속을 뒤집어놓지만 않았더라도 이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네 녀석이 그 둘의 옆에 서고 싶다면 애새끼처럼 건방지게 굴지 마라, 지르니트. 네 녀석이 그동안 이 몸에게 대들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지도 못할 텐데? 네 녀석은 되고 이 몸은 안된다고?”
발끈해서 소리친 질은 베리아의 말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베리아가 선한가 악한가에서 떠나, 자신이 베리아를 귀찮게 했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아요.
과거에 그렇게 귀찮게 했던 일을 떠올리고도 베리아를 탓할 자격이 있다고는 하지 못할 거예요.
“…쯧, 네 녀석이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다. 이 몸은 그저 탈리안의 명령에 네 녀석에게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하러 왔던 것뿐이니.”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베리아는 혀를 차며 방 밖으로 나갔어요.
질은 가만히 베리아가 나갈 때까지 그 등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베리아가 완전히 나가고 인기척까지 사라지면, 좀처럼 그러지 않는 질이 한숨까지 쉬며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더니.
“하아…. 아아, 아악!! 진짜, 진짜아!! 왜 이러는 건데, 왜!! 오늘 이상해, 이상하다구!! 왜 하루 종일…! 라피아 언니 말대로 날 생각해서 그런 거였는데!”
마차가 무너질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어요.
주먹으로 침대 바닥을 치기도 하고, 발을 구르며 침대를 차기도 했어요.
5분 정도를 이런 식으로 힘을 뺀 뒤에야 제풀에 지쳐 축 늘어져 버렸죠.
“…멍청해. 솔직하지 못하다고 그렇게 탈리안 언니한테 말했었으면서…. 가서 사과하자….”
침대 위에서 뒹구느라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덕에 질은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거울 앞으로 가서 섰어요.
하지만 거울 앞에 서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질이 거울의 가장자리를 보았을 때는….
“질이 후회하는 모습은 잘 봤어요.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팔짱을 낀 채로 활짝 열린 문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는 탈리안을 볼 수 있었어요.
“에, 네, 어? 언니…?”
“밖은 다 정리되어가는 것 같아서 제가 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재밌는 걸 봐 버렸네요. 그렇죠, 질?”
“어, 언제, 언제부터…?”
질은 뒷걸음질 치다 거울에 등을 부딪쳐 갈 곳이 없는 걸 보고 주저앉아 버렸어요.
몇 분간 혼자서 뒹굴고 소리 지르던 것을 전부 들여다보았다고 하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있을 수가 없겠죠.
탈리안은 이런 질의 물음에 목소리를 한두 번 가다듬고는 어울리지 않게 질을 흉내 내며 대답했어요.
“‘날 생각해서 그런 거였는데!’부터였을까요. 원래는 제가 사과할 생각이었어요. 질을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거짓말을 했으니까.”
“왜, 왜 지켜보고만 있던 거에요!! 부끄럽게…!!”
“음~ 질이 저에게 큰소리친 벌 대신이라고 하죠.”
탈리안도 은근히 짓궂은 면이 있네요.
혼자서 배웠을 리는 없으니, 질이나 라피아에게서 배운 걸까요?
뭐, 언제부터 이런 모습을 갖게 되었든, 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여 침대로 급히 올라갔어요.
그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죠.
침대와 이불과 함께 하나가 되고 싶은 것 같아요.
질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 누구라도 같은 심정일 거예요.
“아, 안 내릴 거야…! 싸우러 안 가! 안 갈 거라구요!! 오늘 하루는 침대 속에만 있을 거예요!!”
“그래도 되겠어요? 베리아에게 명령을 내려서 알아봤어요. 라파르와의 싸움이 끝나면 베리아를 자유롭게 해주겠다면서요.”
탈리안은 수치스러움에 이불 속에서도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질의 옆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어요.
못 볼 꼴을 보여준 질이 쉽게 침착을 되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지만, 베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불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미는 걸 보니 아무래도 괜찮은가 봐요.
“…그것도 나쁘다고 할 거예요?”
“저로서는 베리아가 밉고 미워서 어쩔 수가 없지만, 질. 질이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밖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질을 혼내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랑 대화하려고도 하지 않았, 읏…!”
질은 화를 내려다가도 자신의 볼에 얹어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질끈 눈을 감았지만, 그저 볼을 쓰다듬는 탈리안을 본 뒤에야 한층 기세가 꺾인 질이에요.
“그때는 마법사들을 도와주고 있었잖아요? 질이 위험할까 봐 들어가라고 했던 거예요. 화난 게 아니었어요. 싸움이 끝난 직후라면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바로 찾아왔던 건데, 때가 좋지 못했네요.”
“아니에요! 어차피 언니한테는 사과하려고 했으니까…! 오해해서, 미안해요.”
이불을 들치고 나와 순식간에 탈리안을 안아버린 질은 뜸을 들였지만, 확실하게 사과했어요.
쉽게 오해한 것도 그렇지만, 기분이 상했다고 화내버려서 미안하다고요.
그런데 사과를 마친 질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려 하지 않자 곤란했나 봐요.
등을 토닥이며 놔달라고 말하는 탈리아이에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준비하고 나와요, 질.”
“금방 준비할게요. 그래도 조금만, 10분, 아니 5분만요.”
질의 어리광을 봐버린 탈리안이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질에게 한정해서 탈리안은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언니하고는 조금 더, 뭐랄까…. 저희의 관계를 누구도 부정 못 할 그런 걸 만들고 싶어요.”
잘 안겨있다가 뜬금없는 주제를 꺼내는 질이에요.
지금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의미일까요?
“반지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탈리안은 머릿속에 애인이라는 관계가 떠올랐는지 반지라는 단어부터 꺼냈어요.
“반지…. 반지도 좋지만요. 라피아 언니한테는 제 피가 섞여 있을 거예요.”
“흡혈을 말하는 거예요?”
“음, 네. 저는 언니하고 피가 섞였으면 좋겠어요.”
피가 섞인다는 것이 피의 섭취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겠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 의미를 탈리안은 아는지 모르는지, 질을 걱정해주기만 하고 있네요.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조금 위생적으로 좋지 못할 것 같은데요. 상처 부위가 덧날수도 있고요.”
“라피아 언니는 제 피를 잘 마시던데요?”
“라피아는 뱀파이어잖아요. 먹이가 되는 대상의 상처 부위를 금방 낫게 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아, 아뇨…. 싫다는 게 아니라…. 아, 아니에요. 이러면 될까요?”
탈리안은 곧바로 마나를 모아 날카롭게 다듬어 칼의 형태로 바꾸었어요.
그리고는 질을 잠깐 떨어트려 놓고 손목에 칼을 가져다 대어 살짝 그었죠.
워낙에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라 그런지, 살짝 그었음에도 작은 컵에 담을 수 있을 수준의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죠.
“저는 언니랑 진짜 가족이 되고 싶었어요. 피가 섞인다는 게 이런 의미가 아닌 건 알지만, 저는 이렇게 해서라도 언니랑 더 깊은 관계의 가족이 되고 싶어요.”
질은 말을 마치자마자 상처 부위를 강하게 빨아들여, 탈리안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어요.
내민 손목에서 나오는 피를 정신없이 빨아들이는 게 마치 라피아 같네요.
흡혈을 당하다 보니, 취향도 라피아와 비슷해진 걸까요.
“…읏, 알았으니까, 조금만 덜 아프게 해주세요. 그렇게 빨아도 많이 안 나와요.”
“이러면 안 아프죠?”
“핥는다고 아프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이상하네, 라피아 언니가 해줄 때는 이러면 더 달아올랐는데…. 언니는 저랑 같이 있으면 기쁘다거나 몸이 뜨거워지지 않아요? 아랫배가 간지럽다던가….”
그럴 리가 있냐는 탈리안의 맥빠진 대답에 질은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어요.
약간은 스스로도 부끄러울 만한 대사일 텐데, 거침없이 말하는 걸 보면 질도 많이 변했네요.
마기에는 적응한 지 오래되어서 진작에 효과가 사라졌을 텐데 말이에요.
오히려 베리아가 말했던 것처럼, 그저 잠깐뿐이지만 숨기고 있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뱀파이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잖아요!”
“근데 언니 얼굴은 약간 붉은데요?”
“이, 이만하면 됐죠!? 이제 그만 가요!”
급히 일어나려는 탈리안은 손목을 질에게 잡혀 잠깐 휘청였어요.
어떤 일이 아직 남아있길래 막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질은 이렇게 답했죠.
“어딜 가는 거예요? 언니. 제 피도 마셔주세요.”
확실히 질만 피를 빤다면, 탈리안의 몸속에는 질의 피가 없을 테니 질이 원하는 가족이라는 것은 되지 못할 거예요.
“더 늦으면 안 되는데….”
“자, 여기요.”
점점 늘어지는 시간 앞에서 고민하는 탈리안은 망설임 없이 탈리안과 똑같이 손목에 상처를 내어 눈앞에 내밀어주었어요.
침대에 흘러 떨어질 정도로 꽤 되는 양의 피가 흘렀기 때문인지, 탈리안은 곧바로 치료를 해주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질이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어요?
바로 치유 마법을 사용하려는 손을 막고, 탈리안을 제압해 다시 한번 자신의 손목을 탈리안의 입 가까이 가져다 댄 거예요.
“읍?! 질, 이대로면 상처가…!”
“그러니까, 언니가 대신 마셔줘요. 흘리면 아깝잖아요.”
탈리안은 어쩔 수 없이 질의 손목을 입에 물었어요.
침대에 엎어진 탈리안의 위를 덮어씌우다시피 한 질은 탈리안의 입이 닿자마자 눈을 감았어요.
이유야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 집중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집중하는 질이야 그렇다 쳐도, 모든 피가 그렇듯 맛은 전체적으로 비릿할 텐데, 탈리안은 무리 없이 질의 피를 계속해서 마셨어요.
질이 만족해서 스스로 탈리안의 입에서 떼어 놓기 전까지요.
“상당히 잘 마셔주네요. 헤헤….”
“웃을 일이에요…?”
“저한테는 기쁜 일이니까요. 이걸로 언니가 거짓말한 건 저도 넘어가 줄게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이제 위에서 비켜 줄래요?”
탈리안은 흡혈이 끝나고 나서 자신과 질의 상처를 회복시켜주었어요.
하지만 질은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팔을 전혀 놔주지 않는 거예요.
“아오이. …언니.”
처음에 이름만 부르려고 했는지 한참을 뜸을 들인 뒤에야 언니라고 말한 질이에요.
순간 놀라 눈치를 보이면서도 탈리안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저항할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탈리안을 보곤, 질은 그대로 살며시 입을 맞췄어요.
탈리안은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혀져, 질에게 몸을 맡기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언젠가와 같이 질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해달라며 저항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그 모습에 질은 잠시 멀어져 탈리안과 시선을 맞췄어요.
“저번에는 시작했을 때 그렇게 몸부림쳤으면서, 왜 이번엔 조용해요?”
“…질이 바란다면, 바라는 대로 할게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탓에 탈리안은 고개를 돌리고 작게 속삭이듯 말했어요.
자신의 아래에 깔려 부끄러워하며 대답하는 모습에 질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탈리안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옮겼어요.
탈리안의 등 뒤, 후크가 있는 곳으로요.
속옷을 간단히 풀어내어, 이번에는 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며 조금씩 드러나는 뽀얀 피부를 바라보다가 다시 탈리안에게 물어봤죠.
“이래도, 이렇게 해도 가만히 있어 줄 거예요?”
“질이, 바란다면….”
하지만 같은 대답에 질은 올라가던 입꼬리가 멈춰, 갑자기 정색했어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요.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탈리안의 얼굴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양손으로 잡았거든요.
“언니. 하나만 물어볼게요. 저만 그런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언니! 언니도…! 원한다는 거, 맞죠…?”
대답 없이 고개만 작게 끄덕일 뿐인 탈리안이에요.
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는 미소를 짓고는 탈리안의 옷을 활짝 열어젖혔어요.
전쟁은 뒷전인 것 같지만, 제대로 오해를 풀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
그렇죠?
밖에서 하선 준비가 한창인 라피아와 베리아에게는 미안할 정도의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쩌겠어요.
둘이 좋다는데 말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