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약속은 지켜야해요 (2)
* * *
“정말 제대로 된 거 맞아요?”
질은 단추를 풀어 벗어두었던 블라우스를 입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베리아에게 물어봤어요.
아무래도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질이 마기를 쓸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블라우스를 벗고 있던 걸까요?
“코어의 반분을 네 녀석의 안에 남겨준 것이다. 네 녀석 안에서 맥동하는 마기가 느껴질 텐데?”
“그건, 그렇지만요. 로니아가 너무…. 그러니까….”
잠깐 눈을 감고 집중하는 사이에 마기가 확실히 있는 것을 느꼈음에도 신뢰가 가지 않는지, 질은 몇 번이고 베리아를 힐끔거렸어요.
베리아 역시 옷을 다시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코어로 무슨 일을 했길래 두 명이 밀실에서 옷을 벗고 있던 건지,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그런데, 그, 역시 필요한 일이에요? 로니아가 죽기 위해 도와줘야 하는 건….”
“계약까지 나누지 않았느냐. 어차피 베리아라는 마군주의 코어의 주인인 이 몸이 죽으면 코어는 쓸모없는 돌덩이로 변하게 될 테니, 코어의 권리 역시 네 녀석에게 주고 가겠다고.”
“대신 라파르를 죽이는 건 로니아의 손으로…. 로니아의 코어는 제 손으로….”
질은 중얼거리듯이 작은 소리로 대답하며 창문 밖을 보고 있었어요.
눈 덮인 도시의 안에 들어와 항구에 정박 된 배에 올라탄 마차들이 보였죠.
너무 빽빽이 들어찬 마차들이 답답해 보일 지경이었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질이 타고 있는 마차는 바깥쪽에 나와 있어, 드넓은 바다의 풍경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걸로 그나마 속이 답답해지는 일은 없겠네요.
그런데 갑자기 베리아가 이상한 말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음, 그리고 짧았지만 오랜만에 충분히 즐겼으니 죽기 전의 여흥으로는 충분했다.”
“조, 조용히 해요! 애초에 왜 옷을 벗고 피부를 맞대야만 했었는지 모르겠다구요!”
그런 일이 있었기에, 질도 베리아도 옷을 벗고 있었나 보네요.
눈에 띄는 작업이라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 거였나요?
“네 녀석도 즐기지 않았더냐,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심지어 질이 즐겼다고 하는데 라피아가 들으면 속상해하겠어요.
대놓고 바람을 핀 거잖아요.
한 지붕 아래에 있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로니아가 너무 강압적으로 나오니까, 무서워서 저항을 못 한 거였다구요! 제가 언제 즐겼다고…!”
“아래쪽 입은 솔직하더구나. 라피아와 즐길 때보다도 더.”
“아아악! 조용, 조용히 하라니까요!!”
듣기 부끄러운 말을 늘어놓는 베리아의 입을 막을 정도로 질은 부끄러움에 못 이겨 몸부림치고 있었어요.
아직도 마음 한편으로는 베리아를 무서워했으면서 손으로 입을 막으려 하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그만큼 더 강하다는 거겠죠.
얼마나 베리아의 손길이 대단했으면 그랬을까요.
“자신의 가족을 빼앗아간 원수에게 농락당하면서 그렇게 기쁜 소리로 울어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나, 나가요! 얼른 나가요!”
그렇게 소리를 냈다면 이미 탈리안이나 라피아에게는 들키고도 남았겠네요.
아무리 마기를 얻기 위함이었다지만, 저항도 못 하고 가만히 당한 건 죄나 다름없어요.
어떻게든 빠져나갔어야죠.
이래서야 라피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없겠는걸요.
“그렇게 열 내지 말거라, 마법 지부의 대 마기노 전용 마법 포대를 본 적이 있느냐? 실로 대단한 위력과 사거리를 가지고 있지.”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직 저희는 출발도 안 했잖아요.”
“이 몸의 경우, 네 녀석과 같은 이레귤러가 끼어들었기에 어이없이 당했을 뿐. 마군주가 대책 없이 당하는 녀석들은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저쪽은 공격을 시작해왔으니. 군대도 이미….”
“공격…? 앗, 윽?!”
옥상에서도 그렇고, 방에서도 그렇고, 최근 질이 자주 넘어지려고 하네요.
물론, 질이 발을 헛디딘 것은 아니에요.
마차가 올라탄 배가 크게 흔들려 오뚝이처럼 기우뚱거렸거든요.
다행히 경호원이라도 된 듯이, 질이 넘어지려 할 때마다 베리아가 도와주기는 하지만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베리아의 품에 안겨버렸어요.
“조심하라고 몇 번을 말하지? 네 녀석의 머리는 그렇게 나쁘지 않을 텐데? 그새 또 잊어버린 건가? 창밖을 봐라.”
질은 창가로 다가가면서도 소란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수많은 인원이 마차 사이를 달려, 선미로 향하는 듯했죠.
“이런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하는데 들키지 않는 것이 이상할 거다.”
“…이렇게 큰 배리어는 처음 봐요.”
“질! 여기 있, 베리아…? 이 이상한 조합은 뭐야?”
이런, 드디어 라피아에게 들켰네요.
한편으로는 아쉬우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인 일이 아닐까요.
이미 그럴 분위기는 한참 전에 지났지만, 더 같이 있다가는 베리아랑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누가 알겠어요.
한 번 걸음을 떼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쉬운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질도 자신의 방에 베리아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나 봐요.
이건, 그러니까, 어…. 같은 소리밖에 하지 못했거든요.
“이 몸은 먼저 가보겠다, 지르니트.”
“아, 로니아! 그, 야, 약속은 지킬게요! 반드시!”
먼저 자리를 피하는 베리아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약속 이야기를 하는 질이에요.
계약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라피아에게 숨기고 싶은가 봐요.
어딜 봐도 숨길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베리아에게 억지로 당한 것만 제외한다면요.
“약속? 무슨 약속?”
“그, 그런 게 있어요! 근데 왜 찾아온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
“방금까지 너도 창밖을 보고 있었잖아. 그럼 알지 않아? 시작됐어.”
라피아의 말대로, 창밖에서는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배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마법사들이 배 전체를 둘러싸고도 남는 마나 배리어를 펼쳐, 거대한 마나의 탄환이 쏟아지는 것을 막고 있었고요.
기사들은 간혹 배리어를 뚫고 들어오는 탄환의 파편을 가호가 담긴 방패로 막아내어 마법사들을 지켜내고 있었죠.
그사이에 배는 시동을 걸어 점점 속력을 올리고 있는 게 보였어요.
“혁명군이라면서…. 이 배의 뒤에는 도시도 있는데….”
“혁명군이란 원래 그런 녀석들이야.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 뒤가 없는 놈들이지. 어쨌든, 밖에서 탈리안이 기다리고 있어. 가자.”
“아, 으응…. 나가야 해요?”
“뭐야, 또 왜 그래? 싸웠어?”
맥없는 대답에 라피아는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아차렸어요.
역시 이런 쪽으로는 이상할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니까요.
“싸웠다기보다는…. 아으, 네. 싸웠어요! 마기를 못 준다잖아요! 약속했으면서!”
“뭐어, 새로운 기술을 배우자마자 힘을 빼앗긴다면 화나기야 하겠지만…. 아오이가 못 준다고 하면 정말 못 줘서 그러는 거 아닐까? 안 주는 게 아니라.”
“알지만,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데요! 진짜…. 실망했었다니까요….”
“실망했다는 건 좀 말이 그런데…. 마기를 빼내겠다는 것도 다 널 위해서였지 않아?”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말에 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라피아의 시선을 피했어요.
삐져있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것 같은 질의 모습에 그 손을 잡고 억지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어요.
돌발스러운 행동에 질이 놀라 저항하려 했지만, 언제 한번 라피아의 힘에 이긴 적이 있던가요?
그저 갑판 위에서 배리어의 조율을 돕고 있는 탈리안 앞으로 끌려갈 뿐이었죠.
“아오이!”
“라피아! 늦었, …질, 멋대로 진행한 일에 대해선 나중에 물어볼 거예요.”
“멋대로…?”
탈리안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멋대로 진행한 일이라니, 설마 그 짧은 시간 안에 질이 베리아와 계약을 나눈 일을 알고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알고도 그냥 넘어가 준 걸까요?
질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거짓말을 했기에 미안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마법 지부에서 날아오는 공격마법을 막기 위해 바빴기 때문에?
질에게 개입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무엇이 되었든 질은 탈리안의 말에 큰 불만을 품고 있는 듯했어요.
자신을 탓하는 것 같은 말투에 그 불만 역시 곧바로 터져 나왔죠.
“언니가, 언니가 마기를 주지 않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요!”
마법과 마법이 충돌해 폭발하는 소리와 주변 마법사들의 영창 소리로 시끄러운데, 탈리안을 탓하는 질의 목소리는 그 속에서도 확실하게 전해졌어요.
탈리안도, 라피아도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게 화가 난 걸까요?
아직 탈리안은 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거짓말을 한 건 언니였잖아요! 근데 제 탓을 하는 거예요?!”
“질,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해요. 하지만 마기는….”
질에게는 탈리안의 말이 나중에 제대로 대화해보자는 말이 혼날 준비를 하라는 말로 들렸던 것 같아요.
멋대로 베리아와 계약을 나누고 마기까지 얻었으니,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이런 식으로 들린 게 아니었을까요?
탈리안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게 아닌 것 같았지만요.
“제가 어리다고 거짓말을 해도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거짓말을 하면서 미안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전부 제 잘못인 것처럼…!”
“질, 일단 제 이야기 좀….”
“맞아, 일단 진정해봐. 그렇게 흥분해서는 대화도 못 하잖아. 아오이가 널 탓하고 혼내려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저는 항상…! 항상 언니들의 뒤에 숨거나 별일 아닌 것들만 해야 했어요! 지켜지기만 해야 했어요! 저는 싫었다구요! 그런 취급이!”
질은 흥분한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운지 좀처럼 진정을 되찾지 못했어요.
베리아에게 들었던 말 때문일까요?
이렇게 빨리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던 것 같은데요.
이런 질을 멈춰준 것은 라피아의 호통이었어요.
“지르니트! 아오이는 그냥 너랑 대화가 하고 싶은 거야!”
어느샌가 조율을 그만두고 자신의 팔만 매만지며 시선을 아래로 향한 탈리안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던 거예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닐 텐데, 질이 오해해서 화만 내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탈리안이 아예 잘못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그저 질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요.
라피아의 눈에는 불쌍하게만 보였을 테니 큰소리까지 내며 질을 꾸짖은 거겠죠.
평소에 애칭으로 질이라고만 불러주던 사람이 지르니트라고 이름을 부르며 큰소리 치는게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방금까지 기세 좋게 화를 내던 질은 바로 입을 다물었어요.
“라피아, 괜찮아요. 질도 미안해요. 마차에 다시 들어가도 돼요. 도와달라고 하려 했는데, 그럴 기분은 아니겠죠. 질을 위해서라도 다음부터는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아, 어, 언니…?”
질은 자신과의 대화를 포기해, 체념한 듯한 탈리안의 분위기에 놀랐어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대답한 것도 아니고, 배리어를 전개하며 포격 마법을 막기 시작했으니까요.
상황이 상황이라 말다툼할 시간이 없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질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탈리안이기에, 질은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분명 질이 이렇게 당황한 것은 탈리안이 사과하는 부분과 마차에 돌아가라는 부분을 듣자마자였을 거예요.
속으로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을 텐데, 라며 후회 중일지도 모르겠네요.
“라피아, 위험하니까 질을 데리고 마차에 다녀와 주세요. 라피아는 도와주었으면 하니까….”
“어, 어어! 금방 갔다 올게!”
“자, 잠깐, 라피아 언니! 이 손 좀…!”
억지로 마차로 다시 이끌리는 질이 탈리안 쪽을 바라보며 손을 놓아달라고 했지만, 놓아줄 라피아가 아니죠.
조용히 따라오라며 질의 입을 다물게 했어요.
오늘따라 여러 가지로 질에게 힘든 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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