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약속은 지켜야해요 (1)
* * *
마차로 이동하는 데에는 장장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리고 있었어요.
이런 긴 시간이 지나고 있는데도 아직 목적지에는 도착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죠.
마차의 풍경은 수시로 바뀌었다는 게 질에게 있어서 그나마 지루한 날을 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어요.
숲을 벗어나 평원으로, 평원에서 황궁의 외곽, 중앙에 커다란 섬이 있는 바다만큼 넓고 거대한 호수를 지나서, 조금 더 달리다 보면 눈이 쌓인 숲에 둘러싸인 도시까지 도착하게 되었죠.
그렇지만 그마저도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는 의미가 없는 그저 지나가는 풍경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여기에 더해서 마차는 전쟁에 참여할 사람을 데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면 멈추지를 않았으니, 마차와 마차의 옥상으로 활동 범위마저 제한 되었어요.
이렇듯 지루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점점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고, 질은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기 직전이었어요.
질은 답답한 마음에 마차의 2층 개인실에 있는 탈리안에게 찾아가 물어보았죠.
“언니…. 언제까지 마차로 이동해야 해요? 워프룸을 쓰면 안 되는 거예요?”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질은 마차에서 지내는 생활이 꽤 불편했던 것 같아요.
황궁의 마차이기에 마차 안에 준비되어 있을 것은 다 준비되어 있다고 봐도 돼요.
2층에는 개인실부터 시작해서, 요리가 가능한 부엌도 있고, 화장실은 기본으로 있었으니까요.
거의 움직이는 집과 다를 게 없었죠.
하지만 집을 떠나와서 생활하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신의 집이 아닌 만큼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 테니까요.
이런 질의 궁금증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하지만….
“질이 워프룸을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건 인원수가 적은 것도 있지만, 마법 학원의 학생이기 때문이에요.”
이에 대한 답은 탈리안이 내줬어요.
“무슨 말이에요?”
“모험가 길드의 이름을 생각해봐요. 그 이름대로 모험가들을 위한 길드잖아요? 당연히 모험가들에게 좋은 혜택을 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마법 학원의 학생들은 언제든 모험가가 될 수 있으니 싸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고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네요.
모험가들을 위해 개설된 길드이니까 혜택이 모험가들에게만 좋은 것도, 모험가가 될 가능성이 큰 마법 학원의 학생에게만 가는 것도요.
혜택이 좋게 들어가는 이유는 그렇다 치지만, 원래는 얼마나 비싸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워프룸 이용료가 얼마나 비싼데요?”
“바가지를 씌운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유지 비용에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고, 무엇보다 모험가 길드가 자선단체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설명을 마친 탈리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종이 한 장을 내밀었어요.
아무리 봐도 최근에 자주 쓰이던 계약서인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질, 한가지 약속을 하죠.”
“약속?”
“슬슬 마차가 배를 탈 거예요. 바다를 건너야 혁명군이 점령한 마법 지부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혁명군과 싸우기 전에 저랑 한 가지 약속해요.”
“제가 걱정돼서 불안한 거예요? 이런, 계약까지 하게 할 만큼?”
“지금 질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잖아요.”
질은 계약서를 훑어보며 불만인 것처럼 말했어요.
계약서에는 정말 간단하지만, 그만큼 효력이 뛰어난 제재가 담겨있네요.
‘위험에 일부러 뛰어들지 말 것, 위험하면 바로 도망칠 것, 둘 중 하나를 어길 시에는 이 계약의 마나를 대가로 지르니트는 집으로 강제 전이 당한다.’라니 과보호도 이런 과보호가 없어요.
하지만 탈리안의 말처럼 몸의 회복이 다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떤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약 한 달을 회복에 신경 쓰고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니 그만큼 베리아를 담고 있던 부작용은 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질이 탈리안이 내민 계약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불만인 얼굴로 탈리안에게 잊은 것이 있지 않냐며 물어봤죠.
“약속하니까 떠올랐는데, 언니도 저한테 지켜야 할 약속이 있지 않았어요?”
“제가, 질에게 지켜야 할 약속…?”
탈리안이 그런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나요?
웬만해서는 탈리안이 잊을 리가 없는데 이렇게 대답하는 걸 보면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아요.
일부러 숨긴다거나 그런 일도 아닐 테죠.
탈리안은 남을 속이는 연기를 하는 데에 있어서 재능은 거의 없으니까요.
“베리아를 제 몸에서 빼내게 된다면, 언니의 마기를 주기로 했었잖아요.”
질의 말을 듣고 나서야 탈리안은 머리 한구석에 내팽개쳐 두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게 가능했어요.
그렇지만 기억을 떠올린 것과는 별개로, 탈리안은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죠.
무언가 곤란해하는 눈치에요.
“질, 지금 당신의 몸 상태로는….”
“저 언니가 황녀님이랑 라피아 언니랑 도서관에 간다고 했을 때, 이사장님한테서 마기를 다루는 법도 제대로 배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기, 질, 그런 게 아니라…. 마기를 나눠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서….”
정정해야겠네요.
탈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할 수 없다는 말에 질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인 적 없는, 특히 탈리안에게는 더욱 보인 적이 없는 실망한 얼굴을 했어요.
“드, 들어보세요, 질! 마기를 준다는 건 베리아처럼 몸을 같이 쓰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에요! 다른 방법은 전부 침식당하는 결과로 이어져서 질이 버틸 수가…!”
“언니 정말 실망이에요. 약속했으면서….”
크게 실수했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질에게 변명을 해보는 탈리안이지만 질의 큰 실망을 안겨준 사실은 바꿀 수가 없는 것 같았어요.
거짓말을 계속 이어가지 않고 사실을 말해준 것만 하더라도 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긴 하다는 말이지만….
질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약속은 없었을 테니까요.
“저는 언니가 준다고 해서 믿고 있었는데!”
“질, 진정해요! 주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주지 못하는…!”
탈리안은 소리치며 방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질을 붙잡으며 변명하려 했어요.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하냐면서요.
약속을 깨버린 탈리안에게 실망했다는 질을 이대로 보내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일 거예요.
화해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거짓 약속을 한 게 들통나 다시 틀어진 상황이 되어버린다면….
탈리안은 슬퍼서 온종일 방 안의 한쪽 구석에 처박혀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게 뭐가 다른데요! 저, 강해졌다고 해도 언니들 옆에 서려면 부족하단 말이에요! 언니가 제 마음을 알아요!?”
“왜 그렇게….”
“항상 언니들한테 보호받는 건 질렸으니까요! 저는 언니들하고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은 거라고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미안해요. 하지만, 질…. 정말 방법이 없어요. 베리아가 특이한 경우였던 거니까요.”
“이번에 언니한테는 정말 실망했어요…. 놔주세요.”
정말 차가운 말투로 자신이 화났다는 어필을 해오는데 더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이대로 놓아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탈리안의 손에 들어간 힘은 좀처럼 빠질 생각을 못 했죠.
그렇지만 정말 천천히, 힘을 빼는 듯 마는 듯이 하는 탈리안의 손을 느끼자마자, 질이 손을 휙 빼갔어요.
손을 놓치자마자 ‘아….’ 같은 기운 빠진 소리밖에 하지 못한 탈리안은, 자신을 두고 재빨리 방을 나와 옥상으로 향하는 질을 말리는 것도 못했어요.
질이 마차의 옥상에 도착했을 때, 일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베리아가 유리창에 팔을 걸어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옥상으로 올라온 질을 눈치챈 베리아는 딱 한 번만 질에게 눈길을 주었어요.
당연히 쭈뼛거리며 옥상의 벤치에 앉은 질도, 신경 쓸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다시 밖을 바라보는 베리아도 조용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정말 뜻밖이네요.
베리아가 먼저 질에게 말을 걸어올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오죽했으면 질도 앉아있던 의자가 들썩일 정도로 화들짝 놀라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으니까요.
“로니아야말로 무슨 일이에요? 먼저 말을 다 걸고….”
“…쯧, 말하기 싫다면 되었다.”
“아, 아니에요! 저, 탈리안 언니한테 마기를 나눠달라고 했었는데…. 나눠주지 못한다고 해서….”
답지 않은 베리아의 선의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인 것은 알지만, 지금은 베리아한테 의지라도 해야 되나 봐요.
하긴, 이런 내용을 누구한테 말하겠어요?
탈리안도 못 하는 걸 라피아한테 가서 해달라 할 수도 없잖아요.
걱정받는 건 덤일 테고요.
“그야 당연한 것이지. 마기를 나눠달라는 불가능한 말을 하니 그 녀석도 꽤 곤란해했겠군.”
“그렇지만 로니아의 마기는 제가 쓰는 게 가능했잖아요!”
“그건 이 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보통은 불가능한 일을, 이 몸의 권능으로 해낸 것이니까.”
너무나도 뻔뻔한 베리아의 모습에 질은 할 말을 잃고 빤히 그 얼굴을 쳐다봤어요.
대화 도중에도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시선을 맞추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이 여전히 밖을 구경하고 있어요.
다만, 그렇다고 한번 베리아에게 겁먹었던 질이 잔소리를 할 수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죠.
태연하게 혁명군 단원과 조종당하던 모험가를 도륙 내고 토막 내던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베리아를 앞에 두고 오직 무섭다는 감정만이 드는 것은 아닌 이유는 단순히 외모 때문이에요.
그다지 낮지도, 높지도 않은 적당히 날카로운 콧대.
새빨갛게 물들어 길게 째진 동공에 어울리는 매서운 눈매.
그런 눈동자로 무심하게 무언가를 바라볼 때는 빨려 들어가는 느낌까지 받게 했어요.
여기에 뺨은 마도 인형을 베이스로 두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혈기가 돌아 발그스레하기까지.
바람에 흔들려 윤기 나는 붉은색의 머릿결까지 더하면 무서우면서도 한 번쯤 다시 눈길이 가게 되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저 뻔뻔한 웃음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든, 충분히 매료될 외모였다는 거죠.
“저, 로니아…. 이제 와서지만 가티아의 일은 유감이에요.”
“뻔히 보이는구나, 부탁할 게 있다면 재빨리 본론부터 말하거라.”
“로니아는 도대체 왜 그렇게 꼬인 거예요? 그저, 가티아가…! 아니, 저도 로니아의 기억을 가지게 된 이상 로니아와 같은…!”
“네 녀석이 이 몸의 기억을 가졌다고 로니아라는 이름을 칭하겠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이 몸은 베리아이니까.”
“아, 후우으. 됐어요. 로니아의 마기를 저한테 나눠주지 않을래요?”
대화 내내 한 번도 돌아보지 않던 베리아를 단 한마디로 관심을 보이게 하는 데 성공한 질이에요.
그야 당연하죠.
원수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힘을 나눠달라고 하는 거예요.
탈리안이 자리를 비워 혼자 있게 된 원흉이잖아요.
그런데 힘을 나눠달라니, 상식 밖의 말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죠.
“…네 녀석,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냐?”
눈썹을 찡그리며 질에게 되묻던 베리아는 곧이어 옥상에서 사라지라는 듯이 손을 휘이 저었어요.
당연히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지만, 질이 발끈하며 하는 말은 베리아조차 놀라게 했죠.
“들어봐요! 로니아, 마도 인형으로 몸을 옮기기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이번 일이 끝나면 교회에 붙잡힐 몸이라는 거! 제가 도와줄 테니까, 로니아의 마기를 나눠주세요!”
마도 인형과 신성석에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을 질도 알고 있었다는 건, 베리아도 알고 있나 보네요.
몸을 옮겨가는 과정을 직접 보았다고는 하지만,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알기 어려웠을 텐데요.
“…네 녀석,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저는 탈리안 언니한테 마법을 배웠다구요! 마법 학원도 다녔는데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도와줄 테니까 저한테 마기를 나눠주세요!”
“하, 그걸 안다고 해도 네 녀석이 이 몸을 어떻게 돕겠다는 것이냐. 죽는 것이 아니라면 이 마도 인형에서 자의건 타의건 빠져나갈 수도 없는 신세인데.”
“황녀님한테 부탁해서, 교회의 부정을 알리…. 흐앗?!”
베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힘쓰던 질은, 순간 덜컹대는 마차 덕분에 휘청이며 넘어지려고 했어요.
움직이는 마차에서 서 있으면 안 되지만 대화를 거부하고 쫓아내려는 베리아의 앞에서라면 그 사실을 잊을 수도 있죠.
하지만 바닥에 넘어진다는 사실에 눈을 질끈 감았던 질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어요.
살짝 눈을 떠보면 어느샌가 일어서서 자신의 팔을 잡아 넘어지지 않게 끌어 안아준 베리아를 볼 수 있었어요.
“고, 고마워요….”
“이 몸 앞에서 네 녀석이 다치면 탈리안이 설교를 시작할 테니 도와준 것이다. 왜 도와주지 않았느냐면서.”
“아, 네, 네에….”
태연하게 질을 도와준 것에 대해 곧이곧대로 선의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듯한 말을 하는 베리아에요.
그렇게 거리가 가까워지는 게 싫은 걸까요?
그나저나 질은 또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며 베리아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건지 모르겠네요.
“생각해보니 마기를 나눠주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 허나, 대가로 무엇을 지불 할 것이냐? 라파르의 명줄을 끊은 이 몸의 목숨을 대신 끊어주기라도 할 테냐?”
하지만 그 부끄러움도 얼마 가지 않아 목숨을 끊어달라는 부탁에 질은 다시 한번 베리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그건, 너무하잖아요….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니까 도와달라니…. 로니아도 죽는 것보다는 계속 살아가는 게 좋지 않아요? 왜 그렇게 쉽게 죽으려는 거예요?”
“이 몸은 이미 수천 년이나 살아온 몸이다. 게다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느냐. 이 몸의 살을 찢어발기라는 것도 아니다. 이 몸이 마기노의 코어를 꺼내면, 그대로 깨부수면 될 일이니. 부탁을 들어준다면 마기를 나눠주어도 상관없다.”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왜? 왜 이렇게 쉽게 부탁을 들어주는 거예요?’
“죽기 직전의 베풂이다. 이 몸의 눈에는 보인다. 네 녀석이 열등감에 찌들어 탈리안, 라피아와 같은 위치에 서지 못해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시기하는 마음이. 무얼, 영혼이 묶인 것은 몸을 옮겨도 풀리질 않으니 말이다. 네 녀석의 마음은 모두 알고 있다. 숨겨도 다 알 수 있지.”
확실히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영혼의 동화라고 했었어요.
그러니 베리아의 말은 어느 정도 맞을 거예요.
완전히 모든 것이 정답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요.
중요한 건, 베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질의 눈빛과 표정이 한순간에 돌변했다는 것이었어요.
평소의 풍부하고 자연스럽던 감정을 내포하던 질이 완전히 사라져, 무감정하고 사람을 적대하는 시선과 표정의 질이 나타났죠.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요?”
“하, 그런 얼굴을 탈리안이나 라피아에게 보여주는 게 어떻겠느냐? 분명 새로운 모습이라며 좋아할 것이다. 이래서야 이 몸보다도 더 거짓을 잘 꾸며내는 마군주 베리아답지 않겠느냐. 사랑받기 위해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겉모습을 꾸미는 것도 적당히 하거라.”
맞아요. 베리아의 말처럼, 질은 마치 탈리안이 잡혀있던 감옥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던 베리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베리아가 무슨 말을 하든 속마음을 전부 들킨 탓인지 질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모습을 보였어요.
아래층에 탈리안과 라피아가 있는데도요.
“…할 말만 해요.”
“분명, 이 몸과 동화를 한 뒤였나? 아니, 아니지. 이렇게 될 기질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어. 그래, 마기노에게 습격받은 날부터 말이다. 감정이 다 죽어가던 날 탈리안에게 구원받기 직전이었지. 그저 영혼의 동화가 양분이 되어, 잠들어있던 기질이 개화한 것뿐일 터.”
“싸우자는 거예요? 계약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야 할 걸요?”
웬만하면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교류를 갖는 질이 먼저 폭력적인 이야기를 꺼낼 정도면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것 같아요.
아예 이쪽이 숨겨져 있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예요.
베리아는 이런 질을 보고도 재밌다는 듯이 작게 웃으면서, 다시 자리에 앉아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갔어요.
“쿠후훗, 이 몸이 왜 네 녀석과 탈리안, 라피아에게 끌리게 되었는지 곰곰이 사색에 빠져있었다만…. 네 녀석도 결국 이 몸과 다를 것이 없었구나. 이 몸이 끌릴 만도 하지.”
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 거의 혼잣말과도 같은 베리아의 이야기에 노려보는 듯하면서도,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듯한 눈빛을 보냈어요.
어떤 말을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 이런 느낌이었죠.
“버려지기 싫은 것은 네 녀석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자신이 쓸모없어지면, 시간이 지나 매력이 떨어지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가진 것이라고는 외모뿐인 네 녀석에게 어찌하여 사랑을 주는지도 모르고 있다. 거기서 오는 두려움에 같은 곳에 서서 입지라도 굳히고 싶지만, 주변은 괜찮다고만 하지.”
“로니아.”
약간은 짜증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
베리아는 이런 질을 한번 비웃고는 다시 이야기를 멋대로 이어갔어요.
“가족을 잃은 네 녀석에게 더 이상 남은 것이라고는 탈리안과 라피아밖에 없으니, 적어도 그 둘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는 그 추잡한 마음. 훌륭하다 못해 감탄이 나오는군! 다시 혼자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울까? 그 두려움, 알고 있다. 기억과 감정을 모두 공유하는 이 몸이야말로 네 녀석의 이해자이니!”
“로니아!!”
참다못한 질이 큰소리를 치고나서야 베리아는 다양한 표정과 손짓에 몸짓을 더해가며 질을 비꼬던 말을 멈추고 침착을 되찾았어요.
그리고는 다시 무감각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조곤조곤하게 말했죠.
“네 녀석이 이 몸을 설득한답시고 들러붙는 하루하루가 그런 기분이었다. 지르니트.”
“미안해요. 됐나요? 그러니까 하던 이야기부터 마저 마무리하죠. 제가 당신의 목숨만 끊어주면 되는 거예요? 정말로 더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뭐, 사람이 변했다고는 해도 남을 걱정하는 모습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네요.
베리아가 질의 기억에 잡아먹히지 않은 것처럼, 질도 그렇겠죠.
“적당히 이 몸의 마음도 깨닫거라, 이쯤 됐으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줄 때가 되었지 않았느냐.”
“…알았어요. 언제든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줄게요. 마기는 어떻게 줄 건데요?”
“교회의 멍청한 놈들은 이 몸의 제어권에만 신경 쓰고, 탈리안은 네 녀석들에게 해가 되는 일만 하지 말라는 것만 계약 조건에 넣었지. 코어로 무슨 일을 하든 네 녀석들 기준으로 나쁜일만 아니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
베리아는 갑자기 자신의 가슴 중앙에 손을 가져가더니 그대로 푹 찔러 넣었어요.
한순간 자해를 하는 것이라 생각해버린 질이 놀라 제지하려 했지만, 피도 새어 나오지 않고, 고통에 신음을 흘리지도 않기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가 싶어 가만히 있었어요.
뭔가 집은 것 같은 베리아가 손을 꺼내 보이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기를 만들어내는 구체를 보는 게 가능했어요.
구체라는 것도 베리아가 잡고 있는 방식이 어떠한 공을 잡고 있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뿐, 질이 보기로는 그저 불길한 마기 덩어리로만 보였겠죠.
“그걸 주겠다는 거예요?”
“이 코어는 마기노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다. 네 녀석이 원하는 것도 이것으로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전에…. 네 녀석의 방으로 가지. 너무 눈에 띄는 작업이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질이 마기를 다시 사용하는 데에는 성공하게 됐네요.
탈리안의 것이 아니라, 베리아의 것으로 대신 받게 되었지만요.
계약상 나쁜 짓을 할 수도 없으니 안심하고 베리아의 마기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설마하니 그 대가로 베리아를 죽여야 하게 될 줄은 몰랐을 테지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