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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47화 (147/189)

〈 147화 〉 협력의 이유 (3)

* * *

레나이와의 일이 있던 뒤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탈리안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준비로 인해 질과 대신전에 도착했어요.

맞아요.

얼마 전에 질이 기습을 받았던 탓에 화난 탈리안이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던 그곳이에요.

그런데 그런 대참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신전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웅장하고 깔끔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죠.

이게 바로 황녀가 손을 써두었기에 나온 결과물일지도 모르겠어요.

어딜 어떻게 손봤길래, 폐허로 변한 건물과 불탄 광장, 폭발로 인한 그을림, 구멍 뚫린 교회의 벽들을 원상복구 했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에요.

단순히 돈을 쏟아부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어서 오십시오. 단탈리안, 지르니트 씨.”

완전히 복구된 대신전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을 때, 부주교가 인사를 해왔어요.

여전히 탈리안을 부를 때는 씨를 붙이지 않고 이름으로만 부르면서 지르니트에게는 씨를 붙이네요.

단순히 탈리안이 마군주이기 때문일까요.

듣는 본인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은걸요.

“교회도 사람이 참 없네요. 안내역이 당신밖에 없는 건가요?”

“저번에 어떤 분이 교회를 휩쓸고 가셔서 그렇습니다. 부상자가 워낙 많이 나온 탓에 제가 대신 온 것이지요.”

“쯧…. 저번에 연락해둔 것은 확실히 준비해둔 거겠죠?”

“시간은 조금 촉박했습니다만…. 대신전의 심판의 성소 대여, 마도 인형과 마군주의 힘을 약화하게 할 특제 신성석까지 전부 준비되어 있습니다.”

부주교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베리아와의 계약에 관한 것들이겠죠.

물품의 준비가 모두 끝마쳐있다는 말에 탈리안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질과 함께 부주교의 뒤를 따라갔어요.

그의 안내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 넓은 통로를 지나, 미약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하의 화원을 지나가면….

천장 높은 곳에는 새파란 하늘이 보이는,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어요.

나름대로 잘 정돈된 평탄한 돌바닥에는 마법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그 거대한 마법진의 주변에는 거대한 조각상 세 개가 둘러서 서 있었어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옷감을 입고, 제각각 책과 검, 천칭을 들고 있는걸 보아하니 성서에나 나올 그란스리를 조각해놓은 듯해요.

“석상에 진짜 옷을 입혀놓는 것은 누구 취미죠?”

“그것이 신의입니다. 의문을 품는 것은 불경죄, 라고 말해드리고 싶지만 마군주에게는 강요할 수도 없는 법이겠지요. 마군주끼리의 계약은 미리 하고 오신 겁니까?”

눈썹을 구기면서 그란스리를 욕하는 탈리안은 눈동자만 굴려 질을 가리켰어요.

어쩐지 질이 처음부터 말이 없다 싶었는데, 새빨간 두 눈을 보니 교회에 왔을 때부터 베리아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나 보네요.

확실히 이러는 편이 계약과 그 이후의 일에 있어서 빠르게 일을 진행하는 데는 편할 거예요.

부주교도 이를 눈치채고는 손을 가슴 근처까지 올렸어요.

그러자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구체 관절을 사용한 마네킹과 가죽 주머니에 담겨있음에도 황금빛을 내는 무언가를 가져왔죠.

그 사이, 탈리안은 베리아를 보며 뜸을 들이며 고민하는 듯하다가 힘겹게 입을 뗐어요.

“…베리아, 계약으로 묶여버린 이상 이미 소용없는 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미리 말해둘게요. 마도 인형을 새로운 몸으로 쓰게 되면 당신은 정말 노예나 다름없는 마군주가 될 거예요. 이런 리스크까지 감수해가면서 라파르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싶은 거예요? 그 정도로 당신은….”

“지금 이 몸을 걱정하는 것이냐? 그 삭막한 연옥이 꽃밭에 물드는 일이 생기려나 보군.”

코웃음을 치는 베리아의 반응도 이해는 돼요.

그렇게 베리아를 용서하기 힘들어했던 것이 탈리안인걸요.

용서는커녕, 질의 몸을 빌려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쓰레기를 보는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마를 짚고는 했으니까요.

어쩌면 질과 함께 있는 날이 길어지는 만큼 질과 닮게 된 것일지도 몰라요.

착해도 너무 착한 질처럼 변하게 된 것일지도 몰라요.

“이 앞부터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까 하는 말이에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당신은 계약으로 인해 저에게 묶여버린 몸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더해 마도 인형에 갇히게 된다면 허울뿐인 마군주가 되는 거라고요. 마군주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죽는 것과 다름이 없지. 하지만 단탈리안, 이 일은 네 녀석에게 있어 둘도 없을 복수의 기회일 텐데? 이 몸을 걱정해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이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베리아의 말에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휙 돌리는 탈리안이에요.

무의미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탈리안도 깨달은 거죠.

“그래요, 그렇게 호되게 당해놓고 당신을 걱정한 제가 멍청한 거죠…. 시간이 얼마나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불편한 일이에요…. 질하고 다를 게 없어요. 미련하고 멍청하다고 욕먹을 정도로 마음이 약해서는…. 마법진 중앙에 가서 서세요.”

부주교가 지시한 명령이 다 끝났는지, 마법진의 중앙에는 마도 인형이 놓여 있었어요.

탈리안의 힘 빠진 명령에 베리아도 말 한마디 없이 그 마도 인형이 놓인 곳 앞으로 가서 섰죠.

어느샌가 마도 인형과 빛나는 주머니를 가져온 사람들은 준비를 끝마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베리아가 마법진 중앙에 섰을 땐 희미하게 주변에서 반딧불이 같은 빛이 떠다니기 시작했어요.

소리도 없이 계약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거예요.

“무엇을 할지는 들어서 알고 있죠? 라파르와 싸울 때, 질의 몸을 쓸 수는 없으니까. 마도 인형으로 베리아…. 당신이 옮겨갈 거예요.”

“질리도록 들었다.”

“마도 인형의 가슴 부분에 홈이 나 있는 게 보일 거예요. 그곳에 주머니에 담긴 신성석을 끼워주세요. 계약만으로는 불안하니까 신성석이 항상 당신의 몸속에서 마기를 억제할 거예요.”

“알고 있으니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베리아는 투덜거리면서도 주머니에 담겨있는 신성석을 꺼내 마도 인형의 가슴팍에 끼워 넣었어요.

그러자 마도 인형의 딱딱한 몸이 부드럽게, 구체 관절이 따뜻한 피부로 덮이면서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품평하는 눈을 한 채로 마도 인형을 바라보던 베리아는 온갖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민에 잠겼죠.

아무렇지 않게 계약도 마쳤고, 새로운 몸으로 갈아타기만 하면 될 텐데,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나 봐요.

떠오른 생각을 다시 묻어둔 베리아는 고개를 들어 탈리안을 빤히 쳐다봤어요.

“뭔가요. 이제 와서 고해성사라도 하려는 건가요? 이곳이 교회니까? 적어도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한껏 걱정해주었던 일이 거절당한 탓인지, 탈리안의 말에는 날이 서 있어요.

이런 날이 선 말에도 베리아는 비웃듯이 웃으며 그럴 리가 있냐며 대답했죠.

“하, 설마. 나는 내가 악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네 말대로 이제 와서 잘못을 뉘우칠 생각도 없다. 다만…. 그래, 지르니트 꼬맹이에게도 했던 말이…. 그저 슬픔을 숨기기 위해 했던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이어지는 혼잣말에 탈리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베리아를 지켜봤어요.

자유를 잃고 본능에 따르지도 못하게 될 베리아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이제 마기노라고 부르기도 어려워질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말할 기회, 거의 유언을 남기게 두는 것 같았죠.

“영혼을 묶는다는 것은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모두 이 몸에게 해가 될 것들로만 조건을 걸어 이행한 계약과 다름없었으니. 그로써 생긴 동화의 영향. 기억과 감정의 공유와 침식. 이것들이 최근의 이 몸을 얼마나 괴롭혀왔는지 알고 있느냐? 정말이지 눈뜨고 봐주기 어렵더구나.”

말을 이어가던 도중, 마도 인형을 잡고 있지 않은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쥔 베리아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어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 몸이지만…. 이런 구역질이 나는 마도 인형의 속에서 살 바에는, 몸을 옮겨도 지르니트 꼬맹이에게 묶여서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겠다.”

“네? 지금 뭐라고…!”

좋지 못한 극단의 선택을 하겠다는 말에 탈리안은 식겁하며 베리아에게 달려들려고 했어요.

달려오는 탈리안의 모습이 꽤 웃겼는지 베리아가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무얼 그렇게 당황하지? 어차피 계약으로 인해서 허튼짓은 못 하도록 막아놓지 않았더냐?’라며 탈리안을 비꼬았죠.

앞으로 한 발만 더 디디면 마법진의 안으로 들어갈 거리의 탈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고 했지만,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가는 베리아 덕분에 화도 내지 못했어요.

탈리안은 분을 삭이며 다시 마법진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어차피 지르니트 꼬맹이에게는 해가 될 것도 없잖느냐. 영혼을 묶었다는 것이 이 몸을 지르니트에게 묶었다는 것이지, 지르니트를 이 몸에게 묶은 것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그 꼬맹이에게는 기억과 감정의 동화 수준에서만 영향이 미쳤던 것이고.”

“…그럼 방금 그 말은 무슨 의미죠?”

탈리안이 베리아를 믿지 못할 만해요.

그야 마군주인걸요.

노예상이라는 세력을 만들어 하나의 세계를 어지럽힌 죄인.

연옥에서의 인연을 잃은 분노로 원수를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린 광인.

마군주라는 핑계를 대어 본능에 따라 수많은 생명을 살인한 살인자.

단순히 악으로 칭해도 될만한 인물이 목적만 달성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몸의 운명은 네 녀석들에게 패배했을 때부터 이미 끝이 났던 것이다. 추하게 더 살아봤자 이 꼬맹이의 간지럽고 비위가 상하기만 하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뿐이겠지. 네 녀석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게 참을 수가 없다. 속이 울렁거려. 그러니….”

말을 끝마치지 않은 베리아는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마기를 내뿜어내더니 곧바로 마도 인형을 감쌌어요.

얼마 안 가서 질의 몸이 안고 있는 마도 인형의 위로 푹 쓰러진 것을 보면 베리아가 몸을 옮겨간 것 같아요.

마도 인형에 추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붉은빛의 기나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자라났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서서히 눈을 떠, 온몸에 마기를 망토처럼 휘감아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를 가렸죠.

다음으로 자신의 위로 쓰러진 질의 몸을 잡아 비켜내고 일어나서는 탈리안을 바라보며 부드러워진 입을 열었어요.

“그러니, 라파르를 이 몸의 손으로 다시 한번 확실하게 코어까지 깨부숴 죽인 뒤에는…. 이 몸의 코어도 스스로 깨부수겠다.”

마기에 휘날리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그로 인해 그림자가 진 얼굴, 그 속에서 빛나는 새빨갛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본래의 마도 인형보다 커진 키에 육감적인 몸매까지.

베리아가 마도 인형에 몸을 옮기자마자 신체적인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 마치 베리아의 진짜 모습을 재현한 듯해요.

그 모습에 탈리안은 잠깐이나마 연옥에서의 베리아를 떠올린 것처럼 견제를 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쓰러져있는 질에게 다가가며 나지막이 말했어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해가 가지도 않네요. 천성이 저와 비슷했던 왜 당신이 그렇게까지 비틀어진 건지. ”

“단탈리안, 네 녀석이 이상한 거다. 모든 것이 삭막하고, 비정하고, 잔학한 연옥에서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네 녀석뿐일 거다.”

“당신이 잃어버렸다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잖아요.”

자신보다 큰 질을 안아 든 탈리안은 베리아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지 않냐는 듯이 말했어요.

이에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고, 빛을 잃어버린 마법진의 밖으로 걸어나가는 베리아에요.

굳이 얼굴을 마주할 의리도 없지만요.

“지르니트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군, 이 몸에게는 본능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계약과 마도 인형에 속박되는 것도 본능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 사람에 대한 것도?”

“이 또한 거짓말이라 믿고 싶다면 그리하거라. 이곳에 오기 전에 마기노의 코어에 직접 새기는 계약까지 했다면, 이 몸이 말하는 것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런 수고를 들여서까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질을 데리고 먼저 집에 돌아가 있으세요. 명령이에요.”

자신으로부터 등을 진 베리아의 앞으로 가서 안고 있는 질을 넘겨준 탈리안이에요.

명령이라는 말에 아무런 말대꾸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교회에 오기 전에 했다는 계약의 힘이 제대로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계약도 마치고, 모르는 사이에 베리아의 새로운 몸까지 준비해 성공적으로 옮겼는데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나 봐요.

명령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는지 베리아는 속박하고 있는 무언가가 풀린 것처럼 전력을 내어 마기에 휩싸인 채로 단번에 성소에서 형체를 잃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래도 별 탈 없이 일이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네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시더군요. 단탈리안.”

그런데 성소의 입구 부근에 서 있던 부주교가 다가와 탈리안을 비웃듯이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탈리안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래도 베리아에게 다시금 그 의중을 물었을 때에는 저조차 당황하여 실수할 것 같았습니다. 혹여 계획을 망치시는 건 아닐지. 그래도 이걸로 라파르만 처리한다면, 이 세계를 위해 힘쓰는 베리아를 볼 수 있겠지요.”

“이 세계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잘나신 그란스리의 눈에 들기 위해서겠죠. 다른 방법만 있었다면 당신들에게 의지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후회하는 듯한 탈리안의 말투에 부주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물어봤어요.

베리아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품는 게 아니었는지, 좋지 못한 일을 당했던 게 아니었는지 말이에요.

그런데 베리아가 교회를 위해서, 그란스리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당신 말대로 원수는 원수라지만, 하지만 이런 사람만도 못한 도구 취급을 하는 건 좋지 못해요! 마도 인형과 신성석에 수작을 부려놓은 걸 모를 줄 알았어요?! 교회에서 특수 제작한 마도 인형에 신성석, 약해진 마군주! 교회의 개로 전락해버린 베리아가…!”

대화의 내용을 보면 교회에서 마도 인형이나 신성석으로 베리아의 행동을 제어할 방법을 찾아두었나 봐요.

다만 당사자의 동의 없이 벌어진 일이기에 이렇게 화를 내는 거겠죠.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가진 원한은 자신이 풀어야 한다는 고집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거고요.

뭐가 되었든 그 화조차도 제대로 내지 못하도록 부주교가 치고 들어왔어요.

“단탈리안,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니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이 세계에 있어서 마군주는 존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지요. 이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네요.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텐데.”

질이 곁에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에 탈리안은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혼잣말을 하며 부주교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어요.

탈리안의 말 하나하나에 토를 달던 부주교는 물건을 건네받고는 조용히 입구 근처에서 비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주었죠.

원래부터 그것만을 바라고 있던 것처럼요.

“지금처럼 대가만 치르신다면 언제든 저희에게 의지하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의지해주시면 좋지요. 다시금 황궁에서…. 아니, 교회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되었으니….”

“눈에 뻔히 보이는 거 알아요? 당신이 관음증을 가지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요.”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단탈리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눈썹이나 눈초리 하나 꿈틀하지 않으며 무미건조하게 말로만 웃는 부주교의 인사에도 탈리안은 대답 없이 곧바로 성소를 빠져나왔어요.

그렇지만 탈리안은 눈치채고 있었어요.

부주교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던 것을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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