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협력의 이유 (2)
* * *
황궁의 어느 도서관, 레나이는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서 은밀하게 말이죠.
그렇다고 이 도서관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었어요.
책의 대여부터 반납, 정리까지 모두 자동화가 이루어져 있는 최첨단의 기술이 접목된 도서관이라 사서마저 필요 없었거든요.
누군가의 도서관이랑은 차이가 나지만, 상관 없겠죠.
어쨌든, 그런데도 레나이가 이렇게 소리 없이 바삐 움직이며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어이, 탈리안! 찾았나?!”
뭐, 들키지 않으려는 것 치고는 상당히 큰 소리로 부르네요.
어쨌든 열심히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리치며 부른다는 것이, 탈리안의 이름이에요.
탈리안도 황궁의 도서관에 와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직접 말해줄 테니 들어보도록 해요.
언제나 그렇듯, 가까이에 있는 용도 불명의 문을 통해서 건너오고 있으니까요.
“이곳에는 딱히 특별하다고 볼 만한 건 없었어요. 제가 찾아본 바로는요. 당신은?”
“음,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선 황녀님이라고 착실하게 부르도록.”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저는 마군주인데.”
“불경죄로 너뿐만 아니라 질과 라피아까지 잡혀가는 꼴을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본인이 괜찮아도 본인의 주변 사람들은 괜찮아하지 않으니까.”
레나이의 잔소리에 탈리안은 작게 구시렁거렸어요.
질과 라피아를 끌어들이면 탈리안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으니까요.
자신의 탓으로 감옥에 넣어지는 질과 라피아의 모습이라니, 끔찍하겠죠.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탈리안이 아니겠지만요.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게 좋은 거예요.
“그렇지만, 정말 있는 건가요? 당신, 황녀님이 말해서 도와주러 오기는 했지만…. 베리아를 질의 몸에서 떨어트릴 방법이라는 것이….”
“진작 말을 해주었다면 본인도 미리 찾아놓았을 테지. 일부러 질의 몸에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 도움을 청했을 때는 꽤 기뻤다고, 본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레나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질의 몸에 베리아를 담아두고 있는 게 힘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 외에 질에게 있어서 베리아를 담아두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될 것이 없잖아요?
마기에 침식될 가능성도 있고, 성격도 나빠지고, 베리아에게 잠식당할 수도 있고….
그저 질이 억지를 부려서, 질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만 하는 게 탈리안이라는걸 레나이도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위험을 알고서도 현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한번은 패배했던 베리아이니, 뭔가 잘못된다면 탈리안이라면 무력을 써서라도 제압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일부러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먼저 알아서 했을 거라고요. 그런데 왜 사람을 시키지 않고 이렇게 직접 찾는 거예요?”
“별 이유 없다. ‘금서’이니까. 그러니 숨겨져 있고, 이 고생을 해가며 찾는 것이지.”
“금서라면 차라리 제 도서관에서 찾는 게 어때요? 저는 특별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어서 원하는 책이 있다면 바로 꺼내서 읽을 수 있는데요.”
“아쉽지만 그대의 능력으로는 그 책을 찾을 수 없을 거야. 그 책은 태초신 헤브니아가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책이니까.”
“…확실히 태초신 급이라면 건들기 어렵긴 하겠네요. 그런 것 치고는 이런 황궁의 구석진 도서관에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데 말이에요.”
탈리안의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책을 찾고 있었네요.
태초신이 쓴 책이라니, 어지간한 마군주의 힘으로도 찾기 어려운 책인 것은 분명해요.
그렇다면 예전에 베리아가 막 질의 몸에 깃들었을 때 혼자서 먼저 찾으려고 했어도 절대로 찾지 못했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걸 보면 탈리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요.
“정말 이 도서관에 특별한 점이 없나? 사소한 거라도 좋아, 숨겨진 통로를 열 수 있는 장치만 발견하면 그 뒤는 수월한데 말이지.”
“애초에 그 비밀 통로라는 것도 금서를 보관한다는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황궁에 널리고 널린 도서관의 이곳저곳과 연결점이 바뀐다면서요.”
“그게 문제야…. 그렇다고 당당하게 금서고를 관리하는 자에게 가서 열어달라 할 수도 없는 법이고…. 그런데 라피아는 어디 가서 모습을 안 보이는 거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곳에 라피아도 같이 와 있었나 보네요.
탈리안을 불렀을 때 같이 왔을 법도 한데 책을 찾는 데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후우.”
“흐으응…! 뭐, 뭐에요?! 누구, 누가 이런! 라피아?! 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탈리안이 어깨를 떨며 야릇한 소리를 냈어요.
몰래 다가와서 탈리안의 귀에 바람을 불었던 것 같아요.
한쪽 손으로 귀를 가리면서도 화를 내는 게, 상당히 간지러웠겠죠.
“아니, 너무 생각에 잠겨있는 거 같길래. 근데 황녀님하고 찾던 책. 찾은 거 같은데?”
“네? 찾았다고요?”
“뭐? 그대가? 어떻게?”
금서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레나이도, 금서의 주인이라는 탈리안도 금서고에 들어가지 못해 탐색에 난항을 겪고 있는데 라피아가 바로 찾아왔다니.
두 명이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라피아가 책이랑 인연이 있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난 따로 2층에서 찾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상한 복도에 서 있더라고? 그래서어…. 안쪽 깊숙이 뭔가 있는 것 같길래 가보니까 책이 한 권 있어서 그걸 가지고 나온 건데.”
이런 걸 운명의 인도라고 하던가요?
의도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얻었다면, 필시 운명이 라피아를 이끌어준 것일지도 몰라요.
태초신 헤브니아가 쓴 책이라면 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책의 의지에 따라서, 라는 상황도 있을법하지 않을까요.
라피아에게 나타난 이유는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것밖에 없을 거예요.
“…신기하네요. 그래서 책의 제목이 뭔데요? 황녀님이 말해주기로는, 태초신 헤브니아가 알려주는 만물이 담긴 책이라고 하던데요.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책이라고.”
“책의 제목? 그러고 보니까 확인도 안 했네, 어디….”
한 손으로 책을 흔들던 라피아는 탈리안이 말해줘야 제목을 확인하려 했어요.
정말로 홀리듯이 책에 이끌렸던 것 같아요.
“어, 음, 이걸 뭐라 해야 하지? 이거 태초신이 쓴 거 맞아?”
“무슨 제목이길래 그래요?”
“질문하면 무엇이든지 알려드립니다, 태초신 헤브니아…. 라고 하는데?”
“으음, 조금 장난스러운 제목이긴 하지만…. 라피아, 언젠가 본인이 그 책의 겉표지를 본 적은 있다. 그러니 제목이 그렇더라도 그 책은 실물이다.”
레나이가 말하는 겉표지는 금테가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정중앙에 초록빛의 보석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확실하게 맞다고 말해주는 사람까지 있으니 라피아가 잘못된 책을 가져왔을 리는 없겠죠.
정말 제대로 가져온 것인지 의심이 되는지, 라피아 본인조차도 찜찜한 표정으로 책을 천천히 펼치고 있어요.
“엥?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데?”
“…곧 내용이 읽힐 것이니 잘 새겨두도록. 그건 라피아, 그대에게만 보일 테니까.”
“네? 탈리안 너도 아무것도 안 적혀있는 걸로 보이지 않아?”
어느샌가 옆으로 와서 같이 책을 보고 있는 탈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는 라피아의 손에 작은 마정석과도 같은 걸 건네주었죠.
“응? 이건 뭐야, 왜 주는 건데?”
“질에게도 만들어준 적이 있는데, 메모리얼 스톤이라는 거예요. 그걸 손에 쥐고 마정석을 사용하듯이, 집중해서 책을 읽어요. 나중에 다시 기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 메모리얼 스톤이 기억을 되새기게 해줄 거예요.”
책이 보여주는 것은 라피아만 볼 수 있으니 기억에 담아서 나중에 알려달라는 거네요.
어디서 꺼낸 것인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 안에 좋은 방법을 떠올려 낸 탈리안이에요.
질이 옆에 있었다면 역시 언니는 최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요.
그러고 보니, 탈리안과 라피아까지 황녀를 따라왔는데 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흐응, 알았, 보인다! 아니, 이거 실시간 대화야? 태초신이 이래도 돼?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된 분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런 거라고?”
“그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단순한 책이다. 태초신이 만들었기에 책 스스로의 의지가 있어 자신을 읽을 사람을 고르는 것도, 어떤 것을 보여줄지도 책 마음대로이지.”
요컨대, 살아있는 책이라는 거네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책에도 의지를 갖게 하는 걸 보면, 태초신이라는 존재가 대단하긴 한가 봐요.
라피아는 탈리안의 명령대로 메모리얼 스톤을 손에 쥐고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라피아의 표정은 탈리안과 레나이를 궁금하게 하기 충분했죠.
“아하하…. 옛날에 황궁에서 마도 인형이라는 걸 썼다는데, 그걸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데? 게다가 신성석인지 뭔지로 베리아를 약하게 할 수도 있다 하고.”
“이번에도 교회로 가야 하는 건가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막시밀리안이라고 부주교를 하고 있?! 왜, 왜 이러세요!?”
레나이는 멀쩡하게 책을 읽던 라피아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어요.
부주교의 직책을 맡고 있다는 막시밀리안, 이름은 어딘가 다르지만 분명 익숙한 이름이에요.
하지만 탈리안도 아니고, 왜 레나이의 손이 먼저 나간 걸까요?
이름을 알아듣는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 만났었던 경험이 있는 탈리안이 알아들어야 하는걸요.
당황해서 책을 떨어트린 라피아를 보고 나서야 그 손을 풀어주고는, 책을 주워주는 레나이였어요.
“…미안하군. 썩 달갑지 않은 이름이 나와서 말이야. 어쨌든, 저번에 지르니트의 혈통이 임페리얼 가디언이라는 것은 설명했지? 그 계획이 실패해서 그다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마도 인형이다. 하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몸을 옮겨 다닌다면 마도 인형에도….”
짧은 대답을 마친 레나이는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거의 혼잣말을 하다시피 중얼거렸어요.
그러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다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혼자서 생각할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레나이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탈리안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요.
이런 흐름을 깨버린 것은 책을 다시 펼친 라피아였어요.
“으응? 글자가 더 안 나타나는데? 끝인가 봐.”
“황녀님의 모습을 보니 책이 줄 만한 답은 다 내어준 것 같아요. 그 책은…. 저기, 라피아? 책 어디 있어요?”
“어? 어어? 방금까지 내 손에 있었는데?!”
스스로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보이는 글을 써 내려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스스로 사라지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나 보네요.
이렇게 된다면 정말로 황궁에서 ‘보관’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네요.
그저 책이 편안히 쉴 공간으로 황궁의 금서고를 선택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에요.
“너무 당황하지 말도록, 책은 제자리에 돌아갔을 거다. 지금 막 본인도 생각의 정리를 마쳤으니, 탈리안. 그대는 지르니트와 함께 부주교 막시밀리안에게 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본인이 따로 연락해두지.”
“황녀님, 혹시…막시밀리안이 제가 아는 부주교 막스가 맞나요? 맞다면 그가 왜, 태초신의 책에 나오는 지식을 알고 있는 거죠?”
그것도 그렇네요.
부주교는 탈리안도 레나이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레나이의 모습을 보면 막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여러 가지로 수상한 부분이 많은 인물이에요.
“…막시밀리안은, 그저 모종의 이유로 황궁에서 퇴출당한 남자다.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군. 그 때문에 해고당한 시녀만 몇인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말하지 않아. 관음증을 가진 녀석이라는 것만 알아둬. 본제로 돌아와서 막시밀리안은 마도 인형이라는 새로운 병력 자원 이론을 내세운 인물이다.”
“마도 인형이 원래부터 있던게 아니라 부주교가 만들어낸 거라고요….”
“그래, 마기노가 넘어오고 나서 차세대 병력자원으로 떠오른 것이 마도 인형이었는데, 제작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에 황궁이 가진 자본이 아니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지. 윤리적 문제도 없으니까. 하지만….”
레나이는 막시밀리안을 떠올리고 머리가 아파져 온 듯 한숨을 쉬었어요.
이야기하려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려는 것 같아요.
마도 인형이 있었다면 재앙에 세계가 휩쓸릴 일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아쉬운 일이네요.
막시밀리안이 잘못을 저질러 추방당하지만 않았더라도 세계는 구원받았을지도 몰라요.
베리아를 질에게서 떼어낼 방법을 찾아낸 이상, 탈리안이나 라피아가 이에 대해서 더 궁금해할 이유는 없지만요.
“정보도 얻었고, 할 말이 더 없다면 저희는 이만 돌아갈 거에요. 그 전에 뭔가 다른 용건이 남아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음, 본인이 시간이 남아 도와준 것이기는 하나…. 자그마한 보상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군.”
그런데 레나이는 일을 마치자마자 돌아가려는 탈리안과 라피아가 야속했던 것 같아요.
서운하겠죠.
아무리 그래도 한 지붕에 살게 된 가족과 다름없는데, 도움만 받고 쏙 빠져나가겠다니.
도와주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 중일 거예요.
“황녀이면서 보상이 필요하다니, 양심은 있어요?”
“마군주이면서 이 세계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나? 꼭 이렇게 한 번씩 말싸움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겠어?”
“…바라는 게 뭔데요.”
알고 보면 레나이가 뒤에서 해주는 것도 정말 많아요.
대신전에서의 사고도 덮어주고, 탈리안과 질에게 시민권도 부여해주고, 다른 간섭이 들어오지 않도록 편의까지 봐주고 있으니까요.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저 도움만 받고 돌아가려는 탈리안의 양심이 조금은 부족해 보이네요.
본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 레나이와 더 이상의 신경전을 펼치지 않으려는 거겠죠.
무엇보다 레나이가 바라는 보상이랍시고 말한 것은 보상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가벼운 것이었거든요.
“그대들을 한 번씩 찐하게 안아봤으면 좋겠군, 안겨있는 동안에는 가만히 있으면 더 좋겠는데 말이야. 이 정도는 일도 아니잖나.”
“정말 안기만 하고 끝이에요. 알겠어요? 돌아가면 바로 베리아와 계약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아. 자, 이리 와!”
활짝 팔을 벌린 레나이에게 어쩔 수 없이 그 품 안으로 들어가는 탈리안이었어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꽤 큰 키를 가진 레나이의 품은 탈리안이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의자에 앉아야만 했죠.
도서관에 널리고 널린 것이 의자였으니 그건 문제 될 것이 없었어요.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마치 인형처럼 레나이의 무릎에 안겨있는 탈리안의 모습이었다고 할까요.
레나이와 라피아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탈리안에게는 상당히 부끄러운 자세였던 것 같아요.
레나이는 팔만 벌리고 있어, 자세를 고치는 것 외에는 탈리안 스스로 인형처럼 안겨야 했으니 말이에요.
“후우, 이것 참. 그대가 지르니트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겠군.”
“무슨 의미예요?”
“그렇게 무서운 눈을 하면 아름다운 외모가 망가지니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런데…. 향수 쓰고 있나?”
탈리안을 안자마자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는 한숨을 내쉬다가 뜬금없이 향수에 대한 말을 꺼냈어요.
“…안 써요.”
“스읍~ 하아…. 달콤한 향이 마치 핏츠 냄새와 똑같군.”
탈리안의 무심한 대답에는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고 코를 정수리 근처로 가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레나이에요.
당연히 이를 탈리안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어요.
소리치면서 거세게 저항을 하기 시작했죠.
했는데….
“뭐, 뭐 하는 거예요! 질도 아니고 냄새를 왜 맡는 건데요?! 이거 놔요! 안고 있기만 한다면서…!”
“으음? 지르니트에게는 냄새를 맡게 해주나?”
“아, 어, 그게, 그러니까아…. 가, 가끔 질이 멋대로….”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버벅거리며 맡게 해주지는 않지만, 질이 먼저 다가와 맡는다며 핑계를 대는 탈리안이에요.
핑계인지 사실인지는 라피아의 눈치를 살핀 것을 보면 누구나가 알 수 있었어요.
뻔하죠.
항상 못 이기는 척 질이 달라붙어서 냄새 맡는 걸 모르는 척 넘어가 준 것일 테니까요.
그저 라피아의 눈치가 보여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거예요.
“부럽군, 그만큼 거리가 가깝다는 증거이니 말이야. 본인하고도 사이가 좋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황녀님에게는 조금은 감사하고 있어요.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친해지고 싶다면 거절하지는 않을게요. 너무 긴 시간 혼자 지내와서…. 외로우니까.”
“탈리안, 그대는 말하는 것과 분위기만 보면 늙은이와 다름없는데…. 생긴 것만 보면 완전히 어린애 같군. 더욱 마음에 들어,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놀릴 거면 그만 해요. 정말, 진지해지려고 하면 당신도 라피아도 항상 이렇, 게?!”
탈리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화를 냈냐면 그것도 아니었고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갑자기 일어난 일에 반응하지 못하며, 그저 레나이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어요.
“왜 그러지? 뺨에 키스 받는 것은 처음인가?”
“저, 황녀님. 탈리안은 그런 쪽에 내성이 거의 없으니까 자제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사랑스러워서 칭찬하는 것도 안 돼, 애정을 표현하는 것도 안 돼. 본인 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자!, 다음으로 라피아, 어서 본인에게 안기도록.”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레나이는 탈리안을 풀어주며 라피아에게 손짓했어요.
“아~ 역시 저도 하는 거죠…? 안기라는 표현이 조금 그런 느낌이 들지만…. 하라면 해야죠.”
“음, 아니야. 그대는 본인이 다음 달에 집에 가면 둘이 있을 때 같이 즐기도록 하지. 탈리안, 그대에게는 건네줄 것이 있으니 바로 돌아가지 말고 따라와. 계약이 끝난 뒤의 막시밀리안에게 건네줘야 할 거야.”
지금 당장의 상황을 모면한 라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음이라는 레나이의 말에 ‘네? 즐긴다고요?’라며 되묻고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어요.
라피아야 조금 고민할 거리가 생겼겠지만, 그래도 이번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질에게서 베리아를 떼어낼 방법도 찾았고, 탈리안은 걱정을 덜었고, 레나이는 사심을 채웠으니까요.
다 잘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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