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누구나 불청객이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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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가 있었던 직후 집에 돌아온 질과 라피아는 함께 욕실의 물에 깊이 잠겨 휴식을 취하고 있었어요.
접근하자마자 마기를 느끼게 되고, 사건에 휘말리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아니었더라도 질의 눈에 면접실은 어린 나이에 보기 어려운 살풍경한 모습이었으니까요.
이전에 탈리안과 싸울 때, 사지가 찢기고 피를 흩뿌렸던 것은 잠깐씩이나마 눈을 피하면 되었던 일이니까요.
결정적으로 그 당시에는 탈리안의 배려로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 될 때는 훈련장의 결계가 불투명해져 보이지 않게 해줬거든요.
그러니 오늘 일은 질에게 있어 조금은 충격적인 일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물에 잠겨있는 지금도 라피아의 품에 푹 들어가 안겨있는 상황인 거에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기는, 내가 널 하루 이틀 봐?”
“자바 단기지 마여어….”
생각에 잠긴 질의 볼을 아프지 않게 집어 늘어뜨리는 라피아에요.
그 말대로 몇 날 며칠을 함께 지냈는데 생각에 잠긴 것 정도는 알아야죠.
숨기는 걸 보면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라피아가 가만둘 리도 없는 일이에요.
질은 천천히 라피아의 손을 잡아 볼에서 떼놓고는 볼을 부풀려, 목 아래까지 물에 잠기도록 몸을 더 아래로 내렸어요.
“저번에도 잡아당긴 적 있지 않아요? 제 볼한테 사과해요!”
“어어? …볼한테 사과해야 해?”
“얼른요!”
질이 손으로 물장구까지 치며 보채는 바람에 라피아는 마지못해 사과했어요.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이러면 돼?’라면서요.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며 한두 차례 더 물장구를 쳤지만, 이내 조용해지고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어요.
“베리아의 감옥에서도 그런 잔인한 장면은 본 적이 없었잖아요. 봐도 이미 상처가 아물었거나, 제대로 보이지 않게 가렸다거나, 볼 수 없는, 그랬잖아요? 근데 이번에는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어요.”
“질, 베리아가 나쁜 거야. 너는 나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베리아가 제 몸속에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다면…. 제가 한 일로 보일 거예요. 그럼 제가 저지른 잘못이랑 뭐가 다른데요?”
라피아가 예상했던 대로 질이 자책하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며 위로를 시작한 라피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 없었죠.
“네가 모험가 일을 하거나 마법학원에 다니면서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면 잘못 생각한 거야. 항상 깨끗한 일만 할 수는 없어. 항상 아름다운 것만 볼 수도 없고.”
“제 말은 그런 게 아니에요. 잘못했다면 사람은 그 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나쁜 짓을 했더라도 저나, 베리아한테…. 그런 잔인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일은 없던 거에요.”
“내 말이랑 다를 게 없잖아. 앞으로도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실수 한번 안 할 거 같아?”
“저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베리아를 막지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내던 고통에 찬 비명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비참한 모습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고 눈앞에서 아른거려요. 베리아가 나쁜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요.”
말을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몸을 스스로 끌어안으며 조금씩 떠는 모습이 겁을 먹은 것 같아요.
지금이나마 베리아의 위험성에 눈을 뜬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베리아를 다시 세상에 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완전히 질이 감수해야 할 일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라피아는 겁에 질린 질을 자신의 몸에 딱 붙도록 끌어안고선 다시 한번 볼을 잡아당겼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평소에는 한쪽 볼만 당겼다면 이번에는 양쪽 볼 전부를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 오히려 베리아를 네가 몸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거라고 말이야.”
“이아, 이그어! 으으! 그만 해요! 그리고 너무, 그건 조금…. 제 형편에 좋게 합리화를 하는 것 같잖아요.”
이번에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이었기에 그런지 질이 짜증을 내며 손을 뿌리쳤어요.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번에는 손을 질의 머리로 옮겨 쓰다듬어주기 시작했죠.
머리를 쓰다듬는 것 정도로 넘어갈 줄 알았냐는 말을 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모습이에요.
네, 그냥 넘어가진 않네요.
약간 투덜거릴 뿐이에요.
“아니야, 사실이기도 해. 베리아가 지금까지 마음대로 행동했다면 지금 세상은 더 개판이었을 거야. 혁명군에 슬리브스터에…. 더 어지러웠겠지. 그러니까 네 몸 안에 베리아를 가둬둔걸 겁먹지 마. 오히려 칭찬받아도 될 일이라고.”
“언니니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거예요….”
“맞아. 그리고 탈리안도 비슷한 말을 해줄 거야. 황녀님도 비슷한 말을 해줄 테고. 너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다 그럴걸?”
“너무 잘해주려고만 해….”
“그러기 위해서 옆에 있는 거야.”
“저도 그래요. 더 나아가서 언니한테 있어서 부끄러운, 부족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 걱정했던 거에요. 겁먹었던 거에요….”
“대견한데?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언니 감동했어.”
한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던 질은 어깨에 닿는 라피아의 입을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어요.
분명 분위기 자체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도 문제없는 분위기였지만요.
질은 장소가 걸렸나 봐요.
“…여기서 할 생각이에요?”
“안돼?”
“물이 더러워지잖아요…. 읏, 진짜아….”
피와 타액으로 물이 더럽혀지는 건 안중에도 없는지 라피아는 그대로 질의 목에 입을 옮겨 송곳니를 박아넣었어요.
그런데 그 순간 ‘콰당!’하는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와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어요.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소리가 난 쪽으로 눈동자만 옮기고 있었죠.
집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탈리안밖에 없으니 소리의 정체도 탈리안이 분명할 거에요.
“어, 언니! 그만! 끝, 저 먼저 나가 있을게요!!”
“잠, 으큭?! 아악…!! 내 코오…!”
갑자기 일어난 질 때문에 라피아는 그대로 코를 질의 머리에 부딪혀버렸어요.
다행히 라피아의 송곳니가 질의 피부를 상처입힌다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라피아가 다치게 됐네요.
“어, 어떻게 해?! 괜찮아요?! 아, 이, 이럴 게 아니라! 저 먼저 나갈 테니까요?!”
라피아는 한 손으로 코를 눌러 고통을 참아내려면서도, 급하게 욕실을 나가는 질에게 손을 흔들어줬어요.
질이 수건을 두르고 밖으로 나오면 거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는 탈리안과 마주쳤어요.
“씻고 있었나요?”
“네, 네! 조금 늦으셨네요!”
“황녀의 수다에 어울려 주느라…. 그런데 질, 지하에는 가봤나요?”
“아, 그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데요….”
질이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와중에 탈리안의 시선은 몸을 감싼 수건에 가 있었어요.
씻던 도중에 자신이 오는 소리를 듣고 급하게 마중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겠죠.
정작 질은 라피아와 함께 들어간 걸 들킬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 전에 남은 물기도 다 닦고, 머리도 말리고 나서 하도록 해요.”
“그, 금방 올게요!”
타이밍이 정말 못했어요.
그렇지만 이미 밖에서 한번 즐겼었으니, 이번에 방해받은 것 정도는 불만 없이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탈리안에게 들키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는걸요.
그저 그렇구나라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더라도 고마워할 거예요.
“그럼, 질. 나중에 봐요.”
다행히도 탈리안은 아무런 의심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질은 천천히 머리의 축축한 물기를 수건으로 꼭 짜면서 다시 욕실로 향했죠.
그리고는 라피아를 불렀죠.
“언니, 나와도 돼요.”
안쪽에서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는데, 아마 탈리안인줄 알았을 거에요.
떨어트린 무언가를 정리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지 라피아가 문을 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탈리안은?”
“방에 올라갔어요. 안쪽에서 제 옷도 좀 꺼내 줄래요?”
“후우…. 자, 미리 꺼내놨어.”
둘이 사랑 중인 사이라는 것을 탈리안도 알지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일 것 같아요.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죠.
하지만, 가능성은 존재해요.
황녀가 개입한 것으로 인해서 좋은 의미로, 탈리안이 라피아를 조금은 수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요.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사랑을 나누는 것도 가능한 일이 되는 게 아닐까요?
지금의 질과 라피아의 앞에는 탈리안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혼나는 일밖에 기다리고 있지만요.
그래도 고의로 그런 게 아니니 크게 혼나진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