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황녀의 사람 (1)
* * *
질과 라피아는 홍보지에 대해 말하며 콜로세움으로 향하고 있었어요.
콜로세움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다른 건물들보다도 몇십 배는 더 큰 크기를 자랑하는 콜로세움 덕분에 방향이 어디인지, 길은 어디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입장하는 데에 있어 표를 사는데에 있어 거금을 들여야 했던 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게 순조로웠어요.
“이 정도면 네가 안내역으로 올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야?”
“그, 그래도요! 언니 암구호 기억해요?!”
“세 송이의 꽃은? 어…. 뭐였더라.”
언젠가 한 번 라피아가 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질 역시 라피아에게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암구호에 대한 답을 말했어요.
“언젠가 다른 한 송이와 함께 꽃병에 담길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 건 보통 의미 없이 지어지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 거예요?”
자신도 몇 번이고 해본 적 있다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뒤에는 앞서나가는 라피아였어요.
길이 복잡한데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걸 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언니, 조금만 천천히 걸어요!”
“피 냄새가 나!”
“피…? 그럼 도우러 가야죠!”
“어, 으음~ 네가 원하는 상황은 아닐 거야, 질.”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물어보는 질에게 잠자코 따라오라며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라피아에요.
질이 바라는 상황이라면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위험에 처한 상황이겠죠.
바라는 상황이 누군가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니 이상하지만요.
그렇지만 라피아의 얼굴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어요.
오히려 재밌는 걸 볼 수 있겠다는 들뜬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표정을 보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에 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어디 가는지는 말을 해줘야, 응? 함성 소리?”
“콜로세움에 입장할 때 표 사고 들어왔잖아? 경기가 진행 중이라고.”
이제야 질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아요.
이곳이 왜 콜로세움이라 불리는지를 말이에요.
하지만, 질과 라피아가 콜로세움에 온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나요?
갑자기 옆길로 샌다니, 탈리안에게 나중에 잔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다 왔네, 볼래? 이런 무대가 콜로세움 안에 수십 개는 있다는데.”
둘이 도착한 곳은 위험하기에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정면에서 관람이 가능한 관중석이었어요.
이곳에서 관중을 보호해주는 것이라고는 얇디얇은 유리막 하나뿐이었죠.
라피아는 질을 앞으로 데려와 자신의 품에 안고서 손가락으로 유리창 밖을 가리켰어요.
간이 의자도 있어, 질은 앉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좀처럼 놔주지를 않았죠.
하는 수없이 밖을 본 그곳에는 시합이 한창 진행 중인 콜로세움의 무대가 보였어요.
거기에는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은발의 드래고니안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앞세워 싸우고 있었죠.
그 드래고니안이 지나가는 곳에는 뾰족한 살얼음이 돋아나 냉기를 뿜어내는 건 물론,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어요.
당하고 있는 상대가 불쌍하다 싶을 정도로, 드래고니안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쥐고 있는 무기를 뒤로 던지고 맨주먹으로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죠.
저항할 기력이 없는데도 마운트를 걸어서는 얼굴을 계속해서 때리던 중에, 그로도 부족했는지 허리 아래에 돋아난 얼음으로 이루어진 꼬리로 휘갈기기 시작했어요.
마른 타격음만 나던 게, 꼬리에 새빨간 피가 묻어나며 질척이는 소리로 변하게 되었죠.
이 소리는 상대방이 기절하고 나서도 몇 초간 이어졌어요.
결판이 나자마자 관중 모두가 ‘티아넬! 티아넬!’ 거리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어요.
“조금, 조금 살벌하네요…. 다 이런 거예요?’
“저 녀석이 좀 특이한 경우일걸? 웬만하면 기절하기 전에 항복하는데, 쟤는 항복할 틈도 안 주고 기절시켜버렸잖아.”
“꽤 잘 알고 있네요?”
“아버지 일을 도와주다가 알게 된 거야. 근데 쟤는 아직 목에 초커가 없네. 도전자인가?”
“슬리브스터의 그걸 말하는 거죠? 여기의 사람들이 그걸 써요? 그건, 너무한 거 같은데….”
분명히 슬리브스터가 쓰던 목걸이는 노예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죠.
한때 탈리안을 빼앗아갔던 세력이라 그런지, 질의 표정이 좋지 않네요.
“으음, 아버지랑 황궁이랑…. 여러 곳에서 압박을 넣고는 있는데 어렵다더라. 콜로세움에서 독자적으로 하는 거라서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나? 오히려 개입하려고 하면 콜로세움이 파업할 거라며 반대로 협박 중이래.”
“파업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내버려 두고 초커를 다 돌려받아도 되는 거잖아요.”
“실라는 수입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콜로세움으로 먹고사는 나라야. 그런데 콜로세움이 파업을 한다고? 콜로세움 정도 되는 거대한 기관이라면 관리도 실라에서 직접 할 텐데,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이건 서로 짜고 치는 거야. 초커가 있으면 노예 관리는 더 쉬워지니까 포기할 수가 없는 거지. 노예의 관리에만 써먹는 것도 아니야, 녀석들의 거점에서 노예를 전투자원으로 쓰던 걸 봤었지? 그러니까 일부러 파업이라는 시시한 것에 겁먹어주는 척을 하는 거고.”
“…나쁜 사람들이네요. 나중에 제가 꼭 저 초커들을 전부 없앨 거에요.”
“흐응, 네가? 어떻게?”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는 라피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짜증 한번 내지 않는 질이에요.
분명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인데도요.
“…저도 혼자만으로는 할 수 없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언니나 황녀님이 도와준다면…. 그리고 베리아도 도움이 될 거에요! 목걸이를 만들어낸 건 베리아니까….”
“푸훗, 푸후흐! 아냐, 미안해. 조금 너무 생각 없어 보이는 말이 아닌가 싶어서 혼내주려 했는데, 내가 나빴어. 나중에 저 목걸이를 없앨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불러줄게.”
“…가끔 언니 너무한 거 알아요?”
“미안하다니까, 시합도 끝났고 더 볼 것도 없는 거 같으니까 얼른 가자.”
무작정 손을 잡아 이끄는 탓에 질은 무대 위를 보다가 휘청였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 기시감을 느끼고 무대에 잠깐 시선을 옮겼을 때, 티아넬이라 불리던 드래고니안이 쳐다보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 시선 끝이 향하는 것이 질인지, 라피아인지는 몰라도 둘을 보는 건 확실했죠.
이를 라피아에게 말해본 질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분 탓이겠지.’라는 말이 전부였어요.
기분 탓인 것치고는 몸도 둘을 향해 있고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던걸요.
그렇지만, 라피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빠른 걸음으로 걷다 못해 뛰다시피 해서 지하에 도착했거든요.
콜로세움의 지하에는 여러 노예가 잡혀있는 감옥을 구경할 수 있는 에리어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널따란 복도의 양옆으로 늘어선 철창 안쪽에 수많은 노예가 잡혀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이런 데에 막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음, 당연히 안 되는 것 같은데…. 딱히 못 들어오게 막는 사람도 없었잖아?”
“언니는 제가 아무 말도 없으면 마음대로 제 몸을 만질 그럴 사람이에요?’
“아니, 너, 비유가 왜 그, 그런…. 근데 아무 말도 없으면 암묵적인 동의 아니야? 게다가 우린 약속도 있어서 온 거잖아!”
“언니 실망이에요.”
“아니, 왜? 너도 막상 시작하고 나면 즐길 거잖아!”
“당연하죠! 최근에 언니가 먼저 손대는 적이 없었잖아요! 제가 부탁해야 겨우 한번 해준 게 전부였으면서! 흡혈도 안 하고!!”
“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나는 아직 네 나이가 마음에 걸린다니까?!”
둘이 떠드는 동안 접근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예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알면서도 눈감아준 눈치였죠.
노예들이 갇혀있는 감옥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땅딸막한 키의 소유자.
맞아요.
펠스미스에서 봤던 플로라다 라인발트에요.
“여어! 언니들 다시 만났네!”
“…아까 봤을 때랑은 또 다른 모습이시네요.”
“으응~ 그랬나? 그래서? 여기엔 무슨 일이야?”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철창을 손등으로 약하게 때리는 플로라다에요.
가게에서 봤던 때의 모습과는 영 다른 모습에 질과 라피아는 긴장한 것 같아요.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라 보였으니까요.
“약속이 있어서 왔어요.”
“약속? 방금 대화는 약속이랑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던데. 낯간지럽기만 하지.”
“이, 잊어요! 일부러 그런 대화를 한 거라구요!”
일부러 한 이유가 플로라다를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성공하기는 했네요.
부끄러움은 오로지 질의 몫이지만요.
“알았다고, 그래서 무슨 약속인지는 알려줄 수 없는 거야? 언니야.”
“…세 송이의 꽃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암구호를 꺼내는 질이에요.
이곳에는 플로라다 이외에 다른 사람이라곤 노예밖에 없으니, 그녀가 황녀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겠죠.
그런데 갑자기 인상을 구기더니 질과 라피아에게 따라오라고 하며, 복도 끝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어요.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여러 가지 고문 도구가 구비되어있는 밀실이었죠.
분위기가 으슥한 게, 어딜 봐도 ‘저 고문실이에요.’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어요.
“…대답은, 언젠가 다른 한 송이와 함께 꽃병에 담길 것이다. 쥐새끼가 들어온 줄 알았는데, 쥐새끼가 아니라 손님이었네.”
“분위기가 너무 사나워서 적인 줄 알았어요….”
“암구호가 아니었으면 적이었을 거야. 뜬금없이 암구호부터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미리 수신호 같은 거 전해 듣지 못했어?”
플로라다의 말도 맞아요.
대뜸 암구호부터 말한다면 비밀리에 만나는 의미가 없잖아요?
노예들이 가득한 감옥이라서 다행이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라고 생각한다면….
황녀의 정적이 듣고 개입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물론, 노예가 듣더라도 큰일 날 일이기는 해요.
그러니 플로라다도 자리를 옮긴 거겠죠.
“그래서 언니들 중에서 파란 머리 쪽이 지르니트 페어차일드고? 빨간 머리 쪽이 아스티엘 라피아라는 거지?”
“맞아요. 그런데 적일 수도 있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아, 아아! 내 정신 좀 봐! 내 소개를 할게.”
플로라다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과 라피아를 구분하고선 자기소개를 시작했어요.
사실은 자신이 가게에서 댄 라인발트라는 성이 가짜였다는 것을 시작으로요.
“성이 가짜였다고요?”
“오우! 진짜 성은 블레이저라고 할 수 있지!”
“블레이저…? 어디서 들어봤는데….”
“잠깐, 잠깐! 블레이저를 모른다고?”
질은 열심히 고민해봐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라피아의 눈치를 살펴봤는데, 이미 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라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어요.
“라피아 언니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언니라고 하지 마세요. 그쪽이 저보다 나이 많은 거 알고 있으니까. …아버지한테 뭐라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네.”
기운 빠진 목소리로 곤란하다는 티를 팍팍 드러내는 라피아에요.
아버지를 찾는 걸 보면 라피아의 집안과 연결되는 문제인가 보네요.
“흥, 나는 이런 키와 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흥!’ 같은 소리 하지 마시고요…. 지금 그쪽 가문이랑 얽힐 사건이었다면 저는 황녀님 부탁을 거절했을 거라고요.”
“플로라다 씨가 누군데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질의 순진한 얼굴을 본 라피아는 깊게 한숨을 쉬었어요.
“실라를 통치하는 건 블레이저 가문이야. 그중에서도 발루드 블레이저라는 거구의 드워프가 있는데, 그 여동생이 우리 앞에 있는 이 땅꼬마 같은 플로라다 블레이저라는 사람이고….”
“땅꼬마라니! 말조심해!”
키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것뿐이라는 플로라다는 키로 놀림당하자마자,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해머의 손잡이에 손을 옮겼어요.
그마저도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이게 된 라피아에게는 위협 수준에도 못 미쳐,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요.
“게다가 이 콜로세움의 주인이지, 성이 다르길래 비슷한 사람인가 했는데 본인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얼굴을 숨기고 지내니 알 수가 있나….”
“통치자의 동생이 왜 황녀님의 사람이 된 거예요? 책에서 봐서 알고 있는데, 실라는 황궁과도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해서 독자적으로 성장해왔었잖아요. 그럼 황녀님과도 사이가 나빠야 하는 게….”
“여기저기 떠드는 소문으로는 플로라다가 발루드의 정실을 질투한다는 말도 있고, 발루드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가출한 사이에 무슨 일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고, 여러 가지 있어.”
친오빠를 좋아한다는 말에 질은 ‘으으, 어떻게 친오빠를 사랑할 수가….’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작게 떨고는 플로라다를 흘겨봤어요.
그러다 플로라다의 분노가 담긴 시선과 마주치자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처럼 다시 라피아를 쳐다봤죠.
작은 키와 몸집에서 나올 수가 없는 강한 기세에 눌려버린 거예요.
“그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하지! 라피아 언니가 말한 건 전부 사실이야!”
“예? 사실이라고요?”
놀라 되묻는 라피아의 말에 플로라다는 해맑게 말을 이어갔어요.
눈빛에는 동경을 담아, 말에는 진심을 담아, 손짓에는 사랑을 담아서요.
“응! 가출한 부분까지는! 가출했을 때 우연히 공무를 위해 파견 나왔던 황녀님과 마주치게 된 거야. 황녀님에게는 여러 가지로 위안을 얻었지, 내 오빠에 대한 사랑을 황녀님에게로 향하게 될 정도의 위안을….”
“질, 내가 장담하는데. 황녀님하고 두 번 다시 엮이는 날이 있으면, 내 뺨을 때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해줘.”
반쯤은 황녀 레나이를 신격화하여 말하는 플로라다는 라피아가 질과 잡담을 하든 말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어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레나이를 찬양하기에 바쁜 것 같았죠.
하지만 한 가문의 사람을 홀릴 정도의 솜씨를 가지고 있다니, 레나이를 너무 얕보면 안 되겠네요.
어쩌면 황녀라는 위치에 있기에 모두를 홀리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래서일까요? 라피아가 레나이랑 엮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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