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황녀의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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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도 그렇고, 라피아 당신도 그렇고! 마법 학원에 안 나가도 되는 건가요!? 도대체 언제까지 집에서 쉬기만 할거에요!!”
이른 아침부터 탈리안의 잔소리가 집을 떠들썩하게 했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탈리안이 화가 났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해요.
분명 질과 라피아가 탈리안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행동을 한 거겠죠.
“화났어? 화난 거야? 아니 근데, 대답을 잘 해줬으면 이렇게 끈질기게 물어볼 일도 없잖아.”
“그깟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라피아, 질! 당신들 집에서 쉰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고요! 알아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 그렇지?”
“그럼요, 저 지금까지 해온 게 있어서 당분간은 의뢰나 공부를 안 해도 성적에는 문제없는걸요?’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고, 질이 해왔던 의뢰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도 알고 있기에 탈리안은 할 말이 없었어요.
지금만큼은 그저 짧게 혀를 차며 질의 성실함을 원망할 뿐이었죠.
그렇다고 라피아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한 가문의 양녀이며, 이사장의 딸이라는 입장 상으로도 그렇지만, 자신의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나태하게 살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탈리안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잖아요! 당신이 먼저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으면서, 왜…!”
“뭐어,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만약에 내가 네 반 전라를 보고 ‘와, 진짜 부드러워 보인다.’ 같은 말을 하면 좋아할 수 있겠어? 아무리 황녀님이 수작 부리는 걸 봤다고 해도 말이야.”
“그건,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왜 이렇게 적극적이냐고요! 갑자기 좋아하니 마니를 묻는 이유가 뭐냐니까요?!”
“그야, 재밌으니까? 아, 오해하진 마? 재미만으로 그러는 건 아니야.”
왜 탈리안이 화가 났는지 알겠네요.
자신의 변화에 몰아붙여 오는 라피아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재미만으로 그러는 건 아니라니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재미만으로 그러는 게 아니면 도대체…. 설마, 진심이라는 거에요?”
“반쯤은? 질이 하는 거 보니까 알겠더라고, 사랑이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채우면 되는 거야. 예를 들어서 질 뿐만 아니라 너랑도 사랑하면 된다는 거지. 설마 질이랑 그런 짓을 해놓고 나랑은 못하겠다는 건 아니지?”
당당함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을, 좋은 본보기로 삼을만한 옆에 황녀도 있었고, 질의 화해 장면을 보고 둘 다 가지려는 욕망에 충실한 질도 있었으니 보고 배운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어쩌면 이게 라피아에게 있어서도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죠.
아, 설마 새벽에 레나이와 대화했던 내용이 이런 내용이었을까요?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황녀에게 물든 거예요? 그녀가 속삭이면서 힘을 쓴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말했었잖아요?! 당신이랑 사이가 괜찮아진다면, 혹시나 해서 저항하지 않았던 건데, 이럴 거면 저항하는 편이 나았어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힘을 사용한다면…. 라피아, 당신도 황녀에게 뭔가 당했다면 제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그 정도만 하는 게…!”
탈리안은 레나이가 수작을 부려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당해주었다는 거네요.
레나이가 말하기를 자신의 취미나 한가한 시간이 아니면 쓰지 않는 능력이라 했으니 해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안일함이 일을 이렇게 만들어버렸지만요.
하지만 라피아는 탈리안의 제안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어요.
“와, 질. 네 언니 너무 무신경하다.”
“저도 그건 좀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달까, 그런 건 있어요.”
“사람이 좀 꽉 막혔지? 미리 말해두지만, 탈리안, 나는 황녀님한테 아무것도 당하지 않았어.”
이건 조금 의외인 부분이에요.
황녀에게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다니, 그럼 온전히 라피아 본인의 의지라는 건데요.
그때의 대화 이후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탈리안은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 같은 말만 반복되고, 전혀 포기하려 하지 않는 데다가, 자신을 놀려오는 질과 라피아 때문에요.
“진짜…. 얼른 가서 할 일 하라고요! 계속해서 놀릴 거면 제가 나갈 거예요!!”
“이거 봐요,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고 하질 않잖아요? 언니는…. 응?”
질이 다시 한번 탈리안의 버릇에 대해서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어요.
워낙 외진 곳에 있기에 탈리안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올 일은 좀처럼 없는데 신기하죠.
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탈리안이 문으로 향했어요.
“…후, 제가 나가보죠.”
질이 나서기도 전에 행동한 걸 보니 둘의 사이에 끼어 있는 게 지겨웠나 봐요.
사실, 질과 라피아에게 놀림당한다면 누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문의 높이를 아득히 뛰어넘는 사람이 앞에 서 있는걸 보고 탈리안은 약간 위축되는 것 같았어요.
한눈에 봐도 현격히 차이가 나는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한계치까지 쭉 들어야 방문자의 얼굴을 보는 게 가능했죠.
“…누구신가요.”
“황녀 레나이 아발테인 님께서 보내신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서신? 아니 그보다 목이 아픈데 조금 숙여주시죠?”
“오래 있을 것은 아니니 이것만 전해드리고 가보겠습니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서신을 쥐려는 탈리안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까치발을 들어도 효과가 없었기에 짜증을 내며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빼앗아왔거든요.
뒤에서 지켜보던 질과 라피아가 입을 가리며 열심히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탈리안이 알 리가 없었죠.
마군주라지만 설마 거기까지 만능이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탈리안이 문을 쾅 닫으며 제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웃을 거면, 그냥 웃어요!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러더니 ‘빽!’하며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요.
“괘, 괜찮아요! 탈리안 언니, 방금 얼마나 사랑스러웠는데요!”
“맞아, 그랬지. 미래의 애인이 될 내가 보장할게.”
질은 나름대로 열심히 탈리안을 달랬지만, 라피아가 찬물을 뿌려버렸네요.
“누가 애인이라는 거에요!! 자리에 앉아요, 서신인지 뭔지 읽어봐야 하니까!!”
항상 철벽을 쳐서 당하기만 할 거라면, 아예 철벽을 치지 않는 게 좋은 방법일 수도 있는데요.
그건 또 싫은가 봐요.
항상 당하기만 한다면, 철벽이 아니라 이미 낡다 못해 모래가 되어버린 거 같은데요.
“수신인은 따로 없는 거 보니까, 우리 모두에게 보낸 거 같아요. 읽을 테니까 잘 들어요.
『사이 좋게 지내고 있나? 그러길 바라지.
뭐, 황궁에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이런 식으로 연락하게 되어 미안하다.
본인도 그대들 사이에 며칠간 더 있고 싶었는데 말이야.
알맹이 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본제로 들어가서….
이전에 탈리안에게 말했기에 알겠지만, 현재 혁명군과 함께 마군주가 이 세계에 다시 한번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
본인이 그대들에게 부탁할 것은 두 가지다.
제일 먼저.
이 세계에 대륙이 두 개인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그중에서 남대륙에 위치한 국가 실라로 향할 것.
실라에 도착하면 제일 큰 콜로세움이 보일 텐데, 그 지하에 본인의 심복이 있다.
그와 만나라, 모든 지원은 그가 해줄 것이다.
암구호는 세 송이의 꽃은? 언젠가 다른 한 송이와 함께 꽃병에 담길 것이다.
첫 번째.
혁명군은 대놓고 홍보지를 배부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혁명군에 관심을 두고 홍보지를 따라 지정장소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하는군.
이에 대한 조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두 번째.
질이 그러했던 것처럼 혁명군의 거점을 박살 내준다면 바랄 게 없겠지만, 위험하니 이번에는 조사만 하도록.
특히 마군주와의 연관성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면 한다.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으나, 아예 관련이 없다고도 못할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으니.
보수는 나중에 이 의뢰를 끝내고, 본인과 만나게 되면 지급하도록 하지.
당연하지만 이 의뢰는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
이는 개인적인 본인의 부탁이니까.』
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래요?”
말로는 부탁이라지만 황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특히 라피아에게는 그 부탁을 거절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누구도 아니고 황녀의 부탁인데, 해달라면 해야죠.
“나는 황녀님이 해달라고 하면 해야 돼.”
모두가 예상했을 거예요.
이다음에도 예상 가능한 것이 있다면, 질의 대답이겠죠.
“그럼 저도 따라갈래요. 실라에는 저번에 가본 적이 있으니까, 안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당연히 전력으로도!”
“질, 싸우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조사가 목적이에요.”
“그렇지만 혹시라도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질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야 지금껏 모든 의뢰를 싸우는 것으로 해결해왔으니까요.
슬리브스터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기회가 있었을까요?
다른 의뢰를 하며 특정 정보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을까요?
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잡혀있는 탈리안을 찾기 위해서 무작정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파괴하는 게 전부였는걸요.
“질이 간다면, 저도 따라갈 거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언니도 같이 가는 거예요?!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같이 가는 게 싫은가요?”
“그럴 리가요! 엄청 좋아요!”
다만, 질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탈리안이 따라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가 보네요.
“그럼 언제 출발할 건데? 나는 당장이라도 갈 수 있어. 황녀님이 지원도 다 해준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지낼 곳은 미리 마련해뒀을걸.”
“라피아,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저희는 거점이 따로 필요 없잖아요. 어디든 건널 수 있는 문이 있으니까. 황녀가 심어둔 사람에게서 얻을 거라고는 정보와 물자지원이 전부에요.”
“아아…. 응, 그래. 그래서 언제 갈 건데?”
“저도 바로 갈 수 있어요. 질은 준비할 필요 없나요?”
“옷만 갈아입으면 바로 갈 수 있어요!”
“움직이기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오세요. 혹시 모르지만, 질의 말대로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네!”
웬일로 일이 빠르게 잘 풀려간다 했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질의 모습 때문에 탈리안은 몇 차례 잔소리를 해야 했어요.
의뢰의 조사와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해서 갈아입으라는 말을 어떻게 들었으면, 나풀거리는 원피스로 갈아입은 걸까요.
처음이야 그럴 수 있어요.
두 번째, 세 번째로 입고 온 옷이 점점 운동성에서 벗어나 ‘미’의 기준에서 보기 좋은 것이라는 걸 눈치챘을 때는 탈리안이 대신 옷을 골라주어야만 했어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마군주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아 마군주를 봉인까지 마친 하프 뱀파이어, 재앙의 문을 건너 대신전까지 제압한 마군주라면 안일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죠.
보통의 적들이라면 싸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스스로도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지지 않을 실력과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약간은 산책가는 듯한 기분으로 옷을 입어도 혼날만한 일은 아닐 거에요.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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