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황녀의 생각대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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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공격으로 탈리안의 배꼽 아래에 문신처럼 새겨진 표식이 생기고 20분 뒤, 아직도 시합은 계속되어 구경 중인 질의 눈을 행복하게 했어요.
서로가 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덕분에 둘 다 옷이 너덜너덜해져서 맨살이 드러나게 됐거든요.
마법 학원에 갓 입학했을 당시의 질이라면 눈을 가린 채로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돌렸겠지만, 지금의 질은 알만한 사실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라피아와의 은밀한 시간도 가지고, 탈리안과의 화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도 했으니, 빤히 대놓고 바라보는 것도 이제 와선 당연한 일이에요.
대단한 점이라면 이런 격한 시합 도중에도 두 명은 더 이상 표식을 늘려가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라피아는 마법이 반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더욱 움직임이 현란해졌고, 탈리안은 언제부터인지 마음에 불이 붙어 전심전력으로 라피아를 상대하고 있으니, 이 시합의 격렬함은 그 어떤 전투와도 궤를 달리했어요.
탈리안이 배려해서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 칼을 만들어 줬음에도 마법으로 서로를 상처입히는데, 대단한 게 있다면 이 와중에도 규칙은 깨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죠.
네, 검으로 할 수 있는 3번의 공격 기회를 말하는 거예요.
“안 지치냐…!”
“그러는 당신도, 독하네요…!”
“누가 할 소리! 넌 그 꼴이 되어서도 싸우고 싶냐?! 싸우느라 자기 모습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탈리안은 짜증을 내며 어떤지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제대로 자신의 몸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격한 전투로 인해 찢어진 옷들은 너덜너덜해져 옷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죠.
외투는 이미 완전히 없어져 버렸고, 상의는 긴 소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민소매가 되어버렸어요.
원래는 하복부만 보이던 배도 전부 보이게 되어 가슴만 가려주고 있는 모양이었어요.
치마는 말할 것도 없이 초미니가 되어, 속옷이 다 비치고 있었으니까요.
라피아가 말하는 대로 남 보기 부끄러운 모습이었어요.
“그건 마찬가지잖아요! 당신 꼴을 좀 보세요! 어떻게 그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하고서도 그렇게 싸울 수 있는 건가요!”
“남 말 하시네!!”
그렇다고 라피아가 정상적인 차림이었냐면, 그건 아니었어요.
라피아가 준비해온 운동복 상의는 한 조각도 남김없이 사라졌고, 속옷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어요.
하의는 또 어떠한가요? 반바지의 형태를 잃어 고무줄 부분만 남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매끈한 허벅지를 다 보이도록 일부러 과시하는 건가 싶을 거예요.
솔직하게 겉옷이라는 겉옷은 이미 없다고 봐도 되는 그런 상태에요.
심각도로만 따지자면 라피아가 탈리안보다 몇 배는 더 심각하고, 외설스러운 거죠.
속옷만 아니라면 알몸과도 같은 상태인데 격렬하게 움직인다면 안 보일 곳이 없으니까요.
특히 이 시합의 장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쌓아두고 절대로 잊지 않으려는 질에게요.
“싸우는데 얼마나 방해되는지 알고 계신 건가요?! 그렇게, 그렇게 맨살을…! 자꾸 눈길이….”
“뭐? 너 이 순간에도 아직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너, 너도 대단하다 진짜…. 김빠지니까 제대로 시합에 임하라고!!”
“누군 안 그러고 싶은 줄 알아요?!”
탈리안이 마법을 쓰기 위해 손을 휘두르면, 얼마 남지 않은 옷가지가 휘날리며 안에 숨겨진 속옷이 보이게 됐어요.
그렇지만 지금의 탈리안에게는 질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에요.
속옷이 보이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라피아와 싸우고 있으니까요.
하기야 라피아의 맨살을 제외하고, 자기 앞의 상대방만 보일 텐데 그런 게 신경 쓰이겠어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합의 양상은 예전과는 달랐어요.
새로 생긴 규칙 때문일지도 몰라요.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탈리안이 만들어낸 마나로 이루어진 검밖에 없으니까요.
잔상처야 시합 도중에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으니 무시한다고 치더라도, 다른 무기나 방식으로 상처를 내버린다면 그 순간 패배라 여겨지고 있는지 치명적인 공격은 서로 피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누구 하나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니 보는 사람으로서는 그 화려함에 흥미가 식을 수가 없었죠.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합 도중에 다시 한번 흐름이 끊기게 된 것은 20분이 더 지나서였어요.
“…응? 하항, 그런 거였어?”
“뭘 그렇게 웃는 건가요?”
“아니, 이 시합…. 내 승리야!”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 에?! 어느 새에 이런 함정을…!”
탈리안은 빠르게 아래에서 파고들어 오는 라피아를 피하려고 크게 뒤로 뛰었지만,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에 빨간 무언가가 지면에서 솟아올라선 오른발을 휘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됐어요.
마치 몬스터의 촉수처럼 휘감은 그것은 딱 보기에도 평소에 라피아가 의뢰에서 자주 사용하던 자신의 고유 능력인 피를 매개체로 쓰는 마법, 혈마법이었어요.
발을 휘감을 때만 하더라도 미끈거리며, 축축하고, 말랑한 느낌이었을 텐데, 발을 완전히 휘감고 나서는 굳어버려 쉽게 풀 수 없는 구속구가 되어버렸죠.
물론 자신이 의도한 상황인 것이 분명하기에, 이때를 놓칠 라피아가 아니었어요.
숨겨두었던 힘을 모두 사용해 한순간에 탈리안의 등 뒤로 넘어가 검으로 등을 크게 베어버린 거예요.
“으읏! 지, 질까 보냐아!!”
정말 라피아로서도 충분히 잘 해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탈리안은 폭발적인 마나를 내뿜어 구속을 해제하고 몸을 돌려 똑같이 검으로 라피아의 어깨를 크게 베어냈어요.
설마하니 이 상태에서 벗어나 반격까지 해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라피아도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해버렸어요.
라피아 쪽으로 힘을 실어 몸을 돌린 탓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어버린 탈리안은 자신에게로 다시 한번 파고드는 검을 보고는 자신의 등에 마나의 벽을 만들어 자세를 고정했어요.
그리고는 탈리안도 라피아의 허리를 노려 검을 휘둘러버렸죠.
안타깝게도 라피아의 검과 탈리안의 칼날이 서로 맞부딪혀, 별 가루가 흩어지듯이 서로의 검이 사라져버렸지만요.
둘 다 검이 사라진 상황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어요.
“…이러면, 누가 이긴 거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역시나 시합의 승패를 중요하게 여기는 라피아였어요.
“라피아가 한번 막았고, 제가 한번 베인 상태에서, 다시 한번 제가 한번 베인 뒤에, 라피아의 어깨가 베였는데….”
“칼이 서로 부딪쳐서 사라진 건 뭐야?”
“둘 다 공격 판정에서 막혀 사라진 게 아닐까요.”
“그럼 이거, 내가 이긴 거지?”
“일단, 옷부터 고쳐드릴게요. 눈 둘 곳이 없네요….”
탈리안은 평소처럼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옷을 고치는 것과 동시에 라피아의 옷을 고쳐줬어요.
거의 새것처럼 변한 옷이 마음에 든 것 같은 라피아는 옷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탈리안에게 물어봤어요.
“야, 탈리안. 그래도 결판은 났으니까 미리 말해둘게.”
“네? 아, 시합 전의….”
“응, 고맙다고. 굳이 해주지 않아도 되는 억지에 어울려줘서. 이겼으니까, 적어도 내가 부족하지는 않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질이랑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네가 앞으로도 나를 어떤 눈으로 보든 받아 들여줄 거고.”
“그, 그 말은 갑자기 왜 나오는 건데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거라고요! 당신과 그럴 생각은…!”
라피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진 탓에 열심히 부정하려는 탈리안이에요.
질과의 화해로 호되게 당했던 일이 있을 텐데, 아직도 솔직하지 못한 모습에 라피아는 고개를 저으며 탈리안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이 말했어요.
“황녀님이 너한테 무슨 생각으로 일주일간 계속 속삭였다고 생각해? 황녀님 스타일을 조금 빌려와서 말하면 말이야. 모르는 척은 그만해. 너도 알잖아. 네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가 어떤 건지.”
“…들어가죠.”
따로 반박할 말이 없는지 탈리안은 아예 대화를 포기하고 등을 돌려 집의 뒷문으로 향했어요.
그런 탈리안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질의 의문이었죠.
“저어, 그럼 탈리안 언니는 라피아 언니랑도 사귀는 거예요? 그건 조금…. 이상할 거 같은데. 언니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어요?”
지극히 타당한 말이에요.
지금까지 탈리안과 라피아는 서로의 관계를 깊게 돌아볼 일이 없었으니까요.
고작해야 최근에 레나이가 탈리안에게 라피아의 매력을 어필한 것과 이전에 베리아로 인해 자리를 비웠던 동안 질을 돌봐주었던 것이 전부잖아요?
서로 호감에서 친구로 변하는 것까지는 어려울 게 없었지만, 친구에서 연인으로 변하기에는 너무나도 방해되는 요인들이 많은 거예요.
그렇기에 당장은 탈리안도 시선은 라피아의 몸 이곳저곳에 향하면서도 말로는 계속 부정하는 것일 테고요.
“그럴 리가요! 그럴 수가 없는 거 질도 잘…!”
“뭐야아~ 질투해? 그런데 이미 우리 둘이 사귀는 것부터가 다른 사람들 보기엔 이상할걸.”
라피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탈리안의 말까지 끊어가며 웃는 얼굴로 질의 말에 대답했어요.
이미 자신들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데, 말하는 것만 보면 라피아는 탈리안과 사귀는 것에 그렇게 심한 거부감이 드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잖아요. 우리가 중요한 거지.”
“그건 그렇지? 근데 탈리안은 저렇게 아니라고 하는걸.”
“탈리안 언니는…. 시간을 조금 길게 투자해야 되지 않을까요.”
“저기, 질도 그렇고 라피아도 그렇고…. 왜 그런 표정으로 절 보면서, 마치…. 저는 그럴 생각이 없다니까요? 조금, 흔들리기는 하지만, 고민 중이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고요!”
“그건 지켜봐야 아는 거야. 그렇지, 질?”
“저는, 언니들이 저를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어요. 이제는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이어지는 대화에 탈리안은 현기증을 느낀 듯이 이마를 짚더니 그대로 말없이 집 안으로 혼자 들어가 버렸어요.
그러는 사이에도 질과 라피아는 탈리안에 대해 끝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라피아 쪽에도 가능성이 없진 않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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