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황녀의 생각대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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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이가 도착하고 나서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 황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어요.
그동안 적다고는 하지 못할,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전부 레나이가 조금씩 개입했던 탓에 해결됐었죠.
어느 정도는 레나이의 탓이 있어도 본인이 다 깔끔하게 해결했으니 된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 레나이가 다음 달에 온다고, 마차의 창문 밖으로 얼굴과 손을 내밀고 인사를 하는데 다들 나와서 배웅해주고 있잖아요.
“다음에 또 보자고!”
나머지 3일의 시간도 꽤 즐거웠던 모양인 레나이는 어린아이보다도 더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점점 숲 너머로 사라졌어요.
처음 왔을 때보다 비교되는 작은 마차였지만, 속도만큼은 빨라 몇 초 만에 사라져버렸죠.
바람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빠르게 사라져버리네요.
“그런데 질, 너 레나…. 아니, 황녀님이랑 능력의 한계를 실험해본다거나, 뭐 비슷한 거라도 한 적이 있어?”
아무래도 라피아는 이전에 레나이가 알현실에서 말했던 질의 능력과 실력을 알아보는 실험을 떠올린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주일간, 레나이가 집에 머물면서 그러한 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나마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지르니트가 어디로 향했는지 미행하며 싸우는 모습을 본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질도 딱히 떠오르는 일은 없는지 깊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어요.
“네? 아뇨…? 그러고 보니, 없네요?”
“…그냥 놀러 온 거 아니야?”
확실히 레나이가 일주일간 행동하던 모습을 본다면 라피아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오자마자 질의 미행에 나서고, 탈리안과 질의 화해를 중재하는 데에 나섰으며, 며칠간 라피아를 매력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말을 탈리안에게 계속 속삭이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남은 며칠간 레나이가 뭔가 중요해 보이는 일을 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어요.
황궁에서 지낸 날들로 인해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요양을 목적으로 왔다고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탈리안은 관심이 없어 보여요.
옆에서 항상 시끄럽게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제야 제대로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죠.
“잡담은 그만 해요. 황녀가 찾아온다고 해서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결계를 손보고 있었단 말이에요. 주변에 몬스터가 어슬렁거릴 수도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요.”
“만나면 때려잡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나도 있고, 질도 있고, 너도 있는데. 할 말 없지?”
“…밖에서 할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어, 있지. 며칠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황녀님이 있으면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말을 하는 동시에 집의 뒤편으로 가는 라피아에요.
질과 탈리안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모습에 왜 안 따라오냐며 덧붙이자, 라피아가 한 말에 담긴 의미도 모른 채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둘이었죠.
그야 집 앞에는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집 뒤편으로 밀려나게 된, 탈리안이 만들어놓은 간이 훈련장밖에 없었으니까요.
시간도 늦었는데 이 시간에 훈련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일까요.
“탈리안, 며칠 전에 질하고 약속을 하나 했어.”
“그런데 그걸 왜 저에게?”
“나는 질이 너를 좋아하든 말든 질투하지 않기로, 질은 너에게 주는 것과 비슷한 사랑의 크기를 나한테 주기로. 그러니까 마무리를 짓고 싶거든. 너한테는 이대로도 괜찮겠지만, 나한테는 약간 찝찝한 게 있어. 내가 성격이 모나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줄래? 내가 너를…, 좋은 친구라고 여기는 건 알 거야. 하지만 난 질한테서 이렇게 아낌 받고 사랑받는 네가 미워.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앞으로 내가 너한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거라고 믿어.”
질은 이미 라피아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기 때문인지 훈련장 밖의 의자에 앉아 둘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건 탈리안도 마찬가지라서, 라피아의 앞에 서서 들으며 어느 정도 상황의 파악을 하게 되어 다시 한번 싸워달라는 것이냐며 되물었어요.
“싸워달라는 건 맞는데, 중요한 부분은 약간 달라. 너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이기면 이기는 대로 나는 너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라며 추하게 정신적인 면에서 자기 위로를 할 거고, 지면 지는 대로 깔끔하게 너보다 내가 부족했을 뿐이라며 자기 비하를 할 뿐이야. 조금만나한테 조금만 어울려달라는 이야기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았어요. 하지만 라피아, 저는 싸워주지 않을 거예요.”
지금껏 중요한 이야기 같아서 잘 들어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탈리안은 거부의 의사를 밝혔어요.
훈련장의 가운데에 서 있던 라피아가 무안해질 정도의 단호한 대답이었죠.
“뭐? 너 지금 내 이야기를 뭘로 들은 거야? 내가….”
“당신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있어요.”
자신의 말을 듣고 제대로 고민을 했는지 의심이 되는 지경까지 이른 라피아는 언성을 높이며 따지려 했지만 바로 탈리안에 의해 말이 끊어져 버렸어요.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하기에 짜증까지 부리며 그게 뭐냐고 묻자마자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죠.
“조금은 부끄러운 말일 수도 있는데요. 라피아…. 우리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말하는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데?”
“가, 가족이잖아요…. 가족끼리 싸우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가족이라는 말을 하는 탈리안을 보고 라피아는 짧게 비웃듯이 웃어버렸어요.
질이라면 모를까 탈리안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게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라피아에게는 웃긴 일일 거예요.
“웃긴 거 알아요! 하지만, 정말이라고요! 가족이 별거에요? 피가 이어지지 않았어도 질과 저는 가족으로 잘 지내고 있는 걸요! 한 집에 살고, 서로 아껴주면 그게 가족인 거죠!”
“진짜 내 이미지를 나락까지 추락시키는구나.”
“무슨 말이에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싸워줘, 그러지 않으면 내가 못 버틸 거 같아서 그래.”
애원하듯이 부탁하는 라피아의 모습을 본 탈리안은 그 결심을 거부할 수가 없던것 같아요.
잠깐의 고민 끝에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거든요.
“알았어요. 대신에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굳이 전력을 낼 필요는 없는거죠?”
말을 마친 탈리안은 한 손에 푸른빛으로 밝게 빛나는 마나를 얇고 길게 모아, 막대기 같은 형태를 띠게 했어요.
모습만 본다면 자루도 있고, 날도 있어 막대기보다는 검에 가까운 물건이에요.
탈리안은 양손에 들린 검 중 하나를 라피아에게 건네며 일단은 시합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의 룰을 설명하기 시작했죠.
“이건 제가 만든 검이에요. 성능은, 말할 것도 없지만 특별한 점이라면 상처를 내지는 않아요. 베인다고 해도 아프지 않지만, 옷이 베이지 않는 건 아니고, 어딜 베였는지 표식이 붙게 되어있어요. 어딜 맞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이 검은 세 번…. 그러니까 상대의 몸을 공격하거나, 같은 검에 공격이 막히면 소멸하게끔 되어있고요.”
“그러니까, 주어진 3번의 기회를 잘 살려서 상대방보다 더 많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하면 된다는 거잖아? 검으로 검을 막으면 공격횟수를 날리게 되는 거니까 더 신중해야 할 테고. 들어오는 공격은 전부 피해야만 한다…. 넌 괜찮겠어? 아니면 날 얕보는 거야?”
“질이 육탄전으로 누구보다 잘 싸우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남겨준 도서관과 제가 가진 책의 레플리카 때문이에요. 저, 약하지 않아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칼을 고쳐 쥐는 척을 하더니, 일순간에 라피아의 시야에서 사라진 탈리안이에요.
탈리안의 강함이란 일전에 사지를 찢기며 경험해본 라피아가 제일 잘 알기에, 곧바로 시야가 아닌 소리와 기척에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에 맡겨 등 뒤로 검을 옮겨 첫 일격을 막아내었어요.
막지 않았다면 등이 크게 베여 수치스러운 상처를 입을 뻔한 라피아는 막자마자 몸을 틀어 발로 탈리안을 걷어차버렸죠.
발에 차이기 직전에 자신의 팔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탈리안은 신발이 거칠게 땅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밀려나 버렸어요.
“저번엔 힘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이번엔 기동전이야?”
“그러는 라피아는 저번이랑 다를 게 없네요. 비상식적인 회복 속도만 믿고 버티려는, 그 무식함이!”
다시 한번 눈앞에서 사라진 탈리안의 모습에 라피아는 주변을 살폈지만, 이번에는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방금처럼 반응하는 것도 불가능했어요.
교회에서의 질이 빠르게 움직이며 섬광처럼 움직이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거였어요.
이런 위기의 상황에 도움을 준 건 질이었어요.
“언니! 오른쪽 위에!”
“질?!”
예리하게 틈을 파고들어 오는 탈리안의 검을 뒤로 물러나며 가까스로 피해낸 라피아에요.
질이 라피아를 도울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탈리안은 놀라 질을 바라봤는데, 한눈을 팔아선 안 됐던 거에요.
“한가하게 질을 바라볼 때냐!”
“윽?! 이런 느린 공격쯤은…!”
라피아는 1초, 2초도 안 되는 사이에 검을 휘둘러 탈리안을 베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 같아요.
그런데 세로로 길게 베어져, 상의가 단추가 잠기지 않은 가디건처럼 활짝 벌어졌음에도 표식은 나타나지 않았죠.
옷만 깔끔하게 잘려지도록 아슬아슬하게 피한 거였어요.
“아쉽게 됐네요, 라피아. 자칫했으면 속옷도 잘려나가고 몸까지 공격당할 뻔했어요.”
“짜증 나게 여유 넘치네….”
“마냥 그렇지만은 않아요. 이전에 비해서 반응 속도도 그렇고, 공격의 예리함도 늘었는걸요. 제약이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면 저와 비등하게 싸웠을 것 같은데요.”
“그게 간단하게 손짓 한 번으로 옷을 고치는 녀석이 할 말이야?”
라피아의 말대로 탈리안은 좌우로 벌어진 옷을 한데 모아, 잘린 부분을 위부터 아래로 슥 쓸어내리면서 잘리기 전의 상태로 고쳐버렸어요.
탈리안의 너무나도 여유로운 모습에 공격할 생각도 못 하고 비아냥댈 뿐이었죠.
“그렇게 보고만 있으면 기습 당할 거라고요? …이렇게!”
“내가 대비도 안 해놨을까 봐!!”
다시 한번 멋지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치려는 탈리안이었지만, 그 공격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처럼 뻔하게 막혀버렸어요.
검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전에, 들고 있던 검을 저 멀리 날려버리고 양손을 합장하듯이 맞붙여 칼날을 잡아내 버렸거든요.
“이, 이건, 칼날 잡기…? 진짜 검이었다면 손이 잘릴, 앗?! 검이…!”
라피아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막아낸 검을 비틀어 탈리안의 손에서 놓치게 하곤 탈리안의 검을 잡아 휘둘러버렸어요.
시합 도중에 상대를 걱정하다니, 이번엔 유독 탈리안이 방심하는 일이 많네요.
“후우, 이걸로 1대 0이지?”
이번에는 아예 옷을 수복하지도 못하도록 하복부를 반듯하게 잘라내 버린 라피아에요.
검을 어깨 위에 올려두고 어떠냐는 듯이 말하는 걸 본 탈리안이 이를 갈고 있는 건 알 바 아니라는 것처럼요.
배꼽 아래에 문신처럼 표식이 새겨진 것을 본 탈리안은 이제서야 제대로 할 마음이 든 것 같아요.
“분하지만, 그렇네요. 그래도 공격 횟수는 똑같이 두 번씩 남았어요.”
“그렇게 여유 넘쳐서 되겠어?”
“…적당히 봐주고 있진 않았지만, 이젠 정말 제대로 할 거예요.”
갑자기 라피아의 손에 있던 검이 요동치더니, 손에서 빠져나와 공중으로 멋대로 날아올라 탈리안에게로 돌아갔어요.
그런 것도 가능하냐며 마법을 쓰는 건 반칙 아니냐고 되묻는 라피아에게 탈리안은 ‘애초에 빠르게 이동하던 것도 마나의 보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걸요.’라고 대답했어요.
“아니, 허, 참, 와…. 너, 진짜, 내가, 어? 할 말은 많은데 참는 거 알지? 어?”
“그러시구나, 안 덤벼요? 아, 검을 아까 던져버렸던가요?”
“…야, 아니, 아니야. 좋아, 그래. 어디 예전처럼 다시 한번 전력으로 싸워보자.”
아무래도 오늘도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겠어요.
언젠가 한 번 무참히 깨졌었던 이전 날의 리벤지 매치가 될 거고, 그렇다면 라피아에게 있어서 이 시합은 절대 질 수 없는 시합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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