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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36화 (136/189)

〈 136화 〉 황녀의 생각대로 (3)

* * *

질의 가족은 별다른 문제 없이 저녁 식사를 마쳤어요.

레나이의 부추김과 탈리안의 부끄러운 감정, 그리고 라피아의 오해로 시작한 사건만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저녁 식사는 매끄럽게 잘 지나갔고, 화해 아닌 화해도 성공적이었고, 둘의 관계에는 아주 조금 진전이 있었으니까요.

정말, 미세하게.

질은 나름대로 일이 잘 풀린 것 같은 느낌에 안심한 상태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라피아 언니.”

“어어, 왜?”

“언니는 새로 나타난 마군주랑 싸울 거죠?”

아무래도 저녁 식사 도중에 누군가가 새로운 마군주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직은 자세한 계획까지는 잡히지 않은 거겠죠.

새로 나타난 마군주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기껏해야 마군주가 나타나면 레나이로부터 ‘라피아, 그대는 본인과 함께 싸워주겠지?’라고 들은 게 전부일 거예요.

“흐음~ 잘 모르겠네. 말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나한테는 아가레스라는 원수가 있어. 아, 당연하지만 아가레스라는 놈도 마군주야.”

“그럼 당연히 싸우겠네요. 저라도 그럴 것 같은걸요. 마군주라면, 다른 마군주의 정보를 알 수도 있을 테니까.”

“응, 아가레스라는 놈한테는 내 가족과 종족을 말살시킨 원수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마군주들하고 싸우는 건 어쩔 수 없을 거야.”

“물어봐도 돼요?”

물어보기 조심스러운 부분일 텐데 망설임이 없네요.

그렇지만 라피아도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있어 주저가 없는 것 같았어요.

의자를 뒤로 기울여 중심 잡기에 집중하며 말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렇다고 바로 모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아니었어요.

“네가 내 질문에 답해준다면 생각은 해볼게, 전생의 기억만큼 힘든 이야기는 아니지만? 딱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어떤 질문인데요?”

대신에 대가로 자신이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나 봐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자신이 들려주려는 이야기와 비슷한 수준의 무게감을 가진 질문인 경우가 많은데요.

겁도 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제안을 수락해버린 질이에요.

“내가 최근에 일이 좀 있어서 마음속으로 고민을 좀 해야 했거든? 거의 마무리는 됐는데 말이야? 네가 한마디만 해주면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저보다는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는 게….”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어쨌든 질문해도 된다는 거지? 대답도 확실하게 해줄 거고?”

“제가 꼭 대답해야 하는 거라면 하겠죠?”

“그런 애매한 대답은 안 돼. 확실하게 정해.”

“…알았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꼭 대답해줄게요.”

재차 확인을 받아내는 라피아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질은 닦고 있던 접시를 손에서 내려놓고 뒤돌아보며 확답을 내줬어요.

그리곤 싱크대에 기대며 라피아가 무슨 질문을 할지 집중했죠.

라피아가 자신에게 해 올 질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중요도를 갖는지 인제야 이해한 것 같아요.

“며칠 전에 너와 탈리안이 두 번째로 화해하는 장면을 봤어. 대화도 들었고.”

“네?! 그걸 왜…!”

“일단 들어!”

탈리안과의 정사, 아니…. 화해의 장면을 엿보았다는 말에 질은 라피아에게 잘못을 따지려 했지만, 라피아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선 제압에 나서서 질에게 경청할 것을 강요했죠.

언제 한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소리친 적이 있던 것도 아니니, 꽤 놀랐을 거예요.

게다가 라피아가 화난 상태도 아니고,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질을 꾸짖듯이 하는 건….

평소에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 때라면 보통 질을 다독여주거나 상담해줄 때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고 있단 말이야. 탈리안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저, 저는….”

질은 혼나는듯한 모양새에 주눅이 들어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어요.

이렇게 질을 주눅 들게 할 생각은 없었는지 라피아는 한숨을 쉬었어요.

그야 질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라피아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할 때만 하더라도 미안하다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책했었으니까요.

탈리안과 화해랄 때야 앞으로는 누구 하나 싸우거나 헤어질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기뻐했겠지만, 이제 와서야 다시 떠오른 거겠죠.

라피아에게는 심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괜찮아, 혼내는 거 아니야. 널 탓하는 것도 아니고. 고개 들어.”

이를 눈치챈 라피아가 안아주기까지, 질은 짧은 시간 안에 눈가가 촉촉해져 울기 직전이었어요.

죄책감을 한계까지 자극 되었는데 이러지 않는게 이상하죠.

이런 지경까지 와서도 탓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질의 죄책감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울게 하지 않으려고 다정하게 들리게 말한 것은 알겠지만요.

“언니가, 언니가 대화를 엿들었다면, 저한테 언니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어, 그러니까 제대로 물어볼게. 넌 탈리안에게 주는 사랑과 같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해줄 수 있어?”

쉽게 대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질이에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강해지는 법도 알려주며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을 준, 스승과 부모의 역할을 동시에 한 탈리안.

잠깐이나마 그런 탈리안의 공석을 메꿔주기 위해 심신을 달래주며 옆에 있어 준 라피아.

둘 다 질에게 중요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중요도로만 따진다면 탈리안이 더 중요한 게 분명해요.

더구나 질은 탈리안이 없던 기간 동안 그리워하며 자신의 감정이 어떤 부류의 것인지 이미 알고도 숨겨왔었으니까요.

“역시, 대답 못 하겠지? 좋지 못한 질문이기는 했….”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라피아의 말을 끝까지 듣게 된다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질은 소리치며 말을 끊어버렸어요.

대화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으니까요.

불안해서 어쩔 수가 없었을 거예요.

정작 라피아는 작게 웃으며 왜 그리 겁먹었냐는 듯이 말하기 시작했지만요.

“질, 억지 부리지 마. 나도 알 건 다 알아. 그리고 내가 뭐, 헤어지자고 할 거 같아?”

“…아니에요? 방금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잖아요.”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 같은 타이밍이기는 했지만 라피아는 아니라고 하네요.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으니 이런 오해도 있을법하지만요.

이런 모습은 질을 안쓰럽게 보이게 만드는 데 한몫했어요.

오죽했으면 라피아가 안고 있는 질의 머리를 쓰다듬어줄까요.

“내가 너랑 사귀기 시작할 때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말했잖아? 절대 놔주지 않을 거라니까.”

“그렇지만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계속 이런 상태라면 저는 언니한테 미안해서…. 지금까지도 언니한테 부족하지 않게 하려고 정말 노력했지만, 그런데도! 안되는걸 알면서도 죄짓는 느낌이란 말이에요! 그런데도 놔줄 수가 없어서…! 얼마나 힘든데 언니는 그냥 괜찮다고만 하고!”

“지금도 고민 좀 해보니까 말이야? 네가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데, 굳이 탈리안하고 네가 주는 사랑의 양에 대해 경쟁을 해야 될까 싶어. 난 지금 네가 말해준 것만으로도 만족하거든.”

어느 정도 라피아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기에 질은 그럴 리 없다며 부정했어요.

이미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준 탓에 라피아의 말에 믿음이 없는 것도 맞아요.

“그럴 리가 있어. 너야 지금 당장에는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겠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려고 해봐. 너 전에 화장실에서 나한테 까불던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간 거야?”

“지,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건데요!!”

그때의 일을 다시 기억해낸 질은 라피아를 밀어내고 등을 보여 주저앉아버렸어요.

서로가 원해서 한 일이긴 하지만 질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라피아는 다시 한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등 뒤에서 질을 안았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널 사랑해. 그리고 너도 날 사랑하잖아?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내가 너무 좀, 마음이 넓어 보이려나? 근데 아니야.”

“아니라니 무슨 말이에요? 지금 언니가 저를 얼마나 나쁜 아이로 만들고 있는지 알면서…! 저도 제가 나쁜 걸 알고 있단 말이에요! 이런 나쁜 저를 받아주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넓지 않다는 거예요!”

이런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겸손까지 가지고 있으니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요.

억하심정으로 라피아에게 소리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에요.

어디까지 자신을 끌어내려야 속이 풀릴까, 같은 생각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이래 보여도 질투가 많아,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쓰레기 같은 년이고.”

“쓰레기라니, 언니…. 자기 자신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자신을 쓰레기라고 칭하는 라피아의 모습에 질은 당황해서 되묻기까지 했어요.

질의 앞에서는 웬만해서는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요.

혼자서 감상에 젖어있거나 레나이에게 속내를 모두 간파당했을 때라면 모를까.

“얼마 전까지 내가 한 말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질투만 해대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네 마음을 어떻게 돌릴지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지. 만약에 내가 너한테 화내며 헤어지자고 말하면, 너는 나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가지 말라고 매달릴까.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지 않을까. 매정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 거라면 먼저 선수를 쳐서라도…. 나는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라며, 그 사람이 떠나간다는데 매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큭큭, 이런 내가 쓰레기가 아니면 뭐야?”

질은 상상도 못 한 집착을 보이는 라피아에게 ‘언니가 그런 생각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표정을 드러냈어요.

놔주지 않겠다고 하는 거야 몇 번이고 들어서 익숙한 데다, 알고 있는 것이기에 그 정도가 덜하겠죠.

하지만 자신이 라피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면서도 자신을 울리겠다는 말은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다 보니 충격이 조금 있을 거예요.

헤어진다면, 울린다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자신에게 매달릴지, 포기하고 놔줄지를 고민했었다는 라피아의 모습이 어딘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미안해하지 마. 나, 이 말만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고른 길이라고 항상 말하잖아? 내가 좋아서 네 옆에 붙어있는 거야. 황녀님이 약간 도와줬지만, 이번에 확실히 마음을 정했어. 이번에 직접 보고 흔들릴 것 같았는데, 포기하지 않아.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을 거야. 탈리안이 있더라도 절대 비켜주지 않아. 똑같이 옆에 앉으라 해.”

이걸로 라피아의 확고한 의지를 질도 다시 한번 확인했으니, 걱정이 하나 줄었겠네요.

질이 라피아를 대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조금의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요.

그래도 어느정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게 아닐까요?

정리되어가는 상황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는지, 안아주고 있는 라피아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 덮어주었거든요.

“어어, 그리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상황이 좀 재밌게 흘러갈 것 같아서. 나도 욕심이 조금 생기려고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무슨 말이에요? 상황이 재밌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게 있어. 어쨌든, 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부디 내가 탈리안한테 질투하지 않게 노력해줘. 나도 노력할 테니까.”

라피아는 질에게서 다시 확실한 답을 얻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껴안은 손에 은근히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거든요.

“네, 당연하죠! 그으, 그래서 언니…. 무슨 일이었어요?”

“아, 아가레스? 어, 음….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설마 언니 일부러 말 안 해주는 건 아니죠? 제 대답은 들어놓고….”

“에이, 그럴 리가? 응, 그럴 리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도 않은데도 라피아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어요.

말투만 봐도 이미 눈치를 챈 질은 작게 한숨을 흘렸지만, 굳이 여기서 더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죠.

자신은 별일이 아니라고 했었지만, 라피아에게 있어서 떠올리기 싫은 일이라는 것쯤은 알기에 그런 것일 거예요.

“진짜…. 그럼 언니가 괜찮을 때 말해주세요.”

“그래, 언젠가는 꼭 말해줄게.”

“그럼 이제 손에 힘 좀 풀어줄래요? 언니가 안아주는 건 좋긴 한데, 슬슬 자세가 불편해서….”

어쩐지 질이 아까부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거나, 몸을 살짝씩 비틀기도 했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그런데 정작 라피아의 팔에 들어간 힘은 빠질 낌새가 없었어요.

오히려 질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이기까지 했죠.

“뭐야, 지금 날 거부하는 거야? 실망인걸…. 방금 노력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잖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

“아니, 언니 이건, 그런 게….”

“나 이러다간 또 탈리안한테 질투할지도 몰라, 너 탈리안이 안아주는 거면 하루종일 안겨있을 수 있을 거잖아.”

“그건, 탈리안 언니가 보통 그런 일이 잘 없자냐하악?!”

계속 부정하려는 데도 말을 끊고 들어오고, 이번에는 입술로 귀를 물어서는 질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라피아에요.

꽤 웃긴 소리를 내며 순간적으로 격한 발버둥까지 쳤지만, 그럼에도 라피아의 품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죠.

얼마나 놓치고 싶지 않길래 이러는 걸까요.

“푸후흐, 그렇게 격렬하게 몸을 떨 정도로 소름 돋았어?”

“갑자기 귀를 왜 물어요!!”

“괘씸해서? 자, 만족했으니까 이젠 풀어줄게.”

“앗, 으응…. 어쨌든, 저 정말 노력할게요. 언니를 실망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엿들어서 알겠지만, 저한테 언니는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이에요. 믿어주세요.”

갑자기 놓아준 탓에 휘청거리며 풀려난 질은 몸을 돌려 라피아를 바라보면서 차분하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결심한 듯한 그 모습에 라피아는 피식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어요.

“알아. 네가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없어. 나는 널 믿어.”

…라는 말과 함께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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