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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35화 (135/189)

〈 135화 〉 황녀의 생각대로 (2)

* * *

레나이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라피아의 방이었어요.

문을 두들기자 얇은 옷감으로 만든 파자마로 갈아입은 라피아가 반겨주었죠.

신경 써서 관찰해야만 날이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라피아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싫은 기색 없이 레나이를 맞이했어요.

탈리안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것이 그렇게까지 싫었던 걸까요? 그런 것 치고는 탈리안이 말한 대로 상당히 노출을 줄인 옷으로 바로 갈아입었네요.

“무슨 일이에요?”

“저녁이 다 됐다고 하길래 직접 찾아와주었지.”

“죄송한데, 입맛이 별로 없거든요. 질한테는 미안하지만 못 먹겠다고 전해주?! 레나이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손목을 잡아 이끄는 레나이 덕에 억지로 방 밖으로 이끌린 라피아에요.

억지로 끌려 나온 탓에 신고 있던 슬리퍼까지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었어요.

“그대들은 하루라도 싸우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나?”

“싸우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대는 앞으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겠군.”

무작정 이끌리기만 하던 라피아는 비꼬는 듯한 말투에 눈썹을 찌푸렸어요.

저녁을 먹지 않겠다는 것은 탈리안과 얼굴을 마주하기 싫다고,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다른 날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가 이제 와서 이유도 없이 잔소리를 한다면 누가 기분이 괜찮겠어요.

질과 같이 있으면서 항상 정확한 판단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라피아지만, 질과 탈리안이 화해하는 장면을 엿보는 것을 보면 라피아도 의외로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이니까요.

“탈리안이 왜 그렇게 짜증을 내는지도 모르겠다고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평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대는 이런 데서 은근히 눈치가 없는 거 아닌가? 평소에는 그렇게 분위기라던가, 상대방의 기분을 읽는 것도 잘하더니 답지 않은데.”

더구나 이번 일은 레나이의 말대로 평소의 눈치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잘못짚어도 완전히 잘못 짚은 상황인걸요.

노출이 많은 모습에 눈 둘 곳이 없어 시선을 피했던 거고, 뺨까지 붉혔던 탈리안이지만….

라피아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이전에 비할 데 없이 화가 난 탈리안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좀처럼 표정 변화가 잘 없는 탈리안이다 보니 새로운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헷갈릴 수밖에 없지만요.

질이라도 헷갈릴 뻔했을지 누가 알겠어요.

“저 다시 돌아가도 되나요? 레나이님이랑 있으니까, 또 피곤해지는 기분인데.”

“정말이지 너무하는걸. 탈리안에게 솔직한 감정을 내뱉을 준비나 하는 게 어떤가.”

“예? 시, 싫어요! 그냥 넘어가면 다음 날부터는 그 녀석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할 텐데 뭐하러…!”

“미안하지만 그대가 저항하지 않는 사이에 다 왔어. 탈리안! 본인이 선물을 가져왔다!”

이끌리는 와중에도 고민에 빠져있던 라피아가 정신을 차리면, 어느샌가 탈리안의 방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선물이라고 말하는 레나이에게는 얄미운 마음밖에 들지 않겠네요.

“레, 레나이님?! 저 진짜 싫다고요!!”

“음, 반응이 없군. 이럴 땐 실력 행사지!”

“저, 저기요?!”

책장 너머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은 탓인지, 레나이는 잡고 있던 라피아의 손목을 놔주고는 뚜둑, 뚜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을 풀었어요.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라피아가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로 레나이를 구경하던 것은….

“흐읍…!”

레나이가 한순간에 책장의 틀을 잡고 강제로 뜯어냈기 때문이었어요.

당연히 꽂혀있던 책들이 무서운 기세로 바닥에 우르르 쏟아지고, 책장에 옆면에는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레나이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탈리안이 얼마나 화낼지 걱정하게 만들 정도였어요.

게다가 탈리안이 단단히 화가 나 있는 상태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라피아라면 더 그렇죠.

“나, 난 몰라….”

“주어진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다. 그런데…. 이런 소동에도 잠들어있는 건가? 저번에 본인과 대화할 때도 그렇지만, 정말 대단하군.”

“그, 그러게요….”

멍하니 서서 탈리안의 깊게 잠든 것에 감탄하던 라피아는 그 옆에 다가서는 레나이에 한 번 더 놀랐어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침실에 침입해 그 어깨를 잡아 강하게 흔들기 시작하더니,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름까지 크게 불렀으니까요.

“구, 굳이 깨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당황한 라피아는 허둥지둥하며 탈리안을 깨우려 하는 레나이의 손을 낚아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킨 탈리안이 짜증 난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한번은 레나이를, 한번은 라피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참하게 먼지와 나뭇조각을 남기고 뜯겨나간 책장을.

“아무래도 황녀…. 당신이 이곳에서 사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네요. 하루가 멀다고 이렇게 소란스럽게….”

“약한 소리 하지 말아. 그대가 아무렇지 않게 집을 수복하는 것을 보여줬잖아? 아무런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니까 이해해줘. 그리고 이렇게 선물도 데려왔다고?”

선물이라는 말에 라피아를 한번 흘겨본 탈리안이지만, 어딜 봐도 선물이라고 보여지는 것은 없었어요.

이전에 있던 일처럼 라피아가 질과 같이 온몸에 리본을 두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단순한 파자마 차림이었으니까요.

물론, 라피아가 리본을 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탈리안에게 선물로 보여질지는 모르겠지만요.

“…선물, 아무것도 없는데…. 라피아를 말하는 건가요? 어딜 봐서 선물이라는 거예요?”

“그, 나 때문에 화났잖아…. 그래서 사과하려고….”

이번에는 레나이가 나서기 전에 먼저 행동한 라피아에요.

뜬금없는 사과의 말에 탈리안이 생각의 정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의외의 모습에 레나이는 알아서 뒤로 빠져주었는데, 라피아에게 있어서는 불필요한 주선이었을 거에요.

“사과라니, 책장을 뜯어낸 걸 말하는 건가요?”

“어? 그게 아니라, 내 집도 아닌데…. 너무 편하게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

“네? 아까 제가 돌아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요?”

“그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온 거야. 제대로 말하자면 강제로 레나이님한테 끌려온 거지만….”

“사과하니까 받아주기는 하겠지만요. 라피아, 저는 당신이 옷을 편하게 입었던 것 때문에 화 난적이 없어요.”

화나지 않았다면서 사과를 받아주다니, 라피아의 모습이 어지간히 보기 힘들었나 보네요.

정작 사과한 사람은 화나지 않았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로 탈리안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뭐? 화 안 났다고?”

“화를 내더라도 방문을 억지로 잡아 뜯어낸 황녀에게 내겠죠. 제가 당신한테 화를 왜 내겠어요.”

이상한 오해를 해버린 라피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어이없고 허탈한 일이 있을까요.

레나이가 했던 말 때문에 더 헷갈렸을 거고, 억지로 끌려와서 더 헷갈렸을 거예요.

그러니 한껏 억울한 얼굴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하는 라피아가 불쌍할 뿐이에요.

“아니, 그렇지만…. 너 나한테 잔소리할 때 날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표정도 조금, 좋아 보이지 않아서 화난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그러니까…. 당신 뒤에 서 있는 황녀가 며칠 사이에 당신 몸을 보고 매력적이니 뭐니 한 탓에….”

말을 더듬으며 다시 한번 라피아의 얼굴이 아니라 가슴 쪽을 바라보고 있는 탈리안이에요.

분명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라피아가 부주의함으로 단추 몇 개를 잠그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라피아가 그 시선을 조용히 따라가다가 자신의 가슴팍인 걸 눈치채고는 재빠르게 단추를 잠그고는 팔로 몸을 가리듯 감쌌어요.

“…설마 너, 내 몸을 보고 있던 거야? 그때도, 지금도?”

“아, 아니에요! 아니! 마, 맞는데! 그러니까, 이건! 이건 황녀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그러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탈리안이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다 들켜버렸는걸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레나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라피아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는 거였어요.

직접 레나이에게 몸을 만져진 적도 있고, 탈리안을 유혹하는 걸 본 적도 있으니까요.

“아하…. 그렇게 된 일이었어? 하, 기운 빠져….”

“뭐라도 말 좀 해보세요!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황녀!!”

“본인 때문이라고? 본인은 그저 그대들의 사이가 좋아졌으면 했을 뿐이야. 지금만 보더라도, 서로 눈을 맞추고 5초만 있어 봐. 이전과 다른 것을 알 텐데?”

레나이는 둘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며 잡아뗐어요.

일이 좋게 끝나서 다행이지, 나쁘게 끝났다면 어떻게 하려고 이랬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또 둘은 레나이의 말에 순순히 서로 눈을 맞추고 바라보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1초, 2초, 3초, 4초가 되어갈 때쯤에 제일 먼저 탈리안이 눈을 피해버린 거예요.

그리곤 다시금 레나이를 향해 소리쳤죠.

“…결국에는 당신 때문이잖아요!!”

“도대체 화를 왜 내는 건지 모르겠군, 사이가 좋아지면 좋은 일인 거 아닌가? 본인은 지르니트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먼저 내려가 있지. 그대들도 어서 내려오길 바라겠어. 아니면, 조금 진도를 빨리 빼기 위해서 늦게 내려와도 이해해주지.”

“피, 필요 없거든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서도 끝까지 놀리며 사라지는 레나이에요.

둘만 남자마자 방은 순식간에 적막해져선 어색한 분위기만 흐르기 시작했어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머리를 긁적이던 라피아에요.

“야, 너 진짜…. 나를 그런 눈으로 본 거야? 4일이라고, 4일. 진짜 짧은 시간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나를 그런 눈으로…. 말이 안 되잖아.”

“저, 저도 이상한 거 알아요! 아는데, 황녀가…. 저도 정말….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황녀가 은연중에 힘을 쓰고 있는 건 알았는데, 저는 단지 당신과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지 이런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아니, 지금은, 지금은 모르겠지만….”

열심히 자기 변론을 하는 탈리안이지만,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탈리안이 무슨 말을 하든 라피아에게는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어요.

어떻게든 라피아가 이해해주기는 할거에요.

황녀가 힘을 써서 어떻게든 이번 일에 개입을 했다는게 드러났잖아요?

그렇지만 단지, 조금 찝찝할 뿐이죠.

탈리안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은 아닌걸요.

“아, 어어…. 일단 지르니트가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내려가자. 밥은 먹고 자야지. 한국인은…. 아니, 아니지. 사람은 밥심이야.”

둘만 남아있는 게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았는지 손을 내미는 라피아에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탈리안은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기만 했죠.

며칠간 세뇌수준으로 듣던 라피아의 매력에 대해서라면 이미 줄줄이 외고 있을 탈리안이니까요.

이 와중에도 그 머릿속에서는 여러 고민들이 떠오르고 또 사라지고 있을 거예요.

“저, 정말 이상한 거 알아요…. 아는데, 라피아는 저랑 그런 관계가 되는 게 싫은 거예요? 질과는 이미 그러고 있잖아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질하고는 경우가 다르잖아!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지만….”

“아, 아…. 그렇구나….”

“너 설마 진짜로…?”

영문 모를 한숨을 내쉬는 탈리안이 믿음직스럽지 못했나 봐요.

그 예상대로 들어맞았다는 것처럼, 질이 기다리니 빨리 내려가자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탈리안이었죠.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은 씨앗과도 같아서 한번 싹이 심어지면 제어하기 어려워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에요.

이미 머릿속에서는 라피아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해 온갖 생각이 다 들고 있겠죠.

레나이의 말대로 라피아는 아름답다.

외모야 당연하지만, 예를 들자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보게 된 가슴이라거나 허벅지.

더 친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어떻게 다시 만든 친구인데 더 친해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레나이의 말대로 더 깊은 관계를 맺어도 나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라피아는 질과 이미 사랑 중인데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친구끼리의 더 깊은 우정을 바라는데, 질이 왜 생각나는 걸까.

애초에 레나이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정말, 온갖 생각들이 떠오를 거예요.

더구나 탈리안은 오랜만에 사귀게 된 친구와 더 친해지기 위해서라며, 판단을 잘못해서 저항하지 않는 실수를 했으니까요.

레나이가 그렇게 큰 개입을 하지 않았더라도 일이 이렇게 되는 건 이미 결정된 일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의 라피아로서는, 앞장서서 1층으로 내려가는 탈리안의 등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도 오해가 풀린 일만큼은 다행이에요.

이번에도 큰 사고 없이 지나갔네요.

아닌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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