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황녀의 생각대로 (1)
* * *
탈리안과 레나이의 회의는 도서관이 폐관하고 나서야 끝이 났어요.
분주히 돌아다니던 도서관의 분신 중 한 명이 방에 들어와서 시간이 늦었다며 알려주었거든요.
그러던 와중에 황녀가 다른 분신에게 관심을 보이려 하면 도망가려 하거나, 탈리안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했어요.
나중에 합쳐졌을 때 과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레나이가 침울해지는 것을 정면으로 봐야만 했죠.
“도대체 분신 따위가 뭐라고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예요?”
“보통의 분신이라면 모를까. 인격도 따로 존재하는 데다가,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가 자신의 감정이라니 신기하지 않을 리가 있나.”
“별것도 아닌데….”
이어지는 칭찬에 탈리안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집과 연결했어요.
문을 건너자마자 보이는 건 거실에 모여 책을 읽고 있는 질과 라피아, 흑기사였어요.
질은 소파에 앉아서, 라피아는 소파에 누워서, 흑기사는 벽에 기대서.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책을 읽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심지어 어지간하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라피아가 책을 읽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흑기사까지 책 읽기에 동참하고 있으니 탈리안은 문을 열고 난 뒤로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어요.
“…다들 왜 여기서 책을 읽는 거예요?”
“보면 몰라? 책 읽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라피아의 대답에 가까이 가서 잔소리를 할 느낌이었던 탈리안은 또 한 번 멈춰 섰어요.
그리곤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라피아의 배부터 허벅지까지 덮어주는 거예요.
“뭐야? 왜?”
“…아무리 집이라지만, 같이 사는 사람들한테 보기 안 좋은 모습이잖아요.”
“내 모습이 뭐 어때서?”
이어지는 잔소리에 라피아는 소파에 누워있다가 제대로 앉아서 뭐가 잘못됐냐며 따졌어요.
집이라면 어느 정도 편한 모습으로 있는 게 당연해요.
새하얀 민소매 나시티에 상당히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는 것도 라피아 마음대로라는 거죠.
약간, 아주 약간 노출이 과했을 뿐이에요.
드러난 어깨라던가, 살짝 삐져나온 옆 가슴과 가슴골, 짧았던 길이로 인해 대놓고 보이는 복부, 그리고 탄탄하면서도 말랑해 보이는 허벅지까지.
평소와 같았다면 그저 주의만으로 끝났겠지만, 오늘의 탈리안은 뭔가 달라 보였어요.
이런 라피아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죠.
“어때서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무방비하게 맨살을 보이니까…!”
어딘가 이상한 모습의 탈리안은 잔소리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어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제대로 말해주는 게 라피아로서도 편할 텐데요.
정작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몸을 흘깃거리다가, 훔쳐보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다른 장소를 바라보기를 몇 번.
영문을 알 수 없는 행위의 반복이었어요.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야? 싫었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고치면 되는 걸 눈치를 주면 내가 뭐가 되냐?”
“그런,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기는, 가서 갈아입고 올 테니까 앞으로는 말로 해.”
라피아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외투를 다시 탈리안에게 건네주고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어요.
열심히 부정하던 탈리안의 노력이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어요.
뒤에서는 레나이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탈리안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죠.
“이, 이게 전부 당신 탓이잖아요! 당신이 최근 4일간, 라피아의 매력이니 뭐니라고 하지만 않았더라도…! 아…!”
그 어떤 말이라도 입 밖에 나온 순간 주워 담을 수 없어요.
반대편 소파에서 같이 책을 읽고 있던 질과 흑기사에게 자신이 라피아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했다는 것을 들켜버렸거든요.
애써 둘에게 이해가 되도록 해명을 하려던 탈리안이었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될 리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럴수록, 탈리안의 수치심은 배가 되어 갔으니까요.
“괜찮아요. 황녀님이 뭘 하는지 옆에서 봤었으니까, 언니가 그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저는 정말…!”
“선생님,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아, 진짜! 오늘 저녁은 저 빼고 먹어요! 도저히 밥 먹을 기분이 아니네요!”
“아, 언니!?”
탈리안은 발끈하면서 라피아가 소파에 두고 간 외투를 집어 들고 2층으로 올라갔어요.
질뿐이라면 모를까 흑기사까지 일부러 그 수치심을 숨겨주려 노력하는 모습에 더 화가 났을 거예요.
2층으로 도망치는 탈리안을 보고 지르니트 옆에 다가와서는 털썩 앉는 레나이에요.
“지르니트, 그대가 보기엔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지?”
“탈리안 언니가 라피아 언니를 좋아하는 건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으음, 아니야. 본인이 말하려는 것은 친구라는 관계 더 발전해서 사랑을 나누기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거지.”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탈리안 언니가 그럴 일이 있을까요?”
질을 확신을 갖지 못하고 레나이에게 되물었어요.
탈리안이 자신 이외에 누군가를 사랑한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하지 않고 싶은 것 같지만 억지로 상상하려 해도 잘되지 않는 것 같아요.
애초에 질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잘 없으니까요.
혼자 있는걸 좋아하고,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낮잠 자는 걸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나마 탈리안이 먼저 관심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최근에 친구가 되었던 라피아밖에 없잖아요?
그야말로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연결고리를 만들기 싫어하는 외톨이에요.
“방금만 하더라도 매력적인 라피아의 모습을 보고 멈칫거렸지 않나? 4분의 1 정도는 넘어왔을 것 같은데.”
“라피아 언니가 좀, 매력적인 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출발선에 있는 거잖아요. 정말 솔직한 제 생각을 말해드리면…. 언니들이 서로 사랑하는 건 불가능할 거 같아요.”
아무래도 질의 머릿속에서는 정말로 둘이 사랑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일부러 상상이 되지 않는 척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요.
“정말 그럴까? 그럼 본인과 내기라도 하겠어? 만약, 탈리안이 라피아와 사랑을 나누거나 그 비슷한 행동을 한다면…. 지르니트, 그대와 본인은 의자매가 되는 거야.”
의자매라는 말에 질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도 그럴 게, 레나이가 질과 의자매가 되어서 좋은 점이 뭐가 있다고요?
언젠가 자신의 옆에 질을 포함해, 탈리안과 라피아까지 둘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레나이인걸요.
자신의 실력을 전적으로 믿고 있기에 했을 말일 텐데, 뭐가 부족해서 의자매를 맺자고 하는 걸까요.
질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에요.
“의자매…? 실례지만 황, 레나이 언니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예상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난 말에 대답은 둘째치고, 레나이의 나이를 물어보잖아요.
하지만 ‘연세’라는 말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온몸으로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소리치는 레나이에요.
“연세라니 그만둬! 본인은 아직 19세밖에 안 되었다고!”
“네에…? 거짓말…. 엄청 어른스럽게 보이는데…. 그, 그럼 언니의 연…. 나이는 넘어가요. 주변의 반대는 어떻게 하고요? 언니가 저를 의자매로 들여서 얻는 이득은 뭔데요?”
질이 입을 가리며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어요.
19세, 10대라는 청춘의 마지막에 피는 꽃과도 같은 나이인걸요.
약간은 어린아이 같은 티가 남아있으면서도 성숙해진 얼굴과 몸으로 인해 매력의 절정에 다다르는 그런 나이를 말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질의 눈에, 아니, 모두의 눈에 보이는 레나이의 키와 몸매, 얼굴까지.
전부 20대 후반의 카리스마 있는 멋들어진 여성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황궁에서 생활하던 탓인지, 공훈을 세우기 위해 타 지역을 방랑하던 생활 탓인지는 몰라도, 웬만한 다른 사람의 분위기는 전부 압살할만한 사람 같아 보이니까요.
진짜 문제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아니라, 질이 말한 대로 황궁 관계자들의 반대 같은 일들이죠.
레나이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몸을 던지듯이 앉고서는 ‘나 이런 사람이야.’라며 자랑을 늘어놓을 뿐이었어요.
“본인을 물로 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황궁 내에서 본인의 입지가 얼마나 큰지,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야. 어쨌든 내기에 타겠나? 기한은 딱히 존재하지 않아. 둘 중 하나가 상대방을 싫어하게 되거나 그럴 생각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면 그대의 승리인 것으로 하지.”
“상대방을 싫어하게 된다니, 그런 건 안 돼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게 되기 전에 본인이 최대한 노력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끄응, 만약 제가 이기면요?”
둘이 다투거나 싫어하게 되는 것은 레나이에게 소리까지 칠 정도로 싫어하면서 그만두라고는 하지 않네요.
탈리안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둘의 사이가 좋아진다는 것 자체에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약간이겠지만, 레나이가 제시하는 보상에도 관심이 있을 테고요.
“음~ 바라는 거라도 있나? 그대가 여태껏 처리해온 슬리브스터의 거점의 수만 하더라도 돈은 충분할 것 같은데.”
“맞아요. 탈리안 언니가 돈을 못 버는 상태가 되어도 저 혼자서 언니를 책임질 수 있는 돈은 있어요.”
탈리안이 없던 기간 동안 해온 일들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보통의 모험가가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릴 정도의 돈을 모으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새삼 질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어요.
그렇다고 탈리안이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중요한 것은 ‘질이 얼마나 뛰어난 수완을 가지고 있는가?’이니까요.
레나이 역시 예상했다는 듯이 이런 질의 대답에 돈 외에 바라는 것이 있냐고 되물었어요.
“그러니까, 음…. 황궁의 도서관 이용권 같은 거?”
“고작 도서관 이용권? 뭔가 더 바라는 게 있을 텐데?”
질다운 대답이지만, 레나이가 듣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보상이었어요.
10살짜리 어린 아이가 바라는 보상이라 봐야 얼마나 큰 걸 바라겠냐만은, 질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한 보상이 없을 거예요.
황궁이니 평소에는 접하지 못했던 귀중한 정보가 담긴 책들도 있을 테니까요.
웬만한 책이라는 책은 다 읽은 질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수도 있잖아요.
물론 탈리안의 도서관도 충분히 쓸모 있지만,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도서관이라는 점에서 질이 알지 못하는 책은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으니까요.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도대체 어떤 책을 원하길래….”
“비밀이에요. 아, 비밀 아닌가…? 언니들한테도 말했었고….”
“무슨 책을 읽고 싶은지 알려준다면 굳이 내기의 보상이 아니더라도 가져다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레나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보상이라고 불리기에는 문제가 있겠지만요.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주겠다고 말하는 거겠죠.
질과는 이렇게 차곡차곡 호감도를 쌓아가네요.
“아, 그래요…? 그럼 연금술과 창조마법에 관련된 책들은 전부 가져다주실 수도 있어요?”
“물론이지, 본인 명의로는 빌리지 못하는 책이 없으니까. 몇 권이면 충분하지?”
“못해도 최소 50권은 있어야 해요.”
“그건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많은 게 아닌가…? 대여 기간 내에 못 읽을 것 같은데?”
50권이라니 질이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도 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레나이의 걱정에도 ‘마을에서는 책을 많이, 빨리 읽기로 소문났었다.’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 보면 마냥 무리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질의 태도에 레나이는 마지못해 대답해야 했어요.
“그대가 그렇다면, 알겠다. 그보다 저녁은 먹었나?”
“아, 준비해놨어요. 이런 일을 시켜서 죄송한데 언니들 좀 불러와 주실래요?”
“이제 가족인데 못할 것도 없지! 금방 불러올 테니 딱 기다리라고!”
레나이는 들뜬 채로 가족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힘을 주며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2층에 향했어요.
하루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는데 다시 한번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네요.
“아! 그러고 보니까 의자매가 되면 좋은 게 뭔지 못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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