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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33화 (133/189)

〈 133화 〉 황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 * *

황녀 레나이가 집에 머물기 시작한 지 4일째.

탈리안은 레나이의 언행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어요.

틈만 나면 라피아의 매력을 어필하려 들었기에 책을 읽는 데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베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해서 꺼냈거든요.

베리아의 이름을 질이 빼앗게 된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다.

마기노의 본능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방법을 생각해보겠다.

베리아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다면 그 원망을 풀도록 도와주겠다.

정말 틈만 나면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참견해왔으니 곤란하기도 이렇게 곤란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버티지 못해 도망간 곳이 수도에 세워놓은 자신의 도서관이었죠.

하지만….

“오오, 직접 찾아오는 건 처음이군. 항상 지나가면서 외관만 봤었는데 말이야.”

“제발, 제발 좀! 레나이 씨 당신은 할 일도 없어요?! 왜 이렇게 쫓아다니는 거예요!!”

도서관의 문을 건너자마자 따라와서 달라붙는 레나이에게 고함까지 치는 탈리안이에요.

이 반응으로 보아 레나이가 한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거 같아요.

쉴 새 없이 주변에서 말을 걸어온다면 그것만큼 피곤한 게 더 있을까요.

“왜냐니? 그야, 재밌으니까. 탈리안 그대와 함께 대화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알아?”

“알고 싶지 않아요! 재미없다고요! 제발, 이 4일간 귀가 피곤한데 풀리지 않는 느낌을 알아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하핫! 그 덕분인지 이 몸의 시녀도 거의 달마다 바뀌고 있지, 미안할 따름이지만 어쩌겠나? 본인의 천성이 그러한 것을!”

자랑이 아닐 텐데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탈리안은 이마를 짚고 레나이를 흘겨보며 물어봤어요.

머리가 어질한 것 같은 모습이네요.

“그래서, 그래서 이번엔 또 뭔가요…. 베리아? 라피아? 누구 이야기를 하려는 거에요….”

“둘이 이야기할 장소가 있나? 있으면 좋겠는데, 이런 탁 트인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거든. 그대에게 부탁할 게 있어.”

“…따라오세요. 미리 말해두지만, 시답잖은 이야기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낼 거에요. 알았어요?!”

“하핫, 이거야 원! 신뢰가 없군!”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길래 받아들여 준 탈리안이지만, 마지막에 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온 레나이를 보고 후회했어요.

그렇지만 탈리안의 개인실에 도착하자마자 본 주제로 돌아가기 위해 목소리의 톤을 다잡는 레나이였어요.

“음, 그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기라도 했나? 오늘 도서관에 따라오며 느낀 시선과 인기척만 수십은 되는 것 같은데.”

“역시 한 번에 포기하지 않았네요. 교회를 믿은 제 잘못이죠.”

“역시 교회인가, 이런 식의 기분 나쁜 기척을 내는 건 교회 놈들밖에 없지. 베리아 때문이란 건 알겠는데 말이야. 처리하기 곤란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는데….”

언제인가 한번 겪어본 적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레나이는 탈리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어요.

도와주겠다는 말에 어떤 식으로 도와줄 거라 되물어보며 레나이를 쉽게 믿지 못하는 탈리안이었죠.

그야 부주교도 귀걸이를 건네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종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해요. 무슨 수로 그들을 설득하실 건가요.”

“이봐,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믿고 맡겨보기부터 하는 게 어때?”

“알았어요, 믿어본다고 해요. 하지만 당신이 공짜로 무언가를 해줄 리가 없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탈리안의 말이 맞아요.

지금껏 레나이는 자신이 누군가와 거래를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지, 선행을 베푸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 같아요.

“본인이 그렇게 인정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이런 것들이 나중에 그대들의 신뢰를 얻는 것에 대해서 플러스가 되는 것이니까, ‘이번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굳이 ‘이번에는’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하는 것을 보면 다음부터는 대가를 받아내겠다는 말이겠죠.

그렇지만 레나이가 탈리안이나 질, 라피아에게서 대가로 받을만한 것들이라고는 이미 다 가지고 있을 만한 것들이에요.

돈과 지위, 명예 같은 모든 것들이 이미 레나이의 손에 있으니까요.

무엇을 대가로 바랄지는 레나이만이 알 거예요.

“이번에는 말이죠, 그게 전부에요? 중요한 이야기라기엔 짧기만 한데요.”

그렇죠, 이제는 베리아의 문제는 사소한 일이에요.

질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품고 있었는지 알게 된 이상, 그걸 받아들인 이상, 탈리안에게 있어서 베리아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해결 방법을 찾으면 되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질을 탓해선 안 되는 일이고, 질과 어색한 사이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을 알았으니까요.

탈리안 스스로가 저녁부터 새벽에 있었던 일로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그러니 무언가 레나이가 말하지 않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한 말이겠죠.

레나이도 말하기를 꺼리는 눈치를 보이며 힘겹게 입을 뗐어요.

“아아…. 사실 타이밍을 맞추는 게 어려워서 말이야. 단둘이 남았을 때가 그다지 없지 않았어? 그러니까 본인이 하려는 말은…. 음, 질리지도 않고…. 재앙에서 마군주가 더 나타났다.”

레나이의 말에 완전히 얼어붙은 탈리안이에요.

탈리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점차 마군주가 세계 한가운데에 열린 재앙의 문을 넘어 이 세계로 점점 넘어오다가는 질과의 일상이 파괴될 수도 있으니까요.

마군주가 다섯이나 넘어와서도 이 세계가 무사했던 것은 다섯 중 절반가량이나 이 세계의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이번에 넘어온 마군주가 우호적이 아니라면….

“…이름은? 나타난 목적은? 행방은?”

그러니 탈리안이 쉴새 없이 질문 공세를 퍼붓는 것도 레나이가 이해해줘야 하는 부분이죠.

알현실과 집에서 얼마나 질을 아끼는지 직접 보여줬으니까요.

하지만 레나이가 해줄 수 있는 답변이라고는 ‘모른다.’라는 말뿐이었어요.

“현재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파견되었던 전 병력의 소식이 끊어졌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도와달라는 건가요?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계약에 그렇게 써 놨을 텐데….”

“그렇다. 계약서에는 그렇게 적혀있지만, 부탁은 해도 되지 않겠어? 물론, 본인도 마군주가 연이어 나타날 거라고 예상도 했었고, 준비도 해두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력하리라고는…. 수치를 무릅쓰고 말하는 거다. 부탁이니, …도와다오.”

레나이가 이렇게 차분히 내려앉은 목소리로 부탁하는 모습을 보면 원래 신분이 황녀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어요.

막연한 위협 앞에 침울해진 레나이의 모습은 탈리안마저 영향을 받게 했어요.

평소라면 질의 이야기를 꺼내, 위험하다고 하지 않겠다며 항의하려 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듣자 하니 교회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던데? 그것도 질과 함께. 그만한 소동을 대신전에서 일으켰는데도 세상은 아무런 소문조차 없이 조용하다. 그걸 누가 수습해주었다고 생각하지?”

탈리안이 망설이는 것이 싫었는지, 레나이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의미심장한 말을 했어요.

그러자 지금껏 망설이던 탈리안의 얼굴이 한순간에 짜증으로 물들어버렸어요.

왜 이런, 측은해 보이는 척을 한 레나이에게 속아 넘어간 걸까…. 같은 후회에 빠진 거예요.

“…기척이니 뭐니 해놓고, 알면서 떠본 거였어요? 속이 이렇게 새까만 사람은 처음 보네요.”

“황녀에게는 그보다 더한 칭찬도 없지! 음…. 미안하다. 도와주겠나? 부탁한다.”

“하아…. 이러면 부탁이 아니라 반협박, 반강제잖아요.”

반짝 장난기 넘치는 모습을 보이려다가도 이어지는 황녀의 저자세에 자포자기하며 돕겠다는 뉘앙스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던 탈리안이에요.

조금은 희망적인 대답에 레나이는 곧바로 다시 의자에 앉았어요.

태도 전환이 재빠르네요.

“미안하게 되었군, 어쨌든 나타났던 마군주는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최초로 나타났던 것은 그대와 아이펠슈에, 아비고르가 사용했을 때와 같은 재앙의 문. 노프르튼해였지.”

“그곳이 통로이니까요.”

“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어보는 거지만, 통로를 닫을 방법은….”

“최소한 다섯 명의 마군주가 모여야 닫을 수 있어요. 아니면, 연옥에서 둘, 이 세계에서 둘이 문을 사이에 두고 닫는 방법이 있지만…. 다른 마군주, 아이펠슈에나 아비고르도 연옥에서의 생활이 지겹다고 뛰쳐나온 것이니, 당연히 하지 않을 거예요. 질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저도 하기 싫은데요.”

탈리안은 설명을 이어가며 마지막에는 다섯 명의 마군주가 닫아야 한다는 말도 가능하다는 것일 뿐, 안전하다고는 하지 않았다며 덧붙였어요.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레나이는 등받이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천장을 보며 고민에 빠졌어요.

5분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잠깐의 여유가 생겨 탈리안이 차를 홀짝이던 와중에, 레나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래. 어찌 되었든 골칫거리는 이뿐만이 아니야. 마군주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판단되지만, 비슷한 시기에 리빌더라는 이름의 혁명군이 생겨났다. 아직 세력은 작지만 마기노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가문들과 황궁에 앙심을 품고 전복시켜, 세계의 패권을 잡아 자신들이 새로이 대륙을 통치하겠다는 놈들이지.”

“그건 저희한테 말해도 해결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짜증이 가득 담긴 손짓으로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탈리안이에요.

황궁과 가문이 손잡고 해야 할 일을 자신과 질에게 부탁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죠.

하지만 레나이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아니? 지르니트가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몇 개를 박살 냈는지 기억하고 있나? 무려 대륙에 퍼진 거점의 3할을 박살 내었어. 황궁과 가문이 힘을 합쳐 해치운 수를, 지르니트 혼자서 말이야.”

아직 이 세계에 많은 수의 슬리브스터가 남아 활동 중이긴 하지만, 지르니트가 정말 많은 수의 거점을 박살 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물론 그 원동력의 중심에는 사라졌던 탈리안을 찾는다는 중요한 일이 숨어있었지만요.

뭐가 되었든, 레나이가 보기에는 이번 일에 한없이 적합한 인재라고 할 수 있겠죠.

“…지르니트한테는 그만 간섭하세요. 다시 말하지만 계약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부탁이다. 태도가 신경 쓰인다면 무릎이라도 꿇지. 보수가 신경 쓰인다면 거부하지 못할 만큼의 보수를 준비해둘 테고.”

“슬리브스터는 베리아가 급조해서 만든 도적무리라서 그 수준이 낮았다는 것도 알고 있잖아요. 혁명군이라니, 그런 세력을 어떻게 질보고 처리하라는 거예요?”

이번에 탈리안이 한 지적은 타당했어요.

특정한 마도구만 없다면 슬리브스터는 수만 많은 도적에 불과했어요.

체계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 말 그대로 바람이 불면 쓰러질 적이었지만, 반면에 혁명군은 상황이 달라요.

세력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준비를 해왔을 것이고, 각 가문과 황궁에 대해서도 수많은 정보를 입수해두었을 거예요.

장비도 슬리브스터보다 멀쩡한, 제대로 된 것을 준비했을 테니 기본 난이도부터가 다른 거죠.

물론, 그렇다고 슬리브스터가 급조된 세력이라고 무시해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베리아를 잃고서도 각지에 흩어져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노예를 사고파는 걸 보면 대단한 세력이긴 한걸요.

“그러니 이번 일을 수락한다면, 본인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잠깐, 설마…. 질이 당신 입에서 나왔다는 건, 벌써 질과 멋대로 상의하고 결정한 일은 아니겠죠?”

불안해진 탈리안은 레나이의 눈치를 살피며 선수를 쳤어요.

과거 전적이 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겠죠.

문제라면, 레나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하핫, 하하….’라며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는 것이었어요.

“아아…. 머리 아파….”

탈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결국에는 할 수밖에 없는 될 일이 되어버렸네요.

질과 화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회복된 관계를 해치는 것도 싫을 테니 잔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탈리안은 질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다, 또는 허락하겠다는 다짐을 했었으니까요.

지금과 같거나, 베리아에 관한 문제처럼 자신에게 관련된 무거운 문제가 아니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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