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황녀가 있는 일상은
* * *
다음 날 아침, 모두가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모여 앉아있었어요.
웬일로 오늘의 아침은 라피아가 담당하고 있었죠.
평소라면 질이 모두의 아침을 만들고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데 걱정되는 듯이 레나이에게 말을 걸어오는 질이에요.
“그런데 언니는 이런 음식을 먹어도 돼요?”
“뭐가 문제길래? 본인이 너무 좋은 음식만 먹어와서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말도 다 안 했는데, 다 알고 있네요…. 언니는 좋은 것만 먹다가 왔잖아요.”
그야 황녀이니 좋은 것을 먹지 않을 수가 없겠죠.
굳이 질 나쁜 요리를 먹을 일도 없을 거예요.
레나이가 먹고 싶다고 애원하더라도 주변에서 말릴 게 뻔하잖아요?
“좋은 거라니, 본인은 이래 보여도 여러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먹어봤는데? 본인은 황궁에 묶여있는 걸 싫어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던가?”
그랬죠.
레나이는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기를 거부하는 유형의 사람이었어요.
대륙 각지의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항상 값비싸고 좋은 품질의 요리만 먹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도 질은 아직도 걱정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번에 직접 해주신 요리를 생각해보면, 분명 괴조의 알을 베이스로 한 요리였던가…? 그거 이 세상 요리가 아닌 것처럼 맛있었거든요.”
질은 레나이가 내준 요리를 잊지 못하고 있었나 봐요.
꽤 요리를 잘하는 편에 속하는 질마저도 이 세상 요리가 아니라고 평가할 수준이라면, 굳이 더 할 말은 없겠죠.
탈리안의 입맛에도, 라피아의 입맛에도 맞춰 요리를 해오던 게 질이니까요.
“아~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는 말이군. 신경 쓸 것 없어. 그건 재료의 문제도 있었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레나이는 대화를 이어가다 말고 건너편에서 책을 읽고 있는 탈리안을 쳐다봤어요.
시선이 느껴졌는지 탈리안은 레나이를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레나이는 포기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어요.
참다못한 탈리안이 책을 덮고 레나이에게 물어봤죠.
부담스럽게 왜 쳐다보냐면서요.
“별일은 아니고, 간밤에 충분히 즐겼나 궁금해서 그렇지.”
“무, 슨…. 그런 질문을…. 그래도 더, 덕분에 좋았, 어요….”
라피아의 바로 앞에서 대답하려니 신경이 쓰였나 봐요.
친구의 애인을 빼앗은 꼴이 되었는데, 신경이 안 쓰이면 말이 안 되기는 하죠.
하지만 레나이에게 날이 섰던 태도가 많이 사그라든 것도 그렇고, 대답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좋기는 했던 것 같아요.
“하핫! 솔직하니 좋군! 다음에는 라피아와 즐겨보는 건 어때?”
뜬금없는 레나이의 말에 묵묵히 요리 중이던 라피아의 어깨가 한번 들썩였어요.
그와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집게가 팬에 닿아 일순간이나마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었죠.
탈리안도 놀라 따지려다가 라피아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지 확인했지만, 다시 조용히 요리만 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라피…! 라피아랑?! 제정신이에요?! 아까부터 무슨 질문을 하는 거예요!!”
“물론, 게다가 그대와 라피아가 즐길 때는 본인도 같이할 거야. 둘 다 성인이니까. 가감 없이 해도 되겠지.”
“가, 가감 없이?! 아침부터 그런, 선정적인 말은 조금 자제해 주세요!! 질도 있는데!!”
이 와중에도 질은 레나이가 한 말에 자신만 빠져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볼을 부풀리며 손가락만 놀렸어요.
질투하는 건지, 부러워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요.
질의 이런 상태를 모를 리가 없는 레나이면서도 대화에 끼워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한껏 부끄러워하는 탈리안만 불쌍할 따름이에요.
“탈리안, 슬슬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니면 라피아랑 연애를 한다거나, 사랑을 나누는 게 싫은 건가?”
“그런 이야기가…!”
라피아랑 하는 것이 싫으냐며 물어봐 오는 레나이에게 강한 부정의 의사를 밝히지만 이마저도 라피아의 요리를 방해하기에는 충분했어요.
얼떨결에 나온 애매한 답변이지만 탈리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를 테죠.
부정하지 않는다면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테니까요.
라피아의 손이 잠시동안 멈췄던 건 그 때문일 거예요.
그렇지만 레니아는 더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라피아에게로 다가갔어요.
“라피아도 꽤 매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 예를 들면…. 여기라거나.”
한순간에 요리 중인 라피아의 도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몸을 탈리안에게 향하도록 휙 돌려버린 거예요.
그리곤 라피아의 셔츠를 들춰 잡티 하나 없는 탄탄한 복부를 드러내 버렸죠.
“뭐 하는 거예요! 불 쓰고 있는데 위험하잖아요!”
“어허, 가만히 있어 봐.”
레나이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려는 라피아에도 굴하지 않고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어요.
나머지 한 손은 라피아의 허리를 구속하는 데 쓰면서도 하복부를 쓰다듬으며 간혹 누르기도 했어요.
싸울 때처럼 저항했다가는 레나이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인지, 라피아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레나이가 라피아보다 힘이 센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 진짜! 밥 안 먹을, 하읏?! 아, 으응…! 그만 좀 해요!”
이런 미약한 저항마저도 단번에 약점을 들켜버려 무의미한 짓이 되어버렸어요.
라피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리에 온 힘을 써서 버티는 것밖에 없었죠.
잠깐 만져진 것인데도 레나이에게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어요.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을 해주니 레나이는 장난기가 더 발동했는지, 손으로 라피아의 반바지까지 벗기려 했어요.
아침상에서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정작 질과 탈리안은 개의치 않고 이 장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어요.
“봐, 여기라거나. 여기.”
“황녀님! 좀! 요리 타버린다고요!”
레나이가 멋대로 자신의 허벅지 안쪽이나, 가슴 아랫부분, 하복부 등등을 보여주는 것에 화가 났는지 소리치는 라피아에요.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죠.
정작 혼난 당사자는 전혀, 쌀알 한 톨 만큼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만요.
“어이쿠, 무서워라. 미안하게 됐어. 그렇지만 어때? 라피아도 매력적이라는 걸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 같은데?”
심지어 계속해서 탈리안에게 라피아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어필하고 있으니, 기가 찰 거에요.
억지로 벗겨져 바닥에 떨어진 반바지를 입으면서도 레나이를 노려보는데 신경 쓰지도 않고 있으니까요.
“그건, 조금…. 네….”
“뭐? 너, 뭐 잘못 먹었어? 너 정말, 나랑 그런 게 하고 싶은 거야?”
탈리안이 말했던 것처럼 일이 쉽지는 않겠네요.
라피아도 탈리안을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하니, 레나이가 꽤 수고를 할 것 같아요.
그나마 탈리안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네? 아, 아니! 그렇지만, 라피아도…. 안 좋은 말보다는 좋은 말을 듣는 게 그나마 기분 좋을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나도 몰라! 칭찬은 고맙지만, 그건 둘째치고! 레나이 님, 다음에 또 이러면 가만 안 둘 거에요. 여기선 황녀님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호오, 그대 은근히 말하는 모습이 지르니트랑 닮았군. 같이 지낸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가?”
레나이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알겠지만, 라피아가 한 성격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계약 때문에 집에 머무는 기간에는 황녀라는 신분을 내세우지 못하는 걸 알기에 이렇게 강한 태도로 나오는 거겠지만요.
그러거나 말거나, 레나이는 잔소리를 듣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 모두를 견뎌낼,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거겠죠.
“닮았다니…. 탈리안한테 해야 되는 말 아니에요?”
“아니, 배짱이나 말투 같은 것을 보면 조금이지만 닮기는 했지. 그런데 라피아 그대는…. 탈리안을 그저 친구로밖에 보지 않고 있는 건가?”
레나이가 당연해도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하네요.
라피아가 탈리안을 연애 대상으로 볼만한 구석은 한 군데도 없었는걸요.
“황녀님이 말한 대로 사랑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탈리안이 못생긴 건 아니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상식 밖의 외모인 건 맞죠. 그 외모 덕분에 어쩌다 혹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친구 이상으로는 조금….”
그렇지만 대답을 들어보니 아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아니네요.
라피아 성격에 할 수 없는 일이면 단칼에 못 하는 일이라며 부정했을 일이에요.
애매하게 부정했다는 것은 아예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레나이도 이를 눈치채고는 크게 웃었어요.
“하핫! 지금은 그걸로 됐어! 가능성이 없지는 않군!”
“설마 지금, 저랑 탈리안을 이어주겠다는 거예요? 진짜 어디 아프신 거예요? 황녀님이 이런 분이 아니었는데?”
“무슨 소리야? 사랑을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 수밖에 없지 않아? 안 그런가? 지르니트, 단탈리안.”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건 맞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거에요.
그러니 질도 탈리안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작게 웃기만 하는걸요.
절대 아니라고는 못 하는 모습을 보니 꽤 웃기네요.
“저는 그래도 라피아 언니가 탈리안 언니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언니들이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서 탈리안 언니가 저한테 주는 사랑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요.”
“그 사이 좋게라는 말이…. 탈리안이 말했던 것처럼 선정적인 의미로 사이좋은 거 아니야?”
“언니! 도대체 저를 뭐로 보고…! 정신적! 플라토닉! 그런 의미에요!”
“아, 그래…. 그래도 아예 아닌 건 아닐 텐데? 나하고도 플라토닉적인 사랑만 한다면 인정해줄게.”
질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라피아가 ‘그럴 줄 알았다.’라며 다시 요리를 시작하는데도 찍소리조차 하지 못했죠.
정작 질을 이런 분야에 발을 들이게 한 사람은 라피아인데 말이에요.
“지르니트를 너무 몰아세우다니, 연장자로서의 품격이 부족하군, 라피아.”
“네? 아니, 황녀님 진짜….”
“황녀가 아니다. 레나이다.”
레나이의 계속되는 참견에 라피아는 입을 닫아버렸어요.
하긴 그런 장난을 당하고도 화를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데, 대답을 안 하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욕을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레나이는 라피아에게 고마워해야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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