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황녀의 앞에서
* * *
제일 먼저 탈리안의 방에 도착한 레나이는 항상 탈리안이 앉아서 책을 읽던 소파에 앉고는 둘을 바라봤어요.
멀뚱멀뚱 쳐다보는 질과 탈리안을 본 레나이는 말없이 싱긋 웃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으라고 했죠.
아직까지도 둘은 레나이가 무슨 생각인지 몰랐어요.
알 수가 없었죠.
그저 이상하게 기분 나쁜 미소만을 짓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으니까요.
기다리다 지친 탈리안이 레나이에게 항의하려는 순간이 돼서야 둘은 다시 방으로 들어온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어요.
“그대 탈리안, 첫 키스는 해 본 적이 있는가?”
“처, 첫 키스…?”
예상치 못한 말에 탈리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했어요.
정말 몇백 년을 살아놓고 이런 쪽으로 면역이 없다니, 탈리안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막막하네요.
질도, 라피아도, 심지어는 레나이까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일을 바라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음, 말 그대로 첫 키스다. 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있어요. 원해서 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건 왜…? 설마….”
땅만 바라보면서 머뭇거리며 대답하던 차에 레나이가 뭘 원하는지 눈치를 챈 탈리안은 급하게 레나이를 쳐다봤지만….
이미 레나이는 질에게 질문하던 도중이었어요.
“그럼 지르니트, 그대는 첫 키스 경험이 있는가?”
“…네, 라피아 언니랑 해봤어요.”
“호오, 라피아랑 해봤다는 말이지. 아쉽군. 라피아의 것은 본인이 먼저 빼앗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탈리안과는 다르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하는 질이 오히려 탈리안보다 성숙한 느낌이에요.
물론, 탈리안보다 몇 배는 더 성숙한 몸에서 오는 분위기라는 것도 있지만요.
황녀는 잠시동안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입을 뗐어요.
“좋아! 그대들에게 부족한 건 신뢰와 사랑이다. 그러니 명한다. 지금부터 서로 키스해라.”
“저, 레, 레나이 언니 앞에서요…?”
“…하? 에?”
부끄럼을 타면서 손가락을 매만지는 질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탈리안의 모습이 퍽 웃긴지 레나이는 큭큭 거리며 웃었어요.
이 장면만 본다면 누구나가 장난삼아 말한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레나이는 장난이 아니라는 듯이 웃음기를 감추고선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으로 다시 한번 말했어요.
“뭐 하고 있지? 어서 하지 않고.”
“조금, 부끄러운데요….”
“잠, 잠깐만요!! 부끄럽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갑자기 키스하라니, 그게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그렇죠, 부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에요.
레나이의 앞에서 키스하라니 보통이라면 못할 일이에요.
평소라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누군가가 지켜본다면 그 어려움은 배가 될 테니까요.
무엇보다 탈리안이 먼저 질에게 해준 적이 없잖아요?
“말했지 않았나? 그대들에게 부족한 것은 신뢰와 사랑이다. 아,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았으면 해. 그대들의 신뢰와 사랑이 작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물론 크고말고, 그대들의 인연은 보통 물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거다. 더 크고 많은 신뢰와 사랑이 필요해. 그러니까, [키스해라.]”
“자, 잠깐?! 이런 일에 능력을?!”
능력을 이런 데에 사용하는 레나이에 대해서는 기가 차겠지만, 지금의 탈리안에게는 저항하는 게 더 급했어요.
탈리안의 성격에 누군가의 앞에서 키스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모, 몸이 마음대로…? 이게 뭐예요, 레나이 언니!!”
반면에 질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부들거리며 오로지 힘으로 레나이의 능력에 저항 중이었어요.
이런 걸 보면 질도 상당하네요.
“말했을 텐데? 본인은 취미, 또는 휴가 시간이 아닐 때에 이 능력을 쓰는 것을 싫어한다고. 너무 남발하는 것도 어려운 힘이고 말이야. 그 말인즉, 이런 거지. 후후…. [키스해라.]”
레나이는 금빛 마나를 발산하며 또 한 번 명령했어요.
마치 이럴 때 쓰기 위해 아껴두는 힘이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그, 그만…! 하세요!!”
“본인은 직접 즐기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다. 알아두도록. 그리고 지르니트, 지금 저항하면…. 나중이라는 기회는 오지 않을 거다.”
레나이의 말에 시선을 한번 맞춰본 질은 뭔가 결심한 듯 몸에 힘을 빼고 명령에 따랐어요.
명령을 따랐기에 탈리안의 어깨를 붙잡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혀 도망치지 못하도록 요령 있게 잡았어요.
힘은 들어갔지만 아프지 않게 쥐어 잡는 질 때문에 탈리안은 더욱 당황했죠.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화해할 기회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질은 그렇게 보는 것 같지만요.
“질, 질! 정신 차려요! 저 황녀의 말에 휘둘리면 안 돼요! 이건, 이건 화해가 아닌?! 읏!”
열심히 설득하려는 탈리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은 그 입술을 한번 핥았어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비틀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질의 손에 저지당해, 찰나였지만 몇 번의 입맞춤은 물론, 손쉽게 입속까지의 침입을 허락해버렸어요.
이전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라피아에게 배운 탓인지 혀를 섞는 방법이 꽤 상냥했다는 것이었어요.
한시도 놓아주지 않는 건 이전과 똑같았지만요.
어쩌다 한번 탈리안이 질의 품에서 빠져나와 숨을 몰아쉴 때면….
“질, 흐읏, 하, 수, 숨이…. 하아…. 그만, 해요….”
“뭘 멈추고 있는 거지? 지르니트, 그 정도로는 화해할 수 없어. 그대가 탈리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탈리안의 몸에 새기고, 증명하는 게 좋을 거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게.”
“…알아요.”
“지, 지일…! 안, 으믓…!”
황녀의 간섭에 질은 눈빛조차 주지 않으면서 참견하지 말라고 중얼거렸어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정리하고, 탈리안을 완전히 침대에 넘어뜨린 뒤에 중단되었던 일을 계속하는 질이에요.
아직 저항을 그만둘 생각은 없는지, 탈리안의 손은 질의 팔을 살짝 쥐었다가도 침대 시트를 부여잡기도 했어요.
그 와중에도 질은 탈리안이 잠깐 보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손을 잡아 깍지를 끼워선 더욱 저항하지 못하게 했죠.
그걸 본 레나이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다시 한번 더, 명령했어요.
“탈리안, [그대는 저항할 생각조차 머리에 담지 마라.]”
이번 명령에 탈리안은 신음을 한번 흘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요.
어쩌면 저항을 포기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미 질에게 제압당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요.
질이 탈리안을 마음대로 한 시간만 벌써 10분이 다 되어가니까요.
정말 놀라운 건, 레나이는 단 한 번도 둘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그저 질과 탈리안이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을 턱을 괴고 쭉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죠.
키스로는 모자랐는지, 라피아가 하던 것처럼 이곳저곳에 키스 마크를 만들던 질은 돌연 탈리안에게서 멀어졌어요.
서로의 숨이 느껴질 거리만큼만.
“라피아 언니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제 아래에 깔린 언니를 보고 있으면….”
“질….”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질은 천천히 탈리안을 껴안고는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하기 시작했어요.
“저, 언니가 좋아요.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해요. 가족으로서도 사랑하지만, 평생을 옆에 있어 주고, 의지할 대상으로서,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으로서 사랑해요.”
“…알아요. 알고 있었어요. 라피아에게 주는 감정과 똑같은,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쯤은.”
탈리안이 질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거예요.
황궁의 복도나 알현실에서 라피아와 질을 나눠 갖느니 마느니 같은 대화를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자신에게도 질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듯이 말했었으니까요.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옆에서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나 긴데, 알 수밖에 없어요.
“그럼 받아줄 거에요?”
“…저는, 저는 모르겠어요. 질이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어떻게든 그에 맞춰주는 게 맞겠지만…. 라피아는? 라피아에겐 어떻게 말할건데요? 저는 라피아와 싸우기 싫어요. 정말, 정말 오랜만에 사귄, 친한 친구이니까요.”
눈을 반짝이는 질에게 해준 답이라고는 이런 애매한 답밖에 없지만, 예전 같았으면 거부했을 탈리안이에요.
은근히 받아주는 걸 보면 탈리안도 은근히 바랬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부족한 대답에 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어요.
더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제가 설득할게요! 저한테는 탈리안 언니도, 라피아 언니도 다 소중해요! 둘 다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에요!”
“라피아에게는, 힘든 일일 거예요. 저도 힘들 거고요. 이건 모두가 힘든 일이에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본인이 그대들이 서로 좋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질과 탈리안의 문제는 거의 해결된 것 같은데, 이제는 라피아가 문제가 되네요.
라피아는 탈리안에게 질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질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자신이 독차지하는 게 라피아가 바라는 것일 테죠.
무엇보다, 그게 정상적인 연애의 방식이기도 하고요.
“제가 라피아를, 라피아가 저를 좋아하게 된다니, 당신이 무슨 수로….”
탈리안이 황녀와 대화하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질은 탈리안의 위에서 내려와서는, 뒤에서 탈리안을 꼭 끌어안았어요.
질이 자기 품에 알맞게 들어오는 탈리안을 만끽하는 모습에 황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죠.
“사랑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이건 누구나가 아는 불변의 법칙이야. 그러니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좋은 장면도 봤으니까 말이야.”
“좋은, 장면….”
그렇게 질에게 당하고도 내성이 늘어나지 않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탈리안이에요.
“그래서, 슬슬 본인이 빠질 때가 된 것 같으니까 물어보겠는데…. 질이 얼마나 그대를 좋아하는지, 제대로 전해졌다고 생각하나?”
“네, 베리아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되겠죠. 제가 도와주면 되고, 애초에 질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베리아의 잘못이죠. 앞으로의 문제는 더 생각을 해봐야 하니 더 이상 베리아의 문제로는 잔소리하지 않을게요. 질의 생각이라 해야 할까, 마음이라 해야 할까, 그런 걸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부족한 건, 앞으로 질이 많이 알려줄 거잖아요? 아닌, 가요?”
질은 감동한 것처럼 탈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어요.
“하핫! 좋아, 그래야지! 그럼 이만 방해꾼은 빠져주도록 할까!”
“네? 방해꾼이라니, 빠져준다니…?”
계속해서 되묻는 탈리안에게 황녀는 무슨 소리냐며 똑같이 되물었어요.
“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보고 있지? 아까부터 지르니트가 부족하다는 어필을 계속해오고 있잖아. 화해도 제대로 하라고? 아직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잖나.”
“부족, 하다고요…? 질…?”
떨리는 눈동자로 질을 쳐다본 탈리안은 이름을 한번 부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질이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한 손은 옆구리에, 한 손은 허벅지에 옮겨가는 것까지 더해서요.
다가오는 질의 마수에 조용히 떠는 것밖에 하지 못했어요.
마수라니 질에게는 미안하지만, 탈리안에게는 마수보다 더한 손길일 수도 있잖아요?
“아, 헤헤…. 레나이 언니는 눈치가 좋으시네요….”
“언젠가는 지르니트, 그대 역시 본인의 것이 될 테니까.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전부 알고, 눈치도 좋아야 하는 게 보통이지 않겠어.”
“그건 그래요!”
질이 레나이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탈리안은 애써 저항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이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도중에 질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댔지만, 이 역시도 소용없는 짓이었죠.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레나이는 남은 힘이 얼마 없는 탈리안과 상황을 즐기는 질에게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어요.
“그러니, [서로 만족할 만큼 즐기도록.]”
“이, 이보세요! 레나이 황녀!! 자, 잠깐만, 질! 앗, 하읏?! 그, 그만해요…! 저 화낼 거에요?!”
“제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몰라요! 그래도, 언니는 처음이라서 끝까지는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끄, 끝까지…? 흐윽, 응?! 지일!!”
레나이는 즐기는 둘을 두고 밖으로 빠져나왔어요.
이 정도로 지켜보기만 한다면 레나이는 거의 관엽식물에 가깝지 않을까요?
약간의 도움만 줬을 뿐, 둘의 사이에 전혀 끼어들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나중에는 자신이 말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지르니트는 당연하고, 탈리안과 라피아에게도 손대겠지만요.
“음? 아직도 여기 있었나?”
그런데 황녀는 방의 문을 닫자마자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어요.
처음부터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잠을 잘 수 없는 흑기사는 정령계로 돌아갔을 테니 라피아겠죠.
“…안돼요? 결정하려면, 고민해야 하고, 고민하려면, 지켜봐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라피아는 탈리안의 문 앞 사각지대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상태로 레나이에게 대답했어요.
일어날 생각도,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아요.
질과 나누었던 계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무례한 모습에도 레나이는 라피아를 탓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차분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갔죠.
“안된다고는 하지 않았어. 다만, 그대가 지켜보기에는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저도 소중하다잖아요. …약속했었어요. 절대로 놔주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모른 척만 한다면 다 괜찮은 거잖아요.”
“질 것 같은 싸움은 빠르게 포기하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건가? 본인이 보기에는 이길 가능성은 없어도, 비길 가능성은 있는데 말이야. 이전에도 말했지만, 모른 척은 그만두는 게 좋아. 똑바로 마주하고 결정하도록.”
레나이의 희망에 찬 말에 라피아는 작게 웃었어요.
그리고는 소리 없는 큰 한숨을 내쉬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이전에 한번, 기분 나쁜 티를 냈던 적이 있어요. 그냥 지나고 보니까, 질투라는 걸 한다고 결과가 좋았던 건 아니었고, 그러니까…. 뭐랄까, 설명이 잘 안 되는데…. 그냥, 감정이라는 게 쉽게 제어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알지만, 지금도 당장 들어가서 둘을 떼어놓고 싶은데요. 그래도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잖아요. 제가 탈리안보다 못하다는 게 아니라잖아요. 탈리안도 저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싸우기 싫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는데 저기에 끼어드는 건….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저에게는 둘의 깊은 관계를 끊어낼 자격도 힘도 없어요.”
“왜 끊어내려 하지? 말했지 않나, 비길 가능성은 있다고 말이야.”
비길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계속해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레나이의 모습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째려보는 라피아에요.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봤고, 가장 힘든 시간인 지금, 포기하지 말라며 말해온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반응할 거에요.
“가능성을 믿다가 배신당하기는 싫어요. 그냥, 이런 애매한 상태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만 약간 힘들면 되는 일인데.”
“그대와 대화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길까? 안쪽에 들리겠어.”
“…제 방으로 가요.”
“그대의 방으로? 이것 참, 유혹하는 건가?”
자리를 옮기자 말하는 레나이가 내민 손을 잡던 라피아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며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깊게 쉬었어요.
“으으, 진짜 이러는 거 보면 진지해지는 내가 바보 같아…. 제발 그런 농담 좀 안 하면 안 돼요? 제가 좀 정조 같은 부분에서는 개방적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하고 싶다고요. 저 그렇게 헤픈 여자는 아니에요. 그리고 황녀님 이미지도 생각 좀 하세요. 만약에 제가 황녀님의 이런 이미지를 퍼뜨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제일 잘 알기에 이러는 것이지.”
멈춰있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황녀예요.
라피아는 발이 꼬이는 바람에 품에 안기는 꼴이 되면서도 바로 빠져나왔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유혹이냐며 장난치던 레나이의 품이니까요.
“읏, 지인짜 짜증나. 황녀님만 아니었다면 상대조차 안 해줬을 텐데, 알아요? 웃지만 말고 반성 좀 하시라고요. 칭찬 아니니까. 얼굴만 이쁘게 생겼으면 전부인 줄 알아….”
“하핫, 어쨌든 그대에게 본인이 친히 알려주도록 하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디 황녀님에게서 알아갈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있고말고, 그런데 그 황녀님이라는 말은 안 하면 안 되겠나? 몇 번이고 말하지만, 레나이라고 부르라니까.”
“제가불경죄로 끌려가는 거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할게요.”
그래도 라피아의 기분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레나이가 없었다면 라피아가 다시 밝아지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을 거예요.
겉으로는 밝은 척을 하더라도 속이 곪아 터졌을지도 모를 일이죠.
방의 문 너머에 있는 질도 행복해 보이니 사소한 문제만 제외한다면 잘 흘러간 하루 같아요.
네, 탈리안의 괴로운 듯한 소리만 제외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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