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황녀의 화해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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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 있었어요.
도시와 멀리 떨어진 평원에서 열쇠의 능력을 쓰기에는 문이 없었으니까요.
평원 한가운데서 문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짧은 것도 아니었고요.
그러니, 집에 돌아왔는데 탈리안이 잠들어있는 것도 어쩔 수 없어요.
“있잖아, 질.”
잠든 탈리안을 깨우기에도 미안하니 모두가 거실에서 벽난로 앞에 모여 불멍을 때리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라피아가 질을 불렀지만, 질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 라피아를 쳐다봤어요.
“언제부터야? 난, 말했잖아. 탈리안에게 돌아가려고 해도 놔주지 않을 거라고…. 놔주지 않는데도 떠나겠다면, 나는 친구로 남겠다고 했었잖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그런지, 라피아는 벽난로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면서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어요.
그 잔잔하게 일렁이는 불꽃이 눈에 담길 때에도 무표정한 채로요.
왜 일찍 말하지 않았냐며 질에 대한 원망을 늘여놓는 것 같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아예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저한테는 두 언니 모두 소중해요. 저한테는 둘 다 놓치기 싫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힘들어지는 건 괜찮다는 거야?”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어요.
이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인 거에요.
질에게 탈리안은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이고, 라피아는 제일 자신을 아껴주는 존재니까요.
두 명 모두 중요하지만, 이 욕심 때문에 일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던 거죠.
라피아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들어질 거예요.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잖아요. 언니마저도 저랑 싸울 거에요…?”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나도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네가,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잖아.”
물론, 일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 질이 먼저 ‘선택’을 했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는 있었겠죠.
그러기에는 질이 너무 미숙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에요.
“제가 더 많이 사랑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주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한 거예요?”
“지르니, 윽?!”
“그만해, 슬슬 외울 때가 되었지 않았나? 본인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그대들 전부를 이 손에 넣기 위함이라고. 그러니 질의 마음을 본인은 어설프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라피아, 그대도 이해해야 해.”
라피아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휙 돌려 소리치려던 순간, 황녀가 라피아의 머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안아줬어요.
그리고는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기 시작하는데,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어요.
얼마나 익숙했으면 가만히 옆으로 쓰러져 황녀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물론, 황녀의 말을 라피아가 받아들일 만큼 정당성이 있는가? 또는 이해 가능할 만한 말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요.
“저도, 언니한테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언니도 알고 받아준 거잖아요….”
“나도 알아! 알지만 실제로 그걸 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나도 이런 건 처음인데, 어떻게….”
“라피아, 그만. 지르니트도 그만하도록.”
“황녀님, 탈리안 언니한테 가요. 라피아 언니는…. 조금 진정되면 다시 이야기해요…. 미안해요, 언니. 다 제가 나빠서 그런 거예요.”
황녀의 만류에 질은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 버렸어요.
그런 질에게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는 라피아는 자신도 일어서서는 똑같이 2층으로 향하려고 했어요.
지르니트를 따라가려는 것일까 흠칫한 황녀가 황급히 멈춰 세웠지만….
“제 방으로 가려는 것뿐이니까 놔주세요.”
“아, 아아, 미안하군. 같이 가지.”
황녀는 라피아가 자기 방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탈리안의 방까지 갔어요.
다만, 책장과 책장 사이의 입구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어요.
질이 탈리안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탈리안의 자고있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아직 깨우지 않은 걸 보면 황녀가 오기까지 기다렸던 것일 수도 있지만, 탈리안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면 황녀를 기다리기 위함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다 탈리안의 뺨 가까이에 손을 가져가는가 싶더니,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놀라 손을 거두며 일어나버렸어요.
“아, 오셨네요….”
“대단한 사랑이군, 탈리안을 깨워주면 좋겠어. 화해, 해야지?”
“네, 네에…. 언니, 탈리안 언니.”
질은 탈리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조심히 깨웠어요.
짧은 신음을 반복적으로 흘리며 잠에서 깬 탈리안은 질과 황녀를 보고 전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무슨, 무슨 일이에요? 둘이 모여서….”
“그런 건 됐으니, 탈리안? 세수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떤가.”
“아, 음, 알겠지만, 그 전에 둘 다 방에서 나가주세요. 옷을 좀….”
“아아, 그렇지. 편하게 갈아입도록. 지르니트, 먼저 나가 있지.”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가렸는데도 조금 삐져나온 걸 보면, 탈리안의 옷차림은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검은색의 네글리제였어요.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질이나 레나이에게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옷이죠.
이전에 입고 있던 셔츠는 빨래 중인지 모르겠지만 잠옷으로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게 더 적합하기는 하네요.
질이 도서관으로 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흘깃거리며 봤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문제 될 건 없으니 넘어가도록 해요.
탈리안이 평소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는 질이 황녀의 수다에 어울려 주고 있었어요.
“세수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마법으로 하고 왔습니다.”
“호오, 그런 간단한 곳에 쓸 정도로 마나가 넘쳐나니 편리하겠어.”
“…그런 건 됐어요. 질까지 데려와서 하려는 말이 뭔가요.”
자던 사람을 깨웠으니 이렇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어요.
더구나 질을 앞에 세웠다면 억지로라도 살가운 태도를 취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짜증 섞인 표정을 하고 있더라도 황녀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지만 특별한 사정이 없더라도 황녀라면 그럴만한 아량을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넘어가 줬겠죠.
“일단 앉는 게 어때, 조금 길어질 텐데.”
“자던 사람을 붙잡고 길게 할 말이라니….”
“그대, 베리아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지르니트와 말다툼을 했다지?”
황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탈리안은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 말없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라는 것처럼 황녀는 차분히 입을 열어 명령했어요.
[앉아라.]라고요.
“크읏! 이까짓 능력…!”
당연하지만 탈리안은 힘껏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에 황녀는 혀를 찼어요.
질의 표정을 한번 살피고는 탈리안에게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말했어요.
“어디까지 지르니트를 슬프게 할 생각이지?”
“뭘 안다고 그러는 건가요! 저희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다시 명하지, [앉아라.]”
“으윽! 도대체, 무슨…! 무슨 생각인 건가요!”
황녀는 공중으로 퍼져가는 찬란한 금빛의 마나까지 발산하며 탈리안에게 명령했어요.
한번은 벗어났던 능력이지만, 벗어나려는 행동을 반복하면 할수록 금빛의 마나가 탈리안에게는 무거운 족쇄가 되어 몸을 짓눌렀어요.
한 번에 말을 듣지 않는 그 청개구리 같은 모습에 황녀는 또다시….
“거듭해서 명한다. [앉아라.]”
“크윽! 하앗…. 하아…! 아, 아, 알았다고요! 앉을 테니까! 그만 하세요!”
버티다 못한 탈리안은 바닥에 주저앉고 숨을 몰아쉬며 황녀에게 소리쳤어요.
마군주를 명령 세 번만으로 바닥에 무릎 꿇게 하다니, 황녀는 대단하네요.
“…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자아,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먼저 복잡한 이야기는 모두 건너뛰자고.”
“복잡한 이야기라고 하신다면….”
“베리아에 관한 이야기이지, 지금 본인이 제일 중요시 하는 것은 지르니트와 단탈리안 그대의 화해이니까.”
“어떻게 해결해주실 건데요? 솔직히…. 황녀님이 언니랑 제 관계에 대해서는….”
“지르니트, 잠깐 기다려. 본인도 모르게 잊고 있었지만 라피아에게도 한번 말한 적이 있다. 황녀님이 아니라 레나이 언니라고 부르도록.”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네요.
하기야 계약상으로도 황녀가 집으로 이사 온 뒤에는 황녀라는 신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있으니까요.
황녀 자신도 딱딱하게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보여요.
“아, 어어…. 네, 레나이 언, 니….”
레나이는 질의 언니 소리를 듣자마자 ‘음음, 듣기 좋군. 이래야 가족 답지!’라며 감탄하며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레나이의 강압적인 태도에 어쩔 수 없이 한 듯한 모양이지만, 레나이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에요.
“지르니트 그대는 탈리안을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범주를 넘어서 사랑하게 되었다. 맞나? 그렇기에 베리아를 갱생시켜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탈리안에게 사과까지 하게 할 생각이었지. 중요 포인트는 베리아의 갱생도, 사과도 아닌 ‘탈리안을 위해서’라는 부분이고, 맞겠지?”
레나이의 긴 설명에 질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시작은 베리아를 향한 동정심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탈리안을 위해서였다는 것, 유독 이 부분을 또박또박 말하며 강조하는 레나이에요.
“그리고 탈리안, 그대가 화난 이유는 질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베리아를 끝까지 갱생시키겠다는 부분에서 화가 난 거겠지? 솔직히 그대에게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이 정도로밖에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질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제가 베리아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는데도 고집을 부려서 화가 났던 거에요.”
“흠, 그러니까 질이 얼마나 자신을 생각해주든 간에…. 그대에게 공감을 해주지 못해서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것으로 축약해도 되는 건가?”
“…저를 얼마나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성에 차시는 건가요. 제 말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던 탓도 있지만, 베리아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쉬운 상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상대를 갱생시키겠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물론 어느 정도는 질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겠다고 그렇게 말했었지만…. 그거랑 이건 별개에요. 너무 위험, 하아…. 아니에요. 황녀, 당신 먼저 말하세요.”
탈리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길게 설명하면서도 질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숨을 쉬고는 레나이에게 차례를 넘겼어요.
질은 탈리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거든요.
자신이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부터 시작해서, 탈리안에게 공감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거나, 자신을 믿어주지 못하는 탈리안에 대한 원망까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에 젖어, 울기 직전인 질을 보고 나서야 황녀는 빠르게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죠.
“하핫, 속이 좁다니 표현도 참 재밌게 하는군! 마치…. 아니, 되었다. 일단 두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다 알게 되었어. 그러니까, 둘 다 일어서서 따라오도록.”
“네? 어디로….”
“잠자코 따라와. 그대들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부족한 것…?”
질과 탈리안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먼저 탈리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레나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무시할 수 없는 그녀의 능력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서로 화해할 둘도 없을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을 테니까요.
질은 물론이고, 이전에 보인 적 없는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탈리안이라도 화해를 하고 싶은 건 똑같은가 봐요.
하긴, 가족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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