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황녀가 이사온 날
* * *
일주일 뒤, 약간의 대화는 오가지만 싸늘한 한기가 탈리안과 질의 사이를 맴도는 것처럼 둘은 화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그렇다고 질이 베리아를 갱생시키는 것을 포기했냐면 그것도 아니기에, 겨울이 아닌데도 오한이 들 정도로 싸늘한 느낌이 들 정도였죠.
이 차가운 분위기에 라피아는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 의뢰를 두세 개씩 받으며 집에 있기를 거부했어요.
변화가 생긴 것은 오늘 아침에 집 앞에 커다란 마차가 두 대나 도착해있는 것을 질이 발견한 시점이었어요.
“무슨 마차가 이렇게…. 어디서 온, 저, 저기요? 누구세요?”
질은 마차를 살펴보다가 마차에서 내려, 짐을 꺼내놓기 시작하는 사람 중 한 명을 붙잡아 물어봤어요.
그 짐들이 고급스러워 보이게 포장되어있는 것은 둘째 치고, 짐을 옮기는 사람들이 이전에 거점에서 보았던 기사단과 비슷하게 보였거든요.
그러니 질의 입장에서 이 주변에 전쟁이라도 난 것인지, 몬스터의 토벌령이라도 난 것인지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는 것일 테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어요.
완전히 질을 무시하면서 짐들을 빠르게 내려놓고는, 마차가 빈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집의 주인이 어디 있냐고 물을 뿐이었죠.
“집주인…. 탈리안 언니는 지금 2층 서재에 있을 거예요. 네? 불러와 달라구요?”
질은 기사의 부탁에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어요.
그럴 만도 하죠.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탈리안과 화해를 하지 않고 있는데, 스스로 다가가서 말을 건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것이라면 모를까, 불가능할 거예요.
이런 답답한 질의 태도에 기사는 현관문 앞에 서서 크게 외쳤어요.
“계십니까아─!!”
탈리안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밖에 나오기 전까지, 기사는 몇 번이고 외쳤는데요.
아마 독서의 한중간이었던 것 같아요.
탈리안은 기사를 노려보며 물어봤어요.
“…저 짐들은 뭔가요.”
“황녀님이 지내실 방을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황녀가 이사 오는 날이었나 보네요.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수의 짐과 기사들이 찾아온 것도 당연해요.
“황녀…? 아, 오늘이었나…. 따라오세요. 그리고 질, 밖에 있지 마세요. 오늘은 결계를 정비하는 날이라 집 앞이라고 해도 몬스터랑 만날 수도 있으니.”
탈리안은 기사보고 따라오라며 현관문을 크게 열어놓고, 질에게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서는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걱정을 해주는 것을 보면 평소랑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바로 들어갔잖아요.
이대로 화해를 하지 않는다면 더 심해지기만 할 텐데, 질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다면 좋겠네요.
얼마나 질의 처지가 불쌍해 보였으면, 말없이 짐을 옮기던 기사들까지 한 번씩 흘겨보며 눈치를 살피잖아요.
질에게는 탈리안의 모습이 새롭기만 할 거예요.
탈리안과 친해지고 깊어지려는 순간에 베리아로 인해서 멀어지게 되었으니까요.
그 부재의 시간 동안 탈리안과 함께했다면 지금보다 더 다양한 모습을 봐왔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질로서는 쉽게 다가가지 못할 거에요.
지금도 보세요.
집에 들어가도 탈리안과 마주치게 된다면 어색한 분위기가 될 것을 알고 있으니까, 집에 들어가지 않고 벤치에 앉아서 짐을 옮기는 기사들만 구경하고 있어요.
화해는 하고 싶은데, 베리아를 갱생시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려고 하니까 대화를 하더라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거죠.
그렇게 뜬구름만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마차 한 대가 더 도착했어요.
그 마차의 지붕에도, 짐칸에도 수많은 가구가 실려져 있었는데, 질은 마차에서 나오는 황녀에게 더욱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죠.
“오오, 지르니트! 본인이 오는 날이라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인가? 이렇게 기쁠 수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일이 좀 있어서…. 저 죄송한데,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음? 흠,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잡을 수도 없겠군.”
질은 황녀를 피해 문에 열쇠를 꽂고, 공간을 넘어 도망가버렸어요.
이대로 집 주변에 있게 된다면 어떻게든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질 테니까요.
어쩌면 단순하게 황녀에게 탈리안과 말다툼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은 것일 수도 있어요.
황녀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개입해 올 것이 뻔하잖아요.
“탈리안부터 만나보는 게 더 급하지, 어디 얼마나 좋은 방을 준비해뒀는지 보자고!”
그렇게 황녀는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탈리안을 찾기 시작하다 발견한 곳은, 2층의 서재 깊숙한 곳에 있는 탈리안의 방이었어요.
보통 아무렇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너무 쉽게 침입해온 황녀의 모습에 탈리안은 ‘어, 어떻게…?’라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죠.
“하핫, 본인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닌가! 이래 보여도 황녀라고!”
“하아….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탈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가디언을 걸치며 방의 밖으로 향했어요.
그 뒤를 따르는 황녀가 제대로 된 환대도 없냐며 따지듯이 말했지만, 가족이 될 거라면서 환대는 무슨 환대냐고 잔소리를 듣기만 했죠.
생각해본다면 탈리안이 해줄 만한 것들은 다 해준 상태이기는 해요.
질의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도 허락해주고, 같이 지내겠다는 것도 허락해주고, 약속대로 이제는 불법 화폐도 만들어 쓰지 않고 있으니까요.
앞의 두 가지는 확실하지만, 불법 화폐에 관해서는…. 아마도요.
황녀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불법 화폐도 이제는 만들지 않는 거겠죠.
여기에 더해 탈리안이 따로 황녀를 챙겨줄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낸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기야 하겠지만, 탈리안이 언제 그런 사교성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요?
“음, 별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그대의 집 좀 안내해 주었으면 하는데.”
“2층은 작은 도서관과 질, 라피아가 머무는 장소에요. 1층은 부엌과 거실, 화장실이 있고, 뒷문으로는….”
“아니, 아니지! 탈리안 그대가, 직접! 안내해 달라는 말이야.”
“귀찮아…. 뭐 때문에 제가…! 읏?!”
탈리안은 짜증을 못 이기고 황녀에게 대들려고 했지만, 몸을 돌려 황녀를 바라보는 순간에 벽에 몰아 세워졌어요.
키에서 오는 차이가 방금까지는 가볍던 황녀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느껴지도록 했으니 빠져나가려는 것도 할 수 없었죠.
황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이렇게 몰린 상황에서도 탈리안은 비키라고 말하고 빠져나갔을 거예요.
“아직 이사 오기 전이니 본인의 황녀 신분은 변함없다. 탈리안, 그대….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는 거지? 지르니트의 상태도 이상해 보였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확실히, 아직 이사를 마친 것도 아니니 신분은 그대로겠죠.
하지만 탈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부들거리더니 황녀를 노려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제가 인형인가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전부, 전부! 틈만 나면 힘으로 억눌러 못 움직이게 하고!! 저는 인형이 아니에요!!”
그동안의 억울함이 쌓였던 게 이제야 터진 것 같아요.
질과의 사이도 점점 서먹해져 가니 이렇게 되는 것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죠.
탈리안은 마기를 폭발시키며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자마자 마나로 배리어를 만들어 탈리안을 말려보려는 황녀지만….
“잠깐, 진정해! 탈리안!!”
“이런 취급은 진절머리가 난다고요!! 지르니트도, 베리아도!! 황녀 당신까지!!”
더욱 화를 내며 더 강한 마기를 내뿜을 뿐이었어요.
엉망이 되어가는 집을 본 황녀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어요.
“탈리안, [그대에게 명한다! 마기를 거둬!]”
“당신의 명령을 들을…! 이유, 가…? 어, 이게 무슨…?”
황녀의 말에서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지만, 탈리안은 단순한 명령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힘을 무시한 결과로 계속해서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황녀를 자신의 앞에서 치우려던 의지와는 다르게, 마기가 깔끔하게 사라져버렸지만요.
이전에 비할 데 없이, 탈리안은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한 얼굴로 마기가 왜 나오지 않는지 자신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후우…. 이제 좀 진정이 됐나? 아니, 표정을 보면 그건 또 아니군.”
“회, 회로도 정상인데, 어째서!?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이래서 휴가 시간 외에 이 능력을 쓰는 것은 싫었는데 말이야…. 황가의 핏줄만 쓸 수 있는 힘이다. 상대방을 본인의 말에 따르게 할 수 있지.”
분명 탈리안도 황녀에게 어떤 힘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겠지만, 이런 힘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게다가 마군주의 마기마저 억누를 정도로 강력한 힘이라니 더욱 그렇겠죠.
“확실히, 책에서…. 하지만 말에 담긴 힘이라면 대처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요. …좋아요. 진정하죠. 그전에 이 손은 치워주세요.”
“따가워라, 황녀에게 너무 버릇없고 거칠게 대하는 거 아닌가?”
“저는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에요. 인형처럼 다룬 것에 대해서 사과하세요.”
탈리안은 황녀의 손등을 때리고 사과를 요구했어요.
동시에 다시 한번 마기를 짧게 폭발시키더니 집안의 모든 물건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죠.
대화를 나눈 짧은 시간에 황녀의 힘을 풀어버린 것 같은데, 대단하네요.
역시 마군주라는 걸까요.
“그래, 그래. 사과하지. 본인도 이 힘은 쓰기 싫어하니까 말이야.”
“싫어한다고요? 그런 거치곤 상당히 진심을 담아 사용한 것 같았는데요.”
“이렇게 쉽게 흐트러진 집을 청소할 줄 알았다면 말리지 않고 힘으로 제압했겠지. 이성을 잃고 화낸 그대 탓이야.”
“…황녀, 기회만 생긴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형 다루듯이 취급된다고 생각해보세요. 화가 안 날 것 같은가요?”
“본인에게 ‘~라면 어떻겠는가?’라는 가정은 통하지 않아. 황녀이니까.”
“가진 거 많고, 그럴 일 없이 자랐다는 말을 돌려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요.”
탈리안의 말이 상당히 무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속으로 숨기기에는 황녀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었어요.
자신이 이렇게 잘난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르니트와 있었던 일은 언제 말해줄 거지?”
“정말, 귀찮네요…. 기사들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니 따라오세요.”
베리아를 갱생시킬지 말지 고민하는 것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에는 곤란한 장소이기는 해요.
방금 마기를 흩뿌린 일로 기사들이 짐을 옮기다가 당황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으니까요.
더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라면 기사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가야겠죠.
이미 마기를 느낀 기사들이 어떤 소문을 흘리고 다닐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