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베리아의 기억 (4)
* * *
“영혼을 묶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수반하는 일입니다.동화는 물론,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니까요.”
“…저는,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
질은 크리미아와 함께 교회의 개인 병실에 있었어요.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은 것은,혼자 광장에서 소리치던 질을 크리미아가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남들 보기 안 좋으니 크리미아가 억지로 데려온 것이었어요.
“그란스리께 듣게 된 신탁으로는 당신이 베리아를 억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만….”
“역시!없애거나 이기는 게 아닌 거죠?”
“그런 섣부른 판단은 좋지 못합니다.그러니….프로비우스,대화 중이잖아요.그만 만지세요.”
개인 병실인데 크리미아가 대화의 장으로 잡을 곳이라면 프로비우스가 있는 곳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프로비우스는 크리미아의 잔소리에도 굴하지 않고,손이나 볼을 만지작거렸어요.
뻔뻔한 대답까지 더하면서요.
“언니가 그 나이 먹고 피부가 좋은 게 잘못인 거야,난 나쁘지 않다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적어도 새로운 감시인의 눈에 띄지만 않게 해주세요.성녀 후보생이라는 신분을 다시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안 그래도 부주교님께 밉보였는데….”
그렇다고 크리미아가 프로비우스의 손길을 딱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어요.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잔소리 수준에서 그치기만 했으니까요.
질은 그런 둘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만약에요.정말 만약인데,크리미아 씨는 프로비우스 씨가 다른 사람한테 공격당해 죽었어요.복수는 성공적이었지만 무덤에 묻어준 프로비우스 씨의 시체를 누군가가 파헤쳐서 훔쳐간 거예요.그럼,크리미아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베리아의 이야기입니까?그건 저한테 묻는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닙니다.지르니트 씨가 그란스리께 자격을 인정받아 베리아와 영혼을 묶게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 말만 하는지 모르겠어요.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탈리안이 라피아도 흑기사도 반대할 거라 했었죠.
어쩌다 보니 크리미아도 반대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어요.
면전에 대고 베리아를 갱생시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요.
풀이 죽은 질에게 이어서 말을 걸어온 건 묘하게 사이가 좋아 보이던 프로비우스였어요.
“언니가 데려와 놓고 그런 매정한 말은 너무한 거 같은데?그,지르니트랬나?딱 봐도 내가 연장자니까 말 놓는다?네가 말한 예시,나였다면 크리미아 언니를 죽인 녀석도,시체를 훔쳐간 녀석도 잡아 죽일 거야.그리고 새로운 사람이랑 사귀겠지.”
“뭐,뭐라고요?프로비우스 당신!그저께만 해도 제,제 입,입술을 빼앗아갔으면서…!!”
새로운 감시인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말했었으면서,이미 하고 싶은 건 다 마친 상태였네요.
“언니,미안하지만 죽은 사람한테만 매달리고 있으면 종족을 떠나서 살 수가 없어.뭐 그리워하긴 하겠지만,살 사람은 살아야지.죽은 사람한테 묶여있으면 어딘가 잘못되거나,베리아처럼 비틀릴걸?”
“마,맞는 말이긴 합니다만….그래도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자신이 죽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데,기분이 나쁘지 않을 리가요.
죽은 사람에게 묶여있으면 잘못된다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요.
뭐,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적어도 크리미아는 아닌 거예요.
“아니야,언니가 죽는다면 슬퍼하거나 그리워하기도 하겠지만,나는 혼자서 떠난 사람만 그리워할 수 없는 성격이거든.그래도 지금만큼은 언니만이 내 전부인걸!카미라즈에게 당할뻔한 순간에 구해주는 거 보고 사랑에 빠졌다니까!”
어쩐지,급속도로 친해진 계기가 있었네요.
프로비우스가 유독 크리미아에게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었지만,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을 보여주진 않았었으니까요.
보통 위험할 때,두근거리는 걸 느끼고 사람으로 착각한다고들 하는데 그런 게 아닐까요.
눈빛에 사랑이 가득 담긴 것 같은 게 거짓은 아닌 것 같지만요.
하지만 크리미아는 프로비우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나중에는 바뀔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이런 파렴치…!”
“…하아,언니.조용히 하고 침대로 올라와.”
프로비우스의 말에 크리미아의 말이 완전히 멈춰버렸어요.
가만히 질의 눈치를 살피더니 갑작스레 소리치는 크리미아에요.
“읏…!아,아직 지르니트 씨가 여기 있는데…!”
“지르니트,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줄래?”
“아,어,네,네에….”
“아,자,잠깐,지르니트 씨!지금 가시면…!”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질을 보고 열심히 말려보려는 크리미아였지만….
“크리미아,조용히.”
“읏….네….”
크리미아답지 않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질이 방을 나서며 뒤를 한번 확인할 때는 살그머니 침대 위로 올라가서는 한 꺼풀씩 옷을 벗는 크리미아를 볼 수 있었죠.
일순간 호기심이 동했는지,문을 닫는데에 망설이는 질이었지만 프로비우스의 손길에 바로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문을 닫고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던 질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어요.
질이 집에 돌아간 것은 탈리안과 헤어진 뒤로1시간이 지난 뒤였죠.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 전체를 둘러보며 탈리안을 찾던 중에 라피아를 만났어요.
“뭐야,같이 나갔으면서 왜 따로 돌아오는 거야?탈리안은 말도 없이 자기 방에 틀어박히던데.”
“그랬겠죠….언니는 만약에 제가 베리아를 갱생시키겠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질은 혹시나 라피아도 탈리안처럼 메마르고 사나운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고민하는 것처럼 눈치를 보면서 말을 꺼냈어요.
라피아는 그럴 줄 알았다며 장난스레 대답해줬어요.
“딱히 좋은 생각이라고는 못하겠지만,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는 할 것 같네.실패하는 경험도 겪어 봐야지.”
“탈리안 언니랑은 다른 반응이네요.오히려 언니가 말하는 게 더,뭐랄까….매정한 거 같아요.”
“보나 마나 그걸로 탈리안이랑 말싸움이나 했겠지,안 봐도 뻔하다.가서 손 씻고 세수하고 와.이야기나 좀 하자.”
순순히 라피아의 말에 따라 질이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에는 거실 테이블에 수많은 쿠키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어요.
질이 화장실에 있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던 걸 생각해본다면,라피아의 행동이 얼마나 신속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어쩌면 크롬웰에게 입양되고 나서 배운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앉아,베리아에 대해서였지?무슨 일이 있었는데?”
“베리아는 조금 특이한 마기노였어요.다른 마기노처럼 힘을 원하는 마기노도 아니었구요.사는 것에 집착이 없었다고 할까….그러다가 가티아라는 별조,특이한 마기노를 만나요.”
질은 쿠키를 하나 집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처음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가티아가 죽으면서 그녀와 로니아가 나눈 맹세에 대한 것이었어요.
가티아는 질이 미리 설명하려 했던 것처럼 마기노 중에서도 별종에 속하는 마기노였죠.
그녀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어필하는 것처럼 폭력을 싫어했어요.
마기노의 존재의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그런 모순적인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사막에서 죽어가던 로니아를 구했고,자신의 거처까지 옮겨 구해주기까지 했어요.
가티아는 그녀와 비슷한 별종인 로니아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친밀한 관계를 쌓아가려 했고,성공적으로 누구보다도 더 깊은 관계를 이루는 것도 가능했죠.
그 과정에서 로니아가 왜 사막에서 죽어가는지도 본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고요.
가티아는 그런 로니아에게 말했어요.
‘싸움에 질렸다면,네가 정점에 서서 연옥을 바꾸어봐.’라면서요.
초대 베리아와의 최종결전에서 가티아가 큰 상처를 입고 죽어가면서 다시 한번 남긴 이 말이 로니아에게 있어 저주가 될지는 그녀도 몰랐겠지만요.
이후 로니아는 베리아로서 활동하기 전에 가티아에게 무덤을 만들어주는데,아무도 그녀의 안식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베리아의 권능 일부를 함께 담아 묻어주었어요.
“잠깐,잠깐만,여기까지만 들어보면 가티아라는 애가 죽은 것만 빼면 베리아가 엇나갈 이유도 없지 않아?”
“맞아요.가티아만 잃어버렸다면 베리아가 엇나갈 일은 없었을 거예요.둘 다 특이한 마기노였으니까요.그래도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줘요.”
질은 마치 자신이 베리아였던 것처럼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때는 전대 베리아가 죽고 전쟁의 뒤처리가 한창일 때였죠.
차기 베리아가 된 로니아는 가티아의 시신을 묻어주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그 누구도 무덤을 건드리지 못하게 자신의 권능 일부를 가티아의 시신에 담아 묻었어요.
전대 베리아와 싸우며 가티아의 목숨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어야 했던 일에 대해 슬퍼하면서요.
이후에는 가티아의 말을 떠올리고는 다른 마군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매일을 보냈어요.
마군주뿐만 아니라,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마기노의 자잘한 사건에도 개입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죠.
당연히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시도 때도 없이 베리아의 힘을 노리는 다른 마군주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일상이고,마기노마저 일대 다수로 덤벼들어 와서 항상 베리아를 지치게 했었거든요.
이런 일상에 지쳐갈 무렵에,라파르라는 마군주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 거처로 가려는 도중이었어요.
그런데 거처 입구를 누군가가 막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가면까지 써서 누군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베리아는 그저,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일 것이라며 대충 넘겨짚고는 입구를 지나치려 했죠.
설마하니 마군주에게 일대일로 덤벼오는 멍청한 마기노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 설마가,베리아를 잡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요.
“라파르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냐?선약을 잡아놨는데 이렇게 공격하는 건 무슨 의미지?”
베리아의 말에도 가면을 쓴 상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버리는 베리아에게 몇 번이고 달려들 뿐이었죠.
그런데 그 공격 방식에서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 몸의 말에 대답해라!라파르는 어디 있냐고 하지 않느냐!!”
기시감이 드는 와중에도 베리아는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상대에게 반격조차 하지 않았어요.
라파르의 부하를 공격했다가는 관계를 개선하러 왔다는 자신의 목적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신뢰가 전부인 일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당연하겠죠.
아무리 베리아가 새로운 마군주라고 하더라도요.
“아까부터 기묘한 움직임만 보이면서…!라파르 자식은 눈에도 보이지 않고,적당히 하란 말이다!!”
이때의 베리아는 인내심이 좋지 못했는지 마기를 두른 발로 지면을 박차더니 한순간에 주변의 모든 것을 전도시켰어요.
그리고 쓰러진 상대에게 다가가 그 몸 위에 올라타고는 마기로 구속하고,가면으로 손을 뻗었는데요.
“감히 이 몸에게 덤벼온 녀석의 잘난 면상 좀 보실…!까…?”
강한 힘으로 가면을 얼굴에서 뜯어낸 베리아는 손에서 가면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가면이 벗겨지자마자 드러난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잊을 수 없는 가티아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묻어준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어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동자와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어 보이는 죽어있는 표정.
금기되는 마법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었어요.
누군가가 가티아의 몸을 되살려 멋대로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요.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충격에 빠져있는 베리아에게 말을 건네오는 것은 웨이브 진 보랏빛 머리의 여자였어요.
거처의 성벽 위에서 베리아를 내려다보며,어린아이 대하듯이 물어보는 것이 보는 이들 전부를 화나게 하는 태도였어요.
그럼에도 베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한 목소리로 여자를 보고 말했어요.
아까는 인내심이 좋지 못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취소해야겠네요.
“…라파르,네 녀석 짓이냐.”
“네가 알기 쉽게 권능을 시체와 함께 묻어둔 덕분이지.이 연옥에서 인연을 맺는다는 건….정말 부주의하고 멍청한,의미 없는 짓이라는 거 너도 알잖아?너는 마군주가 되기 전부터 약점을 달고 다닌 거야!”
사실,베리아도 무덤을 만들어준다는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어요.
마군주끼리의 경쟁은 심하니까,그동안 자신이 연옥의 모습을 바꾸려고 노력할 동안 누군가의 간섭이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 권능의 일부를 담아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일 테고요.
하지만,그 결과는 어땠나요?
로니아가 오랜 시간 연옥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라파르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로니아의 힘을 빼앗기 위해 계획을 짜고 지금,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동안 연옥을 바꾸기 위해 해오던 노력이 배신당한 거죠.
얼마나 부질없던 짓이었는지 증명 당하는 순간인 거에요.
“그래,멍청했지….네놈들을 갱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게 아니었다.가티아에게는 미안하지만,그녀가 틀렸다.”
라파르는 베리아를 조롱하며 소리쳤지만,베리아는 여전히 침착한 기분을 유지하고 있어요.
“갱생?푸훗,아하하!네년은 마기노가 아니라 광대였나?!웃기지 마,신이라 불리는 부모조차 공격한 패륜적인 종족이 우리인데.겨우 네까짓 게 뭐라고?”
“알고 있었다.모른 척을 했을 뿐이지.그저 이 몸에게도 너희에게도 실망했을 뿐이다.너희에게는 갱생조차 사치일 뿐.”
“너무 허물없이 다가오는 거 아니야?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이 몸은,가티아를 욕보이는 네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지금도 이렇게,뒤에서 가티아를 이용해 기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회피한 베리아는 가티아가 내지르는 검을 맨손으로 잡아 부러뜨렸어요.
분명 허점을 보고 공격하라고 지시한 것일 텐데,기예에 가까운 회피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라파르였어요.
“그 정도는 해야 마군주답지!네년 머릿속의 썩어빠진 꽃밭을 짓밟아줄게!끝에는 처참하게 쓰러진 네년의 이름을 빼앗아줄 테니 기대하라고!”
라파르가 덤벼드는 걸 시작으로 격렬한 싸움이 시작됐어요
가티아와 협공하며 베리아를 몰아붙이려는 생각이었겠지만,전세는 나아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절묘하게 공격이 급소에 닿으려 하면 신기루처럼 베리아의 몸이 투명해지더니,눈치채면 라파르의 뒤에서 나타나 기습을 걸어왔거든요.
상대하고 있는 모든 베리아가 환상,신기루처럼 느껴지지만,그렇다고 기습을 걸어오는 베리아를 무시했다가는 큰 상처를 입을 것이 뻔한 상황이었어요.
라파르가 훔친 베리아의 권능 일부도 같이 썼지만,본래 자신의 기술을 아는 베리아에게 있어서는 절대 통하지 않을 공격 방법이었죠.
“연옥의 본질을 잊고 있던 이 몸에게 깨달음을 주어서 고맙구나,그러니 이 몸이 직접 그 명줄을 끊어주마!”
“사기 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년이…!이 공간은 내 거야!!네년 따위가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수적으로는 분명 우위에 있을 텐데도,실력에서 차이가 나기에 조바심이 난 라파르는 이름의 힘까지 써가며 베리아를 상대하기 시작했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베리아의 움직임이 둔해진 거예요.
“그렇게 발악해도 상관없다.결국에는 이 몸 앞에 무릎 꿇을 테니.”
“하!이름이 없을 때부터 그렇게 잘나길 바랐다면 친구까지 잃어가면서 힘을 얻는 게 맞지!”
“…이 몸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자신에게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베리아는 재차 라파르에게 되물었어요.
사실 되물을 필요도 없이 베리아를 뜻하는 말이겠지만요.
“아~맞다,네가 그랬었지?나는 그런 적이 없어서 몰랐는걸?미안하네!!”
“처음부터 가진 게 없어서 다른 사람의 시체까지 훔치고 다니는 버러지 같은 년보다는 이 몸이 몇 배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만.”
“뭐,뭐라고…?말 다 했어?!가티아!저년을 어서 죽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누구 맘대로 가티아를 부르는 것이냐!!”
홧김에 베리아는 전력으로 라파르를 찢어발기기 위해 날카로운 마기를 쏘아 보냈지만….
그 공격은 라파르에게 닿기는커녕,가티아의 몸에 닿았어요.
라파르가 옆에서 베리아를 공격하려던 가티아의 목덜미를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왔기 때문이에요.
흔히 말하는 화살받이처럼 쓴 것이죠.
덕분에 베리아의 마기가 가티아의 복부를 시원하게 구멍 내버린 거예요.
“이,이!네 녀석이!!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이후의 일은 당연하지만,이성을 잃어버린 베리아의 압도적인 승리였어요.
라파르는 손톱만큼의 권능만 남은 마군주가 되어버려,다른 마기노들에게 사냥당했으며,가티아의 시신은 베리아가 불태워버렸어요.
그리고는 몇몇 강한 마군주들과 함께 베리아의 철권통치가 이루어질 뿐이었죠.
약한 마군주는 살아남기 위해 모습을 숨기고 힘을 기르는데 급급했고,강한 마군주는 베리아와 다른 마군주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아슬한 동맹을 이어갔을 뿐이에요.
그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베리아의 성격은 날이 가면 갈수록 별종에서 평범으로 바뀌게 되었겠죠.
물론,마기노의 평범은 파괴와 폭력이니,질의 세계에 있는 평범과는 다르겠지만요.
“그러니까 뭐….노력이 배신당해서 꼭지가 돌았다….라는 말이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게 맞는데요….언니는 말 좀 이쁘게 하면 안 돼요?”
“아,어,전생이 있었다는 걸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서는….전생의 버릇이 좀 나와서 그래.어쨌든 이야기는 대충 들었는데,그게 베리아가 한 짓을 용서할 수단이 될 수는 없다고 봐.탈리안에게 한 짓은 둘째치고,노예상으로 이루어진 세력을 만들어내서 최근에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나왔는지부터 생각해본다면 더 그렇지.얼마나 세력이 크면 아직도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다니까.”
아무리 친한 누군가를 잃었다고 하더라도 베리아가 한 짓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악인이 할만한 짓이에요.
악인으로 불려도 마땅하죠.
이는 질도 이해하는 듯했지만,아무래도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하지만….연옥과는 다르게 아직 이 세계는 희망이 있다고 알려준다면,그렇다면 마음을 돌리는 것도 가능할 거에요.그다음에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그런다면….”
“질,너도 이미 속으로는 알고 있잖아.네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베리아를 변호하는 게 동화의 영향이라는 걸.”
“…어쩔 수 없잖아요.거부하고 싶어도 로니아의 감정이,기억이 스며들어오는데….가티아도 로니아가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라지 않을 거예요.”
“질,가티아도 베리아도 너와 이어졌던 인연들이 아니야.과감히 잘라낼 건 잘라낼 줄 알아야 해.뭐,노력해봐.나는 그렇게 심하게 당한 것도 아니니 막지는 않을 거야.기껏해야 전생의 기억을 몇 번 들춰진 것뿐이니까.”
라피아는 의외로 질의 생각에 크게 반대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반대하더라도, ‘네가 실패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했었으니까요.
뚜렷한 방향을 제시해주었음에도 질은 한동안 대답하길 주저하다가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어요.
“…고민,해볼게요.”
“네 말대로 베리아가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하지만 그게 정말 쉬운 일일까?그다음에는?슬리브스터를 만든 죄는 씻을 수 없어.운이 좋아 네가 베리아를 갱생시켰다고 치자,곧바로 황궁에 불려가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야.뭐….일은 항상 최악을 가정해야 최악을 면할 수 있어서 말은 이렇게 말했지만,열심히 고민해봐,난 너를 응원할 테니까.”
라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질에게 다가가서 안아줬어요.
응원해준다는 말에 그나마 인상을 핀 질이지만,그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불만인 표정을 하고 있었죠.
품에서 놓아줄 때 그 얼굴을 본 라피아는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답이라는 듯,가볍게 입맞춤을 해주고는 다시 한번 안아줬어요.
원래라면 탈리안이 해줬어야 할 일인데 주제도 주제이고,말다툼을 했으니 어쩔 수 없죠.
“가티아를 잃어버린 건 베리아지,네가 아니야.탈리안이랑 말싸움 한 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말고,잠 안 오면 내 방으로 와.재워줄게.”
“그! 그것도 고민해 볼게요….”
“푸후흐,오늘 안 오면 다음에 잡아먹는다?”
“최,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약간은 부족하지만,대답을 받아낸 라피아는 테이블에 준비해둔 쿠키들과 차를 정리하고 방에 들어갔어요.
라피아가 완전히 방에 들어간 걸 확인한 뒤,혼자 남은 질은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버렸죠.
베리아의 일로 머리가 아플 테니 어쩔 수 없겠지만요.
아마 질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벅찬 일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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