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베리아의 기억 (3)
* * *
“언니, 저는 언니가 영혼을 묶는 걸 반대할 줄 알았어요,”
집에 돌아가는 도중, 질이 탈리안에게 넌지시 던진 말이에요.
확실히 탈리안이 질이 하는 모든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지만, 이번 일은 너무 쉽게 흘러간 느낌이 있죠.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에요.
질이 베리아와 동화되어 베리아에게 완전히 잡아먹혔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저는 질이 마기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었어요.”
“제가 그렇게 믿음직하지 못했던 거에요?”
탈리안의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잘 걷다가, 그 앞에 서서 길을 막는 질이에요.
“설마요. 단지…. 옆에서 질이 얼마나,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지켜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지만 마기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걸 듣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그럼 그 전까지는 못 믿었다는 거 아니에요?”
“질,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저 질을 잃을까 봐 걱정했던 거라고요. 그리고 이번에도 무사히 베리아와 영혼과 영혼을 서로 묶게 된 걸 보고…. 조금 회의적인 느낌도 들었어요. 질에게는 이제 저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 때문에.”
이제 질의 실력이라면 어디 가서 무의미하게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탈리안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어요.
질을 구해주게 된 이유가 무사히,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했었던 것이었으니까요.
다만, 의뢰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게 된 지금의 질이라면 탈리안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아요.
굳이 부모의 역할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 거죠.
하지만 탈리안이 한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지금의 저는 언니의 보호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언니가 필요한 거라구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질은 탈리안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보호가 아니라 탈리안을 필요로 한다는 거였죠.
정면에서 시선을 맞춰오며 말하는 질을 본 탈리안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질도 정말, 많이 바뀐 거 알아요? …가끔 낯설어요.”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어도 언니한테는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것 같은걸요.”
그동안 질이 참아온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죠.
하지만 무슨 자신감으로 질이 이렇게 말하는지 탈리안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그렇기에 탈리안은 아예 엉뚱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만으로 괜찮은 건가요…? 저는 아직도 망설여져요. 제가, 질의 옆에 있어도 될지….”
“저는 언니하고 정말, 정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라피아 언니처럼 육체의 대화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가족처럼 옆에 있어 달라기만 하잖아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알았어요. 더는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그렇지만 육체의 대화라니, 질….”
“…아.”
대화를 잘 이끌어가나 했는데, 질이 한가지 실수를 했네요.
당연히 이를 놓칠 탈리안이 아니죠.
육체의 대화라니 주변에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지, 단어 선택이 절망적이에요.
“그, 그러고 보니까요?! 베리아의 기억을 봤는데!!”
질이 급하게 고른 대화주제가 베리아의 기억을 들여다봤다는 거였어요.
분명히 탈리안과 베리아가 닮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겠죠.
탈리안의 도움을 받는다면 베리아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리는 일은 더 쉬워질 테니까요.
하지만 쉽게 도움을 줄지는 모를 일이에요.
그야, 베리아인걸요.
탈리안에게 있어서는 부모의 원수보다 더한 미운 상대에요.
거기다 베리아가 이 세계에 넘어오면서 재앙을 만들고, 슬리브스터를 만들기도 했죠.
슬리브스터가 노예를 사고파는 짓을 하게 만들었던 것을 보면 이보다 나쁜 짓을 한 사람, 아니 마기노도 없을 거예요.
“질! 대화 주제 돌리지 마세요!!”
“베리아도 언니랑 비슷하던데요?! 마군주 되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마기노였더라구요!”
“…그래서요?”
질과 대화 중인데도 시선조차 주지 않는 뻔하디뻔한 차가운 반응이에요.
그래도 대화 주제를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점에서 위기는 넘겼네요.
대신에 다른 위기가 찾아온 것 같지만요.
“개, 갱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오….”
“베리아는 갱생하지 못해요. 하면 안 돼요. 만약에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고요. 알겠어요?”
너무나도 철벽같은 모습에 질은 주춤하는 것 같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조금 더 강단 있는 눈빛으로 베리아를 변호하기 시작했어요.
탈리안을 한번 뺏어가며, 탈리안을 자신과 떨어트려 놓게 만든 주범인데도요.
단 한번의 동화에 너무 많은 기억을 들여다 봐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요.
베리아가 변해버린 사정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언니, 기억 속의 베리아는 마기노였지만 마기노답지 않은, 평범한 사람 같았어요.”
“질, 질이 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에요. 그녀는 씻어낼 수 없는 죄를 지었어요.”
“그렇다고 베리아를 죽이자고, 없애자는 거에요? 잘못을 했다면 제대로 반성하고, 죗값을 치르게 해야죠! 언니를 위해서라도…!”
질이 하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탈리안이 하는 말도 틀리지 않았어요.
감정에 호소하자면 오히려 탈리안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릴 거에요.
그런데도 좀처럼 대화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은 탈리안이 질을 아껴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대화를 그만두고 싶지만, 질의 기분을 해치기 싫어서, 관계를 망치기 싫어서요.
하지만 아무리 질이 하는 말이라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질은 탈리안이 자신에게 소리 지르는 모습을 처음 보고 충격받은 거 같아요.
베리아에게 무슨 짓을 당했든 탈리안만이 알고 있잖아요.
그렇기에 부탁했을 거예요.
베리아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다른 마군주들….
예를 들어 탈리안이나 아비고르처럼 이 세계에 도움이 되도록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 속에는 질이 베리아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숨어있겠지만요.
기억 속에서 무엇을 봤든, 질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건 질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에요.
피해자인 탈리안의 입장에서는 이미 말했지만, 용서하기 싫은 거예요.
용서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할 이유도 없고요.
“기억과 감정을 읽어서 편들어주고 싶은 것은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질. 저는 안돼요. 라피아도 반대할 거에요. 세르디어도 반대할 거고요. 모두가 반대할 일이에요.”
“언니가 뭘 당했는지, 베리아의 기억을 봐서 알아요. 아팠잖아요. 힘들었잖아요. 알아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질이 베리아의 기억을 경험해봤다면, 탈리안이 잡혀있을 때의 기억도 봤을 거예요.
그렇다면, 질도 나름대로 진심이라는 뜻이겠네요.
탈리안이 그걸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다면 질이 베리아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제가 베리아에게 당했던 것들을 알고 있다면…!”
“베리아보다 언니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베리아가 제대로 반성해서 언니한테 사과했으면 했던 건데…, …힘들었잖아요. 알아요. 그러니까 저는 언니를 위해서라도 베리아를 갱생시키고 싶은 거예요.”
질은 탈리안이 말을 계속 이어가는 걸 보다못해 먼저 다가가 꽉 끌어안았어요.
품 안에 적당히 꽉 차는 느낌으로 들어온 탈리안은 질의 속마음을 듣고서야 조금 진정한 모습을 보였어요.
“…질의 마음은 충분히 고마워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베리아에게 사과받기 싫어요. 그 마음의 시작이 뭐였는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끝만 좋으면 전부인 게 아니에요, 질.”
“분명 시작은 베리아가 안쓰러워서 그랬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언니만을 위해서예요!”
“그만 해요. …그만 돌아가요. 시간이 늦었어요.”
아무래도 질이 탈리안을 설득하는 건, 물 건너간 것 같아요.
탈리안이 억지로 질의 품에서 빠져나와 근처 건물의 문에 다가가 집과 연결하고는 먼저 건너 가버렸어요.
어지간하면 탈리아는 질과 걸음을 맞춰 걷는 게 보통인데,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연결한 문을 끊어두지도 않았죠.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어요.
질도 그걸 알아서 먼저 가버리는 탈리안을 붙잡지도, 매정한 탈리안에게 투덜대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질의 목 뒷부분에서 새빨간 마기가 새어 나오더니 귓가 주변에 덩어리져서는….
“거하게 실패했구나, 네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니 실패할 수밖에 없지. 차라리 탈리안 모르게 했다면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것을.”
언제 이런 능력까지 쓸 수 있게 되었는지 몰라도, 베리아는 질의 행동에 안타까운 심정을 표했어요.
비웃는 것 같은 억양에 질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무시하려 했지만….
“…시끄러워요.”
“뭐, 그랬더라도 이 몸이 탈리안에게 사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거절당하는 것이 네 녀석한테도 좋은 일일 테지.”
그럼 그렇죠.
베리아에게도 동화로 인해서 영향이 갔다고는 하지만 쉽게 생각을 바꿀 위인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거예요.
그저 베리아의 편을 들어주고, 탈리안을 생각해서 말을 꺼낸 질만 불쌍하게 됐어요.
“시끄럽다구요!”
“참으로 무섭구나. …그러니 네 녀석도 괜한 고생 하지 말거라. 네 녀석 하나로 몇 명이 피곤해질지 모른다.”
“그런 기억을 보여줘 놓고 모른 척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요!”
“이미 이 몸은 가티아에 대한 감정을 모두 죽였다.”
“거짓말…. 라파르에게 가티아의 시신과 힘을 빼앗겼을 때도…! 로니아!! 이럴 때만 도망치지 마요!! 로니아!!”
질이 말을 이어가는 도중에 마기는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져버렸어요.
질은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베리아를 불렀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죠.
허공에다 대고 사람을 부르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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