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베리아의 기억 (2)
* * *
다음날, 질은 교회의 어느 지하의 마법진 안에 있었어요.
이곳에는 질 이외에도 탈리안과 부주교 막스, 크리미아, 그리고 보조를 위한 몇몇 성직자가 있어요.
부주교는 책을 들고, 마법진의 경계 밖에 서서 질에게 주의점을 말해주고 있었죠.
“지르니트 양, 여기까지 오면서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영혼을 묶는 사이에 베리아와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세요. 잊으시면 안 됩니다. 기억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할 수 있고, 힘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주교님은 이런 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저, 여러 가지 책을 읽어봐서 알고 있는데…. 영혼을 건드는 건 금기 아니에요?”
질의 마을이 실험장이었다고 했었죠.
그렇다면 질의 마을에 이상할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가 담긴 책들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여러 가지 실험을 위해서라면 참고해야 할 것이 많을 테니까요.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사용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그란스리 중 한 명인 케텐님에게도 허락을 받았습니다.”
“신님하고 대화도 할 수 있었어요?! 대단하다!”
“주교급은 전부 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답해주실지 말지는 그분들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일방적인 소통이지만, 신이나 되는 존재라면 그렇게 하고도 욕먹을 일은 없겠죠.
기껏해야 이단이 될 테고, 이단은 자신의 신자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요.
정말로 편한 일이에요.
“그래서 지르니트 양은 베리아의 것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착각하게 된다면 베리아라는 존재에게 잡아먹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베리아한테서도 지겹게 들었던 이야기에요. 왜 이야기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습니다. 단탈리안, 혹시 모르니 마법식의 세세한 조율을 부탁드립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탈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시작으로 부주교는 마법진에 신성력을 불어넣었어요.
주변의 사제들도 그 신호에 맞춰 부주교를 돕는데, 어둡고 칙칙하던 지하가 황금빛으로 가득 차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없던 신앙심마저 생길 거에요.
“와, 뭔가 따뜻한 기분…. 불의 마나보다 조금 더, 조금….”
“말 그대로 성스럽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포근하고 상쾌하면서도, 그 외에도 많은 것이 느껴지는 복합적인 느낌이지요.”
“응…. 맞아요….”
질은 부주교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서서 졸기는 힘들었는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거예요.
“졸리면 한숨 자고 일어나도 됩니다. 현실에서 착각하나, 심상 세계에서 착각하나 똑같으니까요.”
부주교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막말하네요.
탈리안의 따가운 눈총에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보면 부주교도 꽤 대단한 강심장이에요.
그런데 신성력과 상성이 좋은 것인지, 질은 옆으로 누워 잠에 빠져버렸어요.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잠드는 걸 보면 역시 황궁에서 만들어낸 임페리얼 가디언이에요.
약간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전투 중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언제 어디서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잠들 수 있는 굉장한 능력인 것 같아요.
능력이야 어찌 되었든 질이 느낄 베리아의 기억을 함께 보기로 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질은 잠들었다고 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기에는 심상 세계에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였으니까요.
평소처럼 베리아가 맞이하러 나와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두리번거렸어요.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새까맣고, 아무것도 없던 칙칙한 공간에서 그나마 사람 사는 곳처럼 바뀌었다는 것이에요.
마치 작은 오두막집 속에 들어온 것처럼요.
질이 살게 된 탈리안의 집과 같은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나면서도, 완전히 처음 보는 구조의 집이에요.
신기한 마음에 질은 여러 가구를 만져보며 딱 봐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어요.
현관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적갈색 빛.
마치 자신을 열어달라는 말을 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돌렸어요.
창문이라고는 전부 커튼에 막혀있던 오두막에 있어서 바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에서야 확인한 바깥 풍경은 무미건조할 뿐인 사막이에요.
문을 열자마자 불어오는 건조한 모래바람, 평소에 보던 것과는 다른 회색빛의 모래알, 알 수 없는 색의 물감을 뒤섞어놓은 듯한 하늘까지.
저 멀리 보이는 바위로 이루어진 건축물,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 빛을 비추는 달조차 빨갛게 보였어요.
이런 삭막한 곳이 어디인지 질은 이미 눈치챈 것 같아요.
“…연옥, 지긋지긋한 곳.”
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타인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내뱉은 느낌이었어요.
말투나 억양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거든요.
그러는 와중에도 질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천천히 오두막을 떠나 사막을 걷기 시작했어요.
한번, 두 번 걸음을 옮기면서도 떠난 오두막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질 스스로도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죠.
한참을 걷고 또 걸었어요.
그렇게 오래 걸어도 다리는 아파져 오지 않았고,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품지 않았어요.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걷기만 할 뿐이었어요.
걷다가, 걷다가, 또 걷고, 걷기만 하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도 없지만, 질도 이곳에서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질이 원해서 걷는 게 아니었어요.
발이 멋대로 움직이기에 걷는 것이었을 뿐이죠.
그러다 어느 순간, 질은 모래밭 위에 쓰러졌어요.
단 한 번의 징조도 없이 풀썩, 하고요.
저 모래 언덕 너머로 무언가가 보이긴 하지만, 일어나고 싶어도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차지한 것처럼요.
마치 베리아가 주도권을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봐, 이런 데서 잠들면 큰일 난다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질은 눈동자를 움직여 위를 쳐다봤어요.
그곳에는 허리를 반쯤 숙인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기노가 있었어요.
분명 질이 알던 달걀처럼 생긴 검은색의 얼굴을 가진 개체는 아니지만, 질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어요.
그녀는 마기노라고.
“…가진 것도 없는데,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
쉰 목소리로 대답하는 질이에요.
이 역시 질이 하고 싶어서 한 대답이 아니라, 의도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이었어요.
대답할 생각조차 없었거든요.
“어, 어이! 뭐 하는 거야! 안 내려놔?!”
“이런 데서 자면 큰일 난다니까? 사람 말 좀 들어.”
그녀는 분명 마기노가 맞아요.
그런데 살육과 파괴를 즐기기는커녕, 남을 걱정하는 다정한 말투며 내버려 두라고 해도 억지로 안아 들어서 구해주는 오지랖까지.
마기노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아아, 알겠다. 이대로 데려가서 잡아먹으려는 거지. …힘을 원하는 녀석들이 대개 그렇지, 남에게 먹이를 빼앗기는 것만큼 최악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 죽는 것도….”
질은 투덜거리면서도 속마음 한구석에서는 약간의 공포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가식적이게도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 뒤로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 감정을 제외하고는…. 이곳이 어디이든, 자신이 누구이든, 무슨 말을 하고 있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질에게는 전부 소용없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어요.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를 관두고, 움직이는 것도 관두었으며, 그저 가만히 눈을 감아, 그가 이동하는 곳으로 옮겨질 뿐이었죠.
“어이, 그사이에 죽은 건 아니지?”
“네가 죽일 거라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을 듣고는 엉뚱한 말을 내뱉는 질이에요.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리자마자 부유감이 들더니 약간의 충격과 함께 푹신한 촉감이 엉덩이 부근에 들기 시작했어요.
“그건 도대체 어디서 굴러다니던 개떡 같은 논리야? 눈이나 떠.”
“여긴…. 보나 마나 도살장에나 끌려갈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이지?”
눈을 떠보니 질은 웬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어요.
뼈대는 나무로 이루어져, 거기다가 몇 겹의 천을 올려다 놓았을 뿐인 허접스러운 침대였지만요.
그래도 지금까지 걸어온 사막에 비하면 이 정도도 충분히 사치스러운 편에 속하는 편이에요.
“나는 그렇게 야만적인 짓은 하지 않아.”
“야만적인 짓?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마기노로서의 본능을 야만적이라고 말하면서 거부를 한다고?”
질도 놀라며 말 할 만큼, 그 마기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꽤 충격적이었어요.
질이 알고 있는 마기노라면 파괴를 일삼는 괴물에 불과했을 텐데요.
그렇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본능이 별거냐, 그 정도도 참지 못하고 날뛰는 것들이 비정상인 거야.’라며 다른 마기노를 흉보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그녀는 어딘가 잘못된 돌연변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덕분에 질의 메말랐던 감정에 약간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다행이지만요.
이 마기노가 도대체 누구길래.
“너, 이름은?”
“…마기노한테 이름 따위가 어디 있다고, 왜 구해준 거야.”
“내가 별종이라서, 자.”
“미친년….”
질은 작게 욕하면서도 그녀가 건네주는 걸쭉한 수프를 받아 들었어요.
그런데 수프를 한 숟갈 떠먹으려는 순간에 갑자기 녹아내리듯 주변 풍경이 바뀌며, 수많은 건축물 사이의 골목길로 바뀌었어요.
그런 좁은 길을 질과 질을 구해준 그녀가 뛰어다니고 있었죠.
비릿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에 곰팡이 냄새, 벽에는 알 수 없는 낙서까지 그려져 있으니, 이런 길로 뛰어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가령 누군가로부터 추격을 당하고 있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에요.
“내가 다음부터 널 믿으면 마기노가 아니다! 짐승만도 못한 벌레가 되겠어!!”
“너무한걸, 로니아! 그래도 이렇게 질 좋은 마수정을 얻었잖아?”
질은 그녀로부터 로니아라고 불렸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어딘가 짜증이 나고, 정감이 가면서, 싫지만은 않은 이름이었죠.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질을 구해준 그녀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기억이었어요.
‘이름이 없으면 불편하잖아? 마군주만 이름을 가진다니 불공평하잖아, 로니아. 로니아 어때?’
‘로니아…. 촌스러운 이름 같은데.’
‘촌스럽다니! 내 강아지의 이름이었다고!’
‘뭐 이년아?! 지금 나를 개 취급하겠다는 거냐?!’
‘그런 거 아니야, 어쨌든! 나는 가티아라는 이름이 있으니 그렇게 불러!’
질은 달리는 도중에 떠오른 짧은 대화에 작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억울함을 담은 고함을 치는건 또 잊지 않았죠.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절연했어!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녀의 손에는 마기가 우글거리며 갇혀있는 머리만 한 크기의 보석이 들려있었어요.
계속해서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마기를 자신의 마기로 억누르는 그녀예요.
그리고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려고 할 때, 어느샌가 그녀와 함께 싸우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어요.
매캐한 연기가 흩날리고, 주변에 쓰러져있는 다른 마기노, 비릿한 피의 냄새를 쫓아보면 정면의 그녀가 피투성이인 채로 서 있어요.
질도 상처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이렇게 처참한 몰골로 싸우고 있는 상대는 누가 보더라도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녀였죠.
질과 그녀 이외에도 서로 싸우는 마기노가 많았어요.
모두가 뒤섞여 싸우는 이 전장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는데, 마기노의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빛을 띠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그 여자는 전장을 훑어보다가도 가소롭다는 듯이 질을 내려다보면서 비웃었어요.
“쿠후후, 그까짓 힘으로 이 베리아에게 이기려고 한 것이냐?”
“닥쳐!! 반드시 네 녀석의 이름을 빼앗아주마!!”
“네년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 년부터 상대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
질은 못할 것 같냐며 베리아라는 마군주에게 소리치며 그녀와 싸우기 시작했어요.
쉴 틈 없는 공방전이 오가면서도 질은 일부러 그녀의 급소만을 피해 공격했어요.
반면에 그녀는 질의 급소만을 노려왔기에 피하는 데에 있어서 전력을 다해야 했죠.
질이 위협적인 공격과 함께 한 발을 내디뎌도 그녀는 물러설 생각 없이 다가와 마기를 두른 손을 내질렀어요.
실력만 따지자면 질이 우위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 번쯤 겪어본 적이 있는 베리아라는 인물의 능력 덕분에 그녀를 상대하는 동안 핸디캡을 달고 있는 것과 같았어요.
그리고 싸움 도중에 생각에 빠진듯한 질에게 들어오는 치명적인 일격이 들어오는 순간, 다시 주변 풍경이 녹아내리듯 바뀌었어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녀와 소중한 사람을 잃어보고, 질리지도 않고 싸움을 걸어오는 녀석들과 싸워 이기고, 한계가 없다시피 기억과 감정의 격류가 이어지던 끝에 나타난 것은 처음과 같은 오두막집의 소파에 앉아있는 베리아였어요.
힘과 싸우는 것밖에 없는 기억에 질은 쉽게 베리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게 답답했는지, 베리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죠.
“놀랍구나, 동화되기는커녕 이 몸을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괜찮다, 이 몸도 네 녀석의 인생과 감정까지 전부 훔쳐보았으니 이번은 넘어가 주마.”
베리아는 질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에 놀라며 칭찬을 했어요.
평소라면 베리아가 해주는 칭찬은 필요 없다면서 투덜거렸을 질이었겠지만, 지금의 질은 그저 베리아를 촉촉한 눈가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에요.
“베…. 로니아. 당신은…. 반밖에 안 되는 일부만 지켜봤는데도 어떻게 이런…. 가티아 씨를 잃고 나서도….”
가티아라는 이름이 질에 입에서 나왔다면, 분명 베리아를 구해주었던 그녀일 거예요.
그녀 외에는 질이 특별히 기억할만한 인물은 기억 속에 없었으니까요.
“이 몸이 살아온 인생이 그렇게 안쓰러운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픈 이야기인가? 가엾다 못해, 눈뜨고 지켜보기 힘이 들더냐? 신경 쓸 것 없다. 그녀는 고작 몇 천 년 전의 인연일 뿐이다.”
보통이라면 베리아가 이쯤에서 화를 냈을 텐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대답하고 있어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요.
“당신도 탈리안 언니랑 다를 게 없잖아요. 소중한 사람이 있었잖아요. 잃어버린 것도 똑같잖아요. 탈리안 언니처럼 바로잡을 기회도 있었잖아요. 왜 이렇게 비뚤어진 거예요?”
“탈리안도 이 몸과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마, 탈리안의 소중한 것을 상대할 때는 잠깐이나마 가티아를 떠올리기도 했었으니. 질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지르니트는 가티아를 떠올렸었다는 베리아의 말에 따지듯이 소리쳤어요.
왜 가티아를 생각하면서도 나쁜 짓을 했냐면서요.
이런 질의 모습에 베리아는 코웃음을 쳤어요.
“직접 느껴봐서 알지 않느냐. 연옥은 힘만이 전부, 부모도 친구도 사랑하는 이도 모두 힘이라는 것에 빼앗겼다. 그래서 이 몸도 똑같이 빼앗아 준 것일 뿐이지. 연옥이란 그런 곳이다. 연옥에서는 모든 게 힘 앞에서 무의미하다. 그걸 깨달았을 뿐.”
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옥의 환경이 나빴기 때문에 베리아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성격이 변한 건 좋지 못하다고 말하려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곧바로 끼어들려고 했지만, 쉽게 틈을 내어주지 않았어요.
“찰나였지만 지르니트, 이 몸이 네 녀석처럼 올바르고 풍부한 감정을 품었던 적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기나긴 시간에 이미 마모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본능에 충실한 것 외에 이 몸에게 남아있는 건 없다.”
무엇보다 질이 끼어들기에도 어려웠던 이유 중에는 베리아의 표정이 정말 가티아를 잊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질이 느꼈던 베리아의 기억과 감정이 거짓은 아니었기에 포기하지도 않았죠.
베리아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가능성이 있었다면, 질은 베리아를 원래대로 돌려놓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말투가 조금은 험하고, 욕을 하지만, 그래도 가티아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그녀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퍼하기도 하던 그런 로니아로요.
싸웠던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연옥 때문이니까, 연옥이 아닌 여기서라면 베리아는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본능에 충실할 뿐이라면, 아직…. 아직 가티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숨겨두었다는 말이잖아요. 저, 알아요. 당신이 아직도 가티아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
“이 몸의 말을 무엇으로 들은 것이냐, 아니면 기억과 감정의 동화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느냐?”
“베리아 씨가 가티아를 아직 못 잊고 있다는 건…! 으큭?!”
베리아는 질의 말을 끊기 위해 마기 덩어리를 쏘아내서는 벽으로 날려버렸어요.
벽에 처박히고 바닥에 쓰러진 질을 보고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가 밖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어요.
“뭐, 네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 가정하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이제는 가티아를 만날 수도, 되살릴 수도 없다.”
“마기노는…! 마기노는 탐욕과 오만의 종족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질은 힘겹게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며 말했어요.
탐욕과 오만의 종족, 베리아 스스로가 그렇게 소개했었죠.
마기노를 창조한 신에게 반기를 들어 공격하기도 했던 배덕적인 모습을 떠올려 보면, 베리아가 가티아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가리지 않고 어떤 짓이라도 하는 게 맞아요.
“그 말대로, 거기에 더해 이 몸은 시기와 질투, 거짓과 교만, 또 이간을 담당하는 마군주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녀를 어떻게 속이라는 것이냐. 무엇보다 가티아를 살려내는 건 그녀에 대한 모독이다.”
“베리아 씨가 속이고 있는 건, 베리아 씨잖아요…. 감정이 마모되었다고요? 지금만 하더라도 가티아 씨를 신경 쓰고, 되살리는 건 모독이라며 말하고 있잖아요!”
“처음부터 노리던 것이 이 몸이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면, 크게 성공했구나. 더 이상 네 녀석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바라지도 않던 동화 때문에 이 몸까지도 이상해진 것 같으니 돌아가거라.”
“잠, 기다려요! 로니아!!”
베리아가 힘을 회복한 것인지, 아니면 숨겨두었던 힘을 쓴 것인지는 몰라도, 질을 한 번에 어둠에 휩싸이게 하더니 이내 심상 세계에서 내쫓아버렸어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면,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였던 심상 세계가 아니라 신성력이 가득 채운 따뜻한 지하실이었어요.
질은 곧바로 상체만 일으켜 베리아를 찾아보지만, 있을 리가 없었죠.
단지, 뒷머리와 같이 앞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빨간색으로 변해 있는 것만 알 수 있었어요.
이것도 동화의 탓일까요.
“질? 질 맞아요?”
“맞아요….”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신성력으로도 흩어지지 않는 마기가 계속 흘러나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머리카락 색도 전보다 더 많이 바뀌어서는….”
탈리안은 영혼을 묶은 탓에 질의 힘이 빠져있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바로 달려가 안아주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걱정이 되었다는데 그런 게 중요하겠어요?
일단은 베리아를 질과 묶는 데에 성공한 것만 해도 잘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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