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베리아의 기억 (1)
* * *
탈리안과 질은 건너편에 앉아있는 막스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탈리안의 얼굴이 그다지 좋지 못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죄송스럽지만, 그 방법이 아니라면 베리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명히 당신이 말했잖아요! 처리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겠다고!”
막스가 제시한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질에게 좋지 못한 방법이라 거절하고 있는 거겠죠.
하지만 막스의 말을 살펴보면 베리아를 확실히 처리해주겠다고 한 건 맞을 텐데, 뭐가 문제인 걸까요?
“단탈리안, 처리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겠다고는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실히 베리아의 존재를 없앨 방법을 알려드린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 그런데요. 부주교님이 말한 방법대로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지르니트 양이 베리아의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일 뿐이지요.”
“들을 가치도 없어요! 이럴 바엔 질이 말했던 것처럼 나오지 못하게 마기를 계속해서 뽑아내는 수밖에는…!”
탈리안이 짜증을 내고 소리칠 만한 일이었어요.
마군주가 되라니, 아군이 되는 세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적도 늘어날 거에요.
방금만 하더라도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마군주를 몸에 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습당하는 일이 있었잖아요?
“그럼 반대로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단탈리안, 제가 제시한 방법 이외에 묘수라고 부를 만한 해결책이 있습니까? 마군주끼리는 서로 죽고 죽이는 방법으로만 이름의 힘을 빼앗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베리아가 이름의 힘으로 질의 몸을 속이지만 않았다면,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이름의 힘을 너무 쉽게 보니까…!”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르니트 양이 베리아와 싸워 이기고 이름의 힘을 빼앗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요.”
하지만 질은 땅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니, 저는 부주교님이 말한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질이 위험해지는 거예요! 베리아의 이름을 빼앗는다고 해도, 그 직후의 질은 적응을 위한 기간을 가져야 해서 한없이 약한 상태로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고요!”
“그렇게 화내지 않으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주체만이 바뀔 뿐, 속에 들어있는 베리아는 원하시는 대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인데.”
“애초에 베리아의 이름을 빼앗겠다는 것부터가 이 세계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요! 베리아를 이기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지만, 만약에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저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주교에게 계속해서 다른 방법이 없냐고 짜증을 부리는 탈리안이에요.
부주교도 상당히 답답한 심정일 거예요.
탈리안에게 자세도 굽히고 들어가고, 보상도 해주려 노력하고, 베리아를 없앨 방법까지 제시해줬잖아요.
해줄 만한 것은 다 해 줬는데도, 탈리안은 종일 짜증만 내고 있으니까요.
먼저 공격해온 교회의 잘못이라지만 불쌍하긴 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질이 이마를 짚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탈리안의 손목을 잡았어요.
“읏, 자, 잠시만요…. 베리아가 할 말이 있다고….”
“이 성소는 마군주의 힘을 약화하는 장소이니, 주도권을 언제든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괜찮으니 나오게 하세요. 이곳에 부주교랑 마군주가 있는데, 설마하니 싸우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막스의 허락 아래에 질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에 힘을 빼고는 한두 번 한 게 아닌 것처럼 너무나도 익숙하게 베리아에게 몸을 넘겨주었어요.
베리아에게 몸의 주도권이 넘어간 것은 질의 왼쪽 눈동자가 빨갛게 변한 것으로 알 수 있었어요.
이미 머리카락은 질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도 거의 절반이 빨간색으로 뒤바뀌어, 머리카락만으로는 변화를 알아채기 어려웠거든요.
그렇지만 바뀐 직후에도 두통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 같아요.
“으읏, 후우…. 정말이지 주인공을 빼두고 대화하는 버릇은 다들 어디서 배운 것이냐?”
베리아는 다리를 꼬며, 팔걸이에 팔을 지지해 턱을 괴고는 바로 옆의 탈리안을 바라보며 말했어요.
“막상 사라지려니 두려운가요? 베리아.”
“설마, 이 몸이 죽거나 사라지는 걸 두려워한다고? 마기노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만드는 짓을 할 리가 있겠느냐. 단지 조금 아쉬워서 말이다.”
“아쉽다고요?”
“이전에 이 몸에게 굴려질 때는 꽤나 허덕이지 않았더냐? 침대 위에서.”
“무, 무무, 무슨 말을?! 제, 제정신이에요?!”
탈리안은 베리아의 뜬금없는 공격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부주교의 눈치를 살폈어요.
베리아가 아무리 자신만 알고,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는 그런 타입의 인물이라지만, 말을 가리지 않고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부주교는 탈리안의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이야기 나누십시오.’라며 고개를 돌렸어요.
배려해줄 거라면 조금 더 친절하게 귀라도 막아주었으면 좋을 텐데요.
“제정신이고 말고, 그 직후에 지르니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였지만…. 이 정도 떠들기로 하고, 거래라도 하나 하지 않겠느냐.”
“…거래?”
“아아, 이 몸은 지르니트가 정해진 자신의 명을 다 할 때까지 몸속에서 가만히 있겠다. 사고 하나 치지 않고.”
거래라고 하길래 무슨 이상한 말을 할까 걱정되었던 탈리안이었지만, 생각보다 정상적인 말이 나와서 놀랐나 봐요.
한순간 동요하다가도 베리아의 속내를 알아보려 했어요.
“그 대가로 당신이 바라는 건 뭔데요.”
“네 녀석의 몸이지 무얼…. 아, 아니 잠깐! 기다리거라! 그 마기는 일단 집어넣고 이야기를 들어보라 하지 않느냐!!”
역시 아무렇지 않게 그냥 넘어가면 베리아가 아니죠.
어쩌면 이전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아서 더욱 호감이 갈지도 모르겠어요.
탈리안은 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마기를 뿜어내 베리아를 위협했지만요.
“베리아, 제 몸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질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응?”
“아, 으윽?! 저, 저한테도 안 줄 거라고요? 언니 제가 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했었잖아요!”
갑자기 주도권을 다시 가져온 질은 탈리안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급하게 물어봤어요.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부주교의 눈치도 신경 쓰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라피아와의 시간에서도 배운 것이 있을 텐데, 지금은 완전히 까먹은 듯하네요.
“저기, 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도대체 베리아와 주도권을 주고받는 건 언제 익힌 건지…. 다시 베리아를 만나게 해주세요.”
“쳇, 다음에 꼭 다시 약속을 받아낼 테니까요!! 이익…! 이 망할 꼬맹이! 멋대로 차례를 빼앗아 가기나 하고…!”
실시간으로 주도권이 오가는 걸 본, 부주교는 그 장면이 웃긴 건지 힘껏 웃음을 참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탈리안은 베리아의 진위만이 궁금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제 몸만을 원해서 지르니트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가만히 있겠다는 건가요?”
“네 녀석도 본능에 따라 지르니트를 원하고 있잖느냐, 모든 마기노는 본능에만 따르는 별종들이다. 못 믿겠다면 계약으로 묶어도 된다만? 아니, 계약이 아니라면 네 녀석은 이 몸을 믿지 못하겠지.”
“뭘 멋대로 제 몸을 당신 마음대로 하게 해줄 거라고 확정 짓는 거예요?”
흐름을 보면 허락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는 했지만, 탈리안이 허락한 한 적은 없기는 하죠.
베리아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이 비웃으며 탈리안을 조롱했어요.
“주지 않는 것이냐? 그렇다면 이 몸은 항상 지르니트와 주도권을 두고 싸워 네가 싫어하더라도 억지로 빼앗으면 될 일이다.”
“허세만 가득하네요. 지금만 봐도 그렇잖아요? 주도권을 완전히 질에게 빼앗긴 상태면서.”
아주 일순간은 탈리안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이 표정을 구겼지만, 곧바로 베리아는 탈리안의 위에 올라타서는 빠져나갈 구멍을 막기 위해 양팔로 소파의 등받이를 짚었어요.
그리고는 이전에 보인 적 없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탈리안에게 앞으로의 위협 같은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어쩔 것이냐? 이 몸을 지르니트의 몸속에 두다가는, 잠재적 위험 요소라고 떠들며 덤벼오는 심판 기관이라는 것들과 질리도록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순순히 이 몸과 계약을 하는 게 나을 텐데?”
베리아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지금은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이 없는 상태이다 보니, 베리아를 놔두면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가기만 하겠죠.
결국, 베리아와 어떤 방식으로든 담판을 지어야 하는 건 맞아요.
부주교가 제시한 방법은 싫다고 했으니까요.
탈리안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조용히 고개를 돌려 고민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어요.
이렇게 머리를 굴리면서도 답을 내지 못하는 모습이 꽤 안쓰러웠는지, 부주교는 한 가지 방법을 더 제시했어요.
“크흠! 단탈리안,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이 아니어도 괜찮다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지르니트 양과 베리아의 영혼을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면 베리아가 탈출할 걱정도 없고, 묶기 전에 마기를 흩어지게 하는 마법식만 새겨넣는다면, 굳이 베리아와 계약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영혼을 묶는 것도 결국, 질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해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질을 안전하게 해줄 수 있는 건데요….”
부주교가 제시하는 그 어떤 방법도 질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먼저 질이 베리아의 이름을 빼앗는다는 것부터도 그래요.
“만약 베리아의 이름을 빼앗는다면, 베리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지만…. 질은 그다음 베리아로서 마군주의 본능에 이끌릴 거에요. 지금만 하더라도 마기에 침식돼서 가끔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걸요.”
탈리안의 말대로, 지금도 마기에 휘둘리는데 이름을 빼앗는다면 얼마나 큰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베리아는 탈리안의 위에 앉은 채로 질을 연기하며 말을 걸어왔어요.
“그래서 언니는 제가 마기를 다루는 걸 싫어하는 거예요? 마기노의 본능에 따르게 될까 봐?”
“…, …베리아. 연기를 할거라면 적어도 그만한 노력이라도 보이세요. 지금은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니까. 눈동자 색도 그대로인 걸 보면 속일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화낼 겁니다.”
“하! 무섭지도 않구나, 어디 다치게는 할 수 있느냐? 어쨌든 이 몸이 할 말은 다 했으니 열심히 고민해 보거라. 아! 들어가기 전에 선물 하나만 받아가지.”
“무슨, 흐읍?!”
금방이라도 주도권을 질에게 넘길 것 같던 베리아는 짧게 입맞춤을 하고서는 더 나아가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무슨 일인지 몇 초 뒤에 다시 멀찍이 떨어지며 소리를 질렀지만요.
“아악! 베리아아!! 부주교님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질이 바로 주도권을 되찾아 온 거였네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질이 아니죠.
부주교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에 쥐고 있는 십자가만 만지작거렸어요.
“이것 참, 오늘따라 눈 둘 곳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베리아가 노리는 건 제 몸이라서…. 좋지 못한 쪽으로요.”
“아닙니다. 싸움으로 번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원래는 금기시되는 것이지만…. 눈에는 좋았습니다.”
기습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질이 베리아와 말싸움하는 장면도 보여주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탈리안은 이런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빠르게 말을 이어갔어요.
탈리안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부주교가 보는 눈이 있네요.
“어, 어쨌든! 질, 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두고 싶지만….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마기를 흩어지게 하는 건 하지 않고, 영혼을 묶고 싶다고 한다면…. 허락해줄 거에요? 지금의 저로는 베리아를 이길 수 없는 걸 알아요. 이름을 빼앗는 건 무리니까, 그럼 영혼을 묶는 방법밖에 없잖아요?”
“질, 영혼을 묶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베리아의 기억에 집어 삼켜질 수도 있고, 한번 묶으면 다시는 풀 수 없으니까…. 풀 기회가 있다면, 심상 세계에서 베리아를 이겨 없애는 것밖에 없어요.”
“나중에 이기면 되는 거니까, 괜찮은 거잖아요. 베리아가 날뛰지 않게 잘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부탁해요.”
탈리안은 한숨까지 내쉬며 질의 고집에 이기지 못해 끝내 허락해버렸어요.
임시방편인 만큼, 나중에는 결국 질이 베리아와 일대일로 싸우는 것이 되겠지만….
그래도 마기를 다루고 싶은 질에게는 지금의 선택이 최선일지도 모르겠어요.
탈리안이 자신의 마기를 쓰게 해준다고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의 질을 보고 쉽게 내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대화가 마무리되어서 그런지, 탈리안은 부주교에게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는지 물어봤어요.
“당장 준비를 시작한다면 내일이라도 가능합니다.”
“그럼 내일 점심에 다시 올게요. 여기 있다가는 누구에게 기습당할지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좋은 선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탈리안과 지르니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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