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이상한 거리감의 황녀
* * *
황녀가 일어서서 직접 맞이해준 덕분에 질의 일행은 불편한 분위기 속에 앉아 있었어요.
보통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예의라던가, 생각할 것이 많아져 피곤한 자리가 될 텐데, 황녀라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거예요.
더구나 황녀는 직접 맞이해주는 것을 넘어서, 차까지 우려 대접해주기도 했으니까요.
무리한 부탁과 계약으로 사이가 좋지 못하더라도 레나이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편히 있지는 못할 거에요.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질은 황녀가 따라준 차만 홀짝이고 있었어요.
황녀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참다못한 탈리안이 입을 열었죠.
라피아는 그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보니 함부로 황녀에게 말을 걸 수가 없잖아요.
대화를 시작할 사람이라고는 탈리안밖에 없던 거에요.
“레나이 황녀, 무슨 일로 저희 셋을 여기까지 부른 건가요.”
“계약에 관한 것이 아니겠어. 본인이 그대들을 이곳에 부를 이유라면 그것밖에 없지.”
“이미 다 정해졌던 게 아니었던 건가요?”
“며칠간 생각을 다시 해봤는데, 역시 내용이 부실해 보여서 말이지.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적어도 몇 가지 더 추가되었으면 하는데.”
너무 탈리안에게 좋은 계약이었죠.
그냥 보내준 게 신기할 수준의 문제이긴 했어요.
“뭘 바라고 있길래 이런 오지까지 불러낸 거예요?”
“너무 보채지 말아. 이곳에는 본인과 그대들밖에 없으니 느긋하게 있다가 가도 돼.”
“느긋하게 있으라니 말은 참 편하게 하네요.”
황녀랑 오지의 별장에서 느긋하게, 정말 말로 표현하기에만 쉬운 일이에요.
라피아만 보더라도 혹여 실수하지 않을까 봐 마음 졸이는 게 보일 정도니까요.
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던 탈리안이 아니라면 황녀를 앞에 두고 모두가 그럴 거예요.
“그대는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본인이 그대들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닌가요? 라피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데요.”
“라피아, 그대에게는 조금 실망했어. 본인을 믿지 못하다니….”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탈리안 너…!”
탈리안의 쓸데없는 말 때문에 라피아는 기겁하며 황녀에게 머리를 숙여 용서를 구했어요.
이런 것을 본다면 신분이 높은 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네요.
“그냥 해본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 편히 앉으라고, 이곳은 본인이 제일 아끼는 별장이니까. 힘들 때마다 찾아오면 얼마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지 몰라.”
확실히 알현실에서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편해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 해도 값이 꽤 나가 보이는 옷이라는 것은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요.
말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현실에서 느껴지던 중압감이 거의 사라졌기에 다른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믿을 것 같았어요.
그만큼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장소에 굳이 저희를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불러냈다는 건가요?”
“탈리안, 그대들과 말싸움이나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니 긴장 풀도록. 오히려 그대들과는 친분을 쌓고 싶어서 부른 것이니까.”
“친분이라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지르니트, 그대는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지?”
황녀는 탈리안의 간섭에 지친 것처럼 말을 끊고 지르니트를 바라보며 질문했어요.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않는 모습에 기가 막힌 탈리안은 시선으로 질에게 눈치를 줬어요.
혹시라도 황녀의 기분을 좋게 할 말은 하지 말라는 눈치를요.
“저, 저요? 저는, 그냥 높으신 분이라는 거 말고는….”
그렇지만 눈치를 주지 않더라도 질은 황녀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인상을 느끼고 있지 않았어요.
황녀는 그저 황녀일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죠.
그런데 질의 대답을 듣고 나온 황녀의 대답은….
“그거다! 그게 문제인 거야!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다. 그러니 본인이 제안하는 그 어떠한 것도 제대로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지! 그러니 서로를 먼저 알아가자는 것이다. 먼저 친구부터 시작하도록 할까.”
“레나이 황녀…. 어디 아프신 거라면 황궁에 돌려보내 드릴 수도 있는데요.”
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사람과 친구라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기에 탈리안도 황녀를 걱정하며 황궁에 돌아가겠느냐고 물어보는 거겠죠.
“본인은 진지하다, 탈리안. 본인이 이렇게 마음먹은 이상, 훗날 그대들이 본인의 절친한 친구들이 되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나 마찬가지. 문제는 없을 텐데?”
엄청난 자신감이에요.
황녀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질은 몰아붙이는 사람에 한해서는 상당히 약하니까요.
“그리고 조금 더 친해진다면, 지르니트가 이 몸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다. 거기서 더 나아가는 것도, 후후후….”
저번 알현실에서 질에게 호감이 간다고 했었으니 당연히 꺼낼 수밖에 없는 이야기겠죠.
탈리안이야 항상 그러니 넘어가더라도, 라피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처음으로 말을 꺼냈어요.
“레나이 황녀님, 무례한 걸 알면서도 말씀드립니다만…. 지르니트는 이미 저와 사랑 중인 관계에 있습니다.”
질은 이미 자기 것이니,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네요.
그야 그렇겠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가겠다는데 좋은 표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런데 황녀는 그게 어쨌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허? 그게 무슨 문제이지? 본인은 모두를 품어줄 수 있는 아량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본인은 비단 지르니트뿐만 아니라 그대들 전부를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저희 모두를요?”
탈리안의 되물음에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피아에게 천천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어요.
그리고는 라피아의 턱을 잡아 볼에 입맞춤을 하고서 작게 속삭이듯 말했어요.
“화, 황녀님?!”
“그러니, 라피아 그대도 원한다면 본인이 사랑을 담아 안아주어 침대 위에서 처음 맛보는 쾌락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느낌을 느끼게 해주지.”
여기서 멈추지않고, 황녀는 말하는 도중에도 라피아와 시선을 맞추면서 손을 천천히 움직였어요.
라피아의 어깨에서부터 쇄골, 그리고 가슴으로 향하려 할 때….
“…어, 와, 아니! 히끅, 아, 으아아!!”
얼마나 당황했으면, 라피아는 말을 더듬다가 딸꾹질까지 하며 황녀에게 멀리 떨어지기 위해 소파 뒤로 도망갔어요.
질은 대화를 잘 따라가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굳어버렸고, 탈리안은 들고 있던 비싸 보이는 찻잔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깨트리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죠.
애초에 관심도 없던 상대에게 이런 일을 당한다면 라피아와 같은 반응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황녀는 그런 라피아를 보고 피식 웃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다만, 본인은 황궁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몸이니 가까이 지낸다고 하더라도, 길어봤자 달에 일주일이 최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탈리안 그대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지?”
“아무리 그래도 질을 더 이상 나눠 가지는 건…. 그리고 레나이 황녀, 저는….”
“당황스러운가? 머리가 굳어버렸나? 그럴 땐 본인에게 결정하는 것을 맡기면 되는 일이지.”
“아…. 아니, 안돼요! 왜 이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죠? 알현실에서도 할 수 있었잖아요! 이러면 계약서에서! 어라? 계약서가 없어…?”
점점 황녀에게로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가려고 하자, 탈리안은 급하게 이공간에 손을 넣어 계약서를 꺼내려 했던 것 같지만, 그 말대로 계약서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뒤였어요.
가져온 짐가방 속을 살펴봐도, 주머니를 살펴봐도, 그 어디에도 없었죠.
친절하게도 계약서를 찾는 탈리안이 포기할 때까지, 황녀는 기다려줬어요.
“이곳에 오는 순간 계약서는 소멸하게끔 만들어두었다. 신중한 그대들이 멋대로 계약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그대들에게 이런 부끄러운 프러포즈를 하라고? 마군주라서 그런지 조금 짓궂은 구석이 없지 않아 있군.”
“저, 저도 거부하겠습니다! 탈리안의 말대로 질을 나눠 가지는 건 안 돼요! 질이 남아나질…! 앗, 아니, 질이 정신이 없을 거라고요!”
언제 한번 질에게 자신이 물건이냐고 잔소리를 들었던 것이 떠오른 것처럼 바로 말을 바꾼 라피아지만, 이를 모를 황녀와 질이 아니었죠.
둘이 생각하는 중요한 부분은 다르겠지만요.
탈리안과 라피아가 말하는 걸 보면 이상한 것이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어요.
“그대들은 참 이상하구나, 지르니트를 아끼는 건 좋지만 정작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진행하려 하다니. 이전에 말했을 텐데? 지르니트는 본인의 제안에 따르겠다고 했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황녀님이 말한 것처럼 정말 저희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렇다면 한가지 약속을 해주세요.”
황녀의 말대로 질이 제안을 따르겠다고 했다는 말에 반발하려던 탈리안과 라피아였어요.
바로 대답해버린 질 때문에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요.
언제 한 번이라도 질이 중요한 일에 나서서 일을 진행 시킨 적이 있었어야죠.
탈리안과 라피아에게는 한없이 낯선 질의 모습이기에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약속? 계약을 말하는 건가.”
“계약, 네. 황녀님이 저희 집에 와 있는 날에는 신분이고 뭐고 없는 거예요. 집이든, 밖이든 저희한테 피해가 갈만한 그 어떤 명령도 하면 안 되고요.”
“그게 끝인가?”
“질. 저번에도 말했지만…!”
질의 선택에 탈리안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어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황녀의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일 거예요.
질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주겠다는 자신의 다짐도 떠올라서 쉽게 간섭 못 하는 것도 있을 테고요.
그렇기에, 말을 끝마치진 못했어요.
“아니에요, 하나 남았어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거. 탈리안 언니는 건들지 마세요.”
“흠, 지르니트…. 아니, 알겠다. 계약서를 만들 테니 모두 확인해보도록.”
“질, 나, 나는…?”
“아, 응…. 라피아 언니도 조건에 추가해주세요.”
“알겠다. 자, 확인해 봐.”
계약서를 새로 공중에서 만들어낸 것을 보면 황녀도 신분에 맞게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아니면 이 세계의 기본 소양인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계약서를 확인해본 결과 이번에도, 탈리안은 특별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어요.
이전에 알현실에서 맺었던 계약 내용과 함께 이번에 새로 넣은 계약 내용, 그리고 황녀의 요구사항인 ‘친구부터 시작하는 관계, 질의 힘을 실험하는 내용과 집에 머무르게 된 것.’까지.
게다가 이번엔 라피아의 것도 새로 만들어져 모두가 이 자리에서 계약을 하게 됐어요.
베리아와 싸운 뒤로 한계가 없다시피 가족이 늘어나기만 하고 있네요.
모두가 계약을 마치자마자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이보다 기쁜 날은 더 없겠군!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친히 저녁을 만들어 주지. 분명히 입맛에 맞을 거다. 아니지, 너무 고급스러운 요리라서 먹다가 황홀한 기분에 기절할지도 모르겠어.”
“…집에 가면 안 되는 건가요?”
아무래도 탈리안은 황녀와 같이 있는 매 순간이 버티기 힘든 것 같아요.
이 때문에 부엌으로 가던 황녀가 돌아서며 눈물을 닦는 척을 하면서 대답했어요.
“그거야말로 너무 잔혹한 말이 아닌지 고민해봐. 이 오지에 본인을 혼자 두고 가겠다니, 슬퍼서 눈물이 다 나오잖아. 이제 한 달마다 얼굴을 보는 가족과도 다름없는데.”
“으읏…. 질이랑 라피아는 괜찮아요? 여기 있어도….”
“나야 뭐, 불편─”
라피아도 황녀의 눈치를 살피는 건 마찬가지였어요.
말도 다 끝마치지 못했거든요.
왜냐면….
“흐응? 지금 황녀 앞에서 불편하다고 하는 건가?”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 그런데 황녀님…. 계약 조건에 신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건 집에 있을 때만 해당하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크읏! 질! 집에 가고 싶지 않아?!”
탈리안에 이어서 라피아까지 집에 돌아가자며 보채고 있지만, 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저는 황녀님의 요리실력도 궁금한데, 먹고 가도 되는 거 아니에요?”
“하하핫! 그렇게나 기대하고 있다니, 본 실력을 발휘해야겠어! 얼른 요리해오지! 거기서 꼼짝 말고…. 아, 탈리안?”
황녀는 기분이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탈리안을 불렀어요.
뭔가 불안한 느낌에 휩싸인 탈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황녀 쪽을 바라봤죠.
“최근 세 달간 유통경로를 알 수 없는 돈이 오가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무슨…. 마, 아, 설마…. 아, 알겠, 어요….”
“대신에 이 몸이 지르니트의 능력을 실험한다는 명목하에 대금을 달마다 가져올 테니 걱정하지는 말고. 그동안 교사 일을 한 것에 대해서도 정당한 보수를 줄 테니….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말도록.”
마지막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탈리안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하는 것을 보면 탈리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질은 무슨 말인지 알아챈 것 같은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탈리안을 바라보고 있네요.
그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뭔가 잘못하긴 했나 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