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17화 (117/189)

〈 117화 〉 흑기사에게 보이는 적극적이었을 때의 문제

* * *

정령은 기본적으로 잠을 잘 필요가 없다.

마나만이 정령의 모든것, 그러니 충분한 마나만 공급받는다면 피로를 느낄 일이 없다.

덕분에 정령계로 돌아갈 일이 없다는 말을 질에게서 들었을 때에는 이보다 더 곤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말에, 가족이 되어달라는 말에,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런 소환자라면 지금까지 들어온 소환자들의 악명에 비해 상당히 나은 수준이라 판단했다.

가족이 주는 애정에 대한 결핍 때문에, 일개 소환수에게도 애정을 갈구하는 안타까운 소환자이지만….

적어도 대정령제에서 정령왕님에게 나눠받은 힘으로 본 지르니트라는 내 소환자는 다른 소환자들에 비하면 상당히 맑고 깨끗했다.

나뿐만이 그렇게 느꼈다면 착각이겠거니, 정령왕님의 힘이 잘못 되었겠거니 하겠지만….

지금껏 탈리안 선생님과 적은 시간을 함께하며, 새벽에 라피아와 대화를 나누며 느껴본 바로서는 내가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느낀다.

이번 대화에서는 라피아가 지르니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듣게 되었고….

분명, 첫 번째가…. 아니, 우선은 눈 앞의 몬스터가 우선이다.

“생각보다 단단하군, 이러니 선생님의 결계도 무시하고 들어오는 거겠지.”

라피아와 대화를 하던 도중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나왔던 참이다.

보통의 몬스터라면 검격 한번에 나가 떨어졌을 텐데, 이 녀석은 몇번이고 내 검을 맞받아치고 있다.

등에는 두터운 갑각부터, 전신의 털은 강철마냥 단단하다.

내지르는 앞발은 그야말로 바위와 같아서 방패로 막으면 확실하게 타격이 들어온다.

만약, 자리를 비웠던 한달동안 대정령제에서 활약하지 않았다면 정령왕님의 힘을 받지 못했을 테니 이정도 적에게도 고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흐읍!”

단 한번, 한 손으로 잡은 검에 방대한 양의 마나를 둘러 그대로 위에서 내려치면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인 힘 앞에 몬스터는 두갈래로 나뉘어져 쓰러져 버린다.

집에서 꽤 멀리 있기에 가감하지 않고 베어버려, 쓰러진 몬스터 뒤로도 뻥 뚫린 길이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일이다.

너무 집 안에만 있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나름 좋은 운동이었다.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면 갑자기 이런 몬스터가 보인다는 것, 주변에는 둥지도 없고 이렇게 강한 개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있을만한 가능성을 따져본다면….

“새로운 둥지가 생겨 났거나, 길을 잘못 들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돌아갈까.”

혹시 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로에 쓰일 장작을 구할 겸, 주변에 둥지가 없는지 확인해봤지만 전혀 확인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탈리안 선생님은 어디 가신 건지….

집에는 익숙한 두 종류의 마나 밖에 감지되지 않는다.

그것도 서로 뒤엉킨 채로.

이 세계에 자연스레 녹아든 마나라는 것은 각각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불에 깃든 마나를 보자면 그 흐름이 정적이면서도 속으로는 흉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상당히 모순되는 표현이지만, 실제로 그렇기에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질이 공격 마법을 사용할 때, 화염을 주로 쓰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반대되는 물의 경우 흐름이 반드시 어디론가 흐른다는 것 때문인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계를 알 수 없는 깊이가 있다.

그러니까, 마나란 것은 어디에 깃드는가에 따라 자유롭게 변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것을 되짚어 보는가.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 혹시나 누군가가 아픈것이 아닌가 싶어 빠르게 문 앞까지 와 봤지만 돌연 소리가 끊어졌다.

마나를 살펴보면 상당히 요동치는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다 어째서인지 따뜻하면서도….

단순히 요동치기만 하면 모를까, 처음 보는 유형의 전혀 알기 어려운 흐름이다.

“누가 들어가 있나?”

말을 걸자마자 덜컹, 거리는 소리.

마치 들키면 안될 것을 들켜버렸다고 자백하는 듯한….

“어, 어어! 세르디어 돌아왔구나?! 잠이 안 와서 세수하러 왔어!”

이전에 본 적 없는 라피아의 당황한 목소리.

그렇지만, 라피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를 수가 없다.

질이 같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음, 알겠다.”

하지만 굳이 캐물을 이유는 없다.

흐트러진 마나로 들어오지 말라며 명령, 아니…. 부탁을 하는 것을 보면 질이 뭔가 숨기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어쩔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며 화장실에서 멀어지려 하자마자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하으…. 언니…. 이게 뭐예요….”

“…음, 미안. 탈리안일 수도 있어서 급하게 막으려다 보니까….”

탈리안 선생님에게는 더욱 들키면 안되는 것을 하고 있다면, 조금은 궁금해진다.

원래라면 부탁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멀어져 주는게 소환수로서의 본분이지만….

‘가족’이 되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만 집중한다면 작은 소리를 듣는 것은 일도 아니고, 이정도는 이해해주겠지 싶어서 화장실에서 약간 떨어진 복도에 앉아 소리를 엿들었다…. 만.

그 소리가 이상하게 내 기분을 헤치는 느낌이 든다.

나쁜게도, 좋게도 아닌 애매하게….

라피아에게 괴롭혀지는 듯한 지르니트의 애달픈 목소리가, 화장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그 목소리가, 상당히….

오로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라면 가서 도와줄 마음이었지만, 지르니트가 하는 소리를 보아선 그것 또한 아닌것 같다.

묘하게 지르니트 자신도 그것을 바라는 듯한….

“전혀 모르겠군….”

이후로도 삼심 분이 더 지나고 목욕을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일을 마친 것인가 싶다가도, 목욕 도중에도 간간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꽤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은 이 이상 저 둘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자리에서 멀어져 거실에서 미리 손질해 둔 장작을 화로에 넣고 있었다.

목욕이 이루어진 시간도 꽤 적지는 않았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지르니트의 얼굴은 겉보기에도 붉게 물들어 상기되어 있었다.

“지르니트, 잠은 잘 잤나.”

“어, 어어! 응…!”

“라피아는?”

라피아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내 시선을 피한다.

그렇게 말하기 힘든 것인가.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면 그럴 만도 하겠지만….

당하면서도 좋아한다니 이해는 가지 않는다.

“언니는, 뒷정리를 조금….”

“뒷정리?”

“아, 아니! 화장실 청소하고 온다고 하네! 응, 응….”

…청소.

여전히 모르겠다.

아마 지르니트가 스스로 말 할 생각은 없어보이니, 말해주기까지 묻어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말해주기는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약간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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