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15화 (115/189)

〈 115화 〉 늘어나는 가족 (2)

* * *

며칠 뒤, 탈리안의 집 앞마당에서 항상 모여있는 세 명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탈리안, 지르니트, 라피아의 순서대로 일렬로요.

모습을 보아하니 저번에 이야기가 나왔던 작은 텃밭을 가꾸는 일을 이제 막 마친 것 같았어요.

시간도 딱 적당하게 점심시간을 향해 가고 있을 때쯤이었죠.

“생각보다 손이 가는 게 없었네요. 언니가 관리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질이 건넨 말처럼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버렸어요.

그래도 시간이 걸릴까 봐 걱정되어 짐 정리를 마친지 얼마 안 된 라피아까지 동원되었는데 말이죠.

누군가가 텃밭을 계속해서 관리해주지 않았던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작은 텃밭이라고는 해도 탈리안의 집을 기준으로 작은 거지, 크기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니까요.

“질이 가꾸던 거잖아요. 먹기 싫은 음식이지만….”

“…먹기 싫은 건 맞구나.”

“마, 말했잖아요!? 물비린내는 싫다고! 식감도 흐물흐물한 데다가, 비리기까지 해서 구역질이…!”

“에휴, 언니가 왜 그렇게 작은 몸인지 알겠어요….”

이렇게 편식을 한다면 탈리안의 몸이 성장할 리가 없죠.

그야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지금도 성장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편식하는 것보다는 골고루 먹는 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을 테니까요.

더구나 질을 만나기 전까지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로, 먹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항상 끼니를 거르기도 했으니….

“그래도 탈리안한테 너무 뭐라 하진 마, 너 돌보면서도 혼자 밖에 나와서 나 몰래 하고 있었던 거 같으니까.”

웬일로 라피아가 탈리안의 편을 들어주네요.

예전보다는 더 친해졌다는 거죠.

“그건 그래요. 고마워요, 언니.”

“저답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 거 같네요….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안 된다더니….”

“근데 라피아 언니는 언제부터 탈리안 언니를 이름으로 부르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마녀라고만 불렀으면서.”

“응? 별 이유 없어, 그냥 마녀라고 부르기만 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같이 살게 되기도 했으니까.”

질이 은근히 눈치가 좋네요.

사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래도 알아채기 어려운 건 아니에요.

황궁에서부터도 그랬지만 라피아의 탈리안을 향한 말투가 매우 나긋해졌거든요.

오랜 소꿉친구를 대하는 것처럼요.

당연하겠지만, 같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겠죠.

“…그렇구나. 아! 그거 준비됐어요? 밥 먹기 전에 만나고 싶거든요.”

“어제 부탁했던 거 말한 거지? 방에 있어, 가져올게.”

라피아는 곧바로 방으로 갔다 오면서, 질에게 작은 마름모 모양의 보석을 건네줬어요.

“고마워요! 정말, 보고 싶었거든요. 라피아 언니가 새로운 가족이 된 것도 좋지만, 가족이 늘어난다면 한 번에 늘어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그런데 제대로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그게 문제지만, 해보지 않고서야 모르잖아요.”

질은 흑색의 빛이 도는 반투명한 보석을 손에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어요.

그리곤 텅 빈 마당에 앉아, 성인 남성 5명이 누워도 들어갈 크기의 복잡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죠.

풀이 타는 냄새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려낸 뒤에는 일반적인 검과 방패를 중앙에 놓아두고, 질은 항상 해오던 일인 것처럼 주저 없이 마법진에 마나를 흘려 넣었어요.

검과 방패는 언제 준비해둔 건지 모르지만 뭐에 쓰려고 가져다 둔 것일까요.

“안 도와줘도 되는 거야?”

“어제 말하는 거 들었잖아요? 계약이 끊어져 있어서 새로 계약해야 하는데,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하고 싶다고.”

“그럼 그 뭐야, 성공하는 거지?”

“성공이야 하겠죠. 질의 부름에 어떤 소환수가 응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질도 그걸 알아서, 자신이 원하는 소환수…. 흑기사를 최대한 이미지 하기 쉬운 보석이랑 검과 방패를 구해다 달라고 한 거예요.”

가족이 늘어난다고 하더니, 흑기사를 말하는 거였네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흑기사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죠.

‘가족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라고요.

탈리안에 이어서 흑기사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죠.

소환수까지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소환사가 지녀야 할 자질을 의심해봐야 하지만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의 주인공 질은 둘이 떠드는 소리에도 마법진의 바깥에 서서 눈을 감고 완전히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동안의 흑기사를 떠올리려면 완벽에 완벽을 더해야 하니까요.

마법진은 서서히 빛을 발하다가, 또 하나의 마법진이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공중으로 떠올랐어요.

그러자 공중의 마법진에서 꽤 큼지막한 사람의 발 부분에 착용하는 갑옷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몸을 보이기 시작한 발은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속도에 박차를 가하더니, 일순간 ‘쿵!’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어요.

영웅이 크게 점프해서 바닥에 착지하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요.

그 후에는 마법진과 흑기사를 소환하기 위한 매개체가 사라지고 나서, 마법진의 흔적만 남은 바닥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 큼지막한 갑옷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질은 겁먹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갑옷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어요.

“손 필요해? 잡아줄까?”

질의 질문에도 흑기사로 추정되는 갑옷 덩어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질이 두리번거리다 보면, 갑옷끼리 부딪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죠.

천천히 손을 머리까지 올려 투구를 벗는 거였어요.

“…아니, 괜찮다.”

“오랜만이네, 세르디어.”

“음,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변해버렸군.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둘 다 포함해서. 그리고, 오랜만이다.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잘…. 된 거지?”

질은 자신만만하게 소환 계약을 해낸 것 치고는 말하는 것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였어요.

흑기사가 자신의 이름까지 불러줬는데 뭔가 불안한 것처럼 보였죠.

“이런 고품질의 마나와 마정석을 준비해준 덕분이지. 보아하니 이미 예상하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응, 계약이 끊어져 있었으니까. 세르디어라면 말도 없이 계약을 끊을 리가 없는데, 끊었다는 건 기억을 잃었다는 거겠지 싶었어.”

“그럼 내 기억을 어떻게 되살린 거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흑기사가 모든 마나를 써버렸기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정령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극소량의 마나를 제외하고 모든 힘을 써버린 거죠.

그렇다면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에요.

이미 먼지 한 톨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 되어버리니까요.

하지만 질은 그걸 가능하게 했어요.

“정령에게 있어서 마나는 모든 것이라고 했었잖아. 몸, 기억, 힘 전부를 구성하는 거라고. 그럼 내 마나를 계약에 필요한 양보다 많이 준다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거 아닐까? 네 기억 대신 내 기억을 나눠준다면…. 탈리안 언니도 그럴듯하다고 말해줬었고. 덕분에 나 지금은 좀 많이 어지러워, 마나가 바닥났거든.”

이전에 비한다면 질도 꽤 많은 성장을 이뤘어요.

황궁에 가서 능력만으로도 [S+]급이라는 전례 없는 수치로 측정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질이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서 마나가 바닥났다면, 흑기사의 소환과 계약에 얼마나 많은 마나가 들어가는지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성인 남성 10명이 같이 들어야 들 수 있는 엄청나게 큰 물통이 있어서 한 번에 많은 물을 담아 옮길 수 있다고 해요.

보통은 그 물통을 옮기고 나면 모두 힘을 다 써버린 탓에, 옮긴 물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바로 바닥에 드러누울 거에요.

하지만 질은 그러고도 흑기사의 소환을 유지할 마나가 남아있다는 것이죠..

질의 마나량을 생각하면 10명은 너무 적은 비유이지만, 말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거고요.

최소 100명, 아니, 500명은 기준으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정령 중에서 다시 날 선택해낸 것도 대단한 일이야.”

“네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그래서…. 세르디어, 내가 전에 했던 말에는 대답해줄 수 있는 거야?”

“가족이 되어달라는 것을 말하는 건가? 안될 게 뭐가 있겠어.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모르면 배워서라도 되어줘야지.”

용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더 이상 흑기사의 기억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질도 이에 안심하고, 얼굴을 붉혔어요.

라피아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같이 살아달라고 말하더니, 흑기사에게만 이러는 이유가 뭘까요?

“그,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부끄러워하기는, 그건 그렇고 그동안 탈리안 선생님도 건강하셨나 보군.”

멀리 보이는 탈리안을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흑기사에요.

탈리안이 대답으로 손을 흔들어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허리를 펴고 질을 다시 바라봤죠.

“아, 응. 그리고 소환에 대해서 말인데 이제부터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그건 무슨 말이지?”

“이번 계약에서는 소환을 끊지 않아도 부족한 마나가 보충되고 상처가 회복되도록 해 놨거든. 불편하다면 다시 바꿔줄게.”

분명히 이번 계약은 질 혼자서 진행한 마법일 거예요.

재료만 탈리안과 라피아에게 부탁했을 뿐, 모든 것을 혼자서 했으니까요.

“음, 아니야. 이 기회에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행이다. 네 방도 준비해뒀어!”

“정령의 방이라, 그거 기대되네.”

“그치? 내가 나름 잘 꾸며놨어! 기대해도 좋아. 오랜만이니까 라피아 언니랑 탈리안 언니한테 인사하고 올라가자.”

이번에도 역시 탈리안을 이끌었던 것처럼 흑기사의 손을 잡는 질이에요.

그런데 체격 차이 때문인지 이끌지는 못하고 나란히 옆에 서서 걷게 되었어요.

사실 질이 흑기사를 끌고 안 끌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흑기사의 기억을 무사히 되살린 것이 중요한 거죠.

탈리안 혼자만 있던 때와 비교하면, 집이 꽤 활기가 넘치게 되었네요.

라피아와 흑기사까지 같이 살게 되었으니까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