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늘어나는 가족 (1)
* * *
탈리안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급했어요.
알현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알현실의 문고리를 붙잡고 집과 연결해 재빠르게 질을 찾기 시작했거든요.
혹시라도 길이 다시 엇갈린다면 안되니까요.
“질? 질! 어디 있어요!”
같이 집으로 돌아온 라피아를 내팽개쳐두고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혼잣말로 계약서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황궁으로 전이 됐던 것을 걱정 중인 것 같아요.
거실부터 질의 방, 도서관, 화장실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질을 찾아낸 곳은 부엌이었어요.
“질! 있으면 대답을 해야죠!”
“아, 언니. 맛있는 냄새 안 나요?”
“냄새? 이건…. 윽, 저번의…. 아니, 이게 아니지. 질! 계약을 멋대로 진행하면 어떻게 해요!”
무슨 냄새길래 탈리안이 손으로 코까지 틀어막는 걸까요.
웬만해서는 가리는 게 없는 탈리안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몇 가지 없기는 해요.
이런 반응의 탈리안을 보고서도 질은 못 본 척 앞의 냄비에서 미리 준비된 요리를 꺼내 그릇에 담기 시작했어요.
그리곤 그릇 하나를 탈리안의 앞까지 가져오며 대답했죠.
“일단 앉아요. 하루종일 밥도 안 먹고, 언니도 그렇고 라피아 언니도 그렇고 빈속에 돌아다니면 안 좋아요.”
분명 멋대로 계약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나있을 텐데, 앉으라는 질의 말에 조용히 따르는 걸 보니 그렇게 크게 화난 건 아닌 것 같네요.
“라피아? 라피아가 어디, 까, 깜짝이야! 왜 뒤에 소리도 없이 서 있는 거예요!? 놀랐잖아요!!”
얼마나 놀랐으면 의자를 소리까지 내면서 끌며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나는 분명 소리 냈는데? 네가 너무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몰랐던 거지. 처음부터 쭉 네 뒤만 따라다녔는걸?”
“하아, 어쨌든 질!”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대화의 흐름이 끊겨서인지, 탈리안은 식탁을 양 손바닥으로 치며 질의 시선을 끌었어요.
“언니, 예전에 말했던 적이 있잖아요. 앉아요.”
“…큿.”
하지만 질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기세에 눌려 얌전히 자리에 앉았어요.
라피아가 볼만하다는 표정으로 같이 자리에 앉네요.
어쩌다 이렇게 탈리안이 질에게 기세로 눌리는, 안타까운 처지가 되어버린 걸까요.
“너 설마 질이 해준 요리가 먹기 싫은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그저, 이 냄새가…!”
아니기는요.
발을 더듬는 것까지 보니 먹기 싫은 게 맞는 것 같은걸요.
냄새가 싫은 걸까요? 아니면 맛? 뭐가 됐든 탈리안에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에요.
하지만 라피아에게는 중요했나 보네요.
“편식하는 거야? 300살도 넘게 먹었으면 애도 아닌데….”
“시끄러워요! 그보다는 질! 계약에 대해서는…!”
“황궁에 멋대로 전이 된 건 처음이라 몰랐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황녀님과의 계약은 저도 나름 고민해보고 내린 결정이에요.”
그런데 기껏 제대로 말하려는 타이밍에 질이 말을 끊고 들어왔어요.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판단했다니 대답이야 나쁘지 않지만, 탈리안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화가 날 거예요.
“황녀가 무슨 생각인 줄 알고! 그런 건 저랑 상의라도 해야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결정하다니 위험하니까요.
“그렇지만 언니도 알잖아요. 그 상황에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거예요. 아니면 언니, 저를 황녀님한테 빼앗았길 까봐 두려워요? 이미 라피아 언니한테 반분 빼앗겼으니까 더 걱정되는 걸까.”
이에 질은 메인 요리에 곁들여 먹을 요리들을 식탁에 놓으며, 도발하는 듯한 말로 더욱 탈리안의 신경을 긁었어요.
질을 타이르려고 하는 때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좋지 못한, 오히려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정작 탈리안이 보인 반응은 발끈하려다가 누그러드는 소극적인 태도였어요.
“그건! 그건, 맞아요…. 빼앗기지 않겠다고 했는데, 빼앗겨서….”
“야, 빼앗겼다니 듣기 안 좋게! 나눠 가졌다고 하자.”
라피아가 눈치가 없는 건 아닐 텐데, 아까부터 계속해서 끼어드네요.
하지만 정정하지 않으면 라피아가 이상한 기분이 들만해요.
빼앗아간 것은 아니잖아요? 탈리안이 빈자리를 만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질이 라피아에게 기댔을 뿐이니까요.
“제가 물건이에요?”
“어? 아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질이 다른 그릇을 라피아의 앞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자, 황급히 변명하는 모습이에요.
요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것이 꼭 질의 기분을 대신해주는 것 같았죠.
“그렇지만 황녀는 질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어요. 순수하게 질에게 좋은 감정만 있는 건 아닐 거란 말이에요!”
“저 좀 믿어주세요. 언니도 알겠지만, 저, 언니가 없는 동안에 엄청 많은 의뢰를 해왔어요. 그러는 동안에 없던 눈치도 꽤 생겼고, 실력도 올랐고…. 한 달간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옆에서 직접 봤으니 믿어도 돼. 저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다면, 황궁에 실수로 전이된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그건 크리미아 씨의 탓이잖아요! 제대로 미리 설명해줬다면 바로 계약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한순간 주춤했지만 억울하다는 듯이 너무 크지는 않도록 소리치는 질이에요.
너무 섣불리 행동한 질에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겠지만요.
애초에 설명을 잘해주었다면 괜찮았을 일이기는 하죠.
“솔직히 크리미아 걔는 일부러 그러는 거 같더라~ 질을 싫어하는 건지, 마군주를 담고 있어서 그러는 건지, 말도 안 듣고 조금 짜증이 났었다니까? 지금은 돌아갔나? 이만큼 오래 집을 비웠으면 지금은 돌아갔을 것 같기는 한데.”
“언니, 뒤에.”
“응? 아….”
“…망자라도 본 것처럼 쳐다보십니다? 베리아를 어떻게 할지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일단은 당신의 다친 몸을 치료해주기 위해 남아있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아직 질의 몸에 남아있는 베리아를 어떻게 처리할지 정하지 않았었죠.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네요.
“크리미아 씨도 집에 돌아가실 게 아니라면 자리에 앉으세요. 라피아 언니가 같이 살게 되었으니까 모처럼 넉넉하게 만들었거든요.”
질의 말처럼 이미 식탁의 다리는 휘다 못해 부러질 만큼 여러 가지 음식들이 올라가 있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탈리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수저를 그릇에 남가 휙휙 젓기만 하고 있지만요.
이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라면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한번 음식에 관해 설명해보자면, 그릇에 담긴 그것은 수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약간은 흐물거리는 자줏빛의 채소가 들어있었어요.
씹으면 얼마 안 되는 과즙이 터져 나오고, 씹는 맛이 있는 조화롭지 못한 채소에요.
이름은 쿠번이라고 해요.
언젠가 한 번, 탈리안이 싫다고 했던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으, 불편해…. 근데 질, 나는 이걸 먹어도….”
“언니 요리에는 재료로 선지를 넣었어요. 비린 맛과 냄새를 잡아내려고 꽤 노력했으니까 맛있을걸요?”
꽤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맛에 있어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겠죠.
질은 요리를 상당히 잘하니까요.
“아, 그으래? 누굴 닮아서 저렇게 싹싹하대.”
“이젠 칭찬해도 나오는 거 없어요.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거고, 안긴다거나 하는 어리광도 안 부릴 거니까요.”
칭찬한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차갑게 대답하네요.
이에 라피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양 사이드에 앉아있는 탈리안과 크리미아를 한 번씩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어요.
“탈리안, 크리미아. 질 안쪽에 있는 베리아를 하루빨리 없애야 할 것 같아. 마기도 그렇고.”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가 다른 것 같지만, 동감이에요.”
질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몸속에 갇혀있는 베리아도 그렇고 마기도 그렇고 이른 시일 내에 사라지게 생겼어요.
사실 없는 편이 질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질이 혼자 더 많은 걸 해내는 데에 있어서는 있는 편이 낫겠지만요.
자신에게 새로 생긴 힘을 빼앗아간다는 말에 삐져서 대꾸하기도 싫은지, 질은 평소에 하던 식전 인사도 하지 않고 묵묵히 요리를 먹기 시작했어요.
“삐졌어?”
“아뇨. 안 삐졌어요.”
“에이, 삐졌네. 삐졌지?”
“안 삐졌다니까요.”
라피아는 포크에 고기조각을 하나 꽂아놓고 흔들며 질을 놀려댔어요.
마지막 대답을 듣고서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라면서 고기조각을 입에 넣어버렸죠.
질은 그런 라피아를 보고서 이렇게 짓궂게 굴어도 미워할 수가 없다면서 투덜거리기만 했어요.
“라피아, 밥부터 먹고 떠들어요. 질도 화 풀고요. 베리아와 마기를 없애는 건 질을 위한 일이에요.”
“삐지지도 않았고, 화 안 났다니까요!”
라피아는 장난을 그만뒀는데, 이어지는 탈리안의 잔소리가 계속되어서 조금 짜증이 났나 봐요.
퉁명스레 말하는 걸 보니, 방금까진 삐진 척만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젠 진짜 삐진 느낌이에요.
어쩔 수 없이 탈리안은 질을 달래기 위해 혹할만한 말을 했어요.
“…질, 마기라면 모를까 베리아는 확실히 없애야 해요. 그렇게 마기를 다루고 싶다면 제 것을 줄 테니까요.”
“언니의 마기…? 아, 언니도 마군주니까….”
“하지만 제 마기를 주는 건 베리아와 그녀의 마기를 확실하게 없앤 뒤에요. 계약도 다시 살펴봐야 하고요.”
“아, 알았어요. 언니의 마기라면…. 베리아의 마기보다 더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질은 깊게 고민에 빠지다가도 마기가 탈리안의 것이라는 걸 계속 중얼거렸어요.
‘언니의 마기, 언니의 마기라면….’, ‘베리아의 마기보다는 언니의 마기가….’라고 말이에요.
이런 중얼거림을 멈추게 만든 것은 크리미아였어요.
“그 이야기를 교회 사람인 제 앞에서 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성녀 후보생입니다. 이런 대화는 그냥 지나칠 수가….”
“뭐래, 마군주를 앞에 두고서도 수프나 홀짝이고 있으면서.”
라피아의 말대로예요.
마기를 이용하는 것부터 지적할 거라면, 자신의 앞에 있는 마군주인 탈리안부터 어떻게 했어야죠.
“저는 저번의 마법 때문에 몇 달은 더 신성력을 모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로 마군주를 상대하라는 말입니까!? 완전히 신성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데 강요하는 겁니까!”
“어으, 귀 아파…. 그렇게 싫어하면 능력이 없더라도 싸워봐야 하는 거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싸워보고 말해야지. 시원하게 따귀라도 날려보지그래? 내가 허락할게.”
라피아의 말에 크리미아는 탈리안을 슬쩍 훔쳐봤어요.
그러자 자신을 힘 빠진 눈으로 지긋이 바라봐오는 탓에 다시 시선을 수프가 담긴 그릇으로 향했어요.
이상하게 그 눈이 깊고 날카로워 보여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듯했어요.
‘라피아의 말대로 때리기만 해봐라.’라는 듯이.
“…본인은 엄청나게 싫어하는 거 같습니다만.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자면, 베리아를 없애려면 그란스리를 모시는 미카미교에 가시는 게 빠를 겁니다. 베리아의 말에 따르면 그들을 연옥이라는 감옥에 가둔 것이 그란스리니까요. 마군주를 없애는 법이라면 그란스리의 신자들이 제일 잘 알고 있겠죠.”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마군주인데요. 제가 교회에 들어가면 큰일이 나지 않을까요.”
소식도 없이 갑자기 마군주가 들이닥치면 그것보다 무서운 건 또 없겠네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들어가도 이단 심문관이 전투태세로 맞이하러 올 것이 뻔해요.
탈리안은 다른 사람들 눈치 같은 건 일절 신경도 안 쓰겠지만 질이나 라피아는 안절부절못할 거에요.
“마군주라면 알아서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마군주에게 정보를 줬다는 것만으로 저는 이단으로 내몰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고작 그 정도로, 돌아갈 때에 밥값이라도 내고 가세요.”
“죄송하지만 지금 밖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서 못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빈정거리는 탈리안을 보고도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능숙하게 넘어가는 크리미아에요.
“언니, 요리한 건 전데요? 재료비도 제가 번 돈으로 썼는데….”
“집에 있는 재료가 아니었나요? 그럼 저희가 알현실에 있는 동안 장을 보고 온 거였어요?”
“그럼 이 요리들에 쓰인 많은 재료가 어디서 났겠어요.”
“아, 그, 흠! 그것보다는 미카미교에 가는 일정부터 잡도록 해요. 질에게도 쉬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다음 주에 갈까요.”
크리미아와 다르게 탈리안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가 봐요.
같은 마군주인 베리아는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면서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실수와 연기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부끄러움을 얻는 크기는 연기하는 쪽이 더 크지 않을까요.
“언니는 예전부터 불리할 때만 뻔뻔해서…. 그래도….”
“뭐라고 했나요?”
중얼거리는 탓에 끝의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되묻는 탈리안이었지만, 질은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다른 말을 하며 대화 주제를 돌렸어요.
“아니에요. 그럼 교회에 가기 전까지는 그동안 못했던 앞마당 관리부터 해야겠네요!”
“질, 밥 다 먹고 나면 앞마당을 가꾸기 전에 계약서부터 보여줘요. 알겠죠?”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크리미아 씨가 설명만 잘 해줬으면 안 생겼을 문제였다구요.”
탈리안이 질을 걱정하지 않는 날은 앞으로도 없겠죠.
본인이 말하기를 어린애가 아니라고는 하는데, 외관이야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아직까지는 하는 생각이나 행동 같은 걸 보면 어린애를 벗어나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물론, 당장 오늘 아침에 탈리안에게 했던 일을 떠올려본다면 확실히 어린애라고만 보기에도 어려운 면이 있지만요.
그러니 어린애보다는 청소년으로 불리는 게 맞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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