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13화 (113/189)

〈 113화 〉 황녀가 말해주는 비밀

* * *

탈리안과 라피아는 질과 헤어진 뒤, 제1 알현실에 도착했어요.

황녀가 이 사건의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에 대해 가진 정보가 없으니 당장 대처가 가능한 것도 아니라 알아만 두자는 말이 나왔거든요.

크롬웰은 말 그대로 황녀를 돕기만 했고, 알고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다고 했으니까요.

“오라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높으신 분들이잖아요. 저희가 이해해줘야죠.”

알현실은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기나긴 다리를 제외하면 사방이 물에 잠겨있는 듯한 장소였어요.

도중에 끊어진 다리의 앞에는 탈리안이 말한 ‘높은 분’이 앉는 왕좌와 그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의자가 1.5층은 높아 보이는 위치에 줄지어 늘어져 있었죠.

그에 비해서 탈리안과 라피아가 서 있는 다리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어요.

이 때문인지 라피아는 제자리에 털썩 앉아버렸어요.

“…있잖아, 이제 와서긴 한데. 네가 일본에 있을 땐 몇 년이었어?”

“2017년인데, 이게 왜 궁금한 거죠?”

“왜기는, 심심하니까 그렇지. 17년이구나, 나랑 별로 차이 안 나네. 나는 22년이거든. 시간도 제각각이네.”

“그렇네요. 이건 조금, 의외에요. 세계가 다르니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도 있는 거죠.

너무 자세하게 파고들면 그만큼 피곤한 것도 없어요.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라피아, 조금은 더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까요? 저희 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바닥에 앉아있는 건….”

“너랑 있으니까 이렇게 편하게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이랑 있었으면 옆에 기둥에 삐딱하게 기대 있었을 거야. 얼마나 불편한데 그게.”

“그, 그런…. 가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자신이랑 있어서 편하게 있을 수 있다는 말에 탈리안은 잔소리를 멈췄어요.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누그러진 모습이네요.

라피아도 그걸 알고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탈리안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너 은근 단순하구나?”

“나, 나쁜가요! 그동안 친구가 부족했다고요! 질은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하나 있던 친구는 연옥이라는 곳에서 잃어버렸으니, 다시 생긴 친구가 저렇게 말하면 누가 엄하게 말할 수 있겠어요.

친구를 한번 잃고 나서 이 세계로 넘어온 탈리안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할 거에요.

얼마 만에 생긴 친구인데요.

“알아, 약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동물 같은 느낌이지.”

“…맞아요.”

게다가 취향마저도 똑같은.

“이런 데서는 잘 맞는데 말이야.”

“질에 한해서만, 아닌가요?”

“그건 아니지, 이제 지구라는 같이 공감 가능한 게 하나 더 생겼잖아.”

여기에 더해 고향마저도 같은.

“그러니 이 정도는 좀 봐주세요. 안 그런 척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굳이 숨길 필요가 있어? 다 드러내도 되잖아.”

“그런 건 저랑 안 맞아요.”

사람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 세계를 초월해서도 적용되는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에요.

“알지, 네가 어떤 녀석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질은 안 넘겨줄 거지만.”

“…괘, 괜찮아요. 가족이라는 자리는 저만 가질 수 있는 자리니까요.”

이번에도 탈리안을 도발하는 건 잊지 않는 라피아네요.

그래도 조금 친해졌다고 이 정도 도발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는 것을 보니 친구랑 싸우기는 싫은가 봐요.

하지만….

“아 그래? 그럼 질이랑 찐득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를 내가 가져가는 건 상관없다는 거지?”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라피아가 아니죠.

탈리안이 기껏 조용히 넘어가려 하는데 더 도발하는 것 좀 보세요.

“가족의 힘을 얕보는 건가요? 언니라는 칭호는 제가 처음 가져간 거라고요. 그, 그리고! 질의 첫 키스도 제가 가져갔고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착해질 수가 있는 걸까요.

약간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대꾸했지만, 이 정도라면 라피아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준은 될 거에요.

“뭐? 야, 가족이라면서 첫 키스는 왜 가져가? 아직 나도 못해본 건데!!”

아니었네요.

라피아는 질과 사랑 중인 사이잖아요.

첫 키스, 중요하죠.

탈리안이 말을 잘못 꺼냈어요.

“키스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가족이라지만 피도 안 이어졌는데!”

탈리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에서 라피아의 기를 꺾기에는 충분했어요.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적절하지는 않아 보이는 건 둘째 치더라도요.

“그건! 그래도 그렇지, 부부도 아니고 가족이랑 키스하는 사람이 어딨어! 너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니까?!”

“찐득한 사랑을 나눌 거라면서요, 그럼 앞으로도 그렇고 그런…. 질에게 어울리지 않는 외설적인 일로 질을 더럽혀갈 거란 말이잖아요! 이 정도는 양보하세요!”

“더, 더럽힌다고?!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그러는 네가 질하고 키스한 건 질을 더럽힌 게 아니고?!”

아쉽지만, 라피아의 이번 공격은 의미가 없었어요.

“아쉽지만 질이 저한테 키스해온 건데요! 유감이네요!”

이 말대로, 질이 홧김에 탈리안을 제압하고 해온 키스였죠.

하지만, 이 사실을 라피아가 믿을까요?

아닐 거에요.

“질이…. 먼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부터 바르시지!”

“질을 그렇게 못 믿다니, 그렇게 믿음이 부족해서야 되겠어요? 사랑보다는 신뢰부터 다시 쌓아야겠네요!”

“너, 너어! 말 다했…?!”

다시 좋아졌던 사이가 깨질 것만 같은 순간에 라피아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휙 돌렸어요.

왕좌 뒤에 있던 거대한 문이 위로 슬라이드 되며 열리더니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딱 보더라도 탈리안과 라피아를 이곳으로 부른 사람들이에요.

“하던 이야기는 나가서 계속하자. 첫 키스를 빼앗아간 건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계속하려는 거에요? 질과의 시간이라면 지금 충분히 즐겨둬도 되는데요. 어차피 끝까지 옆에 있을 사람은 저니까요. 언젠가는 질과 헤어질 거, 잘 알고 있어요.”

“하, 하, 하. 야.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이건 안 봐줘. 일 끝나면 보자.”

모두가 자리에 앉은 뒤에는 한발 늦게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요.

몸에 딱 달라붙는 흰색의 제복에 망토를 두른 여자였어요.

제복에는 수많은 훈장이 달려있어, 셀 수 없는 공훈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게다가 그녀의 걸음걸이에서는 베리아에게서도 느낄 수 없던 절도와 무게감이 느껴졌어요.

이 한 명이 등장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의자에 앉아 수군거리는 것도 멈출 정도로요.

“모두 모였는가? 소개부터 하자면 본인은 황제 루스 아발테인의 대리로 이 자리에 온, 황녀 레나이 아발테인이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이번에 모인 이유는 다들 알고 있을 테지. 마군주 단탈리안이 그동안의 애매한 태도를 정리하고 황궁의 편에 설 지, 마군주의 편에 설 지, 둘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해서.”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레나이 황녀. 제가 당신들의 적이 되기로 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을 대단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있으니 탈리안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요.

그렇지만 황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대, 금서의 주인 단탈리안. 현재 리니아 가문이 마군주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현재도 진행 중인 사실이다만.”

“그 때문에 저희 마군주를 셋이나 동원하여 리니아 가문이 통치하는 도시의 지하에 잠입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요.”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역시 같은 마군주인 그대가 마음속에서 우리에게 칼날을 갈고 겨누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나머지 두 마군주에 대해서는 계약으로 묶어두었지만, 그대는 아니지 않나.”

황녀의 입장에서 보는 탈리안은 그저 재앙이라는 문을 통해 이 세계로 넘어온 침략자, 다른 마군주와 똑같이 보일 거예요.

베리아와 같이 속내를 알 수가 없다면 위험분자인 것은 똑같죠.

하지만 지금까지 탈리안과 그 동료들을 잘 이용하다가, 왜 굳이 지금에 와서 어느 쪽에 설지 물어보는 것일까요.

“…황녀님의 태도에 따라 바뀌겠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하지 않나요. 솔직히, 기분이 나쁘네요.”

“재차 말하지만, 본인은 황제 루스 아발테인의 대리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무례를 삼가도록.”

“저는 이 세계의 백성이 아니에요. 황녀님과 황제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저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나온 거라고요?”

약간 험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래도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탈리안도 조금 더 생각해서 말을 했으면 좋겠지만요.

황녀를 노려보는 것을 보니,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네요.

“서로 평화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가?”

“먼저 기분 나쁘게 말씀하신 것은 황녀님이시잖아요.”

처음 보자마자 마군주이니 어떻게 믿냐며 의심한 것은 황녀이니 잘못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게 있다면, 상대가 황녀라는 것이겠죠.

“그대에게 직접 거둬들인 여자아이가 하나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황궁의 몰락을 바라고 있다고 말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네요.”

“그 아이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대가 말하기에 달렸을 뿐이지. 오히려 나는 그 아이에게 관심이 많아.”

황녀는 계속 서서 말하기도 지치는지 왕좌에 앉아 턱을 괴고는 내려다봤어요.

“황녀님이 지르니트에게?”

“마군주를 몸에 담은 백성이라, 얼마나 희귀한 케이스라고 생각하나. 잘만 한다면 재앙과 견줄만한 전력이 될 테지. 애초부터 그러할 운명이었을 테니.”

단순히 말해서 황궁 아래에 두어 전력의 일부로 사용하겠다는 말이네요.

하나부터 열까지 탈리안의 신경을 긁어놓기만 해요.

이래서야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죠.

“계속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거라면 돌아가 봐도 될까요?”

“소환장의 계약에 묶여있을 텐데 잘도 말하는군, 아무 대가도 없이 그러겠다는 것이 아니니 들어보도록 해.”

“대가가 있든, 없든. 지르니트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아끼는 모양이나, 그 아이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회의실에 다녀왔을 때에 능력 전부를 들여다보았으니까.”

“감히 누구 마음대로…!”

“…흠. 정확한 능력치를 알게 되었을 때는 감탄할만한 수준이었다. 베리아를 품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10세의 아이라고는 생각 못 할 힘을 가졌는데, 랭크로 바꿔 간단히 설명하자면…. [S+]급이라고 할 수 있겠지.”

황녀는 탈리안의 분노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혼잣말을 시작했어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느낌보다는 ‘그땐 그랬었지.’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그리고 황궁에서 측정한 것이니 황녀의 말에 거짓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는 탈리안과 라피아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었어요.

그동안 자신들의 뒤에서 열심히 실력을 늘리며 따라오던 지르니트가 [S+]랭크라니, 쉽게 믿을 수 없겠죠.

“황녀님,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현자의 양녀인 아스티엘 라피아가 말씀 좀 올려도 될까요?”

“…허락한다.”

“지르니트는 불과 두 달 전만 하더라도 마법학원에 입학했을 때, 모험가의 평균인 [D]랭크조차 받지 못했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S+]랭크를….”

“말은 제대로 경청하여 몇 번이고 곱씹어야 한다. 우리는 그 아이의 ‘실력’이 아니라, ‘능력’의 전부를 들여다보았다고 했다. 지금 그 아이에게 충분한 경험과 실력만 갖추어진다면 그 누구도 이길 자가 없겠지. 라피아, 그대는 [A+]였던가?”

“…[S­]입니다.”

마군주 베리아와 싸우면서도 비장의 무기를 꺼냈는데도 고전하며 싸워야 했던 라피아가 [S­]랭크에요.

랭크는 위로 올라갈수록 한 단계라 할지라도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에 [S­], [S], [S+]끼리의 차이는 땅과 하늘차이에요.

현자라고 불리는 크롬웰이 [S]랭크인걸요.

그런데 능력으로만 따지면 자신보다 두 단계나 더 높다니, 이해가 안되는 게 당연하죠.

“그리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대들이 지르니트 페어차일드의 자세한 출신을 모르기에 그러는 것이니.”

“출신이라고요? 지르니트는 그저 평범한….”

탈리안이 말하려는 것을 대신하자면….

그저 마나를 다를 줄 아는 평범한 시골 소녀…. 라고 말해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딘가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금방 입을 다물어버렸죠.

“단탈리안, 그대의 짐작이 맞다.

평범한 소녀라기에는 몸에 담을 수 있던 마나의 양이 상당히 방대했지. 적게는 일반인의 수십배부터 많게는 수백배는 되는 마나량을 담을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게다가 보통의 인간이 몸에 베리아를 가둬놓고,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한 부분이지.

또한, 실력의 성장 속도는 어떠한가? 분명 누군가의 도움은 있었을 테지만,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해치운 의뢰만 세 자릿수에 육박한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성장 속도라 볼 수 있겠군.

기껏해야 60일이라는 적은 기간으로 말이다. 하루에 두세 개의 의뢰를 해낸 것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양이다. 보통의 다른 종족들에게는 불가능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

마지막에는 불완전하지만, 그대…. 단탈리안을 마군주 베리아에게서 구해내는 것까지 성공했다.

너무 섣부른 생각이 아니냐고? 이런 것만으로는 특별하다고 하기에 부족하다고? 그럼 산골 마을 페리시니…. 그곳이 황궁에서도 아는 자들만 아는 실험장이라면?”

“…실험장?”

실험장이라는 말에 탈리안과 라피아 둘 다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질의 문제만으로도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벅찬데 질이 살던 장소까지 특별한 곳이었다니.

“서로가 바쁘니까 짧게 요약해서 말해주도록 하지.

임페리얼 가디언이란 종족이 있다. 마법으로 여러 종족의 정수를 뽑아내어 탄생시킨 인조인간이지.

허나, 그 과정이 비윤리적이고 모든 종족의 반감을 사는 것이었기에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황궁의 이런 노고에도 성과가 없어 실험은 100년 만에 종료되었다.

그렇기에 페리시니는 일반 마을을 연기하도록 위장했지만, 4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연기가 아닌 일반 백성이 살고 있는 평범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정도 정수의 일부 특성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지르니트 페어차일드와 그 동생 자스네르 페어차일드다.

마지막으로, 그중 하나를 구해서 데려온 것이 그대 단탈리안이지.”

“…지르니트가 임페리얼 가디언이라는 종족이라고요? 책에도 안 나와 있던 정보인데…. 그보다도 역시 알고 있었지만, 황궁은 제정신이 아니네요. 어떻게 그런 실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는거죠?”

그야 탈리안이 화낼 만 한 일이에요.

탈리안이 살던 지구라는 곳이나, 황녀가 사는 이 세계나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당히 거부감이 드는 일일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그 생명을 상대로 자신의 입맛대로 다루기 위해 여러 실험을 해왔다니 용서받지 못할 일이에요.

당장에 다른 종족의 허가도 받지 않고 정수를 채취, 아니, 강탈을 해왔으니 그 수가 얼마일지 짐작도 되지 않아요.

여기에 더해 뽑아낸 정수의 질이 좋지 못하다면 또 다른 정수를 몇 번이고 뽑아내었을 테니,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을지 아무도 모를 테죠.

“이미 계획은 중지된 지 400년 가까이 지났다고? 그대가 데리고 와주었기에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고 말이야. 정직하게 모든 걸 토해내자면, 아직도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아서 당장이라도 뛰쳐 가서 남은 정보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야. 그 실험이라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거든. 멋대로 만들어내고, 멋대로 버려둔다니 얼마나 추악한가.”

황녀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 거에요.

추악하다고 말할 때의 표정이 실험을 진심으로 혐오하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탈리안도 일단, 일단은 황녀를 매도하는 것을 그만두었죠.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가 뭔가요. 황궁이 만든 실험체이니까 지르니트를 넘기라고? 애초에 이곳에 모이게 된 원래의 목적은 저와 라피아가 어느 편에 서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그 때문에 말을 꺼낸 것이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니 잘 새겨듣도록.”

탈리안과 라피아가 어느 편에 설지를 알기 위해서 질의 이야기를 꺼냈다니, 이유가 뭘까요?

탈리안과 라피아를 궁금하게만 만드네요.

“지르니트의 혈통에는 황궁의 실험에서 새겨진 각인이 숨어있다. …그렇게 죽일 듯이 째려보지 않아도 돼. 내리는 명령을 다 들어야 한다는 종류의 각인이 아니라, 그저 황궁이 위험하면 자신도 모르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당장 달려오게 될 뿐이니까. 하지만,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마법에 노출되면 그리되는 것이니…. 눈에 힘 좀 풀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잖나.”

결국은 황궁에 몸이 속박되어 있다는 이야기네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탈리안과 라피아가 아니죠.

자리가 자리라서 힘껏 참고 있을 뿐인 거에요.

“그러니 이에 걸맞은 대가를 준다고 했을 거다. 단탈리안, 그대와 지르니트에게 제대로 된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동안 마법학원에서 강제로 교사 일을 하게 했던 명령과 황궁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다시 거둬들이도록 하지. 지르니트에게 특별한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 황궁이 지르니트에게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하시겠다는 건가요? 저와 라피아가 황궁의 편에 서는 조건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에요.

아군이 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을 보장받는다니 고민이 될 제안인걸요.

그렇지만 탈리안은 이미 아비고르에게 자신이 동맹에서 빠지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해요.

당당하게 아비고르에게 동맹을 파기하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 탈리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탈리안이 아비고르를 만나봐요.

엄청 부끄러운 상황이 만들어질 거에요.

“한 가지 더 남아있다. 지르니트를 한 달에 한 번, 본인과 단둘이 있게 해주었으면 해. 다른 것들은 구두 계약으로 해도 상관없지만, 이것만큼은 마법에 의한 종속계약을 맺어주었으면 하는군.”

“…이유는요?”

“공적으로는 실험체였던 지르니트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지르니트라는 아이에게는 호기심이 가더군. 애초에 그 아이가 가진 비정상적인 외모도 인공적인 것이지만, 그 얼굴을 보고서도 호감이 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 않겠나.”

어떻게 된 게, 질의 외모는 통하지 않는 곳이 없네요.

정말 한두 명을 제외한다면 모두에게 통하는 외모 같아요.

“예전이었다면 이유도 묻지않고 거절했겠지만, 지르니트의 생각도 물어봐야 하니 한 달의 시간을 주세요. 지금도 어쩔 수 없이 황궁에 찾아온 거니까요.”

“…미리 듣지 못한 것인가? 지르니트는 이 제안에 바로 승낙했는데 말이야. 일단은 보호자인 그대들의 허락만 받으면 되는 일인데.”

“…네? 그래도…. 상의를 좀 해보고 와야…. 흐윽?! 왜 옆구리를 찌르는 거예요!”

질이 상의도 없이 멋대로 일을 결정했다는 사실에 놀란 탈리안은, 라피아가 옆구리를 찔러서 한 번 더 놀랐어요.

“지르니트가 괜찮다면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따로 있지.”

“…황녀님, 한 가지조건을 수정해도 될까요?”

라피아의 말을 듣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의 추가 조건을 더 걸겠다는 탈리안이에요.

지금까지만 하더라도 탈리안과 질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것 같은데요.

“들어보고 결정하지.”

자신이 내건 조건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탈리안을 보고서 기분이 상해, 지금껏 내건 조건 모두를 철회할 수도 있을 텐데.

황녀도 어지간히 인내심이 좋은 것 같아요.

“저와 지르니트는 황궁과 마군주 둘 중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도 황궁이 저희에게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겠어요.”

“…마군주 단탈리안, 그대는 방금 본인이 말한 것을 듣지 못했….”

역시 인내심 좋은 황녀라고 하더라도 탈리안과 라피아가 황궁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모든 조건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지르니트를 내어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탈리안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황녀의 말을 바로 끊어버렸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아서인지, 황녀는 탈리안을 가만히 노려보다가도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어요.

보통의 다른사람들처럼 눈치라도 봤으면 위세로 눌러 찍기라도 했을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죠.

“…하아, 알겠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계약서에 담았으니, 돌아가서 내용을 꼼꼼히 읽어본 뒤 계약하도록.”

“뭔가 속임수라도 쓸 것 같았는데, 전혀 문제없네요. 의외에요.”

공중에서 나타난 계약서를 천천히 살펴보고는 ‘황궁이 이럴 리가 없는데….’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말하네요.

그렇게 못 미더운 걸까요? 황궁이 탈리안에게 무슨 일을 했길래?

그렇지만 황녀의 판단도 이상했어요.

마군주를 포기하고 질을 선택하다니요.

탈리안보다 질을 연구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라피아, 그대는 황궁이 위험할 때 도와주겠지?”

“미천한 몸이지만 부르신다면 와야겠죠. 아버님은 황궁이랑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가 없는 분이시고, 저는 아버님에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까요.”

탈리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라피아는 황궁이랑 떨어질 수 있을 리가 없죠.

덕분에 황녀의 얼굴이 약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에요.

“그걸로 되었다. 따로 받고 싶은 보상 같은 게 있나?”

“으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가 베리아랑 싸우면서 몸이 많이 약해졌어요. 황궁의 치료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던데….”

어디가 아픈 것인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남들 앞에서 말하기에 어려운 것일 수도 있겠어요.

어디가 얼마나 안 좋아진 건지 누군가가 알아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이겠죠.

그게 비록 황녀와 그 측근들 앞이라고 하더라도요.

“이해했다. 그대에게는 나중에 따로 단탈리안과는 다른 계약서를 보내주도록 하지. 모두 돌아가 보도록.”

알현이 끝난 것을 알리는 황녀의 말과 손짓에 탈리안과 라피아는 허리를 숙인 뒤 알현실을 빠져나왔어요.

어쩌면 질과 탈리안이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만약 그랬다면, 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 지금보다 더 떠들썩해서는 대화의 진행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탈리안이 필요 이상으로 황녀의 심기를 건든 것만 제외한다면 무사히 일을 마쳤으니까요.

그리고, 마음대로 제안을 수락해버린 질에게는 탈리안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겠죠.

안타까운 일이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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