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12화 (112/189)

〈 112화 〉 크롬웰의 짧은 강의

* * *

탈리안이 질을 찾아냈을 때는 제3 회의실에서 크롬웰과 함께 나올 때였어요.

“질! 한참 찾았잖아요!”

“언니…. 저 베리아가….”

“아, 아버지?! 무슨 일로 여기에….”

“피아,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별일 없었느냐?”

4명이 만나자마자 각자 서로 할 말만 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잠시간의 정적이 일더니, 제일 먼저 탈리안이 말을 꺼냈죠.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여기서는 대화가 안될 것 같네요.”

다행히도 이번에는 현자까지 탈리안의 말에 동의했어요.

아직 제3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적어도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엿듣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하는 게 편할 거에요.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요.

탈리안이 정한 조용한 곳은 황궁의 수많은 정원 중 하나였어요.

“여기, 마법 학원이랑 경치가 비슷하네요.”

“물론이지. 이곳을 본떠서 만든 것이 마법 학원이니 말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누구부터 말할 거에요?”

“저랑 라피아는 아직 일을 마치지 않았으니, 질과…. 현자 당신에 관한 이야기부터 들어보도록 하죠.”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 멋대로 회의실까지 다녀왔으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겠죠.

같이 다녔던 것이 현자이기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었다는 것에는 마음이 놓였겠지만….

회의실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모르니까요.

더구나 현자와 같이 나왔으니 말이에요.

“별일은 없었어요. 황궁에서는 최대한 배려를 해주겠다면서, 몸 안에 깃든 베리아를 최우선으로 없애자고 했었는데…. 제가 반대한 게 전부예요.”

“반대했다니, 질!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이 아가씨의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겠나, 아직 나이가 어려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황궁 녀석들만 애먹었지.”

이전에도 말했지만, 질은 베리아의 힘을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기에 반대했던 거겠지만, 황궁의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한 걸까요?

아니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네요.

다시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라면서 말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밖으로 나온 거예요? 완전히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나오지 못했을 텐데.”

“제가 마기를 사용하는 걸 보여줬어요. 아직 불완전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아서…. 언니?!”

질이 마기를 썼다는 말에 탈리안은 한껏 놀라 질의 어깨를 잡으며 흔들어댔어요.

“마기를 썼다고요? 어떻게!? 침식되었다고는 해도 쓰는 건 별개의 문제일 텐데…!”

“자, 잠깐만, 놔주세요! 저, 이미 베리아랑 한번 싸워서 이기기도 한 걸요!”

“이겼다고…. 요? 설마…. 그런 일이…. 아니 그렇지만 이기지 못했다면 질이 멀쩡히 깨어났을 리도 없었겠죠…. 그렇지만, 정말 어떻게….”

베리아와 싸워 이겼다는 사실까지 듣자 질을 흔들던 손도 놔주고 뒷걸음질 치네요.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을까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잠에 빠져, 내면에서 베리아의 마기에 집어 삼켜져 있었으니 오히려 다루지 못하는 것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죠.

그만큼의 시간을 마기와 같이 지냈다면 능숙하게 다루고, 베리아까지 이겨내는 게 정상인 거에요.

“나도 두 눈으로 직접 봤다네, 마나와는 상당히 다른 면이 많을 텐데도 잘 다뤄내는 것을 보니 신기할 따름이더군.”

“마군주도 마기를 주로 사용하며 마나를 다룬다고 해도 조심스럽게, 한 번에 한 가지의 힘을 소량만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질이 마기를 다루다니….”

“말했었잖아요. 저, 베리아를 몸에 가둬놓고 마나처럼 마기를 뽑아서 쓰고 싶다고…. 그럴 능력이 없었다면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질의 자신 넘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탈리안은 입을 다물었어요.

질도 현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녀석들도 딱하지, 이 아가씨가 마기를 다루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거든. 겨우 끄집어낸 것이 ‘마기는 위험하며, 이단으로 내몰리는 힘이니 감시가 필요하다.’라는 말이었으니.”

“아니 근데, 마기까지 다루게 됐으면서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 거였어?”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많이 부족하니까요.”

혼자서 많은 일을 해냈고, 해내려는 질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간섭할 틈이 없었어요.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예요.

질이 앞으로 할 일을 하지 못하게 생각을 바꾸도록 회유한다거나, 다른 일에 신경 쓰게 한다던가….

그런 일들은 불가능해 보였죠.

지금은 탈리안도, 라피아도 그걸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예요.

“다음으로 이 늙은이가 이 아가씨와 함께 있던 이유에 대해서 말해도 되겠는가?”

“좋을 대로 하세요. 그 대화에 관심 있는 건 질과 라피아뿐이겠지만.”

“자네도 조금의 관심은 있을 것 같은데? 이 아가씨가 다루는 마기와 마나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이니.”

“마기를 다루지도 못하면서 마기와 마나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요?”

탈리안으로서는 믿음이 안 갈 수밖에 없죠.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마기의 ‘ㅁ’자도 다뤄보지 못한 현자가, 마기와 마나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니.

“왜? 불가능해 보이나? 이래 보여도 현자라 불리는 몸이네. 만물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노블 엘프.”

“…푸흡! 아, 죄, 죄송해요, 아버지! 만물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아비고르가 떠올라서…!”

라피아, 아니 백하윤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이런 이름이 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흔했더라도 백하윤의 반응을 본다면 놀림당하거나 비웃음을 사기에 적당한 칭호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크롬웰 역시 아비고르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어요.

“괜찮다, 피아 네가 무례하더라도 언제 화 한번 낸 적이 있더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딸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저와 질의 사이가 저런 걸까요….”

인자한 웃음을 보이는 크롬웰을 보고 라피아는 고개를 숙여버렸어요.

나름대로 반성을 하는 방식이겠죠.

실례를 범했는데도 혼내지 않으니, 스스로 잘못을 곱씹는다거나, 뭐 그런 거 말이에요.

“언니가 더 다정해요!”

“아, 으응…. 그래…. 그래서 아버지, 마기와 마나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마기와 마나가 충돌하는 순간, 또는 섞이는 순간에 시간이 완전히 정체되어 버린다네. 그러니 마군주나 마기노들도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마기나 마나중 한가지만을 사용하고, 절대로 같이 쓰는 일은 없지.”

“시간이 멈춘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왜 위험한데요?”

질은 갑자기 몸을 내밀면서까지 크롬웰에게 질문을 해왔어요.

부담스러웠던지 크롬웰은 양손을 손바닥이 보이도록 들어 진정하라고 말했죠.

“알아서 다 설명해줄 테니 보채지 말게나. 이 사실을 알기까지 나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먼저 마기와 마나가 어떤….”

이렇게 시작된 크롬웰의 강의는 한 시간은 기본으로 넘어가 세 시간이 지나갈 때쯤이 되어서야 끝나가려고 했어요.

단순히 마기와 마나가 충돌해서는 발생하지 않으며, 마기와 마나의 수준이 비슷하거나 같아서 섞이는 것이 가능할 때 멈춘다거나….

시간이 멈춰도 마기와 마나가 존재하는 그 공간만 시간이 멈추고 주변은 멋대로 시간이 흘러가 버린다거나….

시간이 멈춘다면 그건 세계를 만든 신들에 반하는 것이고, 이를 알아차린 그란스리나 태초신이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는 등….

속성이 반대되는 것이 정확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아주 세밀한 조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도 했죠.

그 원리부터 결과까지 다 설명해야 했으니 어쩌면 하루가 넘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몰라요.

물론, 신이 찾아온다는 사실만큼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현자이기에 겨우 세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설명해낸 것일지도 몰라요.

정말 필요한 부분만 집어서, 질과 탈리안, 라피아가 이해 가능한 말들로요.

“그럼 지금 질이 상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는 거 아닌가요? 실수로라도 두 가지를 같이 쓰는 날에는 신을 만나게 되는 일도….”

“탈리안, 내가 지겹게 말하지만 태초신은 모습을 감춘 지 오래야. 그 자식들인 그란스리는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는 해도 직접 개입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그란스리가 존재감을 내뿜고 있기는 하다면, 재앙과 마군주들을 막아주지 않는다고 신자들 사이에서 원성이 꽤 클 것 같은데요.

알고도 모른 척을 하는데도 신앙심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면 딱히 나설 필요를 못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돌아선 사람들이야, 슬리브스터나 산적 같은 집단에 들어가 있겠죠.

“생각보다 신에 대해서 관심이 많구나, 피아. 하지만 네 말대로다. 지금 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걱정할 부분이 있다면…. 지르니트의 시간만 멈추고 다른 이들의 시간만 흘러가는 상황일 게다. 다른 이들에게는 지르니트가 멈춘 것처럼 보일 것이며, 지르니트에게는 주변의 시간이 일순간에 지나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주변을 보게 될 테지. 혼자 남고 싶다면 두 종류의 힘을 한 번에 써도 말리지 않겠지만, 쓰고나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이단자로 낙인이 찍힐 터.”

질에게 있어서 문제점이 될 수 있는 것을 크롬웰이 전부 말해줬어요.

힘을 다뤄내지 못한다면 그대로 혼자서 세계와 단절되어 버리고, 최악의 경우 신을 만나게 되는 것.

힘을 다뤄낸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이단자로 찍혀버린다는 것.

이렇게 보니 문제라곤 두 가지밖에 없어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한 만큼 그 문제의 심각성이 높아요.

어떤 것이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뿐이죠.

“하지만 방금 황궁에서는 감시만 붙인다고….”

“녀석들을 온전하게 믿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지.”

“아버지, 한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힘을 완전히 다뤄내게 된다는 말을 굳이 하신 건…. 연습을 할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에요.

현자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질이 마기와 마나를 완벽하게 다뤄낼 방법이 있다는 말이겠죠.

“좋은 지적이구나, 피아. 너와 친하게 지내주기에 선물이라도 할 겸, 이 늙은이가 도움을 조금 줄까 싶어서 말이다.”

“진짜요?!”

“이 늙은 나이에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이득을 얻겠다고 그러겠느냐?”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진 크롬웰이 질을 속여 얻을만한 것이 없기는 해요.

그리고 라피아의 아버지라면, 현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 거예요.

“현자라 불리는 당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도움이란 거, 질이 안전한 건가요? 만에 하나 잘못되거나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저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이거야 원, 어디 마녀가 무서워서 선행도 쉽게 못 베풀겠구먼, 걱정하지 마시게.”

“질도 명심해요. 어딘가 잘못된다면 저한테 크게 혼난다는 것을.”

한번은 크롬웰에게 말하고는 한번은 질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탈리안이에요.

걱정할만한 일이라는 건 맞기에 탈리안의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질은 그렇지 않았나 봐요.

“언니는 걱정이 과해요. 저, 베리아도 이겼는걸요.”

“과한 자신감은 자만으로 이어져요. 그래도…. 믿어볼게요. 조심하세요. 저는 라피아와 함께 알현실에 다녀올게요. 먼저 집에 가 있어도 좋아요.”

질도 베리아를 이긴 것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베리아와 싸우는 것은 도망쳐서 언제든 다시 기회를 엿볼 수 있어요.

반면에 마기는 한 번만 잘못하더라도 큰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알았어요. 언니, 갔다 오면…. 아니, 아니에요. 먼저 집에 돌아가 있을게요.”

“크롬웰과의 약속은 다음에 제가 있을 때 자세한 일정을 잡도록 해요. 옆에서 저도 도와줄 테니까요.”

걱정에 이어서 자기도 같이 옆에 있겠다며 과보호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네요.

질이 그렇게 어린아이는 아닐 텐데요.

크롬웰도 말했듯이, 여러 가지 일을 겪은 질에게 있어서 실제 나이는 무의미하다고 봐도 되니까요.

겉모습도, 가지고 있는 힘도, 생각하는 것도 전부 나이에 맞지 않으니.

어른이라고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어른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는 시기라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늘 바로는 안되는 거예요?”

“크롬웰도 자기 일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현자 당신은 정말 그것 때문에 불려온 거예요?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황녀께서 부탁한 일이라네, 이 아가씨의 편을 들어달라고 말이야. 조금 속내를 알아볼 기회도 가질 겸 해서.”

황궁에 불려온 순간부터 무언가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탈리안도 이건 의외였나 봐요.

갑자기 황녀라니 일이 커지고 있어요.

“황녀가…? 무슨 이유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 장래 이 아가씨가 황녀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을지도 모르고 말이네. 정치적으로 쓰일 수도 있겠고, 따로 원하는 것이 있을지도…. 이 늙은이는 황녀에게 빚진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도운 것이라 그렇게 매섭게 노려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황녀가 질에게서 얻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현자에게 부탁해서 질을 편들어달라고 한 것일까요?

항상 귀에 딱지가 앉고, 눈에 아른거릴 수준으로 되새기는 사실이지만, 질은 얼마 전만 하더라도 평범한 시골 소녀였는걸요.

질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황녀가 뜬금없이 질을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요.

미스테리한 일이에요.

그래도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는 것인지 질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탈리안은 라피아와 함께 알현실로 향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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