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10화 (110/189)

〈 110화 〉 황궁의 부름

* * *

상당히 길었던 목욕의 뒤에는 크리미아가 찾아와 황궁의 전언을 전하러 왔지만, 질과 라피아는 탈리안의 방에 있었어요.

욕조 안에서 쓰러진 탈리안을 간호해줘야 했으니까요.

“장난이 너무 심했던 거 같기도 해.”

“알아요. 그래도 장난은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탈리안 언니가 저를 혼자 뒀으니까, 그러니까 그동안에 받지 못했던 걸 받는 거예요.”

보상을 바라고 한 행동이라면 장난이라고 할 수는 없죠.

얼마나 노력해서 탈리안을 구해냈는지 라피아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질에게 한소리를 한다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지도 몰라요.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면서요.

물론, 예전이라면 화를 내기보다는 삐졌다는 행동과 표정으로 티를 내겠지만….

마기에 침식당한 뒤인 지금이라면 충분히 화를 내고도 남을 거예요.

“으음…. 질, 역시 나랑은….”

“언니, 저 눈치 없는 거 아니에요. 라피아 언니는 여전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탈리안 언니는 가족일 뿐이구요.”

“그렇다기엔, 아니…. 알았어. 크리미아가 아래층에서 기다리니까, 나 먼저 내려가 볼게. 마녀 일어나면 상황 봐서 같이 내려와.”

“…네.”

라피아가 걱정하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 가능한 문제에요.

자신이 좋아서 시작한 관계이지만 질이 탈리안을 대하는 태도만 본다면, 가족이라는 관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읏?! 누구…! 아니, 어떻게?!”

그런데 라피아가 방을 나가자마자, 갑자기 질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혼잣말을 시작했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탈리안의 눈치를 살피는 게 누가 봐도 잘못을 저지르고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의 모습이었죠.

질의 몸에 빨간 마기가 겉돌고, 머리카락의 안쪽도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걸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여요.

“시끄럽다고요!! 어차피 나오지도 못하면서 조…! 히익?!”

혼잣말 도중에 질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질 정도로 움찔거리며 놀랐어요.

탈리안이 소리소문없이 질의 손목을 잡았거든요.

“…질, 베리아의 말은 무시하세요.”

“어, 언니…. 괜찮아요?”

“덕분에 조금 낫네요. 다음부터는 조금 조심해야겠어요.”

아무래도 베리아가 질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나 보네요.

굳이 질을 내면의 세계, 혹은 심상 세계…. 그런 공간으로 끌어들이지 않고도 대화가 가능한가 봐요.

“그리고 재차 말하지만, 베리아는 무시하세요.”

“…어떻게 무시해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미안한데, 저 좀 일으켜주겠어요?”

“그럼 이 손부터 놔주?! 언니, 진짜 아까부터 왜…!”

탈리안은 일으켜달라는 말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했어요.

질을 자기 쪽으로 당겨 품 안으로 쓰러지게 해선 꼭 안아준 거예요.

욕조에서 불안해하던 질을 안심시켜준다는 약속으로 안아준다고 했었는데, 그게 지금인 걸까요.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사과할게요. …죄송했어요.”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요. 저는 이미 언니를 용서했어요.”

“질도 알잖아요? 이건, 제 마음의 문제인 거에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지르니트…. 죄송해요. 앞으로는 절대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질을 껴안은 탈리안의 손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갔어요.

옷이 손에 집혀 구겨질 것 같았지만, 질은 탈리안이 힘을 주면 줄수록 더 몸을 맡겼어요.

자신의 앞면이 꽉 채워지는 듯한 그런 느낌에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겠죠.

애초에 질이 탈리안의 포옹을 거부할 리도 없지만요.

“그걸로 된 거예요. 저는 언니가 잘못한 일은 제 옆에 없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아직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지만, 알았어요. 그리고 베리아의 마기에 침식된 일은…. 해결책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알던 질과는 많이 바뀌었고, 문제도 많아 보여요.”

지금만 보더라도 비틀리기는 했어도, 예전에 비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네요.

탈리안은 언제나 질을 걱정하고, 언제나 질에게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잖아요?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질을 돕고 있었는지에 대해 숨기던 때와 비교하면 조금 더 가볍고 진심인 마음으로 돌봐주는 거겠지만요.

“저는 지금도 좋은걸요. 언니랑 라피아 언니 옆에 서려면 이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마기와는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조만간 해결해줄 테니, 강해지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찾도록 해요.”

“정말 저는 괜찮아요, 어떻게 보면 베리아를 무한한 마나처럼 쓸 수 있구요.”

“베리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에요. 질이나 라피아가 살아서 돌아온 게 신기한, 그런 무서운 녀석이에요. 어떻게 이겼는지조차 궁금해질 정도로요.”

탈리안은 이렇게 말하지만, 질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에요.

베리아를 계속해서 몸 안에 둔다면, 시도 때도 없이 마기를 뿜어낼 거에요.

그렇다면 질이 할 일은 정해져 있죠.

일정량의 마기가 모일 때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밖에, 무한한 에너지원인 거에요.

그와는 별개로 마군주를 몸에 담아둔다고 하는 일 자체가 위험한 일이기는 해요.

그렇기에 탈리안이 마기가 좋은 것은 아니라며 질을 계속해서 말리려고 하는 거고요.

“조금만 더 고민해봐요. 이 세계의 사람이 마기와 가까워져서 좋을 건 없어요.”

“생각은 해볼게요. 생각은….”

“아…. 질,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왜 라피아랑 그런 관계가…. 아니, 제가 돌아왔으니 그런 관계는 이제 그만둘 거죠?”

탈리안은 이야기가 끝나고 질을 품 안에서 놔주는가 싶더니 얼굴을 보며 관계에 대해 말을 꺼냈어요.

“네? 그만두다니…. 저한테는 언니만 있으면 충분하다지만, 라피아 언니도 그만큼 좋아해요. 언니는 제가 라피아 언니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그저 걱정되어서….”

걱정된다면서 어느 부분이 걱정되는지는 말해주지 않네요.

“그럼 괜찮은 거 아니에요? 언니가 저와 라피아 언니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라피아 언니가 직접 말해준 거 같은데.”

“맞아요. 하지만, 질이 라피아랑 그런,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다니 저는….”

“저는 언니도 사랑해요. …가족으로서.”

“…일단, 크리미아 씨가 와 있는 거 같은데 내려가도록 해요.”

질의 대답에 탈리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옆으로 치워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 표정을 보고서 탈리안의 기분에 뭔가 언짢은 게 있으리라 짐작한 질이었지만, 굳이 불러세우지는 않았어요.

항상 그렇듯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것으로 자신이 입고 있는 옷 위에다가 회색 가디건을 만들어 입었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신기루처럼 투명했던 마나가 실체를 가지며 옷으로 바뀌는 그 모습은 언제봐도 신기한 것이니까요.

그 장면에 넋을 잃고 할 말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거실로 내려온 질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편지 같은 것을 읽는 라피아를 봤어요.

“뭐 읽는 거예요?”

“아,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읽어야 하는 건 여기 있어.”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어어, 조금 부끄러운 내용이라서.”

황급히 종이를 접어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넣는 걸 보면 질에게 중요한 내용은 아닐 거에요.

라피아가 뭔가를 숨긴다니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대 베리아 전에서 라피아 씨가 무리를 했었습니다. 당신을 구하려고 기절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야, 야!! 조용히 해!!”

“…그래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검사를 했었는데, 그 결과가 지금에서야 나온 겁니다.”

“이런, 씨! 말 더럽게 안 듣네!”

종이를 건네받던 질이 굳어있는 것 좀 보세요.

자신을 구하려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니, 누가 이런 말을 듣고 멀쩡하게 있을 수 있겠어요.

그것도 가장 힘든 시기에 자신의 옆에 있어 준 사람인걸요.

“…정말이에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요? 왜 말 안 한 건데요?”

“내가 구하고 싶어서 구한 건데 너한테 말해서 뭐하게.”

“그렇지만, 언니가 저 때문에…!”

“아, 됐어! 사지 멀쩡하게 붙어있는 거 보이잖아? 하나도 아픈 곳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라피아는 기운차게 팔을 돌려 보였어요.

이렇게 쌩쌩하니 아무런 걱정도 필요 없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싶은가 봐요.

질이 믿을지, 안 을지는 둘째 치더라도요.

한순간이라도 더 빨리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것 같은 모습이에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만약 다쳤다고 해도 네가 신경 쓰거나 사과할 일이 아니야. 베리아가 잘못한 거지. 근데 너 머리는 왜 그래? 염색했어?”

“아, 이건 마기 때문에….”

라피아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지만, 크리미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어요.

질이 라피아에게 걱정의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어가려했지만, 이는 크리미아가 황궁의 전언을 말하면서 할 수 없게 됐어요.

“…여러분, 집중해주세요. 황궁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금서의 주인 마군주 단탈리안], [뱀파이어의 마지막 혈통 아스티엘 라피아], [베리아의 그릇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이하 세 명은 황궁에 찾아와, 입장을 확실히 하라. 그대들의 현명한 선택을 기다리겠다.”

“예전부터 황궁이 다른 사람을 이상하게 부르는 방식은 변하지를 않네요.”

탈리안은 크리미아가 말하는 칭호에 한숨을 내쉬며 구시렁거렸어요.

하기야 자신이나 라피아만이라면 모를까, 질에게도 이상한 칭호를 붙여서 불렀으니까요.

베리아를 몸속에 두고 싶어서 두는 것도 아닌데 베리아의 그릇이라니, 기분이 상해서 부름에 답하지 않아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잠깐만요. 크리미아 씨가 말해줄 거였다면, 이 종이는 뭐에요?”

“황궁에 들어가기 위한 증명서를 겸하면서 간단한 계약서 역할을 하는 물건입니다. 거기에 찍힌 인장을 보면 뾰족한 바늘 같은 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손가락을 찔리면 계약이 완료되는 형식입니다. 다만, 계약 완료 후에는 바로 황궁으로 워프 되니….”

“…앗.”

“질?!”

질은 누군가가 손을 쓰기도 전에 황궁으로 워프되어 버렸어요.

설마하니 바로 워프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탈리안은 급하게 자신의 방으로 가서 가장 세련되어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고 질을 따라 황궁으로 향했어요.

물론, 라피아도 같이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