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마기 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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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이 마기에 침식당한 뒤로 시간이 조금 흘러, 드디어 베리아가 잠에서 깨어났어요.
“윽, 끄으…. 이 건방진! 전생자라고 봐주었, 더니…! 감히 이 몸의 능력을…!”
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는 베리아를 본 질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주변에는 숨을 만한 곳이 없는 데다가, 숨는 것보단 베리아를 마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정답이니까요.
어떻게 해결할지는 전적으로 질에게 달린 문제이지만요.
“…라피아도 그렇고, 네 녀석도 그렇고, 이 몸의 능력에 어떻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냐.”
일어나다가 멀찍이 서 있는 질을 발견하고는 언짢은 말투로 질문해오는 베리아에요.
베리아의 능력이 제일 힘들었던 시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라면, 라피아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게 아니었을까요.
그마저도 몸을 빼앗기고 있던 시간이 꽤 짧았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시간을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버텨낸 질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보여준 악몽 때문에 힘들기는 했어요. 처음에는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모두가 죽었던 사실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전혀 안 바뀌더라구요.”
“당연하다. 지나간 날을 바꾼다는 것은 순리에서 벗어난 일. 게다가 이 몸이 네 녀석에게 보여준 것은 이미 알다시피 환영이며 거짓. 그림자인 동시에 신기루일 뿐. 절대 바뀔 리가 없는 것들이지.”
베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질은 자신의 한쪽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어요.
몸이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손 다음으로는 어깨나 목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네, 알아요. 그래서 힘들긴 했지만, 힘든 것뿐이에요. …보기 힘들었을 뿐이에요. 못 바꾸는 걸 알아도 바꾸고 싶어서 마음고생을 엄청 했어요. 정말, 정말 많이.”
“그렇게 억울하다면 소리치기라도 하는 게 어떻겠느냐, 이렇게 차분하게 말하는 녀석은 생전 처음 보는구나.”
베리아의 말 그대로였어요.
질이 힘들었고, 마음고생을 한 것 치고는 상당히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과 말투였어요.
누가 보기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말해도 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러게요, 왜 이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냥, 그냥…. 말로 잘 설명을 못 하겠어요. 그런데 베리아 씨는 저를 공격하지 않는 거예요? 아니면, 못하는 거예요?”
질의 질문에도 베리아는 말을 아꼈어요.
대답하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숨기는 건지는 몰라도 방금 질문이 답하기 곤란한 것이라는 것쯤은 질도 알 거예요.
“라피아 언니가 뭔가 했나 보네요. 역시 믿음직스럽다니까.”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아직 몸의 주도권은 이 몸이 잡고 있다. 네 녀석이 이곳에서 이 몸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 몸이 네 녀석의 몸을 돌려줄 일은 없을 것이야.”
베리아는 없는 허세를 떨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이 말에 거짓은 먼지만큼도 들어있지 않다고 봐도 될 거예요.
지금 질의 앞에 지친 모습으로 서 있더라도 아무 문제가 될 부분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적당히 시간만 흘려보내면서 힘을 회복한 뒤, 다시 질의 몸을 빼앗으면 된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겠죠.
“…있잖아요? 저는 베리아 씨가 기절하고 있을 때 여러 가지 말을 준비했어요. 얼른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뭐 때문에 우리를 괴롭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만두게 하고 싶어서.”
“이 몸을 설득이라도 해보겠다는 것이냐? 마군주인 이 몸을? 마을을 멸망시킨 원인인 이 몸을? 네 녀석에게 있어서 이 몸은 철천지원수일 텐데? 혹여 친하게 지내거나 화해 같은 소리는 하지 말거라,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힘으로 네 녀석을 없애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힘을 썼다가는 제 몸에서 못 빠져나갈 수도 있어서, 그래서 지금도 저를 공격하지 않는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찔린 듯, 베리아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어요.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던 질은 작게 입꼬리를 올리다가도 다시 무표정했던 얼굴로 돌아갔죠.
베리아도 이를 눈치채고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띠고는 마기를 조금씩 뿜어내기 시작했어요.
위협이랍시고 하는 거겠지만, 질은 그게 어쨌냐는 듯이 바라보고 있어요.
“…, …할 말은 그게 끝이더냐.”
“베리아 씨는 무슨 이유로 이 세계에 넘어온 거예요? 탈리안 언니는 친구를 찾기 위해서 넘어왔다고 했어요.”
질은 베리아가 공격해 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질문을 시작했어요.
첫 운을 무슨 목적으로 왔냐고 띄운 걸 보면 베리아가 남을 괴롭히는 행위를 멈추게 하고 싶은 거겠죠.
“보나 마나 슈트리니, 그 꼬맹이를 말하는 거겠군. 그 꼬맹이라면 잘 알지, 함정에 빠트려 죽인 것이 이 몸이니까 말이다.”
“그런…. 베리아 씨는 어째서 그렇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죽였다는 말에 슬퍼하며 왜 그렇게 괴롭히냐고 물어보는 질이에요.
생판 모르는 남이 상처 입었다고 해도 슬퍼하는 게 질인데, 탈리안이 찾아다니던 친구를 죽였다고 말하니 더욱더 그렇겠죠.
소중히 여기는 탈리안의 친구를 죽였다는 것도 슬프겠지만, 탈리안이 그동안 찾아다닌 일들을 무의미한 일들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마군주가 본능에 따르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지? 더 강한 힘을 바라고, 더 강한 지식을 바라고, 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 더 뭐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제가 사는 세계로 넘어온 거예요? 뭔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원래라면 빼앗긴 자유와 고향을 되찾는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 보잘것없는 감정마저도 기나긴 세월에 희석되어 사라져버렸지만 말이지. 이제는 이 몸에 남은 것이라고는 다른 녀석들을 이간질하고 파멸하게 만드는 본능. 몸에 새겨진 본능 말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끈질기게 질문을 해오는 모습에 베리아는 말을 끊고, 자신의 본능에만 따를 것이라고 해요.
만들어질 때부터 그런 존재였으니 이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거겠죠.
다만, 질에게는 이 세계가 원래부터 마기노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니 믿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고향…?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베리아 씨의 고향이라구요?”
“오랜 시간에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이 몸과 마기노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습고 역정이 나겠느냐?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우리 마기노인데.”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이 세계의 모두와 서로 사이좋게 살아볼 생각은 없는 거예요?”
어깨까지 들썩이며 뭐가 잘못되었냐고 말하는 모습에 질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어요.
“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나 보구나,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이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도 있는 법이다. 이제 적당히 하거라. 이래 보여도 상당히 참고 있으니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힘만 회복하고 나면 네 녀석을 언제든 처리하는 것쯤은…!”
“…알았어요.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그동안 자신의 말을 몇 번이고 끊어내고 말을 하던 베리아에 대한 복수인지, 이번에는 질이 베리아의 말을 끊어냈어요.
그리곤 마법을 사용해, 항상 그러던 것처럼 자신의 주먹에 이형의 마나를 둘러 싸우기 위한 자세를 잡았죠.
베리아가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어요.
“…네 녀석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지? 그것도 이 몸이 만들어낸 영역 내에서…! 아니, 그 마나의 각인! 탈리안…! 끝까지 이 몸에게 저항하는구나!!”
마군주는 마군주라고 질의 손등에서 빛나는 마나의 각인만 보고서도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아내네요.
그러면서도 천천히 다가오는 질의 모습에 베리아도 싸울 준비를 하는 듯, 마기를 조금 뽑아내 손 위에 두었어요.
지금껏 베리아가 싸워온 모습이라 봐야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싸우는 것만 보여주었으니, 이번이 베리아가 직접 싸울 모습을 볼 기회일 거예요.
“베리아 씨가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알고 있나요? 당신을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마법을 쓰려고 해봤어요. 그렇지만 방해받는 것처럼 마나는 모이자마자 흩어져 버렸죠.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마나를 쓰지 못한다면…. 제 몸을 차지한 베리아 씨의 마기를 쓰면 되는 게 아닐까, 라고 발상을 바꿔본 게 전부예요. 전부 베리아 씨 덕분이에요.”
평소의 푸른색과는 다른 검붉은 색의 마기를 두른 질은 빠르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어요.
아무리 베리아라고 하더라도 마기로 공격해오는 것을 맞아줄 수는 없었던가 봐요.
질의 주먹을 피한 뒤에는 발을 걸어 넘어뜨렸거든요.
아직 전력을 다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상대할 생각은 여전히 없는 것 같아요.
빠져나갈 힘을 아껴두려는 거겠죠.
여유롭게 질을 넘어뜨린 것 치고는 표정에 꽤 힘이 들어가 있었으니까요.
“이곳에서 싸우다간 네 녀석의 몸이 멀쩡하지 않을 거다! 심지어 자신과 상반되는 힘인 마기를 쓰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것을!! 이 몸을 쓰러트리더라도 네 녀석의 인격이나 기억, 마나 회로에 문제가 생기겠지!!”
“…상관없어요. 저는 지금 엄청 화나 있어요. 그 악몽만 아니었다면 베리아 씨가 돌아볼 때까지 설득하려 했겠지만…!”
질은 넘어진 상태에서 스태프도 없는데 오른손으로 땅을 짚는 것으로 베리아가 도망가지 못하게 화염의 벽을 만들었어요.
이글거리며 돔의 형태를 이뤄낸 질의 마법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죠.
게다가 이동을 방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화염이 비처럼 내려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으니 베리아로서도 대처하기 어려운 마법이었어요.
“같이 공멸하자는 것이냐! 이 아둔한 것!! 일생 회복하지 못할 장애를 안고 살아가겠다고?!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고, 속은 제정신이 아니구나!!”
“전부 베리아 씨가 잘못한 거예요. …전부. 저는, 대화로 풀어보려고 했는데…. 당신이 잘못한 거야….”
중얼거리면서 베리아에게 또다시 달려들려는 게, 질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평소의 질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에요.
먼저 적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고, 원거리 공격으로 견제를 한 뒤, 틈이 보이면 근접전을 시도하는 게 보통이었죠.
이는 마법학원에서 알려주는 전투의 기초 중의 기초이기에 질이 쓰지 않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처음부터 근접으로 시작해서 베리아가 다음에 할 행동을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들려고만 하니까요.
봐요, 지금도 마기를 두른 손으로 때리려고만 하는 단순한 공격만 하고 있잖아요.
“크윽…! 가짜 성녀 년만 아니었더라도 네 녀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신기하네요, 마군주인 주제에 막고 피하기만 하다니…. 두려워요? 하찮은 인간의 몸에 갇힐까 봐?”
“…이, 이 만들어지다 만 인간 주제에!! 이렇게 된 이상, 이 몸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심지어 처음으로 상대방을 도발하기까지 했으니….
베리아는 이에 더는 힘을 아끼지 않고 돌풍이 불 정도로 마기를 뿜어내 질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였고,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죠.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도 질은 그 속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 천천히 베리아에게 다가갔어요.
“와아….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제 몸을 빠져나가는 것도 가능할 거 같은데, 지금까지 거짓말한 거예요?”
“시끄럽다! 이 몸이 언제까지고 봐줄 거란…?! 끄윽…!”
태연한 질의 모습에 베리아는 마기를 지면에 흩뿌려 질의 팔을 휘감던 마기와 비슷한 뱀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어냈어요.
그렇지만 만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질은 한번 발을 구르며 지면을 깨부수면서 수많은 뱀을 한 번에 정리해버렸죠.
그리고는 베리아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며 소리쳤어요.
“시끄러운 건 당신이란 말이야! 언제까지 당신이 위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도껏 눈치 좀 채, 지금은 내가 당신보다 강하다는 거! 내가 봐주고 있는 거잖아!!”
말을 마치자마자 질의 주먹이 베리아의 복부에 꽂혔어요.
약간의 위액이 역류해 입에서 흐를 정도의 힘으로 맞았으니, 아무렇지 않게 금방 일어서기란 보통 힘든 게 아닐 거에요.
마군주라 해도 같은 힘인 마기를 끌어다 썼으니까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갔겠죠.
“네 녀석…! 감히, 이 몸의 마기로 겁도, 없이…!”
바닥에 웅크리고 쓰러져 이를 아득바득 가는 베리아를 차갑게 내려다보던 질은 이성을 되찾고 화를 삭였어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한번 베리아에게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당신이 여기서 절 이길 일은 없다는 걸요. 더 맞기 싫다면 여기서 나가는 방법이나 말해주세요.”
“나가는 방법이라, 크흐흣, 흐으…. 알려줄 것 같으냐? 차라리 죽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이 어둠 속에 갇혀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저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조금 오랫동안 괴로울 뿐이지. 이제 베리아 씨의 힘은 제 것이니까요.”
“어쩌다 마기에 친숙해져,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졌을지는 몰라도…. 후회하는 게 좋을…! 컥, 허윽! 끅…!”
베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어요.
질이 베리아의 명치를 발끝으로 차버렸기 때문이에요.
일순간 숨을 쉬기 어려워진 베리아는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 바둥거리기는커녕 끅, 끅거리기만 하고 있었어요.
“베리아 씨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요. 마기에 침식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이미 잡아먹힌 거였군…! 기억과 다른 성격을 하고 있다 싶었는데, 이 몸의 마기를 건드리고도 제정신일 리가 없지!”
어느 정도 숨을 가다듬은 베리아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어요.
이미 마기에 잡아먹혔다니, 그야 질이 마기를 처음 다루는 것이니 잡아먹힌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죠.
그렇지만 질은 그런 적이 없다며 부정할 뿐이에요.
“아쉽지만, 당신이 말한 것처럼 탈리안 언니가 새겨준 각인 때문에 마기에 잡아먹히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언니가, 도와줬으니까….”
질은 각인이 새겨진 손등을 살며시 감싸 쥐고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상당한 문제가 생긴 것 같기는 해요.
질이 이렇게까지 폭력적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저항할 힘도 없는 상대를 발로 차버린다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어쩌면 각인이 있었기에 완전히 침식되지 않고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힘을 얻고 난 대가가 커요.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성격이 변해버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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