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반복되는 악몽
* * *
라피아가 돌발 행동을 하고 나서는 검붉은 소용돌이가 치며 주변을 에워 감싸고 있었어요.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행동에 크리미아가 당황하며 뭐 하는 거냐며 소리쳤지만, 누가 봐도 쓰러져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라피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나도 멀쩡히 서 있었죠.
“말했잖아, 지켜보라고…!”
소용돌이가 걷히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던 라피아는 자세를 곧게 하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크리미아에게 안심하라고 조용히 소리쳤어요.
그 말투가 조금은 격하고, 불만이 많아 보였기에 안심하라기보다는 ‘조용히 해!’ 같은 식으로 들릴 것 같기는 했지만요.
크리미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피아를 보더니, 단 한 번에 변화를 알아챘어요.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한 수준일 정도로 새빨간 문신이 라피아의 얼굴과 온몸을 덮고 있었거든요.
“그 얼굴과 몸의 문신은…. 아니, 어쨌든 그런 말 안 하셨습니다. …놀라게 하지 말아주시기를, 일순간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으니까요.”
“시끄러워! 조용히 하라고!!”
“라피아 씨…? 꺄악?!”
다짜고짜 화를 내며 작은 검을 만들어 크리미아 쪽으로 날리는 라피아에요.
다행히도 던져지는 마지막 순간에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을 챙겼는지, 방향을 약간 틀어 크리미아에게 맞지는 않았다는 게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크리미아의 허벅지 바로 옆 바닥에 꽂힌 그 검은 상당히 날카로워 보여요.
정말 죽일 생각이라도 했던 것처럼요.
“부탁을 했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몇 번 만나지도 않았겠지만, 라피아의 험악한 표정을 본다면 얼굴 앞에 대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빨갛다 못해서 이글거리듯이 빛나는 눈,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진 송곳니와 손톱, 조금이라도 건들면 터질 것 같은 심기와 마나까지.
그게 바로 크리미아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 이유였어요.
베리아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는 라피아를 향해 자세를 잡았어요.
지금까지와 같았다면 베리아가 무슨 말이라도 하며 라피아를 맞이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건 제대로 싸움에 임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겠죠.
베리아는 곧바로 마기를 최대한 끌어모아 라피아가 다가오지도 못하도록 폭풍을 만들어냈어요.
보통의 폭풍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닿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침식하여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것이겠네요.
주변에 장식으로 세워진 기둥이나 돌바닥의 표면이 깎여나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폭풍 속에 삼켜지면 그저 재가 되어 바스러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라피아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베리아에게 달려들었어요.
무식하게 흘러넘치는 마나로 몸을 감싸면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라피아가 마나를 감싼 것이 아니라, 마나가 라피아의 몸에서 쉴 새 없이 흘러넘치고 있다는 게 맞겠어요.
비장의 수에 걸맞은 제어되지 않는 힘이라 하기에 충분해 보이네요.
결과만 놓고 보더라도 마기가 쏟아져나오는 마나의 양을 이기지 못하고 차단되어, 라피아에게는 전혀 닿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대단한 힘이구나! 솔직하게 평가하자면 마군주와 다름없는 힘이다!”
“시끄럽다고 했잖아! 떠들지 못하게 입을 찢어 주…!! 크윽, 아악?!”
이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마군주는 마군주라는 것인지, 베리아는 가뿐히 라피아의 팔을 잡아 뜯었어요.
마기가 닿지 않는다면 직접 공격하면 되는 일이기는 하죠.
“호오…. 방금 뜯어내었을 텐데….”
그런데 당황한 것은 베리아였어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라피아에게는 두 팔이 멀쩡하게 붙어있었거든요.
자신이 뽑아내어 잡고 있는 라피아의 한쪽 팔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분명히실재하는 것인데도, 고통에 찬 라피아의 비명이 들렸는데도 라피아는 멀쩡한 거예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라피아 씨!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베리아가 다른 몸으로 이동할 수 없는 지금 기절시켜야 합니다!!”
“알고 있으니까 닥쳐!!”
아무래도 라피아가 쉽게 질 싸움은 아닌 것 같네요.
크리미아가 말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기절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요.
그렇다면 싸우는 것은 라피아에게 맡기도록 하고, 잠깐 질의 상황을 보도록 해요.
질은 어두운 공간을 헤매고 있었어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서 있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맞는지, 움직이고 있기는 하는 건지 질도 모르고 있었죠.
그럼에도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질이 ‘끊임없이 걷고 있다.’라고 생각 중일 때,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질은 앞에서 자그마한 빛이 반짝이는 걸 본 거예요.
알게 모르게 풍겨오는 낯선 냄새가 날 때마다 질의 발걸음은 느려지기만 했어요.
한발씩 내디딜 때마다 주변이 밝아지면서 정리 안 된 풀밭과 약간은 정리된 길이 보였는데, 그럴수록 질은 앞으로 나아가길 망설이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 느리게 걸었어요.
길은 일직선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도 질이 걷는 방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어요.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고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요.
어쩌면 이 길을 알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까요.
집 한 채가 질의 눈에 들어왔어요.
“아서스 씨네 집….”
누구의 집인지 알고 있나 봐요.
그 집의 뒤로도 드문드문 집이 지어져 있었는데요.
집에 눈길이 갈 때마다 질은 하나하나 천천히 이름을 불렀어요.
헤르미안, 덴버, 플로에, 레니, 맥머드, 버리스, 그레이시아….
이름 하나를 부르면서 그 집을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집은 그림자에 삼켜져 사라졌어요.
이름을 모두 부르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작은 마당이 딸린 이층집이었어요.
하지만 아까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눈앞의 집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죠.
그런데 갑자기 집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뒷걸음질 친 질이에요.
“왜…. 어째서….”
그 뒷걸음질에 맞춰 문이 열리고, 질이 나왔어요.
지금과는 다른 작은 키를 가진 어린아이 모습의 질이.
게다가 약간은 장난기 넘치는 질의 아버지, 자상해 보이는 질의 어머니, 질에게 부축받아 나오면서도 가슴 부분을 쥐고 있는 동생까지 함께.
맞아요.
지금까지 질이 부른 이름은 모두 질의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에요.
이 앞의 집은 질이 살고 있던 집이었고요.
이제는 마기노의 공격으로 멸망해서 진작에 없어져 버린, 질의 마을이었죠.
“아, 아빠, 엄마…!”
질은 숨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질은 부모님을 불렀어요.
이 세계가 어떻게 생긴 세계이든지, 눈앞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질의 외침은 닿지 않았어요.
눈앞의 질과 질의 가족은 성장해버린 질을 지나쳐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버렸거든요.
마치 성장해버린 질이 보이지 않고, 질이 소리치듯 부르는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면, 가면 안 돼요! 멈춰! 가지 말아요!”
미래를 알고 있기에 그를 막고 싶어서, 뒤를 쫓아 몇 번을 불러도 멈추지 않았어요.
따라잡으려고 해도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어요.
어쩌다 가까이 가서 손을 뻗어도 간발의 차로 놓치기만 하는 거예요.
“안된다니까요! 아빠! 그쪽이 아니에요!!”
적어도 자신의 가족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법을 쓰려고 마나를 모으려고 해도 무슨 방해가 들어오는지 마법은 질이 쓰자마자 마나의 형태로 흩어져 공중에서 사라져버렸어요.
빠르게 따라가던 질은 익숙한 장소, 익숙한 광경을 봤어요.
섬뜩한 무언가를 느낀 질은 바로 주변을 확인하고, 가족을 확인했는데, 분명히 확인하고 있었을 질의 동생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어린 질이 동생을 찾겠다며 가족의 품에서 튀어 나가자마자 마기노의 공격이 마을 사람 전부를 집어삼켰죠.
“아, 아아…! 아니야…! 아니야!! 왜, 왜 마법을 못 쓰는 건데!!”
그런데 이상하죠.
어느 순간, 질이 눈을 깜빡하자마자 풍경이 바뀌었어요.
…질의 집 앞으로.
이게 현실이 아니라 거짓된 무언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질은 멈추지 않았어요.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질은 탈리안이 구해준다고는 하지만, 질 자신을 제외한 마을의 모두가 죽어버리니까요.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구하고 싶은 거예요.
고의가 아니더라도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찾아오는 고독함이.
동생을 찾으러 나서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가족과 함께였을 것이라는 후회가.
질의 정신을 오래전부터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억지로 묻어두고 떠올리지 않고 있었을 텐데, 다시 이렇게 눈앞에 나타난다면….
여기서라도 구해내지 않는다면, 거짓이라도 구해내지 않는다면, 버티지 못할 거에요.
하지만 질의 도움이 과거의 가족에게 닿을 일은 전혀 없었어요.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그 횟수가 100번에 가까워지더라도 절대로.
처음 몇 번을 반복할 때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했어요.
그 횟수가 10번에 다다를 때는 화를 내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모른 척을 하기도 했지만, 바로 다음에 가족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만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다시 따라나섰어요.
20번을 넘어서는 포기하기 싫어서, 30번을 넘어서는 지치는데도 악과 깡으로 버티고, 50번을 넘어서는 슬픔에 잠겨 가족들이 너무 아파 보여서.
70번, 80번을 넘어서는 거의 포기한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지금까지 했던 것들이 아쉬워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질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무엇을 해도 구할 수 없다면 질이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말도 들어주지 않아, 가까이 가지도 못해, 마법도 못써…! 다른 사람들도 날 봐주지 않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는 건데!! 왜 여기서도 나는 아무도 구할 수 없는 건데…? 왜…!”
바닥에 엎어지다시피 허리를 숙여서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질이에요.
지금껏 의뢰로 질이 구한 사람의 수는 꽤 될 거예요.
탈리안을 찾아다니기 위해서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여러 군데 습격하고, 파괴했으니까요.
물론 다른 의뢰로도 사람을 구한 횟수가 적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건 질에게 있어서 모두를 구하고 싶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했던 일이에요.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하지 못했던 적이 많으니까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을 거예요.
탈리안이 선물해준 스태프, 탈리안이 남겨준 책, 탈리안을 찾기 위해 쌓아온 수많은 노력과 경험.
탈리안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오며 실력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세계는 이런 질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보이는 풀과 땅이 노이즈가 걸린 것처럼 지직거리는 모습에 질이 고개를 들었더니, 이내 질의 집 앞의 풍경으로 바뀌어버렸거든요.
‘지겹도록 절망만이 반복되는 이곳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속삭이는 것처럼요.
“제발, 그만….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니까…. 그만….”
질이 움직이지 않아도, 배경이 움직이며 같은 절망을 계속 되새겨주었어요.
도중에 서러움과 억울함에 복받쳐 울었던 때도 있지만, 100번을 넘게 경험한 질은 울만 한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저 멍하니 바닥을 보며 중얼거릴 뿐이에요.
질이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어요.
질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새까만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그러니 질은 사과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구할 수 없어서, 혼자 살아남아서 미안하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 사과마저 할 수 없게 되어 반복 횟수가 200번에 다다를 때쯤에는….
질은 새우처럼 허리를 굽혀 옆으로 눕고선, 눈과 귀를 막아 이 세계를 보고 듣는 걸 거부했어요.
점점 시간은 흘러만 갔어요.
이상하게도 질이 이곳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허비하더라도 배가 고파져 오거나 피곤해지는 일은 전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실 질도 알고 있을 거예요.
이 세계가 베리아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것을요.
그래도 질리도록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멈추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포기하자는 생각으로 바뀌면서도, 다시 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심지어 질이 눈과 귀를 닫아도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려지기도 했어요.
그야, 200번 가까이 같은 장면만 반복해서 봤는걸요.
오히려 이 상황에서 미치지 않는 게 대단한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질은 이상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아무런 환상도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거든요.
눈과 귀를 닫지 않아도 지금껏 들려오던 모든 게 한순간에 다 사라진 거예요.
있어야 할 마을이나 마을 사람들, 가족까지도 한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죠.
“…끄, 끝이야? 끝난 거야…?”
얼마나 그동안의 시간이 끔찍했으면, 이것 봐요.
아직도 환청이 들려오는지 눈과 귀를 닫았다가 풀잖아요.
그래도 질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관심을 빼앗는 게 생겨났어요.
일렬로 줄지어져 있는 거대한 쇠창살.
그 너머로는 짙은 적갈색의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쓰러져 있었어요.
질은 쇠창살 가까이에 다가가 쓰러져있는 여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왠지 모를 공포감에 뒷걸음질 치다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다행히도, 질이 넘어지는 소리에 여자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죠.
“전부, 전부 저 사람 때문에….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마을도, 전부…! 괜찬, 괜찮았을…. 텐데! 저 사람이…!”
질이 난생처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런 험악한 표정을 짓는 이유야 당연할 거에요.
현 상황에서 질이 겁먹을 상대라고는 베리아밖에 없어요.
마군주만 하더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상대할 힘이 생겨나서 잘만 상대하던 걸 보여주었으니까요.
게다가 갑자기 환상이 사라지고 나타난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건 베리아일 거예요.
이런 상황이 된 이유로는 라피아가 성공적으로 베리아를 기절시킨 것이 있겠네요.
하지만, 어떻게? 베리아는 다른 사람의 몸에 옮겨타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텐데요.
사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어요.
질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환상을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질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었다면, 쇠창살에 문은 달려있지 않았지만, 간격이 넓어 질이 충분히 쇠창살 사이로 통과해 너머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질은 망설임 없이 베리아에게 다가갔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탈출을 위한 단서를 찾을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잖아요.
질이 가까이서 본 베리아는 상당한 미인이었어요.
키도 적당히 크고, 피부는 백옥같이 하얗고, 가슴은 작지만 허리가 잘록해서는 모델 일을 해도 되는 몸과 외모를 하고 있었어요.
약간 더 어두울 뿐이지 머리 색도 비슷하고, 날카로운 인상까지 비슷하니 순간 라피아가 생각나기도 했나 봐요.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고는 그저 눈으로만 관찰하기 시작했거든요.
“이 사람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쇠창살 밖에 안 보여…. 죽여야 하는 거야? 지긋지긋하긴 하지만, 적이지만, 여기서는 마법도 못 쓰는 내가…. 어떻게….”
망설임이 있나 보네요.
무기도 없고, 마법도 못 쓴다면 그럴 만해요.
자기 손으로 남을 죽이는 건 또 색다르고 두려운 경험일 테니까요.
간단하게는 목을 조른다거나, 죽을 때까지 때린다거나….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질에게는 전부 어울리지 않는 방법들이에요.
라피아라면 주저 없이 했을지도 몰라요.
탈리안이라면 바로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옥 같은 환상을 200번 가까이 반복하고 나서도 질의 여린 마음으로는 자기 손으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거예요.
설령 진짜 세계가 아니라 환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라 하더라도요.
두려움의 대상인 마군주라도, 재앙을 일으킨 원인이라 해도요.
탈리안만 하더라도 재앙을 일으키고 넘어온 마군주이지만, 질은 상관없다고 옆에 있어 달라며 부탁했었잖아요.
분명 베리아가 일어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망설이는 건, 몬스터나 마기노 외에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럴 거예요.
답답하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여리고 겁이 많지만, 밝은 산골 마을의 소녀였는걸요.
노예상들을 상대하는 것도 마법을 이용했기에 자신이 누군가를 상처입혔다는 자각이 옅어서 가능했던 일이니까요.
…그리고 결국 이런 망설임은 베리아가 깨어나기에 충분히 많은 시간을 주었는데, 질이 마냥 망설이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베리아가 깨어나기 전까지, 질은 머릿속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거든요.
‘베리아를 죽이고서도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마법도 쓰지 못하는 내가 베리아를 죽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베리아는 악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걸까.’ 같은….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다 들여다보기에는….
어쨌든 질이 할 수 있는 고민이라는 고민은 전부 해봤을 거예요.
그러다 질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탈리안이 오른손에 새겨준 마나의 각인이었어요.
“언니가 나보고 마군주라고 했었지, 그게 진짜라면…. 아니야. 지금은 그것보다 이곳을 나, 가야…? 잠깐, 탈리안 언니가 마군주라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질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어요.
모든 일은 기초부터, 마나를 사용하려면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가 중요했기에 질은 마기를 느끼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탈리안이 새겨준 마나의 각인을 쓰려는 거예요.
마군주인 탈리안의 각인이라면, 마기를 쓰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닐 테니까요.
그야 질에게 각인을 물려줄 때에는 마나를 사용하도록 조정을 해주었겠지만, 본래는 마기를 다루기 위한 각인이었겠죠.
그렇지만 누구나가 그렇듯 첫걸음을 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게다가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루려고 하는 것이 마기라면 더욱더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어요.
“베리아가 깨어나기 전까지 해내야 하는데,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어떻게 해야…. 지금까지는 탈리안 언니가 도와줬었는데….”
계속해서 방법을 찾던 질은 한참의 고민 끝에 자꾸만 베리아에게로 눈길이 가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옆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려도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질은 바로 그 옆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어깨에 손을 대보았어요.
몸에 손이 닿아도 아무 반응도 없어, 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어차피 탈리안 언니나 베리아나 쓰는 마기는 똑같을 테니까, 조금만 빌려 써도 상관없겠지? 평소에도 열쇠로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으니까….”
아무래도 질은 베리아를 매개체로 삼아 마기를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힘으로 마기를 느끼거나 움직일 수 없다면, 도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해요.
아예 틀린 방법은 아니었는지 몇 번의 시도 끝에, 질은 표정을 구기는 걸 보니 마기를 느끼는데 성공한 것 같네요.
탈리안과 함께 지냈을 때도 어쩌다 마기를 내뿜는 것을 보고 겁먹었던 일이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무서워하지는 않더라도, 그 꺼림칙한 느낌에 그렇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는 거겠죠.
마기를 느끼려고 하면 할수록 질의 팔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어요.
이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흡사 뱀과 지네 여러 마리가 겹쳐서 기어 다니는 모습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일전에 아이펠슈에는 질을 보고 재능이 없다고는 했지만, 마냥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마기를 느낀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히익?! 언니는 이런 걸 어떻게 쓰고 있던 거야? 소름 끼쳐…. 토할 것 같아….”
하지만 그러던 도중에 뭔가 잘못되었는지 질은 베리아의 몸에서 손을 떼었어요.
그러자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꾸물거리기도 하는 마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기괴한 마기를 보고 있던 질은 베리아를 만졌던 손과 팔을 보고 괜찮은지 확인해봤어요.
저런 게 자신의 팔을 꿈틀거리며 기어 다녔으니 불안한 건 당연해요.
손목과 팔을 돌려 확인해본 질은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샛노랗게 빛나던 마나의 각인이 빨갛게 달궈진 것만 제외한다면요.
“그래도 베리아가 깨어나기 전까지 포기할 수는, 어? 어어?! 아, 안돼! 오지 마!!”
그런데 갈 곳을 잃어버린 마기가 한동안 질의 주변에서 머물더니 갑자기 몸집을 부풀려 질을 덮쳐버린 거예요.
질은 반응할 사이도 없이 질은 마기에 삼켜져 버렸어요.
소용돌이처럼 매섭게 주변을 감싸도는 마기에 질은 겁을 먹었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더해 자신의 몸을 조금씩 침식해오며 검게 물들이는 모습, 이 두려운 상황에 질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죠.
그때였을 거에요.
탈리안이 새겨준 마나의 각인이 빨간색에서 보랏빛으로 바뀌어 버린 것과 질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각인을 통해서 마기를 받아들인 것이 말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