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방심하지 않는 베리아
* * *
크리미아는 반쯤 몸을 굽힌 라피아를 보고선 바로 달려가서는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축복을 걸어 상처를 달래고, 피로를 사라지게 했으며, 좁은 범위지만 성역을 만들어 마기를 걷어내었어요.
“라피아 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짧게 말하자면…. 앞에 서 있는 건 적이 아니라, 마군주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아군이에요.”
“마군주에게 조종당하다니….”
뜬금없이 등장한 크리미아의 모습에도 베리아는 질의 차분해 보이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라피아와 크리미아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니까요.
어떤 식으로 나오더라도 베리아에게는 단순한 잠깐의 여흥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탈리안과 그 동료들을 혼자서 전부 잡아버린 실력을 갖추고 있잖아요.
“보니까 당신에게는 마기를 걷어내는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조종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는 거예요?”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면 마기를 정화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마군주 정도나 되는 괴물이라면 고작 성녀 후보생이었던 제가….”
“해봐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저희뿐만 아니라, 이 위에서 싸우고 있는 파티 전부 전멸당할 테니까!”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쓰면 안 되는 것이지만, 알겠습니다. 대신 시간 좀 벌어주십시오.”
라피아가 약간의 과장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베리아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에요.
당장에 그럴 생각이 없고 탈리안에게로만 관심이 쏠려있지만, 혹시 모르죠.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이 거점의 주변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해, 평지로 만들어 버릴지 누가 알겠어요.
“점점 지루해지는데, 작전 회의는 끝났나요? 라피아 언니의 기억에서 본 만화 중에 이런 게 있었던 거 같은데, 항상 중요한 순간에만 방심하는 영웅이 있었다면서요? 저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으니, 신중하게 덤벼오는 게 좋을 거예요.”
“기억까지 읽어내는 거냐….”
“꽤 재밌었다구요? 라피아 언니의 인생을 살펴보는 건…. 정말 최고였어요. 게다가 언니가 전생자였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한국의 27세 여성, 백하윤. 언니도 제 옆에서 영원히 함께 있는 건 어때요?”
“기분 나쁜 자식, 사람의 트라우마를 멋대로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것도 모자라서 기억까지 읽지 말라고!”
어쩐지, 그래서 라피아가 하는 공격을 피하기만 하고 죽일 생각으로 공격해오진 않았나 보네요.
게다가 조종당하는 동안에는 내면에서 베리아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좋지 못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다시 일어선 걸 보면 라피아도 대단하네요.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성에 안 차요. 특별한 능력을 가졌고, 전생의 기억을 갖는 빙의자, 전생자, 환생자, 이세계인…. 마군주는 다 여기에 끌리거든요.”
“쓸데없는 정보 고마운걸!!”
“위험하잖아요?! 기껏 마음에 들어서 더 신기한 것도 알려주려고 했는데! 벌써 저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거예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이 라피아는 베리아를 공격했어요.
축복으로 상처와 피로를 달랜 만큼 그 위력은 상당히 달랐는데, 주먹 한 방에 공기가 울리고, 발길질 한 번에 땅이 패였죠.
언제부터인지 상처를 내지도 않았는데 라피아의 등에서는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와 날개의 형상을 이뤄선 공격도 하고, 방어의 역할도 해내는 모습까지 보여줬어요.
“너 같은 변태한테 준 사랑은 없어! 네가 주는 사랑도 거절할 거고!!”
“매정하네요. 지금까지 제 피와 첫 키스를 가져가고, 단순히 빤다는 행동만으로 쾌감을 얻는 방법까지 알려줬으면서! 서운하게!!”
“남들 오해할만한 소리 하지 마!!”
축복을 받아서 그런지 라피아의 상태가 이전에 비하면 짐승처럼 날뛴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어요.
야성에 완전히 몸을 맡겨버린 느낌이었죠.
그렇다고 라피아가 베리아를 압도하고 있었냐면, 그건 아니었어요.
베리아의 기교가 더해져서 그런지 질의 몸으로 해오는 공격은 탈리안이 하던 것보다 더 위협적이고, 섬세했으며, 막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어쩌다 옷깃에 스친 공격은 옷 끝자락을 마기에 침식시켜 불타오르게 했기에 바로 옷을 찢어내야 했거든요.
둘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어요.
“언젠가 한 번 이렇게 언니랑 싸워보고 싶었어요!”
“진짜 토악질이 나오려고 하네…!”
계속해서 질을 연기하는 베리아에게 손톱을 휘두르자, 그 궤적을 따라 선혈의 참격이 그려졌어요.
가뿐하게 점프해 뒤로 빠진 베리아는 갑자기 자세를 풀고 양팔을 크게 벌려 보였어요.
“후후후, 빌린 몸이라고는 하나. 이 몸에게 필적하는 반사신경과 능력 활용도…. 위력 또한 만만치 않으니 어지간히 약한 마군주라면 가뿐히 이길 실력을 갖췄구나! 더욱 이 몸의 컬렉션에 넣고 싶어졌다!”
“…뭐 하자는 거야?”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라피아를 보며, 베리아는 한 손을 검지만 핀 채로 라피아를 향해 까딱거렸어요.
“지르니트를 연기하며 네 녀석과의 공격을 주고받는 것도 좋다만…. 네 녀석의 전력을 낸 공격이 궁금하구나. 공격해 보아라, 맞아주마.”
“마군주는 다 너처럼 비정상인 녀석들밖에 없는 거야?”
“상대가 특별한 존재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라피아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없어요.
어떤 공격이든 한번은 제대로 맞아주겠다면 질을 구해낼 수도, 베리아를 이곳에서 몰아낼 수도 있는 거죠.
그렇기에 그 오만함에 기가 막히면서도 차분히 생각에 빠지다가 기회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라피아였어요.
“하…. 네가 반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네 공격이 끝날 때까지, 이 몸이 반격을 한 번이라도 한다면 여기서 네 녀석들을 놓쳐주마. 못 믿겠다면 마군주끼리 하는 계약을 해도 좋다.”
“계약?”
“이 몸의 마기와 네 녀석의 마나를 섞어 계약서에 담으면 된다. 원래는 노예들이나 하게 되는 주종계약서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지.”
역시 슬리브스터를 만들어낸 베리아다운 발상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뭔가 집는 손짓을 하니, 눈 깜빡하는 사이에 뭔가 수두룩하게 적혀있는 종이가 베리아의 손에 쥐어져 있었어요.
“노예 전부가 마나를 쓸 줄 아는 건 아닐 텐데?”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마나가 담겨있다. 마나를 운용할 줄 모르면, 피를 내서 종이에 스며들게 하면 되는 것이지. 자, 읽어보거라.”
베리아는 종이를 라피아에게로 날려줬어요.
날아든 계약서를 집어 천천히 읽기 시작하던 라피아는 내용에 적힌 불편한 말들에 눈살을 찌푸렸어요.
노예는 주인의 명령 없이는 정해진 구역을 떠나는 것도 불가능하며, 반항할 생각을 가지면 몸에 전격이 달리며, 평소에는 자신의 힘조차 멋대로 쓰지 못하는 각인을 몸에 새길 것이라 적혀있기도 했어요.
게다가 방금 베리아가 말한 공격을 맞아주겠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죠.
신중하니 보기 좋네요.
“야, 이건 노예계약서잖아.”
“으음? 흠, 별로 다를 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효력은 30분, 피계약자는 이 몸으로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너, 진짜 제정신이냐? 아무리 짧은 시간이지만 30분씩이나 노예가 되겠다고…? 애초에 이 계약서, 네가 만든 거 아니야? 그럼 내용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도….”
“후후후…. 다른 녀석들이라면 기회라는 생각에 바로 계약했을 텐데, 아직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아서 그런가? 꽤 신중하구나. 그런 점도 마음에 들어.”
처음부터 제대로 라피아와 제대로 계약할 생각이 없었네요.
섣불리 계약했다가는 큰일이 났을 거예요.
“속아 넘어가지 않아서 아쉽겠네.”
“우으…. 언니 왜 오늘은 제 말을 안 들어주는 거예요?”
베리아는 다시금 지르니트를 연기하며 다시 싸움에 임하기 위한 자세를 잡았어요.
“…너, 그렇게 남을 따라 하다 보면 자괴감 같은 거 안 들어? 탈리안처럼 몇백 년은 살았을 텐데, 그래서인가? 있던 수치심도 다 닳아서 사라져버린 게!”
질을 상처 입히는 것에 대한 주저가 사라졌는지 라피아는 날개를 앞으로 가져와 손을 집어넣더니, 평소에 애용하던 검을 뽑아 들었어요.
이어서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더니 그대로 베리아에게 달려들었죠.
미세한 차이로 베리아에게 닿지 않은 검은 질의 옷만을 베어내어 어깨부터 배꼽까지의 맨살이 보이게 됐어요.
우연히 일어난 일이지만, 맨살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 베리아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라피아를 탓했어요.
“이런 싸움 도중에 하고 싶어진 거예요…? 언니도 못 말린다니까.”
“…염병, 그래도 네가 솔직하게 내 시간 끌기에 어울려줘서 다행이야.”
“설마 제가 그걸 눈치채지 못했겠어요? 말했잖아요. 어떤 공격이든 한번은 맞아주겠다고. 되다만 성녀 언니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거, 다 알고 있었거든요?”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맞아보던가.”
라피아의 말을 신호로 크리미아는 여러 장소에 놓인 그릇 중 마지막 그릇에 뭔지 모를 액체를 담았어요.
그러자 언제 그려놓은 건지 알 수 없는 마법진을 따라 그릇에 담긴 액체가 흘러넘쳐 이동하기 시작했죠.
이 기현상에도 베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마기를 걷어내고 주변을 훤히 비추는 마법진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마법진이 얼마나 강력한 물건이든지, 방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걸까요.
마법진이 발동하자마자 크리미아는 중얼거리며 뭔가를 외우기 시작했는데, 그러자마자 베리아의 몸만이 무거운 것에 짓눌리는 것처럼 엄청난 중력을 받았어요.
덕분에 라피아는 아무 견제를 할 필요도 없이 베리아의 배후에 이동하는 게 가능했죠.
“꽤 재미있는 걸 준비해두었지만, 이제 어떻게 이 아이의 몸에서 빼내겠다는 것인지 궁금해지는구나.”
“좋은 방법이 있지. 네가 말했던 되다만 성녀가 주역이지만 말이야…!”
“큿! 피를 빨기 시작하다니,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 전투 중에 발정이라도 났던 것인가 보구나.”
라피아는 베리아의 비아냥을 무시하면서 계속 피를 빨았어요.
베리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확인했으니 반격이 들어온다거나, 도망친다는 부분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계속해서 피를 빨아대는 동안에도 베리아에게는 약간의 변화만이 일어났을 뿐, 평정심을 잃지는 않았어요.
뻔하죠, 질이 항상 느끼던 쾌감에 숨이 점점 가빠지던 거에요.
“기억으로만 보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쾌감이구나, 중독될 것만 같은 쾌감이야.”
몸이 짓눌리는듯한 힘을 받고 있을 텐데도, 힘든 기색 없이 묘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베리아를 질의 몸에서 끄집어내기란 불가능해요.
결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하죠.
하지만 라피아가 누구인가요? 확신 없이 무모하게 나서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생각해둔 계획이 있을 거예요.
“이 몸을 기분 좋게 만들 의도였다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된다. 이 정도라면 아쉽지만 네 녀석은 놔줄 아량도 베풀어줄 수 있지.”
베리아가 열띤 숨을 뱉으면서 말하는데도 라피아는 말없이 흡혈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오늘만 하더라도 싸움 전에 이미 상당한 양의 피를 빨았을 텐데, 회복할 시간도 없이 빨아가기만 하다가는 질의 몸이 버티지 못하는 거 아닐까요.
어쩌면 그걸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질의 몸이 무너지는 그 경계까지 아슬하게 피를 빨아가선 베리아를 끄집어내려는 거겠죠.
“…대답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기껏 좋아진 기분을 망치려는…. 읏, 으극?!”
그 순간, 베리아가 휘청이며 바닥에 엎어지려는 걸 막기 위해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어요.
잠깐의 현기증이 일었던 걸지도 몰라요.
싸움 전에 피를 빨 때도, 너무 오래 빨아서 질이 졸음에 이기지 못하고 잠들뻔했던 일이 있었잖아요?
다만, 이번에는 라피아가 가감을 하지 않아 졸음보다는 현기증을 느낀 거예요.
“고작 이 몸을 기절시키려고 피를 빨아가는 것이냐! 그렇게 하면 이 아이의 몸에서 나갈 줄 알고? 전혀 위협적이지도 않다!”
덕분에 화가 난 건지 베리아는 움직이지 않는 질의 몸을 마기로 억지로 움직여서는, 손으로 라피아의 머리채를 잡아 앞으로 내던졌어요.
무리해가면서 질의 몸을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크리미아가 만든 마법진은 더욱 밝게 빛났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죠.
“푸후흐…. 그런 것 치고는 반응이 격하지 않냐! 네 녀석을 위한 특별 선물도 있으니 걱정 말라고!”
“특별 선물? 이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기능 외에는 없는 마법진 따위를 말하는 것이라면 진작에 틀려먹었다! 이 몸에게 치명적이었다면 진작에 깨부수었을 것이니!”
“아…. 그래? 그럼 내가 흡혈하는 건 치명적이라서 떼어낸 건가 보네?’
“네 녀석이 감히 이 몸을 우롱하는 것이냐?”
말로는 전혀 치명적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베리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어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마기는 뿜어져 나오는 족족 마법진에 의해 소멸당하고 있으며, 흡혈에는 현기증까지 느꼈던 주제에 말이죠.
“오오, 무서워, 무서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똥폼 잡기는!”
“라피아! 마법진 밖으로 나오세요!”
그 꼴을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던 라피아는 크리미아의 말에 기다렸다면서 재빠르게 마법진 밖으로 튀어나왔어요.
라피아가 나온 순간, 엄청난 범위를 묶고 있던 마법진은 베리아를 중심으로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어요.
그 크기가 베리아 한사람만을 가둘만한 크기가 되었을 때 베리아는 크리미아 쪽으로 손을 뻗었죠.
“뭐야, 저 상태에서 뭘 할 수 있다고….”
“라피아 씨! 위입니다!!”
고개를 위쪽으로 향했을 때, 라피아가 발견한 것은 무서운 기세로 크리미아 쪽으로 하강하고 있는 뿔 3개짜리의 마기노였어요.
부딪히기만 하더라도 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속도로 돌진해오는 모습에 라피아는 크리미아를 한 손으로 들쳐메고 바로 그 자리에서 피했어요.
“이, 이런…!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공격을 맞고 죽을 건 아니잖아!”
“저를 구해낸 건 라피아 씨니까, 나중에 저한테 따지지 마세요! 일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전 모르는 일인 겁니다!!”
“젠장…!”
느긋하게 떠들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라피아는 바로 크리미아를 내려놓고 뒤에서 접근하는 마기노를 향해 검을 휘둘렀어요.
마기노가 지면에 도달하고 나서는 지면이 부서지고, 땅이 꺼졌는데 바로 덤벼들다니 다시 보더라도 엄청난 속도에요.
가까스로 마기노의 손톱을 막아낸 라피아는 마기노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마군주를 제외한 마기노에게 머리는 있지만 눈, 코, 입 없이 윤곽만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리고 사람의 얼굴이 달린 걸 봤거든요.
보통이라면 까만 계란을 얹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물론, 이 정도라면 라피아가 놀랄 일은 없었을 거예요.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멜리 리니아…! 네가 왜…!”
라피아가 상대하고 있는 마기노는 미궁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인을 저질렀던 시멜리 리니아였던 거에요.
탈리안이 데려간 동료 중에는 애완견도 하나 끼어있었나 보네요.
다만, 오랜만의 재회라는 감상에 잠겨있을 시간은 없었어요.
시멜리는 한 손으로 라피아의 검을 쥐어 잡은 채로 꼬리를 사용해 라피아의 얼굴을 휘갈겼거든요.
“이 몸이 아무런 보험도 없이 네 녀석들 앞에 나타났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쉽지만, 싸움에 내보낼 녀석을 잘못 골랐어…!”
베리아가 말하는 동안에는 방해하지 않게 교육을 받은 건지, 시멜리는 가만히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됐던 거에요.
말이 이어지던 도중 무언가가 찢어지며, 액체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베리아가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희미해진 마법진을 깨부수고 나왔을 때는 이미….
“허, 흐흐, 크흐흐! 웃기는 일이구나. 아무리 살인을 저지른 녀석이라고는 하나, 얼굴을 아는 이를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니!”
베리아는 지면에서 솟아난 거대한 가시에 가슴 정중앙을 꿰뚫려 피를 토하는 시멜리를 보고서 감탄했어요.
그야 그렇겠죠.
베리아의 말대로예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상대가 몬스터라 해도 처음 모험하는 신인 모험가라면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을 한 사람이라면 더 어렵겠죠.
하지만 라피아는 아무렇지 않게 그걸 해낸 거니까요.
감탄하지 않고는 못 버틸 거에요.
“유감이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거든.”
“이 몸이 직접 탄생시킨 마기노를 너무 쉽게 보는 것 같구나, 라피아.”
베리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먼지를 털고 일어서던 라피아는 갑작스런 기습에 한쪽 다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마기노라 해도 심장을 꿰뚫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시멜리는 축 처져있던 몸을 일으켜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관통한 가시를 깨트리고선, 손톱으로 라피아의 왼쪽 허벅지를 갈라버린 거였죠.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허벅지 아래에 있던 다리는 공중에 떠올라선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어요.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죠.
베리아 하나만 해도 어려운 싸움에 시멜리가 끼어들었으니,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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